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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크랩 몽골 몽골 기행산문 12 - 동쪽 사막 달리기, 또는 낙타 눈물
이시백 추천 0 조회 35 10.11.18 15: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쪽 사막 달리기, 또는 낙타 눈물 

 

 

박태일


사막을 만나러 떠난다. 6월 5일, 몽골 대학교가 2학기를 마친 뒤다. 고향으로 갈 채비를 서두르는 학생들 낯빛이 밝다. 처녀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는 흙모래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다니던 봄이 갓 지난 무렵이다. 사막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으로만 만질 수 있었던 모래 속살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던 사막 이야기. 몽골에 와서 사막과 얽힌 일이라고는 테를지에 나갔다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키우는 낙타를 잠시 본 게 모두다. 이제 사막 한가운데서 제 족보를 뻐기고 있을 낙타를 보게 된 셈이다. 그 동안 울랑바아타르 안에서 굴뚝새 걸음 찍듯 하다 드디어 꿈꾸던 사막 달리기까지 할 수 있으렷다.

동쪽 사막, 곧 도르노고비 아이막 소재지 사인샨드가 고향인 인문대학교 한국어과 2학년 체빌레는 통역으로 걸음을 같이하기로 했다. 지난 학기 내 한국학 강좌 기말시험 자리에서 문제가 어려웠는지 몇 줄 쓰지도 못한 채 앉아서 눈물만 뚝뚝 흘리지 않는가. 적지 않은 세월 강의실을 지켰으면서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광경을 부끄러움 없이 내 앞에서 펼쳐 보인 학생이다. 공부에 대한 샘은 많으나 몸이 따르지 않으니 속을 많이 다친 게다. 울랑바아타르에 유학 온 지 두 해만에 이번 여행으로 고향 집에 들를 수 있게 되었다.


 

국경도시 자밍우드를 향하여


울랑바아타르 역에서 사인샨드를 거쳐 자밍우드까지 가는 기차를 탄 시각은 한낮 4시 30분. 몽골 기차에는 일반석인 업시와 고급석인 쿠페 두 자리가 있다. 업시는 딱딱한 의자로 세 명씩 마주 앉는다. 그리고 복도 건너 쪽에 마주 보는 한 자리가 더 놓였다. 모두 여덟 자리가 한 짝을 이룬다. 세 명이 앉는 넓은 자리 위로는 침상이 두 개씩 붙어 층계 잠을 잘 수 있다. 일반석은 복도를 따라 트여 칸칸에 타고 앉은 이들이 죄 보인다. 몽골 일반인과 섞여 가니 일부러라도 타볼 만한 값어치가 넉넉하다. 그와 달리 고급석은 독립된 방을 지녔다. 복도를 따라 각 방마다 문이 달려 좀 더 호젓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의자도 부드럽다. 마주 앉아 네 명이 한 칸을 이룬다. 그리고 위로 침대가 하나씩 붙어 네 명이 편하게 잠들도록 했다. 일반석이든 고급석이든 앉은 자리를 들어 올리면 그 밑이 짐을 넣을 수 있는 짐칸이다. 엔간한 크기 짐은 다 들어가니 먼 거리 나들이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어울리는 공간 처리다. 될 수 있는 대로 공간 효율을 높이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낸 재치다. 겉보기보다는 꼼꼼하게 기능을 살리는 쪽을 따른 사회주의식 공작 처리 기술이 돋보인다.

나는 고급석 쿠페를 예약하지 못해 업시에 올랐다. 울랑바아타르에서 자밍우드까지 675킬로미터. 기차 안은 중국이나 그 국경까지 오가는 보따리장사들이 자리를 거의 메운다. 한 달에 두어 번은 남몽골 수도 후허트로 가거나, 몽골 쪽 관문도시 자밍우드를 넘어 중국 쪽 관문도시 에렝까지 가서 물건을 사서 돌아오는 이들이다. 마냥 한가로운 길을 따라 기차는 천천히 달렸다. 울랑바아타르를 막 벗어나니 날라이흐 못 미쳐 보그드한 산 동쪽 비알을 따라 급작스레 휘어진 기찻길이 나타난다. 혼호르 지역이다. 일찍부터 카자크족이 마을을 이루었고 그 뒤 소련군이 머물렀던 곳이다. 철길이 죽 벋는 직선의 효율을 따르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길게 굽은 기차의 다른 칸이 한눈에 든다. 처음에는 몽골 젖줄인 강 흐름을 살리고 집짐승들이 드나드는 들을 지키려는 배려에서 기찻길을 급작스레 휘어지게 마련했던가 생각했다. 그러나 수도 울랑바아타르로 쳐들어올지도 모를 외세 - 물론 당면한 적은 중국일 터이지만 - 의 손쉬운 접근을 막겠다는 뜻이 더 담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는 사막을 다시 돌아올 무렵이었다. 중국과 이어져 있는 몽골에서 하나뿐인 남북 관통 열찻길은 중국 쪽과 달리 몽골로 들어서면서 폭이 좁아져 두어 시간이나 걸려 자밍우드에서 새로 처리를 해야 한다지 않는가.

울랑바아타르를 벗어나자 아직 풀이 돋지 않은 능선이지만 곳곳이 푸릇했다. 지난 겨울 눈이 쌓였다 늦도록 녹지 않았던 자리다. 죄 응달이다. 겨우내 물기를 오래 머금을 수 있었던 응달일수록 봄풀이 먼저 돋아 오르는 놀라운 역설을 만나게 된 셈이다. 소금기가 허옇게 말라붙은 자리가 띄엄띄엄 보였다. 집짐승들이 와서 오랜 세월 소금기를 핥은 탓에 허물어진 흙두둑도 차창 밑으로 가깝다. 짐승들의 입모양처럼 부드럽게 파였다. 식당차 안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보드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주는 거의 한국산 화이트다. 몽골에서 인기 있는 맥주 가운데 하나가 한국산 카스. 기차 식당차에는 이미 카스가 동이 났나 보다. 카스 뒷자리를 화이트가 떠맡고 있는 꼴이다.

울랑바아타르와 사인샨드 가운데쯤 되는 도시 초이르에 닿기도 앞서 벌써 사막 현상이 뚜렷했다. 떠난 지 다섯 시간쯤 뒤, 처음으로 나에게 사막 모습을 보여준 도시 초이르에 닿았다. 역머리에서 바라본 시가지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모래가 마음껏 활개 치며 놀고 있었다. 기차가 닿자 튀김만두격인 호슈르와 찐만두격인 보쯔를 파는 장사들이 몰려 왔다. 양고기 살점을 삶아 담아서 파는 이까지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즐겁게 산다. 해는 지기 시작하여 벌써 어두웠다. 20분쯤 머물렀을까. 기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울랑바아타르에서 느꼈던 것과는 무게가 다른 바람이 찻간 안까지 듬성듬성 밀려들었다. 봄 한철 변덕 심한 모래바람이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몽골이지만 사막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더했다. 이런 바람 속에서 가끔 큰 회오리라도 덮치면 낮은 한달음에 캄캄해진다. 그리고 그 서슬에 말려 올라갔다 모래 속에 파묻혀 죽는 집짐승들도 있다. 어린 아이까지 그 바람에 날려 목숨을 앗기기도 한다니 두렵다.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사나운 바람이 사람이고 짐승이고 가리지 않고 혼쭐을 내는 곳이 사막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흐릿하게 허물어진 풍경으로도 그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성냥개비가 타오르는 첫 유황 냄새, 그 짧은 순간을 느끼게 하는 사막 바람 소리가 쉭쉭 차창 안으로 끝없이 파고 들었다.

그 거친 바람 속에서도 철길과 나란히 이어져 있는 전봇대가 측은하다. 어느덧 무릎까지 모래에 파묻혔다. 아랫도리를 모래에 맡긴 채 기차를 따라오는 그들도 언젠가는 새로 손질을 해야 하리라. 철길 옆턱은 바람 모래에 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듭 파서 올린 흔적이 역력했다. 사막에서 부는 모래 바람의 심각함은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했다. 이 바람 속에서 뜨거운 햇살과 더불어 자란 탓에 몽골 아이들은 햇살 알레르기가 많다고 한다. 목이나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간지러운 증상을 앓는 아이들. 게다가 봄철 새 풀이 돋아나올 때는 다시 풀 알레르기의 공격까지 받는다. 사막 사람들이 지고 사는 곤고함을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는 셈이다.  

드디어 도르노고비 아이막 소재지 사인샨드에 이르렀다. 새벽 1시 40분. 바깥 날씨는 밤인데도 따뜻했다. 밤기차에서 사람들은 바삐 내리고 탔다. 가로등 불빛에 기대 늘어 선 노점상들이 보였다. 가장 많은 이ㄷᆕㄹ이 수태채, 곧 소젖차 장사다. 그리고 음료수에다 과자 좌판을 늘어놓은 이들이다. 30분 남짓 머문 뒤 기차는 다시 자밍우드로 떠났다. 캄캄한 밤기차 바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차안이 더워 창문을 열어야 할 터인데 바깥 모래바람이 자꾸 들어오니 그것도 못한다. 사람들은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 하면서도 잠에는 모두 쉬 빠져들었다. 잠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삶이다. 

다섯 시가 넘어섰다. 바깥이 새기 시작한다. 6월 6일이다. 건너 쪽 여자 넷이 맨 먼저 일어났다. 사람들 자는 머리맡에 앉아 아침 화장을 시작한다. 이마 위로 옆으로 머리말이 컵도 썼다. 어젯밤 뒤룩 배를 내놓고 잠자던 그녀들과는 딴 모습이다. 어느새 껌까지 찾아 씹고 있었다. 기찻길 옆으로 밀려와 누운 모래 언덕은 더욱 높아진 느낌이다. 바람 모래의 피해가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다. 그녀들 팔목을 살피니 하나같이 시계를 차지 않고 있었다. 결코 귀한 물건이 아니련만 시계를 차지 않은 것은 그들이 지닌 느슨한 시간 관념에도 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해가 떠 있는 자리나 그림자 크기로 쉽게 시간을 알아챈다. 몽골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가까이서 훔쳐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 차창 밖으로 멀리 낙타떼가 보였다. 밤새 어디서 지냈는지 모두 힘차다. 오십 리 바깥 물냄새까지 맡는 영물이 낙타 아닌가. 벌써 아침 물맛을 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여섯 시가 넘어서자 사람들이 모두 잠길에서 일어났다. 2층, 3층 침대자리에 올라갔던 이들도 슬슬 내려왔다. 아침노을이 차창 밖으로 마구 붉었다.

7시 15분, 자밍우드 역. 울랑바아타르에서 거의 열네 시간이나 걸려 닿았다. 내리는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다. 몽골 동쪽 사막 끝자락 도시 자밍우드는 말 그대로 중국으로 오가는 관문 도시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다시 미크로버스를 타고 국경 너머 중국 쪽 도시 에렝으로 건너갈 것이다. 몽골인들은 중국 비자가 필요 없다. 자밍우드는 교역이 가장 활발한 국경 도시답게 매우 번화했다. 중국 쪽에서 도와서 길도 잘 다듬었다. 에렝으로 열린 아스팔트 포장길이 깨끗했다. 이 길과 기찻길 두 길이 막힌다면 몽골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훈련이 열다섯 해를 넘기는 동안 중국에 대한 경제 종속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울랑바아타르와 자밍우드 사이 교통 시설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중국 쪽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고 있다. 몽골을 두고두고 중국에 예속시킬 도구인 까닭인가.

서쪽 게르판자촌에 있는 체빌레 이모 집으로 가기 위해 가까운 거리였지만 택시를 탔다. 국경수비대에서 일하고 있는 이모부가 손수 지었다는 깨끗한 벽돌집이었다. 세관 일을 보는 이모도 벌써 일터로 나갔다. 문만 열면 날아드는 모래와 먼지 탓에 문을 꼭 잠그는 일이 일거리였다. 마을 골목 한가운데까지 밀려든 바람모래 더미가 눈으로도 뚜렷했다. 해마다 점점 높아지는 놈들이다. 체빌레 동생이 바삐 만들어주는 아침밥을 먹었다. 감자에 당근을 넣어 볶은 야채밥에 소젖차 두 잔. 동생은 밥맛이 어떠했는지 내 반응이 못내 마음 쓰이는 모양이었다.  짰지만 나는 즐겁게 밥공기를 비웠다. 한 살 아래 터울인 동생은 대학에 가지 않고 이모 집에서 조카를 봐주고 있었다. 체빌레는 어릴 적 자신의 젖을 빼앗아 먹어서 동생의 몸집이 크다고 농담을 했다. 동생의 별명인 범버크란 바로 뚱뚱한 아이에게 붙이는 이름.

자밍우드 시가지를 보기로 하고 혼자 걸음길로 나섰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모래가 입안에서 씹혔다. 커다란 규화석을 늘어놓은 쌈지 공원을 하나 건넜다. 에렝으로 나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다시 한참이나 걸어가다 시가지로 되돌아왔다. 걷기도 힘든 바람이었다. 우리나라에 봄철 내내 날아오는 매서운 황사의 뿌리가 이 바람 기둥임에 틀림없다. 길에 나와 있는 이들이 보이지도 않는 사막 도시의 황사 폭풍 가운데를 겁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몸을 바람 반대쪽으로 돌렸다. 어깨며 허리를 바람에 맡기니 몸이 마구 떠오른 느낌이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 카메라를 끄집어냈다가는 그대로 모래가 씹어 고장이 날 게 뻔했다.


부르덴엘스 모래 언덕


체빌레 이모와 이모부가 일터에서 일찍 돌아왔다. 동쪽 고비에서 가장 볼 만하다는 부르덴엘스 모래 언덕에 가기 위해서였다. 체빌레 식구들이 모두 채비를 마쳤다. 차편은 이모부의 러시아제 지프차인 짜리스. 기름을 충분히 넣은 다음 떠났다. 전봇대가 나란히 이어진 길. 묵은 전봇대를 뽑고 새 전봇대를 심고 있었다. 새 것은 옛 것보다 훨씬 높이 세웠다. 모래에 파묻힐 것을 고려한 까닭이리라. 들길을 건너고 산길을 넘으면 다시 자갈길이었다. 부르덴엘스까지 80킬로미터. 거친 사막 풍경을 차창으로 접으며 자꾸 달렸다. 가다 만난 우물에는 말 두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체빌레 동생이 물을 퍼 준다. 목마른 집짐슴은 우물에 이르러서도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물을 마시지 못한다. 그러면 그들은 목이 말라 죽을 수밖에. 영화에서나 보던 오아시스와는 딴판이다. 대추야자 우거진 푸른 호수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못을 생각했던 마음을 삭막한 우물가 풍경이 마구 짓밟았다. 샘물이 마르면 사람도 집짐승들도 사막에서 더 머물 수 없다.

가다가 차에 문제가 생겼다. 건장한 몽골 남자인 체빌레의 이모부 바트는 멀리 있는 유목 게르를 찾아갔다. 두어 곳을 거친 다음에야 필요한 재료를 얻어 차 손질을 끝냈다. 주인과 담배를 한 대씩 나누어 피우고, 차안에 있던 보드카도 한 잔씩 나눠 마셨다. 전형적인 몽골식 예법이다. 물론 내가 넣어갔던 카스 캔맥주 하나까지 선물로 남겼다. 체빌레 이모는 임신 6개월인데도 그 오르내림 큰 사막 길을 잘도 버텼다.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문제가 없다고 마구 웃는다.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네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부르덴엘스가 보이지 않는다. 자꾸 걱정이 되어 넌지시 되돌아갈 것을 권했으나, 기사 바트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갈 목표를 정했으면 거기까지 가봐야 한단다. 이름 그대로 튼튼한 몽골 남자다운 고집이다. 나 때문에 임신한 아내에다 가족들이 죄 고생하는 터이니 마음이 편치 않은데 식구들은 아랑곳없다. 졸다 깨다 드디어 부르덴엘스 모래 언덕으로 접어들었다.

들머리에서 체빌레 할머니의 친구 게르부터 찾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뿐이었다. 아들은 사인샨드로 나가 산다. 지난 가을까지 양이 300마리였는데 겨우내 거의 다 죽고 50마리 남짓 남았다고 한다. 털이 빠지고 여윈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과자와 차를 들고 게르를 나섰다. 거의 다섯 시간이나 걸려서 닿은 부르덴엘스에는 지난 여름 뒤부터 사람이 비어버린 관광객 방갈로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바람이 심했지만 부르덴엘스 모래 언덕에 올라서자 마자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신이 나서 신을 벗고 뛰었다.

몽골 사막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모래밭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아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헐벗고 마른 땅일 따름. 그러나 그 곳곳에 커다란 모래 언덕이 있다. 부르덴엘스는 그런 가운데서도 풀에다 샘까지 있는 풍요로운 곳, 말 그대로 항가이다. 그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하얀 모래가 만드는 결과 살은 매우 부드러웠다. 나처럼 어린 시절 모래 많은 강가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그 느낌이 새삼스럽다. 부르덴엘스 모래 또한 그 한없이 간지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꼭대기에 올라가 서니 모습은 전혀 달랐다. 얼굴로 몸으로 날아오는 바람 모래가 나도 한 모래로 흩어 버리고 싶은 듯 사납게 불어 왔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누런 시간의 가루였다. 아직까지 동쪽 사막 으뜸 경관이라고 하는 부르덴엘스는 사람의 기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다. 심술을 부리는 듯 마음껏 그것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래도 모처럼 가족 나들이가 되어버린 체빌레 식구들과 나는 모래 속에서 한참이나 뛰어다니고 미끄럼을 탔다.

부르덴엘스를 떠나면서 먼저 들렀던 할아버지 게르에 갔다. 그 사이 양젖과 유제품을 짜두었다 싸서 주셨다. 부르덴엘스에 이르는 길은 나처럼 자밍우드에서 올라가는 길과 사인샨드에서 내려오는 두 길이 있다. 나는 좀 더 어려운 첫길을 택했던 셈이다. 자밍우드로 되돌아오는 동안 사람들은 지쳤는지 자기 시작했다. 기사 바트와 이모 그리고 나만 눈을 말똥거렸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사막에는 오가는 차도 없었다. 문득 어떤 새인지 밤새가 한 마리 차 앞창을 치고 달아났다. 마음 저 안쪽까지 부딪친 듯 무거운 울림을 느끼게 하는 소리였다. 그곳 어딘가가 깨졌다. 검은 슬픔이 번져 나기 시작했다. 그래 사막, 나는 드디어 사막에 이른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차에 또 문제가 생겼다. 거듭 그러면 사막 한 가운데서 꼬박 밤을 지새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가져간 손전등이 제 몫을 했다. 다행히 손질이 잘 끝나 차는 달린다. 가끔 밤을 도와 중국에서 사온 물건을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지 큰 차들이 지나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큰길로 나선 게다. 멀리 훤하게 하늘 쪽에 떠 있는 불빛을 본 뒤에도 다시 2시간이나 더 달려 자밍우드에 이르렀다. 불빛이 보인다고 그것을 보고 달리면 더 위험하거나 길을 잃을 수 있다고 기사 바트가 친절한 풀이를 덧붙였다. 부르덴엘스에 갈 때 걸린 시간보다 30분쯤 적은 4시간 30분만에 자밍우드로 되돌아왔다. 굳이 집에 가서 자자는 것을 물리치고 호텔에 들었다. 너무 늦어 저녁을 갖추어 먹을 데도 없다. 점심과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몸을 비상식 꿀과 주스로 달랜 뒤 길게 잠을 눕혔다. 


모래 도시 사인샨드 


6월 7일, 사인샨드 기차역. 역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차표를 사러 갔다. 신역사와 구역사가 나란했다. 구역사는 일을 보지 않고 사람들 대합실과 식당으로 쓴다. 왼쪽 신역사는 잘 지은 건물이다. 새로운 몽골을 웅변하듯 다듬은 새 건물 안에는 기념품 상점과 화장실, 그리고 여행 안내소까지 깔끔했다. 2층 매표구로 올라 가 표를 사려 하니 여권을 호텔에 두고 온 게 아닌가. 자밍우드는 국경 도시인 까닭에 외국인 경우, 호텔에 들 때 여권을 맡겨두어야 한다. 불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어제 호텔에 들면서 맡겼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역무원은 여권 없이 사인샨드 가는 고급석 좌석을 살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기차 출발 시각은 저녁 5시 20분. 넉넉히 남는 시간을 이용해 호텔 식당에서 체빌레 가족과 잠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다. 몇 달 뒤 태어날 아이에게 입힐 옷값으로 얼마 되지 않은 촌지를 맡겼다. 아마 아이는 어머니를 닮아 매우 건강할 것이다. 식당을 나온 뒤 혼자서 시내 관광. 모래와 벌이는 싸움이 자못 심각했다. 철길을 따라 모래를 피하기 위해 길고 높다랗게 담을 쌓아 두었다. 바람모래가 철길 쪽으로 넘어 오지 못하게 한 셈인데, 그 담벼락조차 거의 목까지 모래가 차올랐다. 그렇다고 새 담을 더 올려 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철길 안쪽으로 쌓인 모래도 만만찮아 보였다. 이대로 더 나아가면 모든 거리가 모래로 뒤덮일 모래 도시 자밍우드.  

사인샨드로 가기 위해 울랑바아타르로 가는 기차를 탔다. 미리 예약해 둔 관광 게르캠프에서 도착 시각에 맞추어 사인샨드 역까지 지프차를 보내주기로 했다. 몽골에서는 아이막 소재지나 큰 도시가 아니면 손전화가 되지 않는다. 기차를 타자마자 다시 캠프에 확인 전화를 했다. 곧 손전화도 끊겼다. 10시 40분에 사인샨드 기차역에 이르렀다. 약속대로 캠프 지배인 알탕보털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체빌레는 집으로 보낸 뒤 나는 알탕보털과 함께 사인샨드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샨드게르캠프로 갔다. 밤 11시 40분,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캠프에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던 여자 직원들이 왁자지껄 즐겁게 반겨주었다. 내가 올해 첫 외국 손님이었던 것이다. 직원 가운데 한 아가씨가 한국어를 조금 배웠는지 그 캄캄한 사막의 밤이 울리도록 인사를 거듭해댄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가볍게 씻은 뒤 게르에 드니 새벽 1시. 모래 도시 사인샨드에서 첫밤은 그렇게 내 몸 위로 두텁게 자리를 폈다.


거지 성자 단잔라브자 박물관 


7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늦잠이다. 사막에서 맞은 세쨋 날. 폭풍우가 금방 가라앉은 바다처럼 눈앞에 사막이 넌출거렸다. 희푸른 미명이다. 직원들 아무도 깨어나지 않는 시각, 종달새가 날아올랐다. 울음소리도 함께 날아오른다. 혼자 산책을 나섰다. 바람이 사나웠지만 사막 달리기를 위한 준비를 위한 일이었다. 아침을 가볍게 라면으로 때우고 11시, 드디어 첫 사막 달리기를 나섰다. 몸을 충분히 풀고 햇살을 막기 위한 채비 또한 단단히 한 뒤였다. 바람이 센 날임에도 캠프 둘레를 멀리 빙 돌아오는 달림길을 눈대중으로 잡은 뒤 뛰기 시작했다. 햇살이 뜸을 뜬 듯 따가왔다. 캠프 동쪽으로 뛰어갔다 다시 남쪽으로 이은 뒤, 서쪽으로 가서 다시 되돌아오는 달림길을 골랐다. 어디라 다 비슷해 보이는 사막에서 자칫 길을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게르 캠프를 중심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달릴 작정이었다.

까맣게 타버린 술병들이 햇살에 갈라진 채 모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차에서 떨어진 듯한 쇠뭉치도 어느 세월에 빨갛게 녹이 쓴 채 가끔 눈 밑으로 튀어 올랐다. 오래도록 사나운 햇살, 가파른 추위와 싸운 흔적이다. 모든 것을 태우고 묻어버리는 사막 자갈길이었다. 몽골에서는 어디든지 발길을 옮길 수 있으면 다 길이다. 짐승이 움직일 수 있으면 사람도 간다. 사람길 짐승길이 한 가지다. 사막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헐벗은 까닭에 더 쉽게 길을 만들 수 있다. 가까운 곳이라 여겨져도 가다 보면 그렇지 않다. 한참 걸리는 먼 거리다. 눈대중보다 훨씬 먼 거리 감각을 요구하는 곳이 사막이다. 캠프에서 보이는 동쪽 능선까지 3킬로 정도 뛰어갔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른내가 보였다. 그 안으로 뛰어드니 꼬박 게르캠프가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눈 앞 멀리 목민 게르가 한 채 보였다. 아무도 없는 눈치다. 생각보다 견딜 만한 더위였고 햇살이었다

이제는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목민 게르가 한 집 나왔다. 아버지와 딸이 보였다. 집 사진을 찍으니 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허락을 받고 아이 사진까지 몇 장 더 찍었다. 새카맣게 탄 소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세를 잘 취해 준다. 아버지도 딸도 많이 놀랐으리라. 그것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사막 더위 속을 뛰어 온 외국인이었으니. 땀을 훔친 다음 게르캠프 쪽으로 길을 바꾸었다. 어디서부터 오는지 지프차 한 대가 멀리서 먼지를 한껏 부풀리며 캠프 곁을 지나고 있었다. 흙길이 잘 닦여 있지만 오가는 차는 그 한 대가 끝이었다. 오랜 세월 바람을 받았을 구릉 쪽으로는 흙이 씻겨간 뒤 자갈 마당을 이루고 있었다. 빛돌 두어 개를 골라 등 가방에 넣었다. 한낮 땡볕을 따라갔던 달리기를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니 지배인 알탕보털과 일꾼들이 비쭉이 나를 내다본다. 이른 여름, 그것도 혼자 냅다 뜀뛰기를 하는 꼴이니 수상쩍기도 했겠다.

2시쯤 사인샨드 관광을 위해 캠프를 나섰다. 본디 청나라 주둔군이 만들었다는 도시 샤인샨드는 오랜 세월 길게 바람이 밀어다 놓은 모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다. 한가운데는 쑥 파여져 있어 바람을 피하기 안성맞춤, 마을 중심 거리는 언덕 위에서부터 아래로 묻힌 듯 앉아 있었다. 백만 년 앞선 때는 바다였다는 자리다. 바다 속  모래 도시.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니 구름 그림자와 함께 천천히 떠내려가는 듯한 느낌이다. 먼저 아이막 박물관부터 들렀다. 외국인에게는 입장료로 1000투그릭을 받는다. 자연사와 역사 유물을 같이 늘어 놓았다. 1층에는 야생 산양 앵그르나 야생말, 몽골 몰모트인 타르박과 같이 특별한 짐승 박제품에서부터 동쪽사막에 널린 공룡 화석까지 여러 자연사 유물을 갖추었다. 2층은 역사 전시관이다. 사막 이저 곳에서 찾아낸 청동기들이 각별한 느낌을 준다. 아이막 박물관을 나와 건넌 쪽에 있는 단잔라브자 박물관으로 갔다. 이 두 공간을 한 사람이 관리한다. 먼저 가 기다리니 박물관 여자 직원이 뛰어와서 문을 따 주었다.

단잔라브자 박물관은 개인 기념관으로서는 잘 지은 것이었다. 1991년 자유화 조치와 함께 문을 연 이 박물관은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단잔라브자의 여러 유품으로 가득했다. 1803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거지로 어린 시절을 떠돌았다. 11살 무렵부터 시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17살에 불문에 귀의했다. 존경 받는 승려요 뛰어난 시인이며, 연극연출가, 미술가, 예술가, 교육자일 뿐 아니라 전통의학자로서 다재다능한 재주를 들내는 동안 그를 시샘한 적도 둘레에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청나라 지배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숨기지 않았던 그였다. 마침내 중국인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 넣은 뱀독을 마시고 그가 암살당한 때가 1856년이었다. 이승 나이 쉰 셋이니 아깝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유품들은 투데브라는 제자의 손에 의해 거두어진 뒤 요행히 흩어지지 않고 손자로까지 대를 물리며 갈무리되어 왔다.

단층으로 만들어진 박물관 안에는 한눈에 단잔라브자가 매우 뛰어난 예능인이었다는 사실을 쉬 짐작하게 해주는 여러 유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가 만든 화려한 그림과 조각, 그리고 악보와 희곡, 시작품, 게다가 그에게서 연극을 배운 일본인 제자가 선물한 일본도까지 꼼꼼하게 간추려져 있다. 눈을 끄는 유물은 어릴 적 입었다는 작은 옷 한 벌이었다. 낡은 그것이 거지로 아버지와 함께 떠돌았던 단잔라브자의 징표였던 셈이다. 한쪽에 그의 유골을 안치한 자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아예 신성 예배의 장소로 바뀐 듯했다. 1930년대 사회주의 종교박해 때 이저 곳에 숨겨두었다 죄 찾지 못한 유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실내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었으나 교육용이라 굳이 설명한 다음 허락을 받아 몇 장 찍은 다음 유물관을 나왔다. 기념관 옆에 붙어 있는 기념품 가게로 가니 안내책이 한 권 보였다. 단잔라브자의 고향 사진에서부터 중요 작품에 대한 해설, 숨어 살았던 곳들에 대한 사진까지 잘 올린 책이었다. 58쪽에 지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값은 12000투그릭이다. 그래도 값어치를 너끈히 하는 책이 아닌가. 선뜻 한 권을 사서 손에 들고 찬찬히 책 표지를 쓰다듬었다.

사인샨드 시가지에는 실내 시장이 두 군데 있다. 두 군데를 다 둘러보기로 하고 체빌레와 바삐 걸었다. 내파는 물건들은 거의 중국 남몽골 쪽 것이 많았다. 소젖조차도 모두 거기서 가져온 종이곽 제품이었다. 맛도 몽골 것보다 훨씬 좋다. 중국에 붙은 곳이라 중국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 뚜렷했다. 제철인 듯 노란 중국 살구도 많이 눈에 뜨였다. 시장 안쪽 사진을 찍으려 하니 장사들이 막아선다. 한 식료품 가게 주인이 허락하는 바람에 재빨리 시장 풍경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나섰다. 캠프 지프차로 숙소로 돌아오자니 캠프 지배인 알탕보털이 다음 날 일정을 조심스럽게 묻는다. 다른 일정 없이 캠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하니 매우 실망한 눈치다. 보통 관광객 경우 캠프 차를 빌려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부르덴엘스를 보고 돌아오면서 단잔라브자를 기리는 절인 하므릿히드를 둘러보고 오는 걸음을 택한다. 그런데 하루 내내 캠프에 머물며 사막 달리기나 하겠다고 하니 낯빛이 굳었던 것이다. 올해 첫 외국 손님에게 기대가 컸던 모양인데 실망한 탓이었을까. 차를 거칠게 몰며 심통을 부리는 듯싶었다.

관광 게르캠프를 네 모로 돌아가며 지배인 알탕보털이 나무를 심어 두었다. 어디서 어린 포기를 실어온 모양인데, 제법 자랐다. 버드나무였다. 캠프 둘레로 그들이 잘 자라만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나무들 가까이 가 들여다보니 잎이며 줄기를 많이 다쳤다. 선 채로 죽은 그루도 있었다. 바람모래에 사정없이 맞아 줄기가 찢겨진 채 물관부가 말라붙은 것들이다. 사막의 모래는 총알이다. 하얗게 물관부를 드러내고 모래 총알에 맞아 숨진 놈, 그 상처를 감싸 안고 그래도 살아 오르려 잎새를 키우는 가지들, 여러 모양이었다. 잎새도 모래를 맞아 찢어지고 뜯겼다. 사막에서 나무가 살기 힘든 까닭이 단순히 물이 모자란 까닭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모래 총알에 맞아 죽어가는 나무들을 알탕보털은 여름 관광철까지만이라도 살려낼 수 있을까. 사막 거친 바닥을 가꾸는 가장 흔한 나무는 덤불가시나무다. 땅바닥에 붙어 자란 그것은 아직 겨울잠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마른 가지째 누웠지만 흙 밑 뿌리는 살아 있으리라. 가시가 돋아 짐승들이 제대로 뜯지 못하게 제 몸 채비를 잘 갖추었다. 그 뿌리에 바싹 한 몸으로 붙어 이끼가 또 삶을 가꾼다. 가시나무 덤불 그늘 사이로 말똥구리가 까만 등을 힘겹게 옮기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낮 햇살의 무게를 저 혼자 다 짊어진 듯하다. 붉은 도마뱀이 또 다른 가시나무 그늘을 찾아 달아났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햇살이 살결을 세게 때렸다.

저녁부터 먼지와 바람 모래가 심해졌다. 게르 안으로 사정없이 밀려드는 바람 모래. 그 사이에 말똥구리들이 게르 안으로 들어와 바람을 피하겠다는 심산인지 한 마리 두 마리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게르 벽쪽 나무살에 붙어 있는 놈, 땅바닥을 기는 놈, 가만히 웅크리고 자는 듯이 멈춘 놈, 낱낱이 재미있다. 이 작은 벌레는 내 게르로 들어와 숨을 수 있지만 더 큰 짐승들은 어디로 숨을 것인가.

 

두 번째 사막 달리기


6월 9일, 아침 다섯 시가 넘어 일어났다. 미명의 사막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게르 안에는 밤새 말똥구리 손님들이 늘었다. 아마 한 집안이 다 들어왔다 쉰 모양이다. 게르 문밖에서는 몇 놈이 내가 어제 저녁 뱉어놓은 양칫물 마른 자리에 붙어 있었다. 사막에서는 맛보기 힘든 냄새에 재미를 느낀 모양이다. 게르 바닥에는 밤새 날아 들어온 모래가 굵은 가죽띠처럼 흩어져 있었다.

아홉시가 넘어서부터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게르 천정으로 들리는 사막 빗방울 소리. 팅팅 연통을 때리는 소리. 소리 마디가 좁은 게르 안을 마음껏 돌아다녔다. 게르 가운데에 놓인 화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앉아 그 빗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 속에 사막의 먼지 소식도 섞여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막의 빗발 소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바깥은 어두웠다.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다시 아침잠을 잤다. 말똥구리들도 나가지 않고 게르 바닥에 그냥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깨우지 않고 친한 동거인 노릇을 했다. 일부러 빵가루를 뿌려두었는데 별 반응이 없다. 캠프 일꾼들도 아침 빗발 속에서 조용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날씨가 변하는 봄 사막이 아닌가.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날이 개었다. 바람은 한결같이 거셌다. 그리고 또 게르 바깥의 요란한 종달새 소리.

3시 넘어서 몸을 풀고 두 번째 사막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사인샨드까지 탁 트인 14킬로미터다. 샨드게르캠프 뒤쪽 언덕을 넘어서면 바로 사인샨드까지 한 길로 죽 벋은 전봇대와 어지럽게 나 있는 여러 겹의 길들이 보였다. 뛰다 사진을 찍다 다시 즐겁게 뛰었다. 사막 낙타도 만났다. 가까이 다가가니 멀찍이 달아난다. 비 온 뒤 더 맑아진 사인샨드 긴 모래 언덕 위로 구름이 두 겹 길을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땅에 넓고 깊은 그림자를 팠다 그것을 천천히 끌고 사라졌다. 첫 여름 사막이 지닌 아름다움은 마음껏 구름이 환칠해 만드는 구름 그림자였다. 멀리 사인샨드 시가지 위로 구름이 내렸다 지나가버린 자리에는 붉은 빛깔의 모래 언덕이 뚜렷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커다란 아르히, 곧 소주 공장의 굴뚝이 보였다. 시가지로 들어가서 잠시 한적한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시장에서 살구를 산 뒤 택시로 돌아왔다.

낮이 기울자 지배인 알탕보털과 몇몇이 지프로 집이 있는 사인샨드로 나갔다. 내일 아침 오겠단다. 저녁을 먹은 뒤 남아 있던 치맥과 자야 두 일꾼과 달밤 농구 시합을 했다. 2대 1. 내가 완패했다. 뜻밖에 두 아가씨는 농구를 잘 했다. 추위가 긴 몽골에서는 실내 운동이 제격이다. 학교에서도 주로 실내 농구를 가르치고 학생들도 틈만 나면 농구를 해서 실력이 보통 아닌 것이다. 자세는 엉성했지만 두 아가씨는 잘도 했다. 농구라면 꽤나 하는 나는 슬슬 하려다 오히려 혼이 난 뒤 바짝 힘을 내서 겨우 1세트만 건졌다. 진 사람이 사기로 했던 음료수를 같이 마시며 캠프 뜰에 있는 나무 정자에 앉아 여름 밤 경치를 함께 떠들었다. 주로 캠프에는 프랑스, 대만, 일본 사람이 많이 온다는 설명이었다. 한국인은 잘 오지 않는 캠프에 손님이라고는 나뿐이어서 더 큰 게르캠프. 그리고 무거운 밤 속을 나는 새들. 낮에 마음껏 본 종달새 소리가 밤늦게까지 귀에 쟁쟁거렸다. 밤바람이 선선했다. 아침 비 오고 바람 불고 낮에 개었다 다시 저녁에 다녀가는 신선한 어둠과 고요함. 나를 위해 밤늦게까지 떠들어 주던 두 직원을 잠자리로 보낸 뒤에도 나는 게르 안에서 한참 동안 더 잠을 이루지 못했다.

6월 10일, 여행 6일째였다. 어제 저녁 일꾼들이 캠프 둘레로 심어둔 나무에 물을 주고 수도꼭지를 꺼지 않았던가 보다. 조용한 사막 한 가운데서 지하수가 펑펑 플라스틱 관으로부터 나와 흙을 적시고 있었다. 밤새 흘러내린 게다. 일꾼들이 아직 잠에서 일어나지 않았는지 숙소가 조용했다. 그들을 깨워 물을 잠그려다 그만 두고 이리저리 호스를 들고 다니면서 나는 나무들에게 아까운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여름까지 몇 그루나 살아남을까. 아니면 내년 여름까지는? 아마 거의 죽고 말리라. 조용한 캠프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막의 흙밭을 살폈다. 재미있게 생긴 빛돌도 줍고, 밤새 모래 위로 낸 새 발자국 사진도 찍었다. 바람에 사라지지 않고 발자국을 찍어둔 그들은 어디서 밤을 샌 것일까. 고슴도치 발자국도 보였다. 어딘가 굴 속에서 그 놈이 자고 있으리라.  캠프 옆 쓰레기장에는 그동안 사람들이 오가면서 마신 술병이 모래에 덮여가고 있었다. 카스 맥주병과 화이트 플라스틱 통도 보였다. 저것들도 저대로 진화하면 또 다른 사막의 모래가 될 것이다.

3시 무렵 세 번째 사막 달리기. 1시간 30분 남짓 다시 사막을 빙 둘러 달렸다. 이틀 앞서 보았던 유목민 게르도 다시 지나쳤다. 아버지와 딸은 보이지 않았다. 사막 달리기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몸을 푼 다음 샤워를 했다. 물이 귀한 사막에서 하는 샤워란 마냥 즐거우면서도 또 땅에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꿈꾸었던 사막 달리기를 세 차례나 마친 뒤끝이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제 다시 뛰어 볼 수 있을지 모를 사막길이 아닌가. 해가 기울자 사인샨드에서 부른 택시가 캠프로 왔다. 내가 떠나면 동쪽 사막 샨드게르캠프는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 제철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갈 것인지. 5월 1일에 캠프를 열어서 10월 1일까지 열고 닫는다고 했다. 캠프 지배인 알통보털과 사이좋게 사진을 찍은 다음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캠프를 떠났다.


올쯔웨 부부와 낙타 눈물


아침 일찍 체빌레가 역으로 가 미리 표를 사 둔 덕분에 울랑바아타르로 되돌아 갈 때는 고급석에 앉을 수 있었다. 앞자리에 탄 사람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부부였다. 11시간 30분쯤 가면 463킬로미터 떨어진 울랑바아타르에 이를 것이다. 떠나는 시각이 8시 5분이니 아마 내일 아침 7시 30분쯤 닿이리라. 고급석인 쿠페에는 관리인 여자가 한 사람씩 딸려 있다. 그녀가 수건과 이불 홑청, 베개닛을 가져다주고 갔다. 나를 한국인이라 확인하자 자신의 사위가 울랑바아타르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도 들어서 아는 상호를 가진 큰 유흥시설이었다. 앞에 앉은 부부는 늦은 저녁인 듯 호슈르를 꺼내 먹었다. 그것을 권해서 먹자니 역 가까이서 사온 낙타고기였다. 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몽골에 와서 처음으로 낙타고기를 먹어본 셈이다. 식당차가 있는가 알아보았더니 없다. 낭패다. 하는 수 없이 나와 체빌레도 간식으로만 저녁을 때우기로 하고 가방을 풀었다.

올쯔웨와 체첵바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부는 사인샨드에서도 다시 남서쪽으로 사막길을 300킬로미터나 더 가야 닿는 하탕볼락 솜에 사는 이였다. 거기서 유목을 하고 있었다. 차로 사인샨드까지 와서 다시 기차를 탄 것이다. 울랑바아타르 병원에 가는 걸음이라고 했다. 몇 가지 내가 알고 싶은 일들을 물어보니 거리낌 없이 대답을 준다. 모처럼 전형적인 사막 유목민과 긴 시간을 함께 하게 된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이참에 낙타에 대해 아예 뿌리 뽑을 작정으로 수첩을 꺼내 놓고 이것저것 콜콜하게 묻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게 답하고 아내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간혹 고개를 끄덕이다가 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그녀가 몽골 들에서 자주 만나는 잿빛 두루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길고 가는.

몽골 낙타는 쌍봉 낙타다. 낙타는 마소와 같이 세워 두고 젖을 짠다. 나이가 들어 임종을 앞둔 낙타는 주인이 잡아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낙타 스스로 들로 나가서 숨을 거둔다. 다른 집짐승 무리와 마찬가지로 낙타도 우두머리가 있다. 주인은 가장 힘이 세고 좋은 낙타를 골라 씨내리는 낙타로 쓴다. 이른바 종낙타인 셈이다. 이런 놈은 힘이 세어 사막의 늑대도 잡을 힘을 지녔다. 낙타끼리 서로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물고 피를 흘리며 싸우기까지 한다. 흥분하면 하얀 침을 흘린다. 머릿속에 쉽게 상상이 되는 싸움이었다. 발정기가 되면 사람을 물어 죽이기도 하는 놈이니 됨됨이나 매우 난폭하다. 그런데 그렇게 사납고도 강한 낙타가 제일 겁을 내는 짐승이 쥐란다. 쥐란 녀석이 낙타의 코로 들어가게 되면 낙타는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낙타는 2년에 1번 임신하여 1마리를 낳는다. 매우 소중한 짐승인 셈이다. 낙타는 며칠 동안 물과 음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녀석이다. 목숨도 질기다. 낙타털은 좋은 캐시미어 옷감이나 갖가지 생활 용품을 짜는 데 쓴다. 옷감의 경우 흰 낙타털을 상품으로 치는데 그만큼 얻기 힘든 까닭이다. 낙타 젖은 다른 짐승의 것과 마찬가지로 유제품을 만든다. 그러나 할머니나 갓난 여자 아이에게는 좋지 않아 잘 먹이지 않는다. 소금기가 많아 그런지 다친 곳에 낙타 젖을 바르면 쓰리고 잘 낫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만약 뱀이 낙타를 물게 된다면 오히려 그 뱀이 죽게 되는 이치도 소금기 탓이란다. 낙타 땀은 하얗게 말라붙는데 그것도 소금 성분이 많은 까닭이다.

몽골 사람들은 낙타 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다. 이 점은 울랑바아타르 시장을 이저 곳 돌아다녀도 낙타 고기를 파는 데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나도 울랑바아타르 서쪽에 있는 하라호린 시장 푸줏간에서 한 곳 보았을 따름이다. 낙타를 잡을 때는 발을 묶고 한 칼로 숨골을 찔러 죽인다 한다. 그 점은 양을 잡을 때와 같은 모양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짐승에게 고통을 덜 주면서 땅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배려가 한결같다. 낙타는 땀이 난 채로 안장을 급히 벗기면 위험하다. 햇살에 등이 바로 쬐이면 병이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타 안장을 해가 진 다음에 내린다. 그렇지 않으면 땀을 씻어 준 다음에 내려야 한다. 그 점만 조심하면 낙타는 다른 병치레를 하지 않고 잘 자란다. 평균 수명이 30년 정도라고 하니 오래 사는 집짐승이다. 주인은 자신의 낙타들에게 낱낱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그것을 부른다.

낙타는 먹이를 갈아서 먹는데 씹어서 먹는 말과 다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몽골 사람들이 으뜸으로 치는 집짐승 다섯 가지 - 곧 소, 말, 양, 염소, 낙타 가운데서 말만 씹어서 먹는다. 되새김질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똥에는 섬유소가 많이 남아 있어 다른 짐승들은 먹을 게 없으면 그걸 다시 먹이로 삼는다. 그러나 말은 제 똥을 먹지 않는다고 하니 다른 짐승과 달리 기개가 느껴진다. 낙타도 소, 양, 염소와 다를 바가 없이 갈아먹는 짐승이다. 게다가 낙타는 밤눈이 집짐승 가운데서 가장 좋다. 말도 밤눈이 좋기는 비슷하나 낙타를 따르지 못한다. 밤눈 어두운 나머지 양, 소, 염소 녀석들과는 다른 족속이니 사막의 배라는 일컬음은 부풀림이 아닌 셈이다. 낙타는 물냄새로 물이 있는 곳을 안다. 2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의 물냄새를 맡고 찾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니 대단한 녀석이다. 하지만 낙타가 지닌 특별한 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가장 놀라운 점은 낙타 울음이다. 낙타는 살아가면서 두 경우에 운다. 짝이 죽으면 울고 새끼가 죽으면 운다. 집짐승 가운데서 짝이 죽었을 때 가장 슬프게 우는 놈이 낙타다. 그 다음이 소다. 소는 둘러 모여서 우머우머 우는데 낙타는 버버하고 운다. 새끼가 죽었을 때도 낙타는 눈물을 흘리며 운다. 참으로 영특하고 기특한 집짐승이 아닌가.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이 있다. 이 두 경우가 아니더라도 낙타는 주인이 켜는 마두금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릴 줄 안다. 게다가 자기 새끼가 죽고 없어도 마두금을 켜면 젖까지 흘린다지 않는가. 주인이 야박하게도 젖을 얻기 위해 마두금을 마구 켜댈 리는 없겠지만 두 줄 악기 소리를 들고 사무치게 울며 새끼를 떠올려 물릴 젖을 내어 준다니 참으로 영물이다. 나도 텔레비전으로 낙타가 마두금 소리를 듣고 두 눈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리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흔하고도 널린 게 울음과 눈물이지만 낙타는 짐승 몸으로 참으로 그것을 귀하게 흘릴 줄 아는 짐승인 셈이다

 

할아버지의 낙타에 대한 설명은 내가 물을 때마다 두럭두럭 조곤조곤 이어졌다. 아내는 남편의 설명을 곁에서 들으면서 잔잔히 즐거운 낯빛이었다. 몽골 사람들에게 나이를 바로 묻는 일은 실례다. 그래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체빌레 더러 조심스럽게 알아보게 했더니 뜻밖에 그는 내 또래였다. 남편 올쯔웨는 1953년생이다.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다. 할머니로 여겨졌던 그 아내 체첵바담은 1959년 태생이다. 내 또래인 그들을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여겼던 것이다. 오래도록 사막의 세찬 햇살과 건조한 날씨가 그들을 그렇게 겉늙게 만든 것일까. 몽골 사람들은 나이에 견주어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는 점은 울랑바아타르에 돌아와 뒷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자칫 그들에게 잘못 말해 실례를 저지를 뻔했다. 그래서 나는 끝내 내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젊은 아랫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내는 침상에 오르기에 앞서 탁자에 먹고 남은 낙타 호슈르를 펴놓는다. 밤새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건조한 날씨인 몽골에서는 공기만 잘 통하게 한다면 어떤 음식이든 쉬 상하지 않는다. 더운 여름에도 집짐승의 고기가 3일 정도까지 버틸 수 있다고 하니 사나운 날씨 덕을 엉뚱한 데서 보는 셈이다. 남편은 아내의 이부자리를 찬찬히 봐 준다. 자상하다. 아내는 애기처럼 남편 수발을 받으며 2층 침대로 올라갔다. 이들이야말로 오갈 데 없이 정다운 낙타 부부다. 동쪽 사막 한가운데서 낙타를 키우며 어느새 낙타와 한 가족이 되어 있음직한 사람들. 아마 이 내외도 짝과 새끼가 죽으면 피눈물을 흘리며 우는 낙타와 똑같은 모습으로 어둡고 가슴 거꾸로 뒤집히는 그 일을 겪을 것이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병이 나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쌍봉 봉긋 잘 솟아오른 봄 낙타처럼 건강하기를 빌었다.

밤도 깊어 잘 시간이 가까웠다. 침대보를 다듬어 편 다음 체빌레도 잠을 청하기 위해 윗자리로 올라갔다. 나는 턱을 괴고 엎드려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되비치는 내 얼굴 뿐. 내 마음 위로 굴러 들어오는 바퀴 소리만 규칙적으로 달그락거렸다. 밤 11시, 기차는 천천히 또는 빨리 갔다. 어느 역에서 섰다 가고 또 다시 섰다. 아이라그 역일까, 다랑자르갈란 역일까. 지도로만 보았던 역들의 어두운 불빛이 차창 안으로 들어서려다 멀어졌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나처럼 잠 들지 못한 밤새들은 기차 둘레를 마음껏 따라 돌고 있지나 않을까. 몇몇은 검은 차창에 제 부리를 부딪치거나 어깨를 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핏빛도 검겠다.

새벽 6시가 되자 체빌레도, 맞은 쪽 낙타 부부도 다 깼다. 창밖은 어느새 환한 푸른 들이다. 다시 보는 울랑바아타르 가까이는 벌써 빛깔부터 달랐다. 누른빛을 뿌리고 있던 지난 주와는 딴판이었다. 참 여름이 되려나 보다. 몽골 여름은 이렇게 마구 들이닥치듯이 오는 것인가. 이제 들풀은 아무 거리낌없이 더욱 왕성하게 자랄 것이다. 황량한 사막을 보고 온 뒤라 그런지 푸름이 눈을 시리게 했다. 그래도 이 풍요로운 들판에 사막의 집짐승들을 데려다 놓으면 그놈들은 풀도 물도 제대로 먹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살이 빠질 수밖에. 그 거칠고 살기 힘든 사막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끝내 남아 집짐승을 키우는 까닭은 거기서 나오는 고기 맛이 훨씬 좋다는 점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집짐승들도 슬픈 고집이 있는데 사람이야 오죽하랴. 이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차는 천천히 울랑바아타르 기차역으로 들어섰다. 7시 30분. 몽골 동쪽 사막에게 내준 7일째 아침이었다.

 

 

 

마두금 : Morin Khuur(마두금의 영어식 표기)
내몽골에서는 모린 톨로가이홀(morin-tologaihole)이라 부르고, 외몽골에서는 킬(khil) 또는 쿨(khul)이라고 부른다.

호궁(胡弓)의 일종이다. 높이 25∼35cm, 나비 17∼27cm의 나무로 만든 도끼 모양의 통 앞뒤에 양가죽이나 말가죽을 붙이고, 여기에 약 1m 길이의 대를 세워 그 위쪽 좌우에 줄감개를 만들어  말총이나 명주실,

경우에 따라서는 장선( 腸線 :gut)으로 만든 현을 두 줄 쳤다.
대의 위쪽이 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연주자는 이것을 무릎 앞에 약간 비스듬히 세우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줄을 누른 다음
말총을 맨 활을 왼손에 쥐고서 문지르며 연주를 한다. 독주·합주, 또는 노래의 반주에 쓰인다.
중국 원(元)나라 때 아라비아로부터 전해진 라바브를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단 두개의 줄로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지 한번 들어보죠

몽골의 민요로, 제목은 "푸른 자장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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