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05 왕하6장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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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문장가르기
게하시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 병거로 둘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자를 많게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영안이 열리면 보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면 담대하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면 대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의 도단은 무엇인가?
-나를 둘러싼 아람은 누구이고, 또는 무엇인가?
기도하는 자는 영안이 열리고
기도하지 않은 자는 영안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상만 보고 두려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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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람과 전쟁에서 배경
나는 이전에 게하시의 눈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마음에 기쁘면 기뻐하고, 조금이라도 좋지 못하면 슬퍼하고 수중에 물질이 있으면 조금 평안해하기도 하고, 물질이 없으면 풀이 죽고 안절부절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불안한 삶을 살던 중 어느 날 주께서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그 날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40일 작정철야를 하던 중 21일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시고 나의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악된 나의 실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마음 속에 검은 마음과 하얀 마음이 서로 공존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내 속에 있는 검은 마음이 바로 나를 힘들게 하고 물에도 넘어지고 불어도 넘어지게 하고, 광야와 산중, 죽음의 바다로 나를 끌고 다녔던 악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 검은 마음은 나의 마음에서 슬픈 마음을 주어서 나를 연민하게 하고 홀로 슬퍼하고 술에 취하게 하고 나를 비관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우울감을 즐기고, 다른 사람에게 어찌하던지 불쌍하게 보이려는 추한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의 눈이 열리자 그 실상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고. 그것을 내 안에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내 안에 있던 더러운 것들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먹물과도 같았고 구렁이와도 같았습니다. 며칠을 그 검음 것들이 내 모공과 입과 코로 빠져나갔습니다. 그 검은 것들이 내 몸에서 새까맣게 빠져나가는 것이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내 몸이 흰눈처럼 희게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순간 그 기쁨 그 자유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기쁨 그 환희를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기쁨이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밤 그 성령의 밤을 지난 후, 다음 날 아침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세계가 열렸습니다,
마치 게하시의 눈이 열리자 천군 천사들이 보였듯이 나의 눈이 열리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전에는 세상은 원망과 슬픔, 한과 원한이 가득한 세상, 암흑이 놋이 되어 하늘 막혀버린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는 날 아침의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코 끝에 흐르는 바람에 새롭고 감사했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던 날이면 가로수들이 나를 향해 울어주고 흐느낀다고 생각하고 같이 울었습니다. 그러니 이후에는 가로수들이 나를 향해 환호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성령을 통해 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마치 게하시의 눈을 여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또 믿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자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고 더 감사한 것은 믿음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음의 밭이 좋았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확신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절대로 행하지 않고 확신하기 까지는 돌다리도 두드려보자는 주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사리 믿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에는 세상에 세파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시절부터 일찍 세상에 발을 디디면서 많은 속임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 내가 믿음의 토양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성경의 말씀을 전혀 의심이 가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물론 강단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말씀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결과 내 마음에 믿어지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해봅니다. 예를 들어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라 하니 그대로 될ㅍ줄 알고 시행 했습니다. 장사가 안되면 성령께 구하고 기도해라 여리고를 돌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믿고 그대로 해보았습니다. 그대로 믿고 그대로 해보니 그대로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해볼 생각도 없고 그대로 해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해보지도 못하고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어지는 사람은 믿어지니 그대로 해봅니다. 그대로 해보니까 응답도 받습니다. 그러니 응답의 기적은 믿음의 눈이 열렸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오셔서 나의 믿음의 눈을 여시고 순종할 수 있고, 그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마치 게하시의 눈을 여신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영의 눈이 열리면 인생이 바뀝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날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하늘에서 강한 빛이 사울을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그 빛을 보고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 가운데 예수님이 오셔서 사울의 영을 열어 주셨습니다. 지금 사울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실상을 알게 하시고 지금 행하고 있는 육신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또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그 육신의 눈이 감기면서 육신적인 신앙의 눈도 감기가 시각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아나니아를 통해 삼일 만에 다시 눈이 열렸습니다. 그때 열려진 사울의 눈은 이전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감기고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죄악의 눈은 감기고 성령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시듯이 육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할 능력도 없다고 하셨다. 육신으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육신의 눈이 감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 후 사울은 바울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영의 세계가 실존하는 것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것입니다. 이처럼 영의 눈이 열리자 바울의 일생이 바뀌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육의 눈이 감기는 것일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인생이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게하시는 아람이라는 문제를 만났을 때 답을 찾지 못했다. 답을 찾지 못하니 “아아 어찌하오리까?하고 탄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자기 옆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을 볼 눈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문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터인데 포기하고 도망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유다는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구원의 주님을 올바로 보지 못했다. 결국 은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후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바울이 배에 태워져서 로마로 압송되고 있었다. 그때 바울이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고 했다. 결국 얼마가지 못해서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게 되어서 모두 죽게 되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서 떨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영안이 열린 바울은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라고 말했다. 얼마 후 바울의 말처럼 멜리데 섬에 도착하여 모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처럼 영의 눈이 뜨지 못한 사람은 앞일을 알수도 없고 또 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린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게 된 것이다.
엘리사가 살던 시대에(왕하7장)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쌌다. 그로 인해서 성안에는 모두 굶주리게 되었다. 그러자 왕이 엘리사에게 신하를 보내서 이일을 어떡게 해결해야 할지 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러자 장관이 엘리사에게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엘리사가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다음날 그 말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에게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모두 혼비백산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문둥병자들이 아람의 진영에 이르러본즉 아무도 없고 먹을 것이 지천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안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고 장관은 성문에 있다가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다.
영안이 열린 엘리사는 절망중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알았고, 장관은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응답을 두고도 그 응답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만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운명이라는 수렁에 빠져서 나오지 못했다. 아무리 탈출구를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자포자기하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한번 온 인생 그렇게 살다가는 것은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답을 찾은 것이 천주교에 가자하는 것이 었다. 영적 소경이었던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고작 육신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장사하던 수퍼의 사장 부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보더니 “아저씨는 거기 가면 그나물에 그밥일뿐이에오 복을 받지 못해요, 내가 보니 아저씨는 꼭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신이 다니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말해주면서 그곳에 나가라고 했다. 그 구역장의 인도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영안이 열린 사람의 인도를 받은 결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나와 내 집안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안이 열린 사람의 인도를 받아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했다. 그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서 모세의 영안을 열어주셨다. 즉 하나님을 볼수 있게 한 것이다. 모세가 영안이 열리지 못하고 육신으로 살 때는 소망이 없었고 길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자기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보려다가 도망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서 영안이 열린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인도해내는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이다. 자기 몸하나 추스릴 수 없었던 모세가 바로를 상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해낸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직접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영안이 열리지 못하고 영적소경상태로 모세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비록 눈을 뜨지 못했지만 영의 눈이 열린 모세를 따름으로 구원을 얻고 가나안까지 무사히 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영의 눈이 뜨지 못했을지라도 영의 눈이 뜬 선지자 즉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는 사람의 인도를 받게 되면 구원을 얻고 복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왜 사람이 영적인 맹인이 되었는가?
영안은 무엇인가?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진리 그리고 하나님 또한 영원한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 눈은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이요. 지금 자신의 삶을 그대로 살면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볼수 있는 눈인 것이다.
왜 사람이 맹인이 되었는가?
그 원인을 알려고 하면 먼저 우리 조상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영적 맹인아담과 하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 그로인해 아담으로 하여금 영의 사람, 영안을 주관했던 생기가 거두어졌다. 즉 하나님이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안이란 하나님으로 인해 뜨여지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영안을 열수 없는 것이다. 영안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눈을 뜨게 하시 못한 일을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눈은 하나님만이 뜨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눈을 뜨기 위하여 귀신을 찾고 도를 닦지만 절대로 영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귀신을 찾아다니면 소경이 더욱 더 깊은 소경이 되고 말것이ᄃᆞ.
그러므로 인간이 맹인이 된 것은 첫 번째 원인은 죄로 인하여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결국 죄 때문에 하나님이 영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는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다. 육신의 맹인이나 영적인 맹인이나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는 맹인인 것이다.
삼손은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다. 영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 때문에 영의 눈이 멀어버렸다. 나중에 들릴라가 계략에 빠져 머리가 잘리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눈이뽑혀버리고 말았다. 영적 맹인이 되자 육신의 저주가 다가온 것이다.
사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우상숭배를 했다. 그리고 영안이 닫혀서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사울왕 탐욕과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말았다. 결국 영적 맹인이 되어서 전장에 나가서 죽고 말았다.
유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에 눈이 멀어버린다
탐욕과 세상의 재미가 눈을 멀게 한다.
사단이 탐욕과 교만과 이기심으로 눈을 멀게 만든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맹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적으로 맹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맹인이다. 또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맹인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을 맹인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15:14]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영적인 맹인은 진리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오직 진리와 하나님에 대하여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의 눈이 먼 사람도 귀신의 존재는 인식하기도 하고 귀신과 영통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영이 열렸다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믿지 않는 사단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영통했다. 영이 열렸다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어둠에 있기 때문에 눈이 열렸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영의 눈이 멀면- 어떻게 되는가? 그야 말로 소경의 삶- 소경은 손에 만져져야 믿고 느낀다. 멀리도 볼수 없고 손에 만져진 그 현장의 삶이 전부인 것이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버리고 말자 그의 눈이 멀어버렸고 장래일도 알수 없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신접한 자를 찾아 나섰다. 결국 전장에서 자신의 큰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영의 눈이 멀면 멀리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누가 옆에서 욕하고 싫어하는 지도 모르고 그 일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또 주의에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도 모른다. 사단이 지금 우리 주위에서 앞길에서 어떤 수단을 쓰는지도 모른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령이 임하여 영의 세계가 열리기 전까지 해도 여전히 현세 중심이요, 육의 현상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그 중요한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묻는 것이 “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로마의 압제에서 언제나 벗어나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그들의 관심은 영적이지 아니하고 육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을 하셨습니다. “때 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열리기 전까지는 제자들 역시 육신의 세계에 모든 관심이 있었고, 육신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그들의 영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되지 않고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그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눈이 열리자, 자기들을 핍박하던 서기관과 제사장 무리들의 위협보다 그 뒤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제사장을 향해 담대히 외칩니다. “내가 사람을 말을 듣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을 듣겠는가?”이전에 보지 못했던 베드로의 모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자 사람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집안의 일입니다. 나의 큰 형은 예수를 영접한 후에도 여전히 풍수지리. 작명, 사주 등을 보고 다녔습니다. 형은 그것들은 모두다 통계지 점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물론 제사를 지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형을 보면서 아니라고 말을 하면 다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오직 성령이 형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가 내가 논산에 개척을 하게 되었고 형님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형의 눈을 열어주옵소서하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런 어느 금요일 밤에 형에게 성령이 임하고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아버님의 제삿날이 되었습니다. 그 제삿날 아침에 형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일인 것 같아서 예배를 드려야 겠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영이 열리자 옳고 그름을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인 진실인지 깨닫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눈이 열리면 진실을 알게 됩니다. 눈이 열리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영이 열리면 보배를 구분하는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안이 열리는가?
그것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신
예수 그리스도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안을 회복하는 길을 보이셨으니 곧 예수인 것이다.
맹인 바디메오는 세상의 힘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예수에 의하여 눈이 뜨였다.
날 때부터 소경된 다른 소경들도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2.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 병거로 둘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둘러주신 불말과 불병거가 무엇일까? 내가 눈이 감겨서 보지 못했던 불말과 불병거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영적 실상을 보라고 하십니다.
지금껏 아람군대는 나를 둘러서서 나의 약점을 공격하고, 나의 낮은 자존감을 공격합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아람 군대는 나를 둘러서서 나를 성안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람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숨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안에 가두어진 나는 나의 환경을 바라봅니다. 나의 부족함 연약함을 바라보고 스스로 고사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엘리사를 통해 게하시에게 말씀하시듯이 내 안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학석이의 눈을 열어 실상을 보게 하옵소서‘하면서 내 눈을 열어주십니다.
내 눈이 열리고 영의 눈으로 나를 둘러선 불말과 불병거를 봅니다. 그 불말과 불병거는 저들보다 많습니다. 거대한 불말과 불병거를 봅니다. 내가 영안이 열려 볼수 있는 불말과 불병거는 흰 옷을 입고 발에 끌리는 옷으로 입고 서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마치 풍랑이는 바다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는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과 같습니다. 풍랑을 꾸짖어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죽음을 꾸짖어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나를 떠나지 아니하고 약속하시면서 영원히 나의 힘과 능력으로 함께하시겠다며 오신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은 나의 불말과 불병거로 보혜사가 되어서 나에게 함께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나를 위하여 일하러 오신 성령, 나를 위하여 도움을 주러 오신 불말과 불병거 나와 함께하신 이는 누구입니까? 전능의 하나님이시오 만군의 야훼이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늘 ‘나와 같이 계신 이를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하신 예수님, 나를 구하러 오신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나를 대속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나를 둘러서 있습니다. 원수 아람이 아무리 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여도 내 주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의의 은혜가 둘러 진치고 있고, 아람군대가 아무리 나를 더럽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진 성결과 성령이 내게 임하신 성령 충만이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원수 아람이 아무리 질병으로 나를 공격해 와도 예수 이름으로 주어진 치료와 건강이 나를 둘러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원수 아람이 나를 성안에 가두고 경제적으로 고사시키려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저주가 물러가가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이 둘러 진 치고 있으며, 사망이 아람처럼 나를 우겨 싸고 있을지라도 부활과 영생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나의 눈을 열어 나의 실상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둘러싸고 보호하시는 불말과 불병거를 봅니다.
지금 내 주위에 남북관계를 바라보면 아람군과 같습니다. 철도 파업, 의료파업, 세상의 갈등을 보면 마치 아람 군대와 같기도 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 환경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람 군대처럼 우리를 둘러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을 보면 죽을 것 같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아람군대는 그렇게 우리에게 둘러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슴을 펴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우리를 둘러친 하나님의 군대가 첩첩히 주위에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실상은 바로 예수님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실상은 성령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실상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무리 나를 둘러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면서 ‘너 같은 것, 감히 네가, 더러운 네가’라고 할지라도 나에게 용서와 의의 군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부적한 나를 거룩함과 성령충만함으로 군대가 둘러 진치고 거룩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치료와 건강의 군대가 둘러싸고 있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의 군대가 둘러싸고 있고 부활과 영생천국의 군대가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연약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실상이며, 이것이 나의 불말과 불병거인 것입니다.
지금 이 아침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군대가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은혜의 불말과 불병거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적을 향하여 나의 닫힌 성문을 열고 나갑니다. 그 두려운 아람군을 향하여 나갑니다. 마치 엘리사처럼 말입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을 힘입어 나갈 때 아람군의 눈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나로 담대하게 하며, 그 사실이 나의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힙입어 나갑니다. 아멘
3.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참으로 두려움이 많은 삶을 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도 하나님은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그날 주께서 똑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행할지라도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요 불 가운데로 행할지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삶, 홀홀 단신으로 사는 삶, 내가 위급한 일을 당할 때 그 어디에서도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삶. 이런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나에게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막상 어려울 때는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하였습니다. 마치 식물 부모형제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들의 삶 또한 자신의 삶의 무게도 지탱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기대도 할 수 없고, 기대를 하면 오히려 실망만 더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전의 나는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강한 척 사나운척했습니다. 그래야 내면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하여 위장하면 위장할수록 더 깊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나에게 주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던 그날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주께서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아시고 내가 홀로되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나의 마음을 어루 만져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적들에게 둘려 싸여서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나에게 불 가운데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심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를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는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김장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이런 소식을 부모형제들도 들었건만 그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와보지도 않고 전화도 없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 구역성도들을 통해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형제도 와보지 않은 병문안과 또 서로 도와서 김장을 해주고, 또 한편으로는 윗집 남훈이네를 통해 큰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로 말로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립서비스만 하는 분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를 주시고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후로 점점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남겨진 두려움들도 점점 해소되게 시작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남모르는 자부감과 든든함이 내 등뒤에 버티고 있는듯합니다. 옛날에 마음속으로 가슴 졸이던 그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강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에 내게 다가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시던 그 말씀을 오늘도 내게 말씀해주십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해서 잠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나에게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요즘 광고를 보면 없는 두려움도 일어납니다. 특히 보험광고를 보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험광고는 평안한 마음에 오히려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없는 두려움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암보험, 노인성 치매 보험, 자동차보험, 운전자보험, 화재보험, 건강 보험등의 광고를 보다 보면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물론 보험을 들므로 안심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험이 암을 없애지는 못하고 치매도 없애지는 못합니다. 교통사고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만일의 사태에 보상을 하고자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쉬은 것은 그 광고를 보면 사람이 불안해지고 두려움이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 또 언제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을 미리부터 크게 부각시켜서 두려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을 보면 마귀가 마음에 불안을 집어 넣어준다는 생각이 떨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격는 삶의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셔서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을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두려워하고 떨라고 가르치는 듯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이 많으면 그런 광고가 나오겠는가 하고 이해를 합니다. 북미에서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한파가 밀려오고, 다른 쪽에서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한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에서는 까닭없이 살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온통 불안한 일들 밖에 없습니다. 오늘 내가 보는 사람이 언제 나를 해칠지 모릅니다. 위험한 이웃들이 나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 내가 이 위험한 풍랑이 치고 비바람이 치는 세상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런 위험이 많은 세상에서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 눈에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위험이라는 죽음이 다가와도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아픔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내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 새로운 세계를 보고 두려워서 손을 꼭 쥐고 울음을 터뜨리던 그런 것일 뿐이라고, 그것은 생명선인줄 알던 탯줄이 잘리는 아픔을 겪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4.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자를 많게 하셨습니다.
지금 도단성에는 수많은 아람 군대가 둘러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도단성은 초토화되고 엘리사와 게하시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이 상황에서 떨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보다 많다고 하면서 영의 눈을 열어 게하시로 하여금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했습니다. 게하시가 눈을 뜨고 보니 아람군대를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게하시처럼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에 따라 두려워하기도 하고 어떤 의사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비록 육신적이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인간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천명, 아니 만명, 아니지요 억명이라도 하나님과 비견할 수 있는 수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천군천사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게하시의 눈이 육신의 눈이었기에 천군천사를 보여주시며 안정시켰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천군천사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혼자라도 나와 함께 하시면 나와 함께 한 자가 저들 보다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24절 이하에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에워쌓은 일-
우리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산혜립이 히스기야를 둘러싸고 조롱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세상의 어떤 신이 우리의 손에서 너희를 구원하겠느냐?’하고 조롱을 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일어나서 히스기야와 함께 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앗수르 군대, 그 수많은 군대, 예루살렘성을 겹겹이 싸고 있었던 그 군대가 새까맣게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산헤립은 그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앗수르로 돌아가서 아들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군대가 있어야 이 많은 군사를 물리치며 앗시리아까지 추격하여 산혜립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혼자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혼자라도 나와 함께 하시면 저들보다 나와 함께 한 자가 많습니다.
대하 20 장에서 여호사밧과 아람의 전쟁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했습니다. 여호사밧은 그 연합군의 숫자를 보고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12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의 모든 사람들이 자녀와 어린이와 합께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야하시엘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15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하나님의 응답에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다음 날 유다 백성은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나아갔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패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신 복병은 바로 이것입니다.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 죽였더라 유24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
하나님께서는 서로 싸움이 일어나 서로 죽이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두신 복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만 치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를 많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 자의 수를 많게 하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수보다 크시며 모든 수보다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분이면 족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들보다 많은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한 자가
저들 보다 많습니다.
나와 함께
한 자가
저들보다 큽니다.
나와 함께
한 자는 혼자입니다.
그들은
수십만 명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와 함께
한자가 큽니다.
여전히
나와 함께
한 자가 많습니다.
5. 아 도단성이여
게하시는 도단성 안에서 성밖을 바라보니 아람군대가 둘러서진 것을 보았습니다.
아람군대가 금새라도 도단성을 밀물처럼 덮쳐 들어올 것만 같습니다. 자신을 보호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단성은 아람 군대를 보니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아람군이 둘러싸기 전에는 도단성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평안히 자기도 하고 생활을 안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이 성을 둘러싼 것을 보니 지금까지 자기가 거하던 성이 그렇게 작고 위태롭고 보잘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이상 도단성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오늘 이 도단성 안에서 나는 나를 공격해 오고, 나를 둘러 싼 아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도단성은 어떤 것일까? 내가 평안하다. 내가 여기면 만족하다 하는 그 도단성은 무엇일까?’하고 도단성을 되돌아봅니다. 내게 도단성은 통장의 잔고라는 재산이라는 성일까? 아니면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의 성은 아닌가? 아니면 연약하기만 한 나의 육체적인 건강이라는 성일까? 아니면 나는 내 지식이라는 성은 아닐까? 만일 이러한 성이라고 한다면 내가 가진 것만큼 내가 보유한 것만큼만 안전할 것 같습니다. 나보다 더 큰 아람 군이 나를 둘러싸게 되면 내가 이전까지 믿고 지켜왔던 나의 성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아람이 나의 도단성을 둘러싼 지금 나는 내가 의지하고 살았던 성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세우고 있던 도단 성에서 그것이 나를 도와줄 수 없고 나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성을 떠나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도단성을 붙잡고 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부여잡고, 허술한 성문을 메우고 내 손으로 부여잡고 전전긍긍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허물어진 성에서 두려움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허물어진 성문만 바라보고 애통하고 살았습니다.
아 도단성이여
허물어진 나의 성이여
부서진 나의 성벽이여
자랑삼던
나의 세계여
평안히 눕던
나의 안식이여
그 안에서
네게 구하던
나의 꿈이여
그 안에서
평안타하고
그 안에서
자랑삼던 나의 성이여
이렇게 작은 것인지
이렇게 보잘 것인지
아람이 오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나는
아람으로 인해
나의 도단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오늘 문득 나의 경험과 지식의 세계에 갇혀 있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마음을 열고 밖을 본다고 해도 언제나 나의 도단 안에서 도단성의 가치를 품고 그것으로 척도를 삼고 평가하고 그것으로 기준으로 삼고 나의 도단에 맞지 않으면 참고한다는 좋은 말로 포장을 한 채 외면하고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나의 도단성 밖에서 그 성을 바라보면 작은 아람 군데도 이기지 못하는 무력한 성이었고 지극히 작은 성이었다는 것을 그 성을 벗어나고 보니 보게 됩니다. 아니지요, 나의 대적 아람 때문에 그 성이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람 때문에 내가 안주하던 성이 얼마나 작은 가를 알게 됩니다. 그 성을 빠져나와서 멀리서 그 성을 바라보니 얼마나 그 성이 위험하고 작았던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이전에는 그 성이 제일이었고 그 성이 자부감이었고, 버리지 못한 나의 세계요 나의 경험치였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아람 때문에 진정하게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진실로 나를 보호하는 분이 누구인가를 봅니다. 그 은혜로 인해 성에서 한걸음을 떼고, 그 성에서 눈을 돌려 성밖 하늘을 덮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를 봅니다. 그 하늘을 보면서 나의 슬픈 도단성에서 한 걸음 발을 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