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이십이 년의 절규(絶叫)
고월의 기풍(碁風)은 실리(實利)를 위주로 하는 바둑이었다.
반면, 백무영의 바둑은 대세(大勢)를 중시하는 바둑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고 흰 돌과 검은 돌만 반상에 늘어놓는다. 하지만 두 사람
은 실로 많은 말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자다.'
백무영은 고월이 모든 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집이 세군!'
고월은 백무영의 끈끈하고 집요한 성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바둑이
후반으로 치달아가자, 일 수(一手) 일 수가 모두 사활(死活)의 급소로 화
했다.
이제 바둑은 수의 싸움이 아니라, 정신의 싸움이 되었다. 누구의 정신력
이 더욱 강하느냐가 승패를 구분짓게 되는 것이다. 바둑 한 판을 이긴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으되,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승부야말로 두 사람의 기나긴 승부 가운데 첫번째 승부일
지도…….
고월의 마(馬)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으며, 백무영의 대마 또한 완전히 살
았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긴장감이 팽팽히 일어나고 있는 국면, 갑자기 고월의 호흡이 급박해졌다.
그의 눈빛은 암울히 침잠되어 있다가 기이한 광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두어서는 아니 되는 자리에 일 수를 올려놓았다.
'패착을 두는군!'
백무영은 쾌재를 불렀다.
끈질기게도 버티어 왔던 고월이 뜻밖의 악수(惡手)로 허물어지는 것이다.
백무영은 묘수가 되는 지점에 돌을 올려놓으며 고월을 올려다봤다.
고월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이 이긴 이유가 다른 데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월의 시선은 반상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는 다른 곳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래, 암갈색 인영(人影)이 머물러 있었다.
엽편을 말아 쥐고 있는 늘씬한 여인.
그녀는 독살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이 머물러 있는 죽옥을 보고 있었다.
백무영은 고월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월방!'
나무 아래 서 있는 여인은 음월방이었다.
그녀는 고월과 백무영에게 노골적인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후계자 승계를 방해하는 경쟁자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입교하고 나서 음월방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격하되었다.
음월방은 고월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목덜미에 송충이가 떨어져 내려 피부 위를 슬금슬금 기어다닐 때의 표정
이 이러할까?
"천박스러운 자!"
음월방은 싸늘히 말한 다음에 신형을 돌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고월의 입술 사이에서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번뇌에 휘어 감기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문득 고월이 이 곳을 떠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를 알 수 있
었다.
'그렇군. 고월은 음월방을 사랑하는군!'
강호의 이단자 고월은 음월방을 처음 보는 순간, 연정(戀情)에 사로잡힌
것이다.
음월방은 여장부(女丈夫)로, 여성스러운 데가 전혀 없다.
그녀는 모질고 사나운 성격이다.
바로 그 점이 고월에게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것이다.
고월은 바둑에서 패배했다. 그는 부수수한 봉두난발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백무영을 바라봤다.
"여기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훗훗… 충고, 고맙게 새겨듣겠소."
"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피
해 쫓겨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냉혹해졌지. 그러나 내 말은 진심에서
하는 말이다. 이 곳은 위험한 곳이다. 널 죽이려 하는 자가 너무 많다."
고월은 다시 술병을 들었다.
그는 큰 술병 하나 가득한 술을 단 한 모금에 마셔 버렸다.
그의 번뇌가 무엇이기에, 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
그는 술병을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난세무림(亂世武林)이 된다. 오랫동안 힘을 길렀던 무림세력이
격돌하기 시작한다. 무수한 사람이 쓰러질 것이며 장강(長江), 황하(黃河),
멀리는 대사막(大沙漠), 초원(草原)까지 혈풍이 불어닥친다. 한 사람의 힘
으로는 막지 못할 대참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가운데 끼여
들 것이다. 난… 살육(殺戮)을 즐기니까!"
그의 회색 눈에서 독기가 흘러 나왔다.
피 내음을 맡은 맹수의 눈빛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피와 주검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게 된다. 녠녠, 그리고 위선자들은 모조리 척살
된다. 어쩌면 고금무림사 최초로 무림일통(武林一統)이 단행될지도……."
고월은 다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깡마른 얼굴 가득 상처가 그득하다.
그는 쫓겨다니는 가운데 들개 떼에게 포위되어 물어뜯긴 바 있다.
얼굴의 상처는 그 때 생긴 것이었다.
얼굴 윤곽만 살펴본다면 꽤나 준미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으되, 상처가
많고 강시처럼 깡마른지라 타인에게 정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얼굴의 상처를 매만졌다.
"들개 떼에 포위되어 본 적이 있느냐?"
"없소."
"녠녠… 들개 떼는 피와 고기 내음에 굶주려 있다. 낮에는 숨어 있지만,
밤이 되면 떼를 지어 황야를 헤맨다. 나는 허약한 소년 시절, 들개 떼에
게 포위된 바 있다. 난 얼굴이며 가슴을 마구 물렸지. 난 피투성이가 된
채 쫓기고 쫓겼다. 피가 철철 흐르고 살가죽이 찢어진 채. 녠녠, 난 그 때
맹세한 바 있다. 언제고 절세고수가 된다면, 이 세상의 들개들을 모조리
내 손으로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고월은 다시 술병을 찾았다.
그가 찾아 낸 것은 텅 빈 술병에 불과했다. 술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고월
의 손길이 수전증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손이 떨리는 걸 자제할 수 없다는 게 괴로운 듯, 인상을 일그러뜨렸
다.
"치욕스러운 일이야. 나의 강골(剛骨)이 나약한 삶에 젖어 이 따위로 부
패해 버리다니."
"……."
"녠녠… 나를 이 곳에 붙잡아 두고 있는 건 약간의 미련 때문이지. 그 미
련은 곧 사라지겠지. 난 언제나 그랬지. 위기 때마다 극복하곤 했었지."
고월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백무영을 바라봤다.
백무영의 시선과 고월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두 사람 모두 메마른 눈빛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풍운천하가 만들어 낸 기형아(畸形兒)들이라 할 수 있었다.
빛깔로 따지자면 백무영은 무색 투명하고 차가운 빛을 흘린다고 할 수
있으며, 고월의 빛은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썩은 회색으로 찌들었다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군. 네녀석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무엇인가가 있어."
"듣기 좋은 칭찬이오."
"훗훗… 마지막으로 네게 충고를 해 주겠다. 한시빨리 강호에서 은거해
라."
"은거?"
"넌 고집이 너무 세. 타협을 하기에는 주관이 강하지. 그런 성격으로는
난세를 살아나가기 힘들지."
고월은 처음으로 따사로운 눈빛을 흘렸다.
그의 일생을 통해 남에게 다정한 눈빛을 던져 보기는 처음일 것이다.
백무영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흘렸다.
고월은 언제부터인가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어깨 위, 동천(冬天)은 더욱더 검게 찌들어져 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눈이 내릴 것이다. 눈이 내리면서 겨울은 그 빛을 더하게 되리
라.
백무영은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슬쩍슬쩍 시선을 피했
으며, 어쩌다가 시선이 마주치는 자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백무
영은 이미 연환마교 안에서 상당히 지위를 굳힌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인사를 할 때마다 여섯 명의 사부를 기억했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반역했다 여길지 모른다!'
최근 백무영은 그들의 지시 통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혈의육존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데 회의를 느끼고, 나름대로 독자
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위선자들일까? 후후, 그들은 명분을 정확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들은 겉으로 정인군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원
래는 철저한 위선자들일지도……!'
겨울 바람이 옷자락 속으로 저미어 든다.
백무영은 오전 내내 군사부(軍師府)에 가서 집법당주(執法堂主)에게 이러
저러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사급제자이기에, 사급제자가 알고 있어야 할 마교의 율법에 대해 들
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백무영이 직위를 바란다면, 향주(香主)급 정도의 지위에 오를 수 있
다.
그리고 신분의 상승을 바란다면, 마교연무관(魔敎鍊武關)에 들어가서 또
다시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마교연무관에는 백도의 무공을 격파하는 제반 파해마공(破解魔功)이 있
다지. 연환마교의 세력이 팽창하는 이유는, 마교연무관이 무한한 신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백무영은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는 며칠 사이 함백을 재암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불행히도 모든 방법은 불가능했다.
함백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엄청난 호위벽을 펼치고 있었다.
'함백을 암산(暗散)한다는 계획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는 암살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를 꺾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백무영은 나름대로 한 가지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정면도전하여 꺾는 방법이 그것이다!'
백무영은 함백을 꺾겠다는 야망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함백은 도전을 겁내지 않는 자. 그러하기에,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마저
마교제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쓰러지지 않는 한, 백도는 마도를 꺾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함백이 해외세력에 의해 제거되어서도 아니 된다.
그러할 경우, 중원무림은 해외세력에 의해 막후 조종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걷다가 짙은 안개에 쌓인 숲에 이르렀다.
다른 곳에 비할 수 없이 유현(幽玄)한 정취이다.
안개가 자욱이 깔리어 있는 가운데 회양목(淮楊木)이 무수히 서 있고, 흰
바위가 인공의 가미 없이 자연스럽게 서 있는 정경이 고아한 품격을 느
끼게 했다.
회양목이 어찌나 큰지 쳐다보노라면 등목이 뻐근해질 지경이다.
하늘빛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푸른빛이었더라면 경치가 대단했을 것이
다.
신묘한 것은, 근처의 모든 게 정지되어 있는 듯 느끼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이며 공간마저 정지되어 버린 듯하다.
'진세이다. 기문둔갑(奇門遁甲)에 따라 자라고 있는 수목에 의해, 주위환
경이 기이하게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내 눈에 보이는 건 환상
에 불과할지도…….'
백무영은 진학에 대해 배운 바가 많다.
진을 설치하는 법, 파진하는 법, 그리고 진세를 감별하는 법까지.
백무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
딛었다.
'초상비(草上飛)!'
그는 메마른 풀잎을 밟고 나아갔다.
신기하게도 풀잎에 그의 체중이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풀잎이 눕혀지지
않는다.
그는 팔괘지문(八卦之門) 가운데 건(乾)의 방위에 있는 문을 찾아 접어들
었다.
'미리환상진(迷離幻像陣)… 후후, 진세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곤
(坤)의 방위에 있는 문이 생문(生門)이라 여기고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곤의 방위에 있는 문은 사문(死門)이다!'
그는 연기처럼 빠르게 숲을 스쳐 지나갔다.
장춘(長春)의 뜰이랄까?
다른 곳은 다 겨울이거늘, 숲 속에 위치한 장원 앞의 뜨락은 완연한 봄이
었다.
뜨락 가에 많은 소녀들이 오락가락거리고 있다.
대바구니를 겨드랑이 사이에 낀 소녀들이 밭이랑 가에서 냉이며 쑥 같은
봄나물을 뜯고 있었다.
소녀들은 대부분 노오란 빛깔이나 분홍색 빛깔의 나삼을 걸치고 있어, 더
할 나위 없이 환해 보였다.
신기하게도 모든 소녀소년들은 꽃잎을 밟고 훌훌 날아오르는 정도의 무
공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세외선경(世外仙境)이 있다니?'
백무영은 큰 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꽃밭을 바라봤다.
연환마교 안은 어디를 가든 살풍경이다.
권모술수를 머릿속에 가득 담고 있는 마도효웅(魔道梟雄)들이 살기를 흘
리고 있는 곳이 연환마교이다.
한데, 이 곳은 탈속(脫俗)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었다.
공기가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는, 꽃밭 가운데에서 온천이 뿜어져
오르기 때문이었다.
'마교 한가운데 이런 지역이 있다니?'
백무영은 음지를 따라 몸을 이동시켰다.
그는 동영환술(東瀛幻術)에서 유래된 은밀잠형술(隱密潛形術)을 시전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그의 무공은 급신장되고 있었다.
함백에게 어처구니없이 당했다고는 하되, 그의 무공은 일취월장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은밀십구편을 비롯한 사도마경(邪道魔經)의 마공, 사공을 거리낌없
이 터득하기 시작하였는 바, 무공이 갈수록 신비로워지는 것이다.
그는 한 줄기 검은 연기가 흐르듯 장원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비취빛의 다락 아래 이르게 되었다.
다락방에는 월동창(月洞窓)이 만들어져 있는데, 창문이 빠끔히 열렸다.
백무영이 다락 아래 이르렀을 때, 창문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용감한 청년이군요. 이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태상교주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는데, 과감히 들어오다니?"
창문을 열고 아래쪽을 보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모습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백무영이 본 것은 창틀에 올려진 하얗고 갸름한 섬섬옥수(纖纖玉手)에 불
과했다.
여인은 백무영이 숲에서부터 장원까지 치달아오는 걸 다 보고 있었던 것
이다.
"이십팔숙(二十八宿)이 보게 되면 찢겨져 죽어요. 어서 피해요."
"이십팔숙?"
"태상교주가 친히 기른 인간 야수(野獸)들이지요. 천마팔영(天魔八影)과
더불어 태상교주가 믿는 애제자들이에요."
"천마팔영을 아십니까?"
"태상교주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지요."
나이 든 음성이다. 그리고 감미롭고도 상냥한 목소리인 바, 대단한 기품
을 지니고 있었다.
백무영이 창문 쪽을 보고 있을 때.
삐이이익-!
갑자기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일어났고, 포효(咆哮) 비슷한 소리가 도처
에서 시작되었다.
"이십팔숙이 기문진이 파괴된 걸 발견했나 보군요."
"으음……."
"어서 이 곳으로 올라와요. 잠시 몸을 피신해야 합니다."
"그 곳으로?"
"어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찰나, 백무영은 먼 곳에서 누런 그림자가 충천
(沖天)해 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스물여덟 명의 거한(巨漢)이 장창(長槍)을 쳐든 채 장원 근처를 뒤지고
다니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거구이며, 팔이 유난히 길다.
마치 스물여덟 마리의 금모성성(金毛猩猩)이 치달리고 있는 듯하다.
'자칫하다간 발각된다!'
백무영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훌쩍 떠올랐다.
그는 빠끔히 열린 창을 통해 내실로 접어들었다.
"이 곳은 안전해요. 한 시진 정도 숨어 있다가 떠나가요."
여인은 연한 빛깔의 나삼을 걸치고 있었다. 화려하다기보다 소박한 차림
이다.
이제 나이 사십대 초입, 여인은 자수(刺繡)를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금비이십팔숙(金臂二十八宿)은 숭산(崇山) 소림사를 통째로 파괴할 정도
로 무서운 무사들이에요. 그러나 감히 이 방 안에는 들어서지 못할 테니,
걱정 말아요. 그들은 날 무서워하고 있답니다."
"……!"
백무영은 뻣뻣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일생을 통해 이 순간처럼 경악해 보기도 처음일 것이다.
그는 석상이 된 양, 나무가 되어 땅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양, 신체를
경직시켰다.
자애스러운 인상의 여인은 자수를 놓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다.
"내가 무섭나요?"
"아, 아닙니다."
"호호… 그럼 왜 그리 땀을 흘리나요?"
중년여인은 맑은 눈빛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다가, 백무영이 쩔
쩔매는 모습이 우스운 듯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럴 수가……?'
백무영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앞에는 여신(女神)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
냉약빙이든, 산호부인이든, 음월방이든, 어떤 여인도 감히 그녀와 미를 겨
룰 수가 없다.
백무영이 놀라는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백무영과 초면(初面)이되, 백무영은 그녀를 여러 번째 보는 것이
다.
만박이 그리던 그림에서, 함백이 깎던 조각에서…….
그렇다. 이제까지 백무영에게 엄청난 신비를 안기어 주었던 여인이 바로
그의 앞에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군!'
백무영은 심호흡을 여러 번 거듭한 후에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중년여인은 그 때까지 백무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갑자기 미간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공자의 모습은 내가 전에 섬기던 한 분 대협(大俠)과 너무나도 흡사하군
요. 눈썹이 희지 않고 검고, 입매가 일그러지지 않았다면… 난 그분이 바
로 내 앞에 서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잘 알던 분이라니요?"
"바로 저분……!"
중년여인은 손가락으로 방벽 가운데를 가리켰다. 거기 초상화 한 폭이 걸
리어 있었다. 단아한 인상의 청년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다. 그의 품에
는 귀엽게 생긴 갓난아이가 안겨져 있었다.
'저, 저럴 수가……?'
백무영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그는 번개에 맞아 몸이 쪼개어지는 듯한
전율감에 사로잡혔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늘 그가 보는 사람이었다. 그
는 바로 백무영 자신이었다.
멍한 충격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중년여인은 백무영이 공포에 질려 혼미
해졌다고 여기고, 약수 한 그릇을 흰 도자기잔에 따라 내밀었다.
"마셔요. 정신이 맑아질 테니까."
"아……!"
백무영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초상화의 얼굴은 그 자신의 얼굴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
면 다른 데가 약간 있었다. 또한 초상화의 얼굴은 이전에 한 번 본 얼굴
이었다.
백무영은 초상화가 걸리어 있던 장소를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관산검맹에 걸리어 있던 초상화다. 바로… 무적대협(無敵大俠)의 초상화
다!'
무적대협!
그는 함백에게 꺾여진 백도의 대영웅이다. 그리고 당금강호에는 그를 추
모하는 무사들이 무수하다.
관산검맹에 걸리어 있는 초상화는, 여인의 방에 초상화와 약간 달랐다.
보다 정교한 초상화는 관산검맹의 초상화이되, 품격은 지금 보고 있는 초
상화가 더했다.
"저 그림은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백무영은 약수 한 사발을 마신 다음에 지나기는 말처럼 물었다.
"얻은 게 아니예요. 제가 그린 겁니다. 여러 장을 그렸는데, 저게 제일 나
은 것 같아 걸어 두고 있지요. 태상교주는 제가 그림을 걸어 두는 걸 싫
어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분이 어떤 분이지요?"
"백비룡!"
백무영은 처음으로 무적대협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외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아도, 그의 본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
의 없다.
'나와 종씨(宗氏)라니……?'
백무영은 혀끝이 바짝 탐을 느꼈다.
미부인은 하이얀 손으로 자수를 뜨며 말을 이었다.
"저분은 곤륜파(崑崙派)의 제자. 세상이 마에 뒤덮임을 고뇌하시던 분이
셨지요. 저분은 우연히 상고시대의 절대검보(絶代劍譜)를 얻어 절세고수
가 되셨지요."
"으음……."
"호호… 저분에 대한 건, 자세히 알지 않는 게 좋아요."
"왜요?"
"이 세상을 너무나도 추악하다 여길 테니까."
온화하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에 습기가 머금어졌다.
'무적대협 백비룡과 어떤 사이일까? 그리고 함백과는……?'
백무영은 문득 자신을 밝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이 여인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을지도…….
그러나 차마 그는 역용을 풀고 자신이 누구라는 걸 밝힐 수 없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혹, 잠풍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잠풍… 그의 이름이 나오는 찰나, 여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가증스러운 자! 그는 처단되어야 할 악마예요. 그는 저분을 망친 장본인
이에요. 그는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저분을 해친 위선자예요!"
여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잠풍에 대해 처절한 복수심을 품고 있
음에 틀림이 없었다.
백무영은 혀가 바짝바짝 마름을 느끼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만박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만박……?"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 하는 탄성을 발했다.
"천금신수(千金神手) 음천걸(陰天傑)… 그분이 가끔 자신을 만박이라 청
했지요."
"천금신수!"
"그분은… 좋은 분이에요. 성격이 삐뚤어지기는 했지만, 의로운 분이지요.
솔직히 난 그분에게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지요. 난 그분의 정혼녀(定婚
女)였는데, 그분과 일생을 같이 살 용기가 없어 파혼(破婚)을 했으니까!
그분은 그 후 상심하여, 독주(毒酒)를 퍼마시다가 독기가 다리로 뻗치어
스스로 두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나 때문에 벌어진 참극
이었지요."
여인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 나왔다.
백무영은 잘 알지 못하나, 여인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노도처럼 치밀어오르는 광기(狂氣)를 억제하지 못할 때가 많고,
가끔씩 제정신을 차린다.
지금은 여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인은 점점 더 구슬픈 흐느낌 소리를 냈다.
백무영이 얼굴을 상기한 채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데, 갑자기 방 밖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낯익은 음성이다. 바로 마검대교두(魔劍大敎頭) 관욱량(關旭亮)이었다.
"괜찮아요!"
여인은 얼른 눈물을 닦아 냈다.
"제가 들어갈까요? 아니면 시녀를 보내 드릴까요?"
"필요 없어요. 어서 물러가요."
"예, 명대로 하겠습니다."
호랑이 같은 마검대교두가 여인의 일갈 앞에서 꼼짝없이 물러나고 있었
다.
'부인? 설마……?'
백무영은 그제야 이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산호부인은 마교의 제이부인이다.
제일부인은 다른 여인이다.
그녀는 백치부인(白痴夫人)으로 불리며, 외부와 단절된 곳에서 살고 있다.
'이 여인이 바로 백치부인이다!'
중년여인은 묘한 백치미를 갖고 있었다.
심기가 흐트러질 때에는 특히 백치미가 두드러진다.
마검대교두가 멀리 물러난 후, 백치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백
무영을 바라봤다.
"청년은 누굽니까?"
"전… 낭객(浪客)입니다."
백무영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백치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무한한 정이 담기어 있는 눈빛이다.
'닮아도 많이 닮았다!'
백치부인은 멍한 눈빛을 흘렸다. 문득 그녀가 말했다.
"올해가 무슨 해지요?"
"정묘년(丁卯年)입니다."
"정묘년… 그럼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올해로 스물두 살이 되겠
군."
아주 나직한 목소리다.
백치부인의 눈에 다시 습막이 담겼다.
그녀는 스무 해 넘게 늘 이렇게 울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이십 년을 고독하게 살아온 여인인 것이다.
백치부인은 네모난 비단에 자수를 놓고 있는 바, 그것은 옷에 장식하기
위해 짜고 있는 자수였다.
그녀는 자수를 놓고 있을 뿐 아니라, 청색 유삼(儒衫) 한 벌을 만들고 있
었다.
옷을 만들고, 자수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게 그녀의 하루 일과였다.
"그, 그 아이라니요?"
백무영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백치부인은 다시 초상화를 가리켰다.
무적대협 백비룡의 가슴에는 아이가 안기어져 있다.
이제 나이 한 살이나 되었을까?
아이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천진스러운 모습이 눈을 시큰하
게 할 정도였다.
무적대협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솔직히 그는 사생활이 폭로되지 않은 은자풍(隱者風)의 대협객이었던 것
이다.
그는 강호 출도를 하지 않을 때에는 한촌(閑村)에 칩거해 농사(農事)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농사를 짓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일 년에 네 차례씩 강
호에 출도하여 거마들을 응징했던 것이다.
"귀여운 아이군요."
백무영은 호흡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수련이 혹독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정신은 이미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
이다.
"살아 있다면, 스물두 살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살아 있을 수는 없을 거
예요."
"왜요?"
"그 자들이 죽였을 테니까."
"그 자들이라면……?"
"여섯 명의 악마들! 빠드득! 그들은 정랑(情郞)을 유인한 다음, 곤륜산의
농원을 덮쳤습니다. 난… 저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가 납치되었습니다. 그
자들은 아이를 빼앗아 갔어요. 아이를 인질로 삼아 그분을 죽이기 위해!
호호호! 태상교주와 비무를 코앞에 둔 그분을 암살하고자… 호호! 그들은
비겁하게도……!"
백치부인은 발작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백무영은 찰나적으로 창을 통해 몸을 날렸으며, 다락방의 월동창 아래 벽
에 벽호공(壁虎功)을 써서 매달렸다.
간발의 차이로 그는 발각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백치부인이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흐느끼는 통에, 무사들이 기겁해 방 안
으로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
흐느끼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 자들이 내 아이를 죽였어요. 흐흑… 난 무림을 증오합니다. 검을 갖
고 다니는 잔, 모두 죽어야 해요!"
백치부인은 실신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는 과거 무적대협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가 정랑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바로 무적대협 백비룡이었다.
두 사람은 맺어지지 못할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어졌다.
백치부인은 거상(巨商)의 딸이며, 그녀의 가문은 사마외도(邪魔外道)와 깊
숙이 결탁하고 있었다.
무적대협은 고검독보강호(孤劍獨步江湖)할 때, 그녀의 아버지를 방문하여
그의 팔을 잘라 버렸다.
그러다가 함정에 떨어지게 되었는 바, 백치부인은 그에게 연정을 품고 그
를 구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듯 기구하게 맺어졌던 것이다.
웃고 있는 아이, 장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적대협 백비룡, 그리고 조각
과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백치부인.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것은 백무영이 십 수 년 간 알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백무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던 백무영이었지만, 이 순간
만은 혈루(血淚)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생각한 게 진실이라면, 그 자들은 모두 제 손에 죽을 겁니다!'
그는 육지비행공(陸地飛行功)을 시전해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회양목 숲으로 잠기어질 때, 누군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금빛 장포를 걸친 자, 그는 적족(赤足)이었으며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
다.
그의 등 뒤에는 스물여덟 명의 금비위객(金臂衛客)들이 버티어 서 있었
다.
"쫓을까요, 지존(至尊)?"
무사들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쫓지 마라. 그리고… 오늘 벌어진 일은 없었던 일로 하라."
그는 함백이었다.
함백은 백무영이 사라진 곳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의 발 아래에는 지옥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함백은 실로 오랫동안 정성들여 깎은 조각상을 백치부인에게 전하기 위
해 오다가, 백무영이 사라져 가는 걸 보게 된 것이다.
"오늘은 이걸 전할 때가 아닌 듯하군. 후에 소수미랑(素手媚娘)의 심기가
안정되었을 때, 전하리라."
함백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산악이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였다.
"곧 눈이 올지 모르겠군."
함백은 중얼거리며 눈길을 스르르 내렸다.
'곧 바로 실행해야겠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굳혔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추측하지 못한다.
중요한 건, 그는 수십 년 간 맹세한 모든 걸 지켜 왔다는 것이다.
지금 그가 한 결심도 곧 실행되리라.
눈(雪)이다. 온통 흰 눈이다.
옥천산의 능선 위로 거위털 같은 회색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천지사
방이 백색의 꽃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람을 따라 하늘가를 빙빙 춤추고 떠도는 눈송이의 빛깔은 회색이되, 가
지 위나 바위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의 빛깔은 태초의 빛처럼 희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눈이 더러운 풍경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먼 산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희고 순백한데, 시정(市井)의 눈은 신발에
밟히고 마차 바퀴에 깔리어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
지금 연환마교에서 가장 분주한 곳은 오미팔진각(五味八珍閣)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장명(長命)하고, 술에 취하면 선인(仙人)이 된
다.>
붉은 깃발에는 그러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오미팔진각주는 마교의 무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판 지 이십 년째였다.
그는 천하에서 알아주는 요리사로서, 그의 가문은 칠대(七代)째 요리만
해 오고 있었다.
대저 요리라는 것은, 오대 정도 계승되어야 제 맛이 난다.
의복을 짓는 비결은 삼대(三代) 정도만 대물림을 하더라도 거의 완전해지
되, 요리는 오대 정도는 대물림을 해야만 완벽해지는 것이다.
중국요리는 대부분이 뜨거운 요리이다. 차가운 음식은 몸을 상하게 하기
쉽기에, 거의 모든 요리는 뜨겁기 마련이다.
중국요리를 즐기는 데에는 꽤 여러 시간이 소요된다.
요리란 음식과 달리, 그 맛을 즐기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청두하인(靑荳蝦仁), 홍소포어(紅燒鮑魚), 유계정(溜鷄丁), 초육편(炒肉片)
의 채단(采單)으로부터 시작되고 연와압인단(燕窩鴨仁蛋), 홍소기어시(紅
燒氣魚翅), 삼사하병(三絲蝦餠), 권동계, 유유동과(劉油冬瓜), 괘로소압(掛
爐燒鴨), 작류이어(酌溜鯉魚)가 뒤를 잇는다.
연와(燕窩 : 제비집) 중에서 최고로 치는 용수연와(龍鬚燕窩)가 요리되어
나온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며, 입 안 가득 군침이
담기리라.
오미팔진각의 으뜸은 뭐니뭐니하더라도 어시(魚翅).
다름 아닌 상어 지느러미 요리이다.
그 다음이라면, 구운 오리구이랄까?
그는 고압자를 먹고 있었다.
고압자란 구운 오리구이이다.
청총(靑蔥 : 파란 파)을 된장에 발라서 일 촌(一寸) 크기로 썰은 고압자
의 맛있는 부분을 한 조각 넣고 평평한 만두피 같은 것으로 싸서 먹는다
는 건, 중국인에게 있어 예술이나 마찬가지이다.
집오리(家鴨)의 가죽을 구어서 여우 가죽 빛깔이 되도록 잘 구운 것을 괘
로소압(掛爐燒鴨)이라 하는 바, 그것은 상급요리에 속하고 있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사람이 많이 머무는 곳에서 팔진미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건 금기였다. 그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다.
소년 시절, 여섯 사부는 염라대왕보다도 혹독하게 그를 다스려 왔다.
평범한 출신의 소년이라면, 하루도 견디지 못할 지옥의 생활을 그는 십수
년 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솔직히 그의 무공은 그러한 연마의 과정 가운데 완숙해지지 않았던가?
고압자 요리가 문득 비위를 거슬리게 한다.
'고압자 요리에 쓰이는 오리는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한다. 걸어 다니면 살
이 단단해지기에, 좁은 상자에 가둬 기르는 것이다. 잘 먹고 뒹굴리면 고
기 맛이 좋아지는 것이며, 결국 어느 날 껍질이 벗어지고 구워지고 만
다!'
구운 오리고기가 문득 그의 운명을 생각하게 한다.
창 밖은 눈발에 쓸리고 있다. 그리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청석로를 뛰어다
니며 환호를 하고 있다.
'백치부인은… 나의 누구인가?'
번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백건주(白乾酒 : 빼갈)를 쉬지 않고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는……?'
고압자 요리를 시켜 놓기는 하였으나, 거의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아무리 냉정한 성격이라 하더라도, 이 순간만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음월방이 따라 붙인 고용영이라는 자는 달콤한 여아홍을 홀짝홀짝 들이
마시며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백무영은 얼굴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취했다.
벌써 여러 병의 백건주를 쉬지 않고 들이마셨으니, 취하지 않고 배겨 낼
도리가 있겠는가?
고용영은 그를 지극히 천박한 하류계급 출신이라 여기며 비웃는 시선을
던졌다.
'일단 산호루(珊瑚樓)에 가자. 그녀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내가 알고자
하는 비밀을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백무영은 갑자기 욕설을 토해 냈다.
"제길헐! 여긴 몸 파는 계집 하나 없단 말이야? 이렇게 좋은 밤, 계집 하
나 없이 혼자 자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욕설을 해 대며 술상을 뒤엎었다.
와지끈- 쾅-!
상이 박살나며 요리 접시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사람들은 그가 흉폭한 대살성 냉혈살흔이라는 걸 알기에, 감히 다가서려
하지도 못했다.
그는 다섯 개의 식탁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 다음, 광소를 터뜨리며 밖으
로 나갔다.
"젠장, 너무 마셨어. 속이 역겨워질 정도로 마시긴 오랜만이야."
그는 휘청거리며 측간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뜨락 가득 눈이 한 치 넘게 쌓여 있었다.
그는 비틀비틀거리면서 걸어가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퉁겼다.
미세한 파공음이 들린 직후, 오 장 뒤쪽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나뒹굴었
다.
그를 추적하던 고용영이 탄지신통(彈指神通)에 격타당해 의식을 잃고 널
브러지는 것이다.
"꼬리를 떼어 버렸으니, 자유롭게 행동해도 된다. 일단, 산호부인을 찾아
가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 속으로 접어들었다. 눈이 폭설인지라 신형을 감
추며 이동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