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장 수라궁(修羅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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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봉(天魔峯).
천하무림에 마존첩(魔尊帖)을 뿌림으로써 무림제패의 야욕을 드러
낸 수라궁이 있는 곳.
천하 정사무림에 도전장을 낸 수라궁은 마침내 이곳 천마봉에서
개파대전(開派大典)을 열었다. 그로 인해 혈겁(血劫)의 전운(戰
雲)이 천마봉의 음산한 지역을 더욱 으스스하게 뒤덮고 있는 듯
했다.
천마봉은 괴이하게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폐한
갈암과 적토(赤土)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위로 오를 수록 지세는
더욱 거칠고 음산해졌다.
봉우리 아래에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백의를 입고 자색이 감도는 긴 머리를 흘러내렸다. 역시 얼
굴도 자면(紫面)이었으며 괴이한 것은 눈동자도 자안(紫眼)이라는
것이었다. 나이는 대략 삼사십 정도로 보였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 새롭게 변신한 자부신군(紫府神君) 무영종(無
影宗)이었다.
"......."
무영종은 자광이 감도는 눈으로 천마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봉우리로 오르는 길로 다섯 명의 인물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자색 감도는 얼굴에 잠시 의혹이 스쳤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모두 풀이 잔뜩 죽은 채 힘없는 모습인 데다가
또한 그들 중 한 명은 왼쪽 어깨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런데 기이한 행렬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다시
내려오는 일단의 무리들 역시 부상을 당한 듯 심하게 절룩거리거
나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무영종은 그런 식으로 산길을 오르는 동안 수십 명의 인물을 지나
치게 되었다. 그의 의혹은 곧 하나의 결론으로 화했다.
'그렇구나. 저들은 아마도 수라궁으로부터 마존첩을 받지 못한 자
들일 것이다. 호기심으로 개파대전에 참가하려다 제지를 당한 모
양이다.'
무영종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맞은 편에서 세 명의 장
한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내려왔다.
그들 중 한 명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그래도 관동(關東) 지방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우리 관
동삼괴(關東三怪)가 관문 하나를 제대로 뚫지 못하고 쫓겨나다
니......."
그는 삼 인 중 가운데의 턱이 네모진 중년 장한이었다. 좌측의 약
간 마른 자가 고개를 흔들며 그의 말을 받았다.
"형님, 솔직히 그 관문은 너무도 어렵소. 분명 수라궁 놈들이 고
의적으로 세운 것이오."
무영종은 그들의 말을 모두 들었다.
'관동삼괴라.'
그는 강호에 나온 후 관동삼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관동지방에서는 꽤 알려진 고수였으며 정사지간(正邪之間)
의 인물들로써 외가권(外家拳)에서는 경지가 독특했다.
대괴(大怪) 시천공(施天公).
이괴(二怪) 시천수(施天水).
삼괴(三怪) 시천지(施天地).
그들은 형제(兄弟)였다. 첫째는 구두철편(九頭鐵鞭)이라는 채찍을
썼고 둘째는 장법(掌法)에 능했다.
그러나 셋째인 시천지는 무공보다는 머리가 영악했으며 암기(暗
器)를 잘 썼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관동삼괴는 바로 시천지에 의
해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무영종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세 친구, 잠깐 실례하겠소."
관동삼괴는 걸음을 멈추며 무영종을 주시했다. 곧 그들은 괴이한
인상의 무영종을 보자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그들과는 달리 무영종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그 말에 우측의 턱이 뾰족하고 두 눈이 깊숙하며 생각이 빠른 듯
이 생긴 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가 바로 삼괴인 시천지였다.
"이곳이 바로 수라궁으로 가는 길이오?"
무영종의 물음에 관동삼괴는 움찔했다.
"그것은 왜 물으시오?"
시천지가 그의 아래 위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아마도
기억 중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영종은 고개를 들어 천마봉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 뒤 말했
다.
"본인은 동해(東海) 자부도(紫府島)에서 온 자부신군(紫府神君)무
영종이라 하오."
"자부도? 자부신군?"
시천지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자 내심 비웃었다.
'스스로 신군(神君)이라고? 웃기는 놈이군.'
무영종은 다시 한 번 천마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인은 자부도에서 중원에 처음 나온 길이오. 중원의 친구들과
함께 견식을 넓히고 무학을 비교해 보기 위해 왔소. 막 중원에 발
을 내디디자마자 우연히 수라궁에서 강호인들을 초청한다는 소문
을 듣고 호기심에서 와본 것이오."
대괴 시천공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귀하는 그럼 수라궁에서 보낸 마존첩을 갖고 있소?"
"없소."
시천공은 냉소했다.
"흥! 그럼 그냥 돌아가시오."
"아니, 왜?"
"공연히 올라갔다가 팔다리 하나 잃지 말고 조용히 자부도로 돌아
가는 게 좋을 거라는 얘기요."
무영종은 짐짓 멈칫하며 물었다.
"수라궁이... 정말 그렇게 무섭소?"
이번에는 시천수가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거든 직접 올라가 보구려."
무영종은 자미(紫眉)를 움찔하며 중얼거렸다.
"흠, 이 중원에도 그렇게 무서운 고수가 있단 말인가? 본 신군의
개세무학과 상대할 인물이 그럼 수라궁에 있단 말인가?"
그 말에 시천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아니, 당신의 개세무학은 그럼 적수가 없다는 말이오?"
시천수도 기가 찬다는 듯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것 보시오, 친구.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만약 수라궁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은 살아남지도 못할 것이
오."
시천지도 충고했다.
"공연히 화(禍)를 부르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조용히 사라지시
오."
그러나 무영종은 자광이 감도는 기이한 눈을 껌뻑이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젯밤 밤새워 복주(福州)에서 이곳까지 달
려온 보람이 없게 되는데."
관동삼괴는 모두 대경하였다.
"뭐, 뭐라고? 복주에서 이곳까지 하룻밤 사이에 왔다고?"
시천수는 멍한 얼굴로 부르짖듯 외쳤다. 시천공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당신, 농담하는 거요? 복주에서 이곳까지는 이천 리(二千里)가
넘는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하룻밤 사이에?"
마지막으로 시천지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들, 이 자는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오. 천리마로 달려도
이틀이 걸릴 거리를 하룻밤에 왔다는 것을 누가 믿겠소? 신경쓰지
말고 우리 갈 길이나 갑시다."
그러나 시천지는 눈길을 돌리다 우연히 무영종의 눈빛을 보게 되
었다. 무영종의 눈은 자색이 감돌면서 마치 깊이가 끝이 없는 호
수처럼 담담했다. 또한 기이하게도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라도
솟아야할 양 쪽 태양혈(太陽穴)도 밋밋하기만 했다.
시천지는 비로소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 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한 차례 눈알을 굴리더니 품 속을 뒤져
한 장의 천을 꺼냈다. 무영종을 주시하며 말했다.
"친구, 당신이 만약 이 헝겊을 날려 저 나무에 꽂을 수 있다면 수
라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시천지는 약 삼 장(三丈) 밖에 서 있는 고사된 나무를 가리켰다.
어찌된 일인지 천마봉 일대에는 나무가 있어도 모두 말라죽어 있
었다. 천마봉의 마기(魔氣)를 이기지 못한 탓일까?
무영종은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는 그래도 굵기가 한 아름은 되
고 있었다.
시천공과 시천수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막내가 돌았나? 저 나무에 헝겊을 꽂으려면 최소한 백 년(百年)
의 공력은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무영종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런 정도 해낼 사람이라면 자부도에 수십 명은 되
오. 하하! 수라궁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쉽다니?"
관동삼괴는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치 그들은 어떤 환상
의 세계를 듣는 것같은 기분으로 눈 앞의 괴이하고도 신비한 사나
이 자부신군 무영종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영종은 시천지에게서 헝겊을 받아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
게 휙 던졌다.
스슷!
깃털이 스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헝겊은 고목에 꽂힌 게 아니라
아예 고목을 뚫고 지나가 버렸다.
우르릉... 쿵!
뒤이어 고목은 칼로 벤 듯이 잘려져 넘어갔다. 천은 또 기묘하게
방향을 바꾸더니 무영종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관동삼괴는 대경실색하여 멍청히 굳어 버렸다. 눈 앞의 상황이 도
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무영종은 혀를 찼다.
"쯧! 너무 힘을 썼군. 나무를 잘라 버리다니."
그는 짐짓 무안한 듯 변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 나무가 너무 무른 것 같소."
관동삼괴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들은 무영종을 두려움과 선망, 그리고 의혹의 눈으로 바라볼 뿐
이었다.
"이 정도면 수라궁 개파대전에 참가할 수 있겠소?"
무영종의 물음에 시천지가 번쩍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추... 충분하오!"
그는 부러운 눈으로 무영종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 그럼... 올라가 보시오."
관동삼괴는 쫓기듯이 몸을 돌렸다.
"잠깐."
무영종이 그들을 불러 세운 뒤 물었다.
"당신들도 수라궁 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소?"
시천공이 멈칫하며 더듬거렸다.
"하, 하고는 싶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그럼 본인이 도와준다면 가능할 것 같소?"
그 말에 관동삼괴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들은 구미가 당기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마침내 그들 중 시천공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시... 신군(神君)께서 도와주신다면야 가능하고말고요."
어느새 그의 말투는 공손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무영종은 짐짓 호
탕하게 웃었다.
"하하! 염려하지 말게. 본 신군은 강호초출이니 경험이 부족하네.
오히려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함께 가세."
무영종의 말투도 역시 변했으나 관동삼괴는 이미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신군."
무영종은 옷소매를 저었다.
"자, 올라가 보세."
그는 관동삼괴를 앞장세운 채 천마봉으로 올라갔다.
괴암(怪岩).
갈색의 편편한 암석 위에 탁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나란히
세 명의 흑의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육 순(六旬) 정도
에 눈빛이 음침했다.
그 옆으로 사방 오 장(五丈) 넓이의 반석이 있었고 그 위에 한 명
의 백의복면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으며 두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왔다.
이곳에 다시 네 명이 올라왔는데 그들은 무영종과 관동삼괴였다.
관동삼괴를 본 세 흑의노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관동삼괴가 또 오는군."
"미친놈들,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못하다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군!"
관동삼괴가 탁자 앞에 서자 가운데 흑의노인이 비웃듯이 말했다.
"관동삼괴, 다시 올라온 것을 보니 그 동안 기연(奇緣)을 만나 새
삼 천고절학이라도 익혔나 보군?"
관동삼괴는 한결같이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무영종이 나서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본좌가 대신 통과할 것이오."
흑의노인은 움찔했다.
"그대는 누구요?"
시천지가 재빨리 엄숙하게 말했다.
"그 분은 우리들의 대형(大兄)이시오."
"대형?"
세 흑의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조소를 띄우며 무
영종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당신은 이 관문을 통과할 자신이 있소?"
무영종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없으면 오르지도 않았을 거요."
그를 바라보던 세 흑의노인의 눈빛이 빛났다.
'음, 이 자는 관동삼괴와는 다른 것 같다. 어쩌면 생각 밖으로 고
수일 수도.'
가운데 흑의노인은 우측의 반석 위에 우뚝 서 있는 백의복면인을
가리켰다.
"첫 관문의 상대자는 저 친구요."
무영종은 백의복면인을 주시했다.
"흠, 저 자와 싸워 이기면 통과요?"
"이긴다고? 흐흐흐... 천하의 그 누구도 저 친구를 꺾지 못할 것
이오."
"흐음?"
"당신이 반석에 올라가 저 친구에게 삼 장(三掌)을 공격해 한 걸
음이라도 움직이게 하면 통과요."
무영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겨우 그 정도요?"
그러나 시천지가 옆에서 주의를 주었다.
"대형, 저 복면인은 절대 얕볼 수 없습니다. 아까 우리 모두가 공
격했는데도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무영종의 눈에 자광이 번쩍였다.
'음? 관동삼괴가 비록 절정고수는 아니나 그래도 일류급인데 그들
의 합공(合攻)을 받고도 끄덕하지 않다니.'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시험해 보겠소."
그는 어깨도 흔들지 않고 발도 구르지 않으며 반석 위로 뛰어 올
라갔다. 그의 괴이한 신법에 세 흑의노인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무영종은 백의복면인 앞에 서서 말했다.
"자, 친구. 공격하겠소."
백의복면인은 말이 없었다.
'이 자가 어떤 외문기공(外門奇功)을 익혔는지는 모르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무영종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가볍게 손바닥을 밀었다. 소리
도 없이 장력이 뻗었다.
펑!
장력은 정확히 백의복면인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의복면인이 끄덕도 하지 않자 무영종은 안색이 다소 변했다.
'이럴 수가? 비록 이 성(二成)의 내공밖에 쓰지 않았지만 웬만한
고수는 즉사할 텐데... 이 자는......?'
"일 장(一掌)을 공격했소. 이제 이 장(二掌) 남았소."
흑의노인의 말에 관동삼괴가 도리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꽝! 하는 폭음이 울렸다. 무영종은 이번에는 사 성(四成)의 공력
으로 장력을 날린 것이었다. 그러나 백의복면인은 가볍게 상체를
흔들었을 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무영종의 자면이 찌푸려졌다.
'이번 일 장이면 강호의 절정고수도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렇다
면 이 자는 이미 금강불괴라도 된단 말인가?'
그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일 장(一掌) 남았소!"
흑의노인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무영종은 이번에는 육 성(六成)의
공력으로 적미천존의 현천마공(玄天魔功)을 일으켰다.
그의 장심으로부터 검은 기류가 뻗었다.
꽝!
"크윽!"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의복면인은 비명을 지르며 연달아 뒤로 오
보(五步)나 후퇴했다.
"어... 엇! 저럴 수가!"
탁자에 앉아 있던 세 흑의노인은 모두 대경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무영종은 안색이 변한 채 백의복면인의 앞가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천마공에 의해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핏빛의 비늘로 된
갑의(甲衣)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호신갑을 입고 있었군!'
무영종은 내심 중얼거렸다.
'아무리 호신갑이라 해도 대단한 물건이다. 저 호신갑 만 입으면
삼류고수도 능히 절정고수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겠구나.'
무영종은 알지 못했다. 훗날 이 호신갑을 입은 괴인(怪人)들로 인
해 가공할 혈풍이 일어난다는 것을.
무영종은 예의 괴이한 신법으로 반석에서 뛰어 내렸다.
"자, 됐소?"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통과요."
무영종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관동삼괴
가 기뻐하며 그를 따랐다. 그런데 얼마쯤 봉우리를 오르자 시천지
가 한숨을 쉬었다.
"휴. 신군, 정말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영종은 기소를 흘리며 말했다.
"후후후... 본 신군을 믿지 못한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요. 단지......."
시천지가 우물쭈물 말을 못하자 무영종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
음을 멈추며 말했다.
"너희들을 만난 기념으로 본 신군이 무공을 한 수 전수해 주고 싶
은데 어떤가?"
"넷? 그, 그게 정말입니까?"
관동삼괴는 펄쩍 뛰도록 기뻐했다.
"후후... 물론이지, 자부도의 무학은 바다같이 넓고 깊으니 몇 수
만 전해 줘도 그대들에겐 큰 도움이 될 걸세."
"고, 고맙습니다. 신군!"
관동삼괴는 감지덕지했다. 무영종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
을 열었다.
"우선 한 가지 무공을 전수하겠네. 이것은 권법(拳法)과 장법(掌
法)은 물론 보법(步法)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검(劍)이나 무기
로도 사용할 수가 있네. 이 무공의 이름은 태극십팔문(太極十八
門)이라 하지."
관동삼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공의 이름치고는 괴이했
기 때문이었다.
무영종은 그들에게 구결을 들려주며 한 수 한 수 보여 주었다.
태극십팔문은 실로 익히기 쉬운 무학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정말 신기할 만큼 실전(實戰)에 적합한 것으로
써 십팔로(十八路)의 방위(方位)를 마음대로 차단시키며 공방(攻
防)의 변화가 기묘한 것이 특징이었다.
관동삼괴는 온통 정신을 빼앗긴 채 태극십팔문의 무공에 빠져들어
갔다. 약 이 각 후, 그들은 그런대로 익숙하게 태극십팔문의 무학
을 시전할 수가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영종의 적절한 전수방법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관동
삼괴의 무학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진경(進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무영종이 전수한 태극십팔문이란 바로 가장 평범하다고 알려진 소
림사(少林寺)의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에 강호의 일반적인 초식
이 혼합되어 즉석에서 창안된 무공이라는 것을.
그들은 태극십팔문을 자부도의 천고기학(天古奇學)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두 번째 관문(關門).
그곳에는 탁자 앞에 한 명의 혈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가슴에는 섬뜩한 고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음침하고 냉혹한 인상에
나이는 구순(九旬)이 넘어 보였다.
무영종은 그를 보자 흠칫 놀랐다.
'고루혈마 곡우양!'
혈의노인은 바로 수개월 전 천풍보의 회갑연에 나타났던 세 명의
수라궁 사자(使者)들 중 한 명인 고루혈마 곡우양이었다.
무영종, 그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하후성의 분신(分身)이었으므
로 대뜸 고루혈마 곡우양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곡우양의 곁에는 한 명의 청색가면을 쓴 청의인이 있었는데 그는
체격이 왜소했으나 눈빛만은 지극히 맑아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청의인의 뒤에는 또다시 아홉 명의 은의무사(銀衣武士)들이 둥글
게 포진하고 서 있었다.
그들의 앞가슴에 핏빛 글씨로 혈(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각기 왼손에는 은빛 방패를, 오른손에는 은월도(銀月刀)를
들고 있어 몹시 살벌한 광경이었다.
무영종과 관동삼괴가 다가오자 곡우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오랜만에 일 관을 통과한 자가 오는군."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들의 이름은?"
시천공이 대답했다.
"관동삼괴요."
"관동삼괴?"
곡우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수십 년 전에 강호를 떠났기 때
문에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청의면구인에게 물었다.
"서영주(徐令主), 관동삼괴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
청의면구인은 가늘고 째지는 듯한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관동지방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고 있는 자입니다."
"무공은?"
"이류에 불과합니다."
곡우양은 음소를 흘렸다.
"후후후... 관동삼괴, 이 관(二關)은 두 번째 관문이자 마지막 관
이다. 이 관을 통과하면 수라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천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자존심이 잔뜩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
었다. 그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요?"
곡우양은 아홉 명의 은의무사들을 가리켰다.
"저 무사들은 수라궁의 일급 무사들이다. 저들의 합공(合功)을 십
초(十超)만 견딘다면 통과다."
그 말에 시천공, 시천수, 시천지의 눈이 동시에 반짝 빛났다.
그들은 방금 무영종에게 배운 태극십팔문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시천공이 호쾌하게 말했다.
"좋소. 그러나 우리 삼형제는 언제나 같이 행동하오. 우리도 합공
하겠소."
"좋을 대로."
곡우양은 냉소하며 말했다.
휙! 휙! 휘익!
관동삼괴는 일제히 몸을 날려 반석 중앙에 내려섰다. 그들은 곧
서로 등을 맞댄 채 품 자(品字) 형태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들이 떨어진 순간 아홉 명의 은의무사들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공격을 가했다.
쉬쉭! 차... 창!
은광이 눈부시게 번쩍이며 열 자루의 은월도가 일제히 관동삼괴에
게 떨어졌다.
"엇!"
관동삼괴는 간담이 써늘해져 비명을 질렀다. 은의무사들의 공격이
너무도 패도적이고 악랄했으며 또한 신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수십 년 강호의 도산검림(刀山劍林)을 누벼온 능구
렁이들이었다. 그들은 곧 태극십팔문을 전개했다.
펑!
장력이 난무하자 요란한 폭음과 함께 은의무사들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금새 재차 공격했다.
관동삼괴 중 시천공이 재빨리 구두철편을 꺼내 태극십팔문을 편법
(鞭法)으로 변용해 펼쳤다.
쐐--- 액!
구두철편이 마치 수십 마리의 뱀같이 한꺼번에 사오 명의 은의무
사의 목을 휘감아갔고, 반면에 시천수는 그대로 장법으로 맞서고
있었다.
쉬쉬익! 펑--- !
시천지는 품에서 두 자 길이의 판관필(判官筆)을 꺼내 어지럽게
찍었다.
차--- 창---!
무수한 불꽃이 튕겼으나 은의무사들은 수시로 방패를 들어 막았기
때문에 관동삼괴의 절묘무비한 공격을 대부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관동삼괴의 변화무궁한 태극십팔문의 공격에 초수
가 흐를수록 기선을 뺏기고 말았다.
관동삼괴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과거같으면 이 놈들의 삼 초(三超)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에게 승산이 있구나.'
그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초수가 거듭될수록 무영종에 대한 경외
지심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한편 곡우양은 싸움 광경에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다. 관동삼괴같은 하찮은 놈들이 저런 절학을 쓰다
니.'
드디어 제한된 십 초가 지났고 시천지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제 통과해도 되겠소?"
아홉 명의 은의무사는 약속이나 한 듯 뒤로 일제히 물러섰다. 곡
우양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다!"
관동삼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듯 했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대형(大兄)!"
시천공이 무영종에게 이렇게 말하자 곡우양이 외쳤다.
"잠깐!"
그는 무영종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시천지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 분은 우리들의 대형이시오."
그러나 곡우양은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너희들에게 묻지 않았다!"
무영종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본인은 동해(東海)의 자부도(紫府島)에서 온 자부신군 무영종이
오."
"자부신군?"
곡우양은 어리둥절하여 옆의 청의면구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자 또한 의혹의 눈빛으로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영종은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후후... 나도 관문을 통과해야 되오?"
곡우양은 차갑게 말했다.
"물론이오. 규칙이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영종은 몸을 빙글 돌리더니 일 지(一
指)를 뻗었다.
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지풍은 십 장(十丈) 밖 반석 위의 한 은
의무사의 방패에 격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패에는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앗!"
곡우양과 청의면구인은 동시에 경악성을 발했다.
'저 방패는 비록 만년한철은 아니지만 두껍고 단단하다. 더구나
십 장의 거리에서 지력으로 구멍을 뚫다니,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똑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곡우양은 눈에서 혈광이
번뜩이는 한편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대도 통과요!"
무영종은 당연하다는 듯한 눈짓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자, 가세!"
그는 관동삼괴와 함께 천마봉의 점점 더 가팔라진 길을 올랐다.
그들이 사라진 후 고루혈마 곡우양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생각지도 않던 괴이한 놈이 나타났군."
그는 청의면구인에게 말했다.
"서영주, 금영주(金令主)에게 빨리 이 사실을 연락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예, 알겠어요."
뜻밖에도 이번에 청의면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청아한 소녀
의 목소리였다. 그 자는 여인(女人)이었던가?
천마봉 정상(頂上).
그곳은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지형이었다. 우선 천마봉의 정상
은 넓다란 분지(盆地)였으며 넓이가 무려 열 마장에 달했다.
아래서 보기에 뾰족한 정상이 이렇게 넓다는 것만 해도 실상 괴이
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것은 그 한가운데 넓은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호수의 면적만 해도 다섯 마장은 넘었으며 바로 그 호수
한가운데 온 천하무림(天下武林)을 경동시킨 수라궁이 있는 것이
었다.
수라궁은 실로 엄청난 규모의 건물이었다.
처처에 전각(殿閣)과 석탑(石塔)이 하늘을 찔렀으며 지붕은 모두
혈옥(血玉)으로 된 기와를 얹어 섬뜩한 살기가 허공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라궁 주위에는 높이 삼 장의 보(堡)가 축조되어 있었다. 사방에
보루(堡樓)가 있었는데 주변을 감싼 듯한 검푸른 호수는 자연적인
호보하(護堡河) 구실을 하고 있었다.
호보하에서 수라궁의 거대한 궁문(宮門)까지는 약 백 장 길이의
가교(假橋)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가교의 넓이는 불과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날 정도였다.
문득 봉우리 위에 네 줄기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무
영종과 관동삼괴 일행이었다.
"아!"
그들은 수라궁의 형세를 보고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시천
공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말 굉장한 위세로군! 수라궁이 그렇게 큰소리칠 만도 한데?"
무영종은 눈에 자광을 빛내며 수라궁을 살펴보았다. 곧 그의 안
색이 미미하게 동요됐다.
'으음. 실로 철담동장을 방불케 하는 천연의 요새구나. 게다가 무
서운 살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관동삼괴를 돌아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삼괴, 이제부터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모든 행동에 조심해야 한
다."
삼괴는 갑자기 변한 무영종의 말투에 움찔했으나 곧 공손히 고개
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군."
호보하의 가교가 놓인 곳에 두 명의 괴노인이 탁자를 놓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흰 천의 방명록과 필묵이 놓여 있었다.
한 명은 흑의(黑衣)에 검은 안색, 한 명은 백의(白衣)에 창백한
모습으로 몹시도 상반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만면에 온통 권태스런 표정을 짓
고 있었는데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시천지가 그들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저들은... 흑백쌍로(黑白雙老)!"
"흑백쌍로?"
무영종이 의아한 듯 반문하자 시천지는 음성을 낮추어 설명했다.
"저들은 근 육십 년 전에 사라진 기인(奇人)들로 무공을 추측할
수 없는 절세 고수들입니다. 또한 저들은 행동이 몹시 신비하여
출신내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정파에 가까운 인물들인데 어째서 수라궁의 문(門)을 지
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무영종은 신음을 발하며 앞장서 흑백쌍로 가까이 성큼성큼 걸어갔
다. 그러나 흑백쌍로는 귀찮다는 기색을 지으며 그들을 쳐다보지
도 않았다.
단지 마지못한 듯이 흑로(黑老)가 냉막하게 말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시오."
무영종도 굳이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히 붓을 들어 방
명록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었다.
- 자부도(紫府島) 자부신군(紫府神君) 무영종(無影宗).
관동삼괴도 차례로 자신들의 이름을 썼다.
- 관동삼괴(關東三怪).
대괴(大怪) 시천공(施天公).
이괴(二怪) 시천수(施天水).
삼괴(三怪) 시천지(施天地).
그들이 모두 명호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흑백쌍로는 쳐다보지 않
았다. 이번에는 백로가 약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네 개의 은패를
꺼냈다.
"이것을 지니고 들어가시오."
"이게 뭐요?"
시천공이 묻자 백로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곤란하니 잘 보관하시오."
무영종 일행은 각기 은패를 하나씩 받아 갈무리했다. 은패의 전면
에는 마(魔)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천천히 백 장(百丈)이나 되는 가교 위를 걸었다.
그러나 그 사이 호수 밑바닥을 보던 무영종의 안색이 대변했다.
놀랍게도 검푸른 호수 밑바닥에는 무수한 검(劍)이 거꾸로 꽂혀
있어 만일 물에 빠지면 여지없이 즉사할 것 같았다.
또한 무수한 검 사이를 누비며 괴이하게 생긴 금빛 고기들이 떼지
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저 고기는 금린식인괴어(金鱗食人怪魚)가 아닌가? 묘강(苗疆)의
열수(熱水)에서만 살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무서운 고기인데 이
곳에 있다니.......'
이 모든 것은 관동삼괴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물 속 깊은 곳
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호수의 색은 어두운 푸른색이었던
것이다.
무영종은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잠시 후 마침내 그들은 가교를 모두 통과했다. 붉은 철문으로 된
궁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궁문 안으로 들어가니 한 명의 황의유
삼을 입은 준수한 청년이 십여 명의 은의무사들을 거느린 채 서
있었다.
무영종은 또다시 흠칫했다.
'금악비(金岳飛.)'
황의청년은 바로 남창의 만경루에 나타났던 금마비(金魔匕)의 주
인공 금악비였던 것이었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금악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환영했다.
"소생은 금악비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
다."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아! 금소협이셨구료. 본인은 무영종이오."
포권을 나누던 금악비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서매(徐妹)의 전신에 의하면 이 자는 보통이 아니라던데.'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핫핫핫! 관동삼괴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세 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세 분 덕분에 수라궁이 더욱 빛나는 것 같습
니다."
그의 대소에는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이를 눈치 챈 관동삼괴는
모두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들은 억지로 화를 참았으며 금악
비는 몸을 돌렸다.
"자, 소생을 따라 오십시오. 여러분이 머물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
니다."
그는 앞장 서 걸었다. 정면에 하나의 거대한 대전을 지나자 넓은
화원(花園)이 나타났다. 일행은 화원 사이의 청석길을 걸어들어
갔다.
무영종은 직감적으로 화원의 꽃과 수목, 그리고 담장 틈새에서 무
서운 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십팔 명이나 화원에 매복해 있군.'
일행은 다시 여러 개의 담을 지나 한 채의 화려한 전각으로 안내
되었다. 역시 정교하게 꾸며진 화원 사이에 별원(別院)과 전각,
방사(房舍)가 줄지어 질서 있게 축조되어 있었다.
그들이 당도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몇 명의 무사가 나타났다. 금
악비가 뭐라 지시하자 한 무사가 관동삼괴를 안내했다.
"세 분은 소생을 따라 오십시오."
시천공, 시천수, 시천지는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전음으로 말했다.
(따라가 내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리게.)
관동삼괴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사를 따라갔다. 그들은
서쪽의 방사로 안내되고 있었다.
무영종은 여전히 금악비가 안내했으며 곧 그들은 우아하게 건립된
한 채의 전각 앞에 이르렀다.
"이곳은 매화각(梅花閣)으로 무대협께서 거처하실 곳입니다."
무영종은 매화각을 둘러보았다.
'푸대접은 아니군.'
"참, 잊은 것이 있습니다."
무영종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금악비가 웃었다.
"본궁의 사정상 개파대전이 십 일(十日) 간 연기되었습니다. 죄송
하지만 이곳에서 그때까지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십 일 연기라고?'
무영종은 뜻밖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금악비가 갑자기 손뼉을 세 번 쳤고, 그것이 신호인 듯 매화각의
문이 열리더니 한 명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녹의시비가 나왔다.
그녀는 놀랄 정도의 미녀로 몸매가 특히 섬세했다.
금악비는 그녀를 야릇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매군(梅君), 이 분은 본궁의 귀빈이시니 정성껏 잘 모셔라."
시비 매군은 허리를 사뿐히 숙였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금악비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자, 무대협. 무엇이 필요하든 간에 매군에게 분부하십시오. 소생
은 손님 대접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무영종이 담담히 말했다.
"오늘 밤 군웅전(群雄殿)에서 연회가 있으니 필히 참석하시기 바
랍니다."
"알겠소."
"그럼."
금악비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녹의시녀 매군이 무영종에게 사뿐히 허리를 숙이며 꾀꼬리 같은 음
성으로 말했다.
"나으리, 비녀를 따라 오세요."
무영종은 매군을 내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음, 이 시녀는 실로 기이하구나. 이 정도 미모라면 도저히 일개
비녀로는 어울리지 않거늘.......'
그는 매군을 따라 매화각 안으로 들어갔다.
"낭자는 이곳에 오래 있었소?"
그의 물음에 매군은 흠칫하더니 곧 교태롭게 웃었다.
"호호호호... 나으리, 이 수라궁은 건립된 지 채 오 년도 되지 않
았어요. 그리고 제가 온 것은 이 년 전이예요."
무영종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년 전이면 어린 소녀 때 왔겠군.'
매화각에 들어서자 곧 넓은 대청이 나왔다. 대청은 훌륭하게 장
식되어 있었다. 매군은 대청을 지나 한 방 앞에 섰다.
"이 방이 나으리께서 머물 곳이에요.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지
바꿀 테니 말씀해 주세요."
무영종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함에 놀라고 말았다. 마치 황궁
의 침궁처럼 온통 번쩍거리는 것이 화려의 극치를 이루었기 때문
이었다.
"됐소. 이곳은 정말 훌륭하군!"
매군은 매혹적인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
다.
"비녀는 바로 옆방에 머물고 있사오니 무엇이든지 시키세요. 언
제라도 모든 분부를 받들 테니까요."
무영종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짐짓 야릇한 눈으로
매군의 교구를 응시하며 물었다.
"어떤 일이라도 말인가?"
매군은 그의 물음에 무엇을 깨달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
를 숙였다.
"네, 무엇이든지."
"알겠다. 돌아가 있거라."
무영종은 말투를 바꾸며 말했다.
"그럼... 언제든지 비녀를 불러 주세요."
매군은 사뿐히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무
영종은 그녀가 매우 육감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동요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려한
방을 낯설게 둘러보며 방 한가운데 놓인 태사의에 가 앉았다.
'으음, 수라궁이 개파대전을 십 일씩이나 연기하다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하던 무영종의 안색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굳
어지고 말았다.
'이곳에 매군과 같은 미녀가 대체 얼마나 된단 말인가? 만약 그
숫자가 많다면.......'
무영종의 자색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
무영종은 가슴이 쿵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부르지도 않았는데 매군이 들어섰다. 그녀는 교
태롭게 말했다.
"나으리,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것 같아서 목욕물을 데워 놓
았어요. 우선 목욕을 하세요."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오랜만에 먼지를
씻을 겸 목욕 생각이 났다.
"비녀를 따라 오세요."
매군은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그를 안내했다.
대청으로 나와 한 방의 문을 여니 더운 김이 풍겨나왔다. 커다란
목통에 더운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무영종은 욕탕에 들어선 후 옷을 벗었다. 곧 그의 미끈하고 튼튼
한 골격이 드러났다. 축골환공으로 바꾼 체격이었으나 본래의 수
려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영종은 천천히 목통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다시 열
리더니 욕탕 안으로 한 명의 전라미녀(全裸美女)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매군이었다.
"아니!"
무영종은 대경하여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매군의 나신이 적나
라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흡사 천도인 양 돌출된 팽팽하고 육감적인 젖가슴, 매끄럽게 흘러
내린 아랫배의 선(線), 그리고 은어같은 두 다리.
게다가 아랫배 밑의 은밀한 방초(芳草)가 우거진 여인의 비역까지
여지없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영종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자신 또한 아무 것도 걸치
지 않은 알몸이니 어쩌겠는가.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무영종은 아연실색하며 급히 목통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나으리의 몸을 닦아 드리려고요."
무영종은 더욱 당황하여 말했다.
"필요 없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매군은 나신을 흔들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나으리께선 보기 보단 무척 부끄러움이 많군요. 나
이에 어울리지 않게요."
무영종은 움찔했으나 곧 엄숙하게 꾸짖었다.
"나가라, 나 혼자 씻겠다!"
매군은 흠칫하더니 할 수 없다는 듯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소비는 물러가겠나이다. 옷은 이곳에 두겠어요."
그녀는 한 벌의 깨끗한 백의를 한 쪽에 두고 몸을 돌렸다.
잘룩한 허리와 풍만한 둔부를 기묘하게 흔들며 그녀는 밖으로 사
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무영종의 안색은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확실하다. 수라혈신은 십 일 동안 미인계로 군웅들의 마음을 흩
어놓을 목적이다.'
무영종은 내심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그
는 새 옷을 걸치고 흰 띠로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머리를 묶는
것은 이제 습관이 되고 있었다.
잠시 후 욕실 밖으로 나가자 바로 앞에 매군이 서 있다가 그를 보
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발했다.
"아! 나으리께서 이토록 멋진 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마 세
상의 여인들이 제대로 사람 볼 줄을 안다면 모두 나으리께 다투어
몸을 바치려 할 거예요."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너는 농담도 잘 하는구나."
매군은 교태롭게 웃으며 물었다.
"나으리께서 소비에게 시키실 일은 없나요?"
"없다. 더 이상 수고할 것 없으니 가서 쉬어라."
매군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소비는 나으리를 모시는 몸이에요. 언제나 곁에 있도록 되어 있으
니 서슴지 말고 어떤 분부든지 내려 주세요."
무영종은 흠칫했다.
'이 비녀는 의외로 당돌하구나. 아마도 윗사람에게 단단히 명령을
받은 모양이로군.'
무영종은 진지하게 물었다.
"너는 도저히 비녀같지 않은데... 원래는 고귀한 출신이 아니었느
냐?"
매군은 생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그렇다면 차후 영주님께 한 마
디만 해주세요."
"영주?"
"아까 금영주님에게요."
"음, 무엇을 말이냐?"
"저... 제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요."
무영종은 눈썹을 움직였다.
"음, 쉬운 일이군. 그렇다면 그것이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렇게 되면 영주께서는 소비를 나으리에게 주실 거예요."
무영종은 멈칫하며 헛기침을 발했다.
"흠, 좀 우습군."
"네?"
"너는 나를 오늘 처음 봤는데도 자신을 나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
이냐?"
매군은 갑자기 만면에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비록 천한 일개 비녀이지만... 아직... 처녀의 몸이예
요."
그녀는 왼팔의 소매를 걷더니 하얀 팔뚝을 보여 주었다. 그 곳에
는 순결성을 상징하는 수궁사(守宮砂)가 찍혀 있었다.
"저는 그 동안...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어요."
무영종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매군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너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
매군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급히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무영종은 볼 수 있었다.
'음, 만약 이 소녀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실로 무서운 심계
(心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방법을 쓴다면 십중 팔구는 넘어갈
것이다.'
매군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소비가 잠시 주제 넘는 말을 한 듯 하옵니다. 나으리께 용서를 비
옵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영종은 담담히 고개를 저으며 말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쉬고 싶으니 너도 잠시 물러가 있거라."
"네, 나으리."
매군은 몸을 돌려 사라졌다.
무영종은 자신의 거실로 돌아가 태사의에 깊숙히 몸을 묻은 뒤 깊
은 명상에 잠겼다.
저녁 무렵이었다.
무영종의 거실 문 앞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대협, 안에 계십니까? 소생 금악비입니다."
무영종은 태사의에서 일어섰다.
"아!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금악비가 들어오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군웅전에서 연회 준비가 끝났습니다. 개파대전을 연기하게 된 데
대한 사과의 의미에서 성대하게 연회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무대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음, 그렇소?"
무영종은 곧 그를 따랐다. 그들이 매화각을 나오자 관동삼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형(大兄)!"
시천공이 반색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 금악비의 안내로 그들은
화원 사이를 지나갔다.
그 사이 무영종은 사방을 예리하게 살핀 결과 화원과 전각 건물
등의 은밀한 곳마다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펼쳐져 있음을 발견하
고 침중해졌다.
'으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으나 속으로는 무
서운 살기를 내포하는 지세다. 곳곳에 고수들의 눈길이 감시하고
있구나.'
얼마 후 그들은 한 커다란 대전에 당도하게 되었다.
첫댓글 항상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