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二章 揮劒到死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 년 전.
당문(唐門) 역사상 초유의 기재 한 명이 탄생했다.
그는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이미 당문 오대암기의 사용법을 완벽하게 터득하였고, 우연히 한 고동(古洞)에서 절세의 무공기서(武功奇書)를 얻은 후 그것을 오대암기와 적절히 혼합해 천수암권(千手暗拳)이란 독특한 무공을 개발한 뒤로는 누구도 감히 그의 삼초지적(三招之敵)이 되지 못했다.
당시 약관의 나이로 마도의 거마(巨魔)인 혈발악존(血髮惡尊)을 일백(一百) 초(招)가 넘는 사투 끝에 제압한 사실은 지금도 세인들의 입을 통해 신화(神話)처럼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누구도 감히 그에게 검을 겨누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이라 칭송받으며 만인에게 두려움과 경이의 대상이었던 독성 당문제조차 그의 천재성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하나, 당문제보다 뛰어나다는 천재가 또다시 자신들의 가문에서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문 사람들에게선 그리 기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 천재의 성정(性情)이 너무도 부드럽고 온화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후손이 엄청난 기재에다가 성품마저 뛰어나다면 보통의 무가에서는 아주 기뻐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화한 천재(天才)보다는 냉혹한 범인(凡人)을 더 좋아했다.
그들이 꾸미는 일, 즉 무림 정복을 위해서라면 온화하다거나 부드럽다거나 하는 성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당문의 핏줄이 아니었다.
그가 만약 당문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면 지닌 성품과는 상관없이 천재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주(家主)가 되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는 절대 가주가 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당문제가 데려다 키운 수양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연유로 그는 당문 사람들과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문제의 맏아들이며 장차 당문을 이끌어 나갈 것으로 예정돼 있는 당초인이 알게 모르게 그를 경원시하면서부터, 그는 당문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 하나 없이 거의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 자신을 위하고 사랑하는 당문제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 당문을 떠났을 것이다.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시기했지만, 당문제만은 달랐다.
그는 항상 친아들인 당초인보다 ‘천재’를 더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항상 냉혹하고 사갈 같은 당문제가 유달리 그를 아끼는 것을 보고 일부에서는 혹시 숨겨 두었던 자식이 아니냐고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문제는 그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당문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을 심어 주기 위해 일부러 냉혹하게도 대해 봤고 살생(殺生)의 잔혹함과 그에 따르는 미묘한 쾌락을 알려 주기 위해 함께 사냥도 수없이 나가 보았지만 그의 성격은 도무지 변할 줄 몰랐다.
당문제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하루는 그와 함께 인간 사냥을 나가기로 했다.
‘천재’는 이미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그가 따라오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당문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냥을 나가자며 함께 집을 나섰다. 그는 별 생각 없이 당문제와 함께 길을 나섰다.
하나, 누가 알았으랴?
당문제를 따라 한참 길을 가던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금치 못했다.
사냥을 하자면 마땅히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가야 할 텐데 당문제는 오히려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의아했지만,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당문제와 그는 어느 장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천재’는 속으로 당문제가 친구를 만나러 왔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그들이 장원 앞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다짜고짜 당문제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당문제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소 당문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던 인근의 무림세가였다.
그들은 당문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에게 복종할 것을 통보하자 매우 분노하고 있던 참에, 당문제가 나타난 것을 보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할 것을 다짐하고 이렇듯 죽자 살자 덤벼든 것이다.
‘천재’는 그제서야 당문제가 꾸민 일을 짐작하게 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을 놓고 멍하니 있다가는 상대의 검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천재’는 하는 수 없이 손을 썼지만, 절대 살수(殺手)는 쓰지 않았다.
그의 성격상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둘 죽어 가기 시작했다.
당문제가 어떤 사람인데 그들이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불과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무려 이백이 넘는 사람들이 당문제 한 사람에게 몰살당하는 처참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당문제가 기세를 몰아 막 마지막 남은 한 명을 죽이려 할 때, ‘천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천재’는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명, 그녀는 바로 당문제가 몰살시킨 가문의 외동딸이었는데, 자신의 일가족이 모두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하자 너무도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실신한 상태였다.
당문제가 놀란 얼굴로‘천재’를 쳐다볼 때, 그는 어느새 그녀의 가녀린 몸을 안고 있었다.
당문제는 노발대발하며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끝내‘천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천재’는 당문제와의 실랑이 끝에 자신이 그녀를 보호해 주기로 하고 당문으로 되돌아갔다.
그로부터 사 개월 후‘천재’와 그녀, 상관려(上官麗)는 마침내 혼인을 치르게 되었다.
하객도 별로 없는 쓸쓸한 결혼식이었고 상관려가 가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과 결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천재’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진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이 년이 지난 후, 상관려는 천재’의 진실함과 인간됨을 알게 되자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와 결혼한 것은 순전히 가문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자‘천재’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천지사방에 서로 친인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들은 그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가 있었다.
그들에게 불편한 것이라면 당문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약 십 년이 흐른 후 그들 부부에게 실로 커다란 경사가 생겼다.
몸이 약해 그 동안 아이가 없던 상관려가 드디어 임신을 한 것이다.
그들 부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결혼하고 무려 십이 년 동안이나 아이가 없다가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만삭(滿朔)의 상관려가 당문의 중지(重地)에서 기밀을 탐지하다 발각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천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당초인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증거가 너무도 뚜렷했던 것이다.
‘천재’는 당시 가주이자 의부(義父)인 당문제에게 사정사정하여 겨우 상관려의 죽음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그 대가로 당문제와 모종의 언약(言約)을 하고야 말았다.
하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관려는 아이를 낳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가 심화(心火)가 겹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천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맛봐야 했다.
평생 유일한 지기이자 동반자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의 죽음은 그에게서 삶의 희망을 앗아 가버렸다.
거의 삼 년 동안 매일 술로 살다시피 하던‘천재’에게 삶의 희망을 준 것은 바로 그녀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자신을 향해 방글방글 웃는 딸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모든 시름을 잊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딸을 키우는 것으로 그나마 인생의 재미를 다시 찾게 되었지만, 천재’에 대한 하늘의 시기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무럭무럭 자라던 딸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딸을 진맥하던 ‘천재’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불치병인 오음절맥(五陰絶脈)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음절맥은 몇 백만 명에 하나 타고날까말까 한 희귀한 병으로, 당사자는 비록 뛰어난 오성(悟性)을 갖고 태어나지만 체내의 음기(陰氣)가 너무 강해 열여덟이 되기 전에 죽고 마는 불치병이었다.
하나, 오음절맥이 비록 불치병이라 하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內丹)이나 금양과(金陽果) 같은 천고영약이 아니더라도 당문의 의술과 독술이라면 어느 정도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것이다.
‘천재’는 다시 한 번 당문제에게 부탁을 했고 당문제도 친손녀나 다름없는 그녀의 병을 모른 척 하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조금 연장할 수 있었지만, 평생 약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나뿐인 딸마저도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천재’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자식 하나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재.
하늘마저 시기한 이 위대하고도 불행한 천재의 이름은 당초경(唐礎敬), 아니, 상관초경(上官礎敬)이었다.
“……”
상관초경은 쓸쓸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했다.
모옥(茅屋).
거대한 당문 어디에 저런 볼품없는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작고 초라한 모옥이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상관초경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모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끼익!
부서질 듯한 비명을 토해 내며 문이 열리자 작은 침대에 힘겨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한없이 연약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이 아이가 바로 그의 딸인 상관수(上官琇)였다.
상관초경은 잠들어 있는 딸의 얼굴을 애틋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없이 여리고 부드러운 감촉이 투박한 손을 통해 그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수아(琇兒)……”
상관초경은 그렇게 오랫동안 딸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딸의 모습을 뒤로하고 모옥 밖으로 나온 그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의부! 이제 이 일만 끝나면 나는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이오. 사랑스런 내 딸이 자라기에는 이곳이 너무 비정하다는 것을 의부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상관초경은 다시 한 번 모옥을 쳐다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 * *
용문산(龍門山).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 경계에 있는 명산.
예전에는 여량산(呂梁山) 산맥과 접해 있었는데, 이 산이 마침 황하(黃河)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본 우임금이 산을 두 조각으로 동강내어 그 사이로 강물이 흐르도록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용문산 어귀.
무표정한 얼굴의 청년과 보기만 해도 속이 거북할 정도로 지저분한 차림의 거지노인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철군악과 철탁개(鐵鐸) 왕충(王忠)이었다.
꽤 오랫동안 길을 걸어왔는지 온몸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모습으로 조금은 피곤한 기색인 철군악에 비해 왕충은 아주 생생한 모습으로 뭔가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네. 조금 전에 들어온 개방과 대정회의 연락에 따르면 삼마가 이 산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네.”
철군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산을 쳐다보았다.
그는 부상당한 송난령과 함께 무이산을 내려오는 길에 동천립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삼마를 추적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철군악은 내심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송난령이 비록 어느 정도 내상을 치료했다지만, 철군악과 함께 삼마를 추적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이런저런 이유로 누군가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싶은 것이 철군악의 심정이었는데, 때마침 돌봐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철군악은 오랜만에 만난 동천립과 미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송난령을 떼밀듯 맡기고는 부랴부랴 삼마를 추적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는 마침 근처에 있던 왕충과 연락이 닿아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자네는 그들을 계속 쫓아갈 텐가?”
왕충의 물음에 철군악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자네가 단소의 복수를 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걸세. 자네가 십존(十尊) 중 셋을 제거한 것은 알지만, 빙마와 목마는 그들보다도 더욱 무서운 고수네. 더군다나……”
왕충은 잠시 말을 끊고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철군악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네가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안 이상 이제부터는 그들의 행동도 분명히 달라질 걸세. 전처럼 단발적인 공격이 아니라 무서운 함정을 파놓고 자네를 기다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 자네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많은 고수가 함정을 파놓고 자네를 기다린다면 빠져 나가기가 만만치 않을 걸세.”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충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철군악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십존 같은 고수가 세 명 이상 있다면 함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십존보다 더욱 무서운 고수가 없으라는 법도 없었다.
하나, 철군악도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순간, 최후의 때가 되면 적들은 철군악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왕충은 진정이 가득한 눈으로 철군악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당부하듯 입을 열었다.
“몸…… 조심하게.”
철군악은 침침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을 대하는 순간, 왕충은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껴야 했다.
그의 두 눈은 아무런 광채도 없이 그저 어두컴컴할 뿐이었지만, 마치 지옥의 무저갱처럼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철군악은 그런 눈으로 잠시 왕충을 응시하더니 어느 순간 산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과연 저 산에 목마와 빙마가 있을지, 또 어떤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저 유람 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산을 올라가는 철군악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휘익!
울창한 수풀 사이로 가느다랗게 난 작은 소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두 명의 노인이 있었다.
푸른 장삼을 입은 청수한 인상의 노인과 갈의(葛衣)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쭈글쭈글한 피부가 왠지 모르게 황량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앞만 보고 전력으로 산길을 달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휘익!
쉬익!
나무며 풀들이 쏜살처럼 그들의 곁을 스쳐 가며 기묘한 비명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앞서가던 청의노인이 갑자기 손을 들고는 천천히 걸음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갑작스런 행동에 뒤를 바짝 따라오던 갈의노인, 목마(木魔) 민경익(閔敬益)이 얼떨떨한 얼굴로 청의노인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나?”
청의노인, 빙마(氷魔) 궁초심(宮初心)은 경직된 얼굴로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아까부터 누군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네.”
“뭐라고?”
너무도 신중하고 조심스런 빙마의 행동에 목마의 표정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잠시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더니 한층 자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놈이란 말인가?”
빙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는 목마의 눈길을 외면하듯 잠시 고개를 외로 꼬며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 아마 그런 것 같네.”
“놈이 이렇게 끈질길 줄이야……!”
목마는 생각하기도 싫은 듯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다.
빙마는 다른 곳을 살피는 척하며 목마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쭈글쭈글한 얼굴이 오랜 피로와 긴장으로 인해 아주 볼품없어 보이는 데다,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공포심 같은 것이 언뜻언뜻 비치기까지 했다.
지옥의 염왕(閻王)이라도 꺼릴 게 없다던 그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애송이 하나를 저토록 두려워하는 것이다.
빙마는 그와 무려 사십 년 이상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해왔지만, 목마가 저토록 초조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긴……’
빙마는 자신의 얼굴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공포와 경이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허겁지겁 쫓기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빙마는 설마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뿐만 아니라 목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 그들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어처구니없게도 상대는 새파란 애송이였지만, 빙마와 목마는 결코 상대를 깔볼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무림에 출도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이었으나, 무려 이천 리가 넘는 길을 조금도 지치지 않고 쫓아올 수 있는 끈기와 집념이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강한 검법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에게 냉면무적(冷面無敵)이란 거창한 별호가 붙었겠는가?
“……”
빙마는 은은하게 핏발이 선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 십 일간이나 쫓기느라 식사는 물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다 빠질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는 빙마의 눈동자에는 왠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내비치고 있었다.
‘이놈! 조금만 기다려라. 삼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마.’
빙마는 섬뜩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가느다랗게 웃음을 흘렸다.
조금 후면 그 동안 본의 아니게 일방적으로 쫓겨 다닌 수모를 백배, 천배 갚아 줄 자신이 있었다.
비록 그들을 호위하던 스물네 명의 고수가 모두 놈에게 목숨을 잃었지만, 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조금 후 놈이 나타나면 모든 것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될 것이다.
빙마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웃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마가 여전히 어두운 모습으로 뒤를 따라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겨우 십여 장이나 걸었을까?
바스락!
돌연 마른 낙엽 밟히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시커먼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목마의 얼굴에는 당혹스런 표정이, 빙마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누구냐?”
빙마는 짐짓 놀란 목소리로 외치며 나타난 사람을 훑어보았다. 시커먼 흑의에 옷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분위기, 그리고 얼음보다 더 냉막해 보이는 얼굴.
바로 철군악이었다.
그는 십 일이 넘는 오랜 추적 끝에 드디어 삼마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철군악은 빙마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묵묵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굳이 입을 열어 물어 보지 않더라도 그들이 누구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철군악은 섬뜩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그의 앞에 다가온 것이다.
뚜벅뚜벅!
빙마와 목마는 철군악이 자신들의 물음에 대꾸도 않고 다가오자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공력(功力)을 끌어올렸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떤 말로도 철군악의 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진정한 실력만이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철군악은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무적인(無敵刃)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청아한 금속성과 함께 거무튀튀한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군악은 걸음을 멈추고는 앞에 있는 상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무적인을 눈앞으로 쳐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순간,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공력을 끌어올린 채 결전에 대비하고 있던 목마와 빙마의 얼굴에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철군악이 생사대전(生死大戰)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꿍꿍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고 철군악 또한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검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이놈이……?’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빙마와 목마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철군악이 혹시 무슨 암수나 속임수를 쓰기 위해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사실 철군악은 지금 특별한 감회에 빠져 있었다.
이 년 전, 언제나 그를 보살피고 가르쳐 주었던 사형이 죽던 순간, 철군악은 한 가지 맹세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형에 대한 복수였고, 그는 맹세를 이루기 위해 지난 이 년 동안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 년이 지난 후, 철군악은 드디어 복수를 할 힘을 갖게 되었고 오늘, 마침내 빙마와 목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철군악은 그들과 마주치게 되자 죽음을 맞이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던 사형의 안쓰러운 모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석상인 양 우두커니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랜만에 심장이 강렬하게 고동치는 기분 좋은 흥분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빙마와 목마를 노려보았다.
아무런 광채도 없는, 암흑의 무저갱 같은 동공이 심혼을 빨아들일 것처럼 어둠침침하게 빛나고 있었다.
‘으음!’
빙마와 목마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쭈욱 돋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쳐야 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철군악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며 왠지 불길한 느낌이든 것이다.
철군악은 잠시 그들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한 쪽 손에 들려 있던 검집을 땅바닥에 휙 내던졌다.
철그럭!
잔뜩 공력을 끌어올린 채 철군악을 노려보고 있던 빙마와 목마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무인이 검집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는 것.
이미 상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빙마는 가슴 한구석에서 한기(寒氣)가 치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양손을 치켜 들었다.
쓰으으으……
하얗게 변한 손에서 태양마저도 얼려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한기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목마 역시 공력을 잔뜩 끌어올린 채 철군악이 다가오는 것을 심각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철군악은 그들에게 다가가 가만히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공포, 불안감, 그리고 반대로 알 수 없는 자신감. 이런 것들로 가득 찬 그들의 눈은 기이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철군악의 얼굴에 문득 희미한 조소(嘲笑)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설마 하니 자신들이 이런 감정을 갖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부터 공포니 불안이니 하는 것들은 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지 자신들은 그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 의해서 말이다.
철군악의 비웃음에 수치를 느꼈는지 가뜩이나 하얀 빙마의 얼굴이 완전히 백지장처럼 변해 버렸다.
“이노`―`옴!”
그는 느닷없이 한소리 괴성을 터뜨리더니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철군악을 향해 덤벼들었다.
휘류류릉!
그의 손이 거칠게 휘둘려지자 백색의 장력이 마치 눈꽃처럼 사방에 휘날리며 철군악의 상체로 날아들었다.
빙마가 천하에 자랑하는 삼음신수(三陰神手)였다.
철군악은 칼날 같은 장력(掌力)이 엄습해 오자 뒤로 슬쩍 몸을 틀며 검을 좌우로 기괴하게 흔들었다.
우우우웅……
운해만천(雲海滿天)의 구름 같은 검세가 허공 가득 일어나 삼음신수의 장력을 조각조각 내며 빙마에게 몰려갔다.
“엇!”
빙마는 철군악이 너무도 간단히 자신의 절초를 파해하자 한소리 경호성과 함께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나,
슈아악!
철군악은 뒤로 물러나는 빙마를 번개처럼 따라붙으며 다시 한 번 검을 기이하게 흔들어댔다.
꽈르릉……
풍뢰야우(風雷夜雨)의 절정검기가 커다란 뇌성(雷聲)을 동반한 채 빠른 속도로 빙마를 덮쳤다.
“헉!”
순간적으로 빙마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철군악의 검법과 반응이 너무도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하나, 철군악이 막 검을 떨쳐 냈을 때,
쓰쓰쓰쓰……
흡사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강력한 기운이 그의 뒤통수를 향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목마가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급작스런 목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철군악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별반 놀란 표정도 없이 얼른 몸을 돌려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쓰스스승……
잔잔한 호수에 파장이 일듯 아홉 겹의 검기가 사방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목마에게 몰려갔다.
흡천십이검의 검파멸절(劒波滅絶)이었다.
그것을 본 목마가 이를 악물고 양손을 세차게 떨쳐 냈다.
“이야압!”
쏴쏴쏴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앙상한 그의 양손에서 황갈색의 장력이 뿜어져 나오며 철군악의 검기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고사(枯死) 직전의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으나 거기에서 나오는 장력은 너무도 강력해 철군악은 일시지간 몸이 꽁꽁 조여 드는 착각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목마를 있게 한 황목장(荒木掌)으로, 그의 삼대절기 중에서도 가장 위력 있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과연 소문은 틀리지 않아, 철군악은 강력한 황목장의 기운에 밀려 일시지간 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그는 몸을 예닐곱 번 움직여서야 가까스로 황목장을 피할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허점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것을 본 빙마가 눈을 새파랗게 번뜩이며 철군악의 뒤쪽으로 달려들었다.
“취수빙정(聚水氷精)!”
순간, 빙마의 장심에서 칼날 같은 백색의 장력(掌力)이 쭈욱 일어나더니 철군악의 등짝을 향해 일직선으로 파고들었다.
쐐애애애액……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마치 얼음의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철군악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재빨리 검을 들어 사선으로 비스듬히 내리 그었다.
꽈르릉……
풍뢰야우(風雷夜雨)의 절정검기가 허공에 새파란 빛의 물결을 일으키며 빙마의 장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꽈꽝……
“크윽!”
검기(劒氣)와 장력이 부딪쳤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오며, 압력을 견디지 못한 빙마가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한참을 비틀댄 후 가까스로 신형을 안정시킨 그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이, 이럴 수가……!”
검법은 둘째 치고라도 내공(內功)에 있어서도 철군악은 전혀 그들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내공 또한 그들보다 더욱 강하면 강했지 결코 모자란 것 같지는 않았다.
멀거니 철군악을 응시하는 빙마의 얼굴에서 평소의 자신감 넘치고 냉철하던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상대에 대한 놀람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철군악은 빙마가 얼빠진 듯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그에게 빠르게 다가가며 검을 종횡으로 마구 그어댔다.
번쩍! 버언`― 쩍!
아홉 가닥의 시퍼런 번개가 치솟아오르며 빙마의 몸뚱어리를 휘감으려는 찰나, 그제서야 정신이 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양손을 뿌리듯 앞으로 내질렀다.
쏴아아아앙……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팔뚝까지 새하얗게 변한 그의 양손에서 천지를 얼려 버릴 만큼 차갑고 음랭한 기운이 쏟아져 나와 철군악이 펼친 막강한 검기를 손쉽게 뚫는 것이 아닌가!
삼음신수의 절초인 빙하도래(氷河到來)였다.
동시에 목마 또한 질세라 철군악을 향해 양손을 힘껏 떨쳐 냈다.
쏴쏴쏴쏴……
황목장의 막강한 기운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철군악의 등짝을 노리며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다.
철군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의 합공이 너무도 치밀하고 시기적절하여 일시지간 대처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칩광구뢰의 일 초로 간단하게 빙마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무려 사십 년간 적수를 찾지 못했던 마왕(魔王)이 바로 자신의 상대임을 순간적으로 잊은 것이 커다란 실수가 되어, 철군악은 공세에서 순식간에 수세로 몰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철군악은 하는 수 없이 있는 힘껏 몸을 왼쪽으로 비틀며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우우웅……
순간, 그의 검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검강(劒)이 빠르게 퍼져 나오며 빙마와 목마의 장세(掌勢)를 동시에 베어 갔다.
하나, 그처럼 막강하기 그지없는 검사초영(劒絲剿影)의 검세로도 빙마와 목마의 합공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꽈꽝……
“크윽!”
“으음!”
거친 폭음이 터져 나오며 빙마와 목마가 양쪽으로 갈라지듯 물러났지만, 철군악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비록 심각하지는 않지만 등과 가슴 쪽에 약간의 타박상을 입은 것이다.
철군악의 얼굴에 기괴한 빛이 떠올랐다.
빙마와 목마가 일전에 상대했던 암흑쌍검보다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낭패를 면치 못하겠군.’
철군악은 조금이나마 상대를 경시하던 마음을 버리고 신중하게 싸움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굳은 얼굴로 다시 검을 치켜 들었을 때,
“이놈!”
어느새 다가왔는지 빙마가 차가운 얼굴로 그의 코앞에서 양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휘류르르릉……
예의 얼음 같은 장력이 또다시 철군악의 가슴팍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철군악은 엉겹결에 검을 들어 막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꽝!
폭음과 함께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이놈!”
이번에는 목마가 뒤로 다가오며 오른쪽 손가락을 빠르게 흔들어댔다.
피핑핑피잉……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수없이 많은 지력(指力)이 마치 화살처럼 터져 나오며 철군악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철군악은 지력이 닿기도 전에 온몸의 피부가 갈라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목마의 삼대절기 중 하나인 목령지(木靈指)가 극성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빙마 또한 질세라 양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쒸이이이잉……
그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음랭한 장력이 흡사 칼날처럼 철군악을 향해 빠르게 몰려들었다.
하나, 철군악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눈을 번뜩이며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상대의 공세가 몸 가까이에 이르러서야 검을 미친 듯이 그어대기 시작했다. 순간,
우우웅웅……
시퍼런 광막(光幕)이 철군악의 몸뚱어리를 둘러싸듯 휘돌며 일어나 순식간에 그의 주위가 푸르스름한 검기로 인해 물샐틈없이 변해 버렸다.
흡천십이검 최고의 수비초식인 검막밀밀(劒幕密密)이 극성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목령지와 삼음신수의 막강한 공세는 이내 철군악이 내뿜은 검기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콰르르릉……
“으음!”
누군가가 신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철군악이었다.
그는 꽤 심한 타격을 받았는지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등짝과 옆구리의 피부가 이미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이놈! 맛이 어떠냐?”
“크하하하핫…… 천하의 냉면무적도 별수 없구나!”
철군악과의 싸움에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우위를 점하게 되자 빙마와 목마는 한층 자신있는 표정으로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빙마의 삼음신수가 벼락같은 기세로 다시 철군악을 향해 덮쳐 왔다.
철군악이 몸을 슬쩍 틀며 삼(三) 검(劒)을 떨쳐 냈지만 빙마는 어느새 저만치 뒤로 후퇴해 있었다. 대신,
“여기다!”
폭갈이 터짐과 동시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목마가 철군악의 옆구리를 향해 세차게 손을 휘둘렀다.
철군악은 상대의 합공이 이처럼 절묘할 줄은 생각지 못했는지 일순간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초절한 반사 신경 덕분에 간신히 목마의 살인적인 일장(一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빙마에게 다시 옆구리를 얻어맞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꽝!
굉음과 함께 상의(上衣) 한쪽이 강력한 음한지기(陰寒之氣)를 견디지 못해 얼어 터지며 그곳으로 드러난 살이 시커멓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으음!”
이번의 일격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철군악조차 순간적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의 몸이 일시지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갸우뚱거리는 순간,
“이놈!”
“뒈져랏!”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칠세라 빙마와 목마가 양손을 거칠게 휘두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는지 각자 최고 절기를 펼치며 철군악에게 덤벼들었다.
빙마는 삼음신수의 최절초(最絶招)인 영음빙천하(永陰氷天下)를, 목마는 고목신공(枯木神功)으로 몸을 보호한 채 한 손으로는 황목장을,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목령지를 극성으로 떨쳐 냈다.
쏴쏴쏴쏴쏴……
피피피이잉……
쐐애애앵……
빙마와 목마는 그야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 최강의 절예를 전력으로 펼친 것이라, 범인이라면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막강한 기세가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꿈틀거리며 사방을 누볐다.
하나, 천지를 집어삼킬 듯이 휘몰아치는 장력의 폭풍 속에서도 철군악은 조금도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기세등등하기 짝이 없는 빙마와 목마의 얼굴을 노려보는 철군악의 두 눈에선 새파란 빛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지금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상대로 인해 상처를 입거나 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사형의 원수인 삼마를 어떻게 하기는커녕 자신이 오히려 그들에게 부상을 입고 수세에 몰리자 그답지 않게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만 것이다.
무인(比武)이 비무를 하거나 싸움에 임했을 때 절대 냉정(冷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철군악은 상대가 사형의 원수란 사실에 그만 냉정을 잃고 말았다.
철군악은 시퍼렇게 빛나는 눈으로 빙마와 목마를 향해 거칠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격한 감정에 빠져 무공을 펼치면 대개 그 위력이 감소되고 날카로운 맛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지금 철군악의 경우는 그런 상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듯 보였다.
꽈아아아아……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검을 따라, 실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지막지한 검기가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가며 천지를 집어삼킬 듯 마구 요동치는 것이 아닌가.
고금(古今)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고 알려진 열 가지 검법(劒法).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광해삼검(狂海三劒)의 광해일령(狂海溢靈)이 펼쳐지는 것이다.
빙마와 목마는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펼친 장력과 광해일령의 검세가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어마어마한 굉음을 토해 냈다.
꽈꽈꽈꽈꽝……
동시에 어마어마한 바람이 무지막지한 기세를 동반한 채 사방으로 퍼져 나가 주위에 있던 초목과 작은 돌멩이가 미친 듯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실로 사람의 싸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결과였다.
허공을 비산하던 돌이며 초목들은 시간이 조금 흘러 바람이 멎자 비명을 질러대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투두두둑……
그리고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빙마와 목마는 온몸에 검상을 입고 비틀거리며 서 있었는데, 매우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몸가짐이 불안정했고 눈빛 또한 안광을 잃고 흐릿해져 있었다.
반대로 철군악은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차분한 신색과 안정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시퍼렇게 빛나는 눈으로 빙마와 목마를 노려보며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빙마와 목마는 그제서야 사람들이 왜 냉면무적, 냉면무적, 하며 새파란 애송이를 그렇게 추켜세우는지 알 것 같았다.
철군악은 그들 둘만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나, 그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감이 있었다.
빙마와 목마는 철군악이 두 눈 가득 살기를 띤 채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지 그저 멍한 얼굴로 철군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꼭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무기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해(四海)를 떨어 울리던 마왕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철군악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어졌다.
드디어…… 드디어 사형의 원수를 갚게 되는 것이다.
그가 제아무리 감정이 죽은 목석 같다지만 이 순간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철군악은 두 눈을 빛내며 한 발 한 발 빙마와 목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이제 철군악의 손에 목숨을 잃는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