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 김익하 여행, photo essay들
2023-06, 15 -12.30
흐름이 멈춘 공간, 강화도 조양카페, 박물 창고
-폐업한 터전에 버섯처럼 부활한 조양카페
김 익 하
강화에 발 더뎠다 하면 반드시 들려야 한다는 조양카페. 어머님 기일에 부모님을 모신 강화 파라다이스 추모원에 갔다가 아내와 같이 잠깐 쉬어가려고 들렸다. 아내는 처음이지만 나는 삼 년 앞서 왔던 곳이라 조금 익숙했다. 연전에 널찍했던 앞 주차장은 공사를 하느라 펜스가 둘러쳐져 앞은 시원하지 않았다. 이곳 공장부지에는 특유 다단층 지붕을 한 일본식 목재 트러스 구조인 본 공장 건물과 직원 편의를 위한 부속 건물 안팎에는 소유주 말대로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라는 말이 실감 나듯 내가 볼 땐. '고양이 뿔'만 제외하고 한국 산업화 시대 문물이 모일 건 모두 모아두었다. 거의 50년대에서 70년대 산업 초기와 연관된 물건들이라 우리 세대에겐 새록새록 유년에 얽힌 추억을 되살려낸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리 미술관'이라 별칭을 달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산업 초기의 박물관이라 불러야 함이 마땅했다.
위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향나무길 5번 길 12, 시내로 강화여고 입구 건너편이고 강화군청에서 직선거리로 670미터이며, 강화버스터미널에서 1.2킬로 거리, 도보로도 접근이 수월한 편이다. 전국으로 워낙 널리 알려져 찾는 사람이 넘쳐나 토·일요일엔 길게 줄을 늘어서야 할 만큼 북적인다. 남녀노소 누구나 눈 호강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울 진입 요충지였던 인천항에 인접한 강화도는 몽골 침입 때부터 늘 외세 공격을 받던 곳인데,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외세 공격이 더욱 심했던 곳이다. 그러나 고종이 실권을 회복하자, 일본은 부산항에다 함포사격으로 조정 관료를 혼쭐을 뺀 다음,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영국에 당했던 방식을 조선에다 써먹었던 거다. [1858년 영·일 조약]
.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 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로 굳게 닫혔던 조선의 대문은 활짝 열려 개항을 당한다. 5항의 조항에 따라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바닷길을 열어 '개항장'이 조성되기까지 했다.
개항으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자 비로소 근대 산업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는데. 방직산업도 이와 궤를 같이했다. 더러는 이 조양방직이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방직공장이라 옮기고 있으나, 이는 과문에서 비롯된 가짜 정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방직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이 부산 범일동에 지은 조선방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 뒤인 1919년 10월, 김성주 중심으로 조선민족자본으로 영등포에 설립한 경성방적이 2번 째임을 방직산업에 관심을 가진 분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강화도는 예로부터 특산물인 화문석으로 유명한데 특히 자료를 물들이는 염색산업이 일찍 발달했다. 개항 이후 인천항을 낀 강화도는 방직산업의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1916년에 강화직물조합이 설립된 정황을 보더라도 이미 수공업 형태의 방직산업은 존재했다.
그런 가운데 1933년 일본에 유학했던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조양방직을 설립했다. 강화에서 최초로 기계화된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 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 생산품으로 가동했다. 공장 가동 후 1년여가 되는 1939년에 큰 화재로 피해액 40만 원(200억 원 내외)의 손실을 입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조양직물 가동으로 강화도에 전기·전화 시설이 이루어 지자 그 뒤에 이어 평화직물, 심도직물, 이화직물 등이 자리 잡자 1950년대 30여 개가 들어선 성황을 이뤄 한때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 6·25 한국전쟁을 거치고 대구·구미 지역의 현대식 설비로 탈바꿈하자 너도나도 그쪽으로 생산시설을 옮겨가자 강화 방직산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때 호황기를 맞았던 조양방직도 1942년 미쓰이 출신 이세현에게 넘겨졌고, 그는 아들 이현일과 함께 경영하다가 1958년 문을 닫았다. 이후 방치되어 오다가 서울에서 빈티지 삽을 운영하던 이용철 씨가 강화 사진작가가 보여준 사진을 보고, 고심 끝에 폐허나 다를 바 없는 부지를 매입해서 오랫동안 리모델링을 거쳐 2018년에 카페를 개설해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카페는 이 공장 전형적인 일본식 목재 트러스 구조 건물과 3 - 4점의 일본인 소유 적산 가옥이 포함되어 있다. 공장의 생활공간이던 식당, 회의실, 변전실, 금고, 화장실 등은 현재까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우리나라 산업 초기의 생활용품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어 7·80대 부부들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때 당시 공장 설비뿐 아니라 국내는 물론 해외 박물(舶物)도 즐비하다. 특히 기계도 사람도 떠난 공간은 중국과 유럽 등지에서 찾은 골동품으로 채워졌다. 깨진 유리창을 간직한 영국제 문짝, 체코의 옛 기차에 달렸던 둥근 거울, 따위들이 시선을 끌었다.
카페는 공장 건물 통째로 꾸며져서 그대로 국내에서 제일 너르다는 말에 일리가 있었다. 공장 안 염색조(染色槽)였던 공간에 잉어가 노닐고 있었다. 입장료는 별도 받지 않고 음료와 베이커리 구매를 권유하고 있다. 주인장의 박물 수집 수공과 쉼 공간에 비해 커피값과 베이커리 값이 아깝지 않다.
각 동에 전시된 옛것들
#강화도 조양방직 카페 #흐름이 멈춘 공간 #조양카페 #근대화 문물들 #산업화 박물 #가장 너른 카페 #강화도 여행시 들릴 곳 #유년의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