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의 유례와 한옥골목 답사기
글/ 사진 김경식
1. 익선동의 유래와 철종(강화도령)이 살았던 동네
익선(益善)이란 “더욱 착하다.”라는 뜻이다.그러나 익선동은 여러 동이 합쳐져서 불러진 이름이다. 돈녕동, 궁동, 익동, 니동, 한동의 각 일부를 합쳐 1914년 4월1일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익선동으로 태어난다. 익동에서 “익” 자를 따고, 정선방에서 “선” 자를 따왔다. 조선시대 익선동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관할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정선방에 한동, 익동, 누동, 궁동이 함께 공존했다.
1943년 구청 제도가 실시되면서 종로구 익선정이 되었다가 1946년10월 1일 일본식 동명칭은 종로구 익선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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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920년 한옥마을이 남아 있는 164번지와 166번지 일대는 철종의 유년시절 추억이 있는 곳이다.
철종의 조상 계보는 복잡하고 불운했다. 철종의 가계도 뿌리는 사도세자에서 시작한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정조가 태어난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후궁 3명에게서 각 1명씩의 아들이 태어난다.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다. 이들은 영조시대에는 팔자가 괜찮았다. 그러나 정조가 집권하자 서인들은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정조를 살해하려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은언군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 막내아들인 전계군이 익선동에 살았다. 전계군의 아들이 바로 철종이다.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의 유년시절은 불운했다. 그의 나이 11살 때, 아버지 전계군이 사망하고, 왕족을 압박하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그는 외가댁이 있던 강화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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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수명이 다하려는 듯 24대 왕인 헌종은 아들없이 세상을 떠난다. 허수아비 왕을 찾던 정권 실세들은 강화도령(철종)적격자로 선임한다. 정원용 대감은 강화도령이 타고가는 가마와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도에 당도한다. 강화도령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간다. 강화도령은 자신을 죽이려고 온 사람들로 오인하여 다락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그의 형인 평군은 도망가다 마루에서 떨어져 팔이 부려졌다. 그의 별명은 곰배대감이 된 내력이다.
이렇듯 강화도령이 조선25대 왕 철종이 된 사실은 마치 전설같다.
강화도에 살 때도 그들은 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왕이 된 철종은 자신의 유년을 보낸 익선동을 잊을 수 없었다.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 전계군을 그리워했을 것이다.철종이 전계군을 선양하기 위한 사당인 누동궁을 건축한 이유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형인 영평군이 살도록 했다.
2. 익선동 한옥골목의 의미
서울의 60년대와 70년대의 골목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존재하는 곳이 있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165번지 일대이다. 그러나 이곳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익선동의 변모는 1920년대였다. 이 지역은 정세권이라는 사람이 건양사라는 주택회사를 경영하면서 주택단지로 개발된다. 정세권은 북촌에서 유명한 가회동 31번지 한옥마을을 건설했던 장본인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그가 두 번째 도전한 한옥지어 팔기 사업이었다. 두 곳 모두 넓은 땅을 나누고 집을 지어 살 사람을 구하는 분양방식이었다. 결국 그는 한옥 집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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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한옥들이 집장수의 손에 넘어가는 경우는 대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주의자들이 집을 팔았기 때문이다. 조성 명문가의 집들은 대개 300평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 집을 헐고 50평이나 60평 이내로 나누어 집을 짓고 팔았다. 북촌의 골목 모습이 최근처럼 형성된 원인이 될 것이다.
당시 일본집과 서양식 콘크리트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 그는 한옥풍의 집을 지어 팔았던 것이다.
경사지에 위치한 가회동 31번지는 비교적 대지가 익선동 보다는 넓었다. 서울에 진출한 주로 지방의 지주들이 사들였다. 익선동은 평지에 주로 50㎡(약 15평) 안팎의 서민용 주거를 지었다.
첫댓글 높은 빌딩 만보다 이런 골목을보니~~ 익선동 보러 가야 겠구먼~
어제 강좌에서
궁금했던 부분 을 알게되었습니다.
걸음 걸음마다 이야기가 담긴 길이 많다는것을 느낍니다.
좋은 공부 되었습니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