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무용의 기원과 의의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계율 상 가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무용의 종교적 의미와 교화적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들에 밝혀놓고 있다. <법화경> 제2 <비유품>에 '사리자가 기뻐 춤추며 일어나서, 합장하고 부처님의 존안을 우러러보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 권 상(上)에는 '이 빛을 만나는 자는 삼구(三垢)가 소멸하고 신업(身業)이 부드러워져 기뻐 춤추고 착한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하였으며, 권 하에는 '빛이 전신을 감싸서 세 번 돌아 정수리로 쫓아 들어와, 일체 천인(天人)들이 모두 기뻐 춤춘다.'라든지, '부처님의 이름을 얻으면 기뻐 춤추고, 이에 일념(一念)에 이르면 마땅히 큰 이득을 얻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불교무용인 범무(梵舞)의 기원이 환희용약(歡喜踊躍)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환희용약은 깊은 신앙의 결과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무용은 신앙의 행위적 표현이며, 의식무용으로 전개될 수 있는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 의식무용의 전개와 발전은 밀교의 발전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밀교란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적 가치체계 면에서 밀교가 상징체계를 중요시하며 모든 행위적 표현에 있어서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밀교는 불교의식을 다양하게 전개, 발전시켜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무용이 의식무용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이러한 불교의식의 구조적 성격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불교의식에서 구밀(口密)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진언과 다라니의 독송과 염불이 있고, 신밀(身密)에 해당되는 것은 의식무용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의밀(意密)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환희(歡喜)가 있다. 밀교에서는 신, 구, 의를 삼밀가지(三密加持)라 하여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3대 요소로 삼는데,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독경과 염불 등의 구밀에만 의존하였다.
그러던 것이 신밀인 의식무용에까지 구체화시켜 나간 데는 환희라는 동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3밀가지의 구체적인 신앙 표현에 따른 의식무용의 의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불교무용의 기원은 신라시대의 원효 대사가 표주박을 두드리며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무(無碍舞)를 춘 것과 그의 스승 대안 대사의 동발무(銅鉢舞)를 들 수 있는데, 기록을 보면 동발무는 동발을 치며 '대안대안(大安大安)'을 외치면서 시장과 골목 등의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일반대중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또 682년경에 조성된 감은사(感恩寺) 사리탑에서 발굴된 금동상여형(金銅喪輿形) 환희용약 사리기(舍利器)의 난간에 보면 동북우주악천(東北隅奏樂天)이 보이는데, 현재 우리나라 바라의 모형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아직 정형화된 의식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형화된 대규모 불교의식이 행해진 기록은 신라시대의 백고좌강(百高座講), 팔관회, 연등회 등에서 살필 수 있는데, 다만 범무(梵舞)의 발전이 범패(梵唄)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범패가 이미 신라시대(830년) 진감국사(眞鑑國師)에 의해 당나라에서 전래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본격적인 의식무로서의 범무가 행해졌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범패란 일반적으로 성악으로서의 불교음악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성악만을 지칭할 때는 범음(梵音)이라 하고, 범패라고 하면 범음과 기악, 그리고 무용까지 합쳐진 종합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시대에 범패가 전래되었다 함은 범무도 함께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상남도 하동의 쌍계사(雙溪寺)에 있는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功塔碑)>에는 많은 제자들이 범패를 배워 성행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의식이 더욱 발전한 시기였다. <고려사>에 전하는 불교의식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다양하긴 하지만 범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별로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재회(齋會) 등에는 수백 명의 범패승이 의식을 진행했다고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 성대한 의식과 더불어 그에 따른 의식무용으로서 범무가 존재했음을 알게 해 줄 따름이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범무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로는 연산군 2년(1496)에 간행된 <진언권공(眞言勸供)>을 들 수 있는데, 이 문헌을 살펴보면 '명발'과 '요잡'이란 말이 보이는데, 이는 바라춤을 추라는 내용으로 불교의식에는 불교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 숙종 때에 이르면 불교계는 의식집(儀式集)의 정비에 많은 힘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식집의 정비는 의식음악으로서의 범패 중흥에 중점을 두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에 의해 상류층에서 기반을 잃은 불교계가 그나마 일반대중에게 그 기반을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식을 통한 전교가 더욱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래적 토속신앙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범패와 범무를 중흥시키는 데 크게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선조 22년(1589)에 제작된 감로왕도(甘露王圖)를 자세히 살펴보면, 석존께 육법공양(六法供養)을 올리고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스님들의 작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스님은 법고(法鼓)춤을, 어떤 스님은 바라춤을, 또 다른 스님은 나비춤으로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나타나 있어서, 불교 의식무(儀式舞)의 역사가 1589년 이전 불교문화와 더불어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때 간행된 <범음집(梵音集)>은 그 뒤 몇 번이나 증보판이 나오게 되었다. 가령 백파(白坡)에 의해 정비된 <작법귀감(作法龜鑑)>은 그러한 성격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안진호(安震湖)에 의해 편찬되어 오늘날 불교계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석문의범(釋門儀範)>은 앞의 의식집을 재편집한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집들이 모두 범패와 범무의 중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불교의식(儀式)이 상당히 민중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전하는 범패와 범무는 신라시대 이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유지되던 것을 조선 중기에 다시 확립하여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오늘날 전하는 불교 의식무는 모든 불교 의식에 통용되는 춤이 아니라 일반 신도들의 요구에 응하여 승려가 행하는 재의식(齋儀式)에서 주로 추었던 것이다.
이러한 춤이 몇몇 승려들에 의해 무대화 작업으로 시도되어 많은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 한 예가 2001년 국립국악원 50주년 특별 초청행사로 예악당에서 영산재를 봉행한 것이며, 일본의 국립극장에서도 영산재를 시연한 바 있다.
<불교평론/ 진언과 다라니가 불교무용에 끼친 영향/ 능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