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絶對危機
암흑마천(暗黑魔天)의 혈살귀화(血殺鬼花)!
당금 천하에 그 유래를 모르는 자 어디 있으랴?
천하제패(天下制覇),
무림이라는 세계가 이 땅에 생겨난 이
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천하제패를 꿈꾸어 왔다.
그리고 천하제패를 위해 수많은 거마효웅(巨魔梟雄)들이
피(血)의 잔혹사(殘酷史)를 남겨 놓은 채 덧없이 명멸(明滅)해 갔다.
하지만 천하는 한 사람의 손에 쥐어지기를 완강히 거부해 왔다.
헌데 그것이 끝내는 이루어지고야 마니..
지금으로부터 삼백년 전(三百年前),
천하는 수천 년의 완강한 거부를 꺾이고
마침내 한 사람의 수중(手中)에 들어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암흑마천!
바로 그들의 놀라운 위업(威業)이었다.
그러나 중원인(中原人)들에게 있어 그 위업은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들의 근거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새북(塞北)으로부터 중원을 침공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침공에 중원은 하나로 뭉쳐 대항했다.
정사마(正邪魔)를 불문한 대소문파(大小門派)가
중원불사혼(中原不死魂)이라는 기치 아래
암흑마천의 세력에 맞서 피의 항쟁(抗爭)을 벌였다.
하나 실로 어이없게도,
중원불사혼이라는 기치가 중원패망혼(中原敗亡魂)이라는 말로 변하는 데는
단 석 달이 걸렸을 뿐...
중원은 암흑마천에게 천하를 내주고야 마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공포천하의 도래!
누구도 암흑마천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암흑마천을 거역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 죽음의 신표(信表)가 한 송이 핏빛 혈매화, 바로 혈살귀화(血殺鬼花)인 것이다.
헌데,
기이한 것은 암흑마천이 천하를 제패했음에도
암흑마천의 천주(天主)라는 인물을 한번도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허나 보다 기이한 일은 암흑마천이 천하를 제패한 지 정확히 일년(一年)이 되었을 때,
그들이 홀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가 수수께끼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구한 억측과 구름처럼 이는 의혹의 소용돌이!
그러나 누구도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중원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무엇보다 앞섰던 것이다.
헌데,
삼백 년의 세월을 격한 오늘 뜻밖에도 혈살귀화가 다시 모습을 나타낼 줄이야!
이때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와 바람결처럼 장내를 휘돌았다.
"혈살귀화를 대하고도 예(禮)를 취하지 않는 자, 죽음 뿐이다."
인간의 것이 아닌 양 한 올의 감정조차 배제된 음성,
순간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일순 부르르 몸을 떨더니
거의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광세경혼 시계명, 삼가 혈살귀화를 뵈오!"
"소소실혼 거상시, 삼가 혈살귀화를 뵈오!"
어디선가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혈살귀화를 대한 후 혈살귀화의 주인이 나타날 때가지 떠나지 않는 자,
또한 죽음뿐이다."
시계명과 소소실혼의 석불상의 미간에 꽂힌 혈살귀화와
오송학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예의 그 감정이 배제된 음성이 즉시 다시 들려왔다.
"환영경은 본 암흑마천에서 접수할 것이다."
이번 음성은 극도로 무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짙은 살기를 풍겨냈다.
순간,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한 차례 눈빛을 빠르게 교환하더니
번쩍 신형을 날려 장내에서 사라졌다.
슈슉!
두 사람이 종적을 감추기가 무섭게
장내로 한 채의 가마가 소리없이 날아들었다.
가마(轎),
그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면은 일생(一生)에 한 번 보기조차 힘든 값진 명주(紬珠)로 엮어 만든
칠채주렴(七彩珠簾)이 둘러쳐져 있고,
주렴의 아래 하단(下段) 부분은 갖가지 꽃 문양(文樣)이 양각(陽刻)된
황금(黃金)으로 장식되어 있다.
뿐인가.
여덟 명의 꽃처럼 아름다운 홍의소녀(紅衣少女)들이 어깨에 둘러멘 교각(轎脚)은
남만(南蠻)에서만 난다는 붉은 주단(朱緞)으로 감싸여져 있으니...
정녕 화려함의 극치가 아닐수 없었다.
도대체 저 가마의 주인은 어떠한 신분을 지니고 있기에
저토록 화려한 가마를 타고 다닌단 말인가?
이때,
홍의소녀들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가마를 장내의 정중앙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때를 같이해서 몇 줄기의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여덟 명의 홍의인(紅衣人)들이 두 줄로 의맹하게 걸어 들어왔다.
철컥...
철컥...!
하나같이 얼굴에 청동면구(靑銅面具)를 쓴 모습,
어깨에는 한 쌍 씩의 낭아곤(狼牙棍)을 메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양쪽 날이 톱날처럼 생긴 거치도(鋸齒刀)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허벅지엔 길이가 다섯 치쯤 되어 보이는 유엽비도(柳葉匕刀)가
열두 자루씩 꽂혀 있는 금낭(錦囊)이 하나씩 매어 있었다.
금속성은 그들이 걸을 때마다 유엽비도가 서로 부딪쳐 나는 소리였다.
그들은 일단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서자 일사불란하게 가마 주위를 에워쌌다.
한편,
오송학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이 점점 더 해괴해지는구나.
암흑마천은 무엇이고 혈살귀화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어쨋든 시계명과 소소실혼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도망을 친 것으로 보아
가마 속의 인물은 무서운 고수가 분명할 것이다!'
이때 돌연,
파- 악!
한 줄기 날카로운 소성이 장내를 격하게 울렸다.
오송학은 부지중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놀람의 빛으로 물들었다.
'저..저럴 수가! 가마는 꼼짝도 않았거늘
혈살귀화가 저절로 가마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니..저건 또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그렇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오송학이 본 것은 다름아닌 허공섭물이었다.
그가 언제 그러한 신공절학(神功絶學)을 한 번이라도 견식한 적이 있었겠는가?
혈살귀화가 주렴 속으로 사라진 직후,
그곳으로부터 한 줄기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환영경을 접수하라."
순간 오송학은 의외라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분명 여인의 음성..'
그렇다.
그건 분명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것도 은쟁반에 옥(玉)이 구르듯 영롱한 소녀(少女)의 교성..
그 음성이 떨어지자,
가마를 호위하고 있던 여덟 명의 청동면구인 중 한 명이
몸을 돌려 주렴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속하, 혈귀제팔령(血鬼第八靈), 명(命)을 받자옵니다!"
이어 그는 석불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푹! 푹..!
그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놀랍게도 견고한 청석 바닥엔
어김없이 세 치 깊이의 족적(足跡)이 새겨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석불상의 일 장여 앞에까지 다가선 그는
석불상의 왼쪽 귀를 올려다 보며 허리춤의 거치도를 뽑아 들었다.
'제기랄! 겁부터 주겠다는 것인가?'
오송학은 긴장된 눈으로 청동면구인을 내려다 보다 녹상아를 돌아보았다.
녹상아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오송학은 한껏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섭니, 상아?"
"으응...무...무서워, 오빠..."
"무서워 할 것 없어. 상아, 상아는 오빠가 지켜준다. 알았지?"
"그러면 오빠 또 다칠 것 아냐..상아는 오빠 다치는 거 싫어.."
"그래 알았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게."
오송학은 싱긋 웃어보인 후 다시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청동면구인은 이미 오송학을 향해 신형을 솟구쳐 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오송학의 지척에까지 다가든 순간이었다.
"물러가랏!"
오송학은 우렁찬 일갈과 함께 우수를 맹렬히 떨쳐냈다.
쏴- 아- 아!
일진의 강맹한 경풍(勁風)이 청동면구인을 향해 노도(怒濤)처럼 몰아쳤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조금 전 소소실혼이 시계명과 일전을 벌일 때 펼쳐 보였던
횡소천군의 일식이 아닌가?
비록 공력은 실려 있지 않으나
일반의 횡소천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절묘한 일식!
허나,
청동구면인은 삼 장여 위로 신형을 번쩍 솟구쳐 올려 간단히 오송학의 일격을 피해 내고는
계속해서 독수리가 먹이를 덮치듯 빛살처럼 오송학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 순간,
"아악!"
오송학은 녹상아의 공포에 질린 뾰족한 비명성을 들었다.
허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소소실혼이 펼쳤던 것과 같이 철판교의 신법으로 비스듬히 신형을 회전시키며
벼락처럼 우수를 쳐올렸다.
그 일련의 동작 변화는 유연하기 그지없었다.
오오..
오송학은 치열한 접전의 상황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인
절세고수의 수법(手法)을 그대로 펼쳐낸 것이니..
퍽!
"으윽..!"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일성 답답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청동면구인의 우람한 동체(胴體)가 한 줄기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그는 한차례 신형을 비틀거린 후에야 몸을 바로잡았다.
그의 입에서 살기 어린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알고 보니 숨은 고수였구나!"
다음 순간,
그는 거치도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듬과 동시에
오송학을 향해 쏘아낸 살처럼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휘- 이- 익!
도신합일(刀身合一)!
그것은 바로 도법(刀法)의 상승경지(上昇境地)인 도신합일의 자세가 아닌가?
그 순간,
오송학은 무지막지하게 짓쳐드는 한 줄기 가공할 암경(暗勁)에
가슴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으으윽...!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시퍼런 도광(刀光)과 함께 짓쳐드는 청동면구인의 모습이
마치 악귀(惡鬼)처럼 보였다.
오송학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좋다. 오너라! 시계명이 펼쳤던 수법을 맛보여 주마!'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한 움큼의 은자를 꺼내들더니
청동면구인을 향해 홱 떨쳐냈다.
시계명이 소소실혼을 향해 일장을 날렸을 때의 동작을
그대로 흉내내어 은자를 떨쳐낸 것이었다.
파파파파팟..!
이십여 개의 은자가 하나 하나가 모두 암기(暗器)로 변해
청동면구인을 향해 쾌속하게 폭사되었다.
허나,
청동면구인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짓쳐드는 속도는 가일층 배가 되었다.
텅! 텅! 텅..!
오송학은 자신이 쏘아낸 이십여 개의 은자가 청동면구인의 몸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사방으로 퉁겨나가는 것을 보았다.
도막(刀幕)!
청동면구인은 자신의 몸 주위로 무형(無形)의 도막을 펼쳐 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본 오송학은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도막에 대한 생각은 미쳐 할 겨를도 없이 다급히 몸을 뒤로 돌려 녹상아를 안고 쓰러졌다.
자신은 죽더라도 녹상아만은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일념(一念)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순간,
번쩍!
돌연 석불상 위 천정으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촤- 악!
"크아악!"
동시 막 오송학의 등줄기를 덮치려던 청동면구인이
칠공(七孔)에서 검붉은 선혈을 뿜어내며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헉...! 대반야현공(大盤若玄功)이다!"
가마를 호위하고 있던 칠인(七人)의 청동면구인 중 누군가가
놀람에 찬 경악성을 토해냈다.
오오..
대반야현공이라 했는가?
소림(小林),
무림의 태두(泰斗)로 자타가 공인하는 대소림사,
불문무학(佛門武學)의 본산(本山)이자
천하무학(天下武學)의 산실(産室)이라고까지 숭상받는
대소림사의 최대절기는 무엇인가?
그렇다.
바로 대반야현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소림의 조사(祖師)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면벽(面碧) 구년(九年)의 세월을 허비한 후에야 창안했다는
달마역근경(達魔易筋經)과 달마세수경(達魔洗修經) 등
양대심공(兩大心功)을 십이성(十二成) 통달해야만
비로소 수련이 가능하다는 대반야현공!
역대로,
소림사 내에서도 대반야현공을 익힌 인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달마(達魔), 광혜(廣慧), 대승(大乘), 만상(萬象) 등
절세의 네 기승(奇僧)과 칠십여 년 전 백팔마녀대(百八魔女隊)와 맞섰던
십방대선사(十方大禪師)를 포함한 다섯 명뿐...
하니,
대반야현공을 모른다면 몰라도 알고 있다면야
어찌 그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각설하고,
대반야현공이 한차례 가공경이할 위력을 보였음에도
정작 그것을 펼친 인물은 이순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가마 속으로부터 예의 그 소녀의 교성이 차디차게 터져 나왔다.
"감히 암흑마천의 일에 끼어들다니.. 혈귀팔령(血鬼八靈)은 명을 받으라."
순간 일곱 명의 청동면구인은 일제히 주렴을 향해 몸을 돌리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하명(下命) 하옵소서!"
"본 암흑마천을 능멸한 자를 암흑마천의 율법(律法)에 따라 처벌하고,
아울러 환영경을 속히 접수하라!"
"복명(復命)!"
청동면구인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린 후
신형을 번뜩여 석불상과 마주 본 상태로 일렬로 나란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가마를 내려놓고 한쪽에 물러서 있던 홍의소녀들이
날렵하게 몸을 날려 청동면구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내려서며
품속에서 한 자루 씩의 날이 시퍼런 비수를 꺼내들었다.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 신속하고도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때 칠인의 청동면구인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방금 대반야현공이 폭사되었던 천정을 향해 신형을 번뜩였다.
슈슈슛!
그들 중 한 명이 방향을 돌연 바꿔 석불상을 향해 쏘아져 간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육인의 청동면구인들이 대반야현공을 펼친 인물을 공격하는 사이를 틈타
오송학에게서 환영경을 탈취하려는 것이었다.
육인의 청동면구인들은 이미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허벅지의 금낭에서 열두 자루씩의 유엽비도를 양손에 뽑아 들더니
일제히 천정을 향해 사납게 떨쳐냈다.
파파파파팟...
섬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부챗살처럼 폭사되는 칠십 이 자루의 비도(飛刀)!
그들은 계속해서 거치도와 낭아곤을 양손에 나눠 들고 맹렬히 휘둘렀다.
쇄애애액!
촤아악-
천정의 한 부분이 수천, 수만 조각으로 갈라져 터지며
돌조각과 흙먼지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실로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피할 수 없을 듯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한편,
석불상을 향해 쏘아져 간 청동면구인도
이때 오송학을 향해 거치도를 맹렬히 휘두르고 있었다.
오송학은 소소실혼이 펼쳤던 수법을 흉내내어 사력을 다해 대항하려 했다.
허나,
청동면구인의 몸놀림은 가히 유령과도 같았다.
오송학은 그가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피했으며
어느새 거치도가 자신의 가슴을 향해 떨쳐오는지 전혀 알아보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의 신형은 반 이상이 녹상아의 안위(安危)에 쏠려 있었으니...
오송학은 거치도가 옷을 꿰뚫는 감촉을 느꼈다.
미처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느껴지는 아찔한 충격!
헌데 그 순간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번-쩍!
"으아악!"
석불상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부터 한 줄기 새파란 검광(劍光)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오히려 청동면구인이 가슴에서 시뻘건 선혈을 뿌리며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여섯 명의 청동면구인들에 의해 뻥 뚫린 천정으로부터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에... 에취! 이런 고얀...졸지에 껍데기가 홀랑 벗겨나갈 뻔했다."
말과 함께 오척단구(五尺短軀)의 작달막한 홍포인(紅袍人) 하나가
석불상의 머리 위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스스스...
언뜻 보자니 승인(僧人)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싶은 괴이한 몰골의 인물,
반들반들하게 깎은 머리와 몸에 걸친 홍색가사(紅色袈裟)로 보아선
어김없는 승인인 듯 한데..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인데다
털이 숭숭한 다리가 무릎까지 드러날 정도로 짧은 바지를 걸친 것하며,
밑으로 축 처지도록 불룩하니 튀어나온 배 등으로 보아선
부잣집만 골라가며 구걸하는 먹성 좋은 거지인 듯 싶다.
더구나 그의 손엔 땟국물에 절은 시커먼 술병 하나와
닭다리 하나가 보란 듯이 들려 있으니...
어쨋든간에 그는 나타나자마자 술병을 거구로 치켜들어
요란하게 몇 모금의 술을 들이키고는
살 한 점 붙지 않은 닭다리를 한 번 쓱 핥은 후 석불상의 머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아미주육타불(阿彌酒肉陀佛)이로다!"
이어 그는 느닷없이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인간지사(人間之事) 백년(百年)은 뜬구름 같거늘, 아미주육타불...
중생들은 어찌하여 영욕(榮慾)에만 눈이 어둡단 말인가? 아미주육타불..."
탕!
타당...!
그는 술병으로 석불상의 머리를 두드려 가며 장단까지 맞추고 있었다.
실로 괴이한 행동,
아미(阿彌)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선
파계승(破戒僧)일지언정 승인인 것은 분명한 듯했다.
헌데 술 마시고 주육타불(酒肉陀佛) 운운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보아줄만 하다 쳐도,
설사 파계(破戒)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당했다 한들
어찌 버젓이 머리 깎고 가사(袈裟)를 걸친 처지에
부처의 머리를 술병으로 두들겨 댈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그의 괴행(怪行)에 홍의소녀들은 물론
청동면구인들가지 아예 할 말을 잊고 망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홍포괴승이 노래를 뚝 그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거 도저히 못 참겠다! 아무리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참을 수가 없다!
어느 놈부터 죽겠느냐? 썩 나서지 못할까!"
그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몸을 한 차례 크게 흔들었다.
순간,
후두두둑...!
그의 몸에서 수십여 자루의 비도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가슴, 배, 허리 등은 물론 심지어는 목줄기에서까지...
헌데 그 비도들은 바로 조금 전 여섯 명의 청동면구인들이 천정을 향해 쏘아날렸던
칠십 이 자루의 유엽비도가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유엽비도들이 석불상 아래로 떨어져 내려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청석 바닥에 자루만 남기고 푹푹 박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콰콰콰!
청동면구인들과 홍의소녀들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도대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니..
"이놈들! 어서 앞으로 썩 나서지 못할까!"
홍포괴승은 장내를 박살이라도 낼 듯한 기세로 침까지 튀겨가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흥! 또 취하셨군요?"
석불상의 겨드랑이 밑으로부터 한 줄기 영롱한 소녀의 옥음(玉音)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석불상의 왼쪽 어깨 위로 사뿐 모습을 드러내는 한 명의 흑의소녀(黑衣少女)가 있었다.
대략 십 육칠 세나 되었을까?
윤기가 감도는 짙은 수발(秀髮)은 질끈 동여매어 위로 틀어 올려졌고,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위에는 한 송이의 붉은 장미가 꽂혀 있었다.
한 쌍의 아미(蛾眉)는 그린 듯 초생달처럼 휘어져 흘렀고..
그 아래의 두 봉목(鳳目)은 추수처럼 서늘하고 맑은데다
보석이라도 박아 놓은듯 초롱초롱 빛났다.
오똑한 코, 알맞게 솟아 올랐지만 코끝이 날카로와 오만한 듯도 보인다.
금세라도 붉은 물이 들 듯한 아름다운 호선(弧線)의 조그마한 입술,
그리고 세류요(細柳腰)에 알맞게 살이 오른 동그란 둔부는 섬세하기 이를데 없고,
가슴의 융기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봉긋하니 솟아 올랐다.
아아, 절색(絶色)의 미녀(美女)란 바로 이런 여인을 두고 이르는 말이련가?
미소녀(美少女)는 지금 희고 매끄러운 섬섬옥수를 허리춤에 턱하니 올려 놓고는
은은한 노기가 서린 표정으로 홍포괴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포괴승은 그녀의 질책을 듣는 순간부터 찔끔한 표정이더니
얼굴 가득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청아(淸兒)야,
이 사부(師父)는 저 아이들을 우리 청아에게 어떻게 넘겨 줄 것인가를 궁리하기 위해
잠시 노래를 불렀을 뿐이었다. 술 취했다는 말은 당치도 않다."
그는 손까지 내저으며 극구 변명을 늘어놓았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엇다.
그는 분명 자신을 가리켜 흑의미소녀의 사부(師父)라 칭하지 않았는가?
헌데 사부가 제자를 두려워하여 쩔쩔매다니...
흑의미소녀는 한술 더 떠 홍포괴승을 다그쳤다.
"그럼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할 것 아니예요! 소녀가 먼저 가버려도 좋으신가요?"
그러자 홍포괴승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구 저었다.
"아..아니다. 내 이제 엄숙해지련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청아야."
"흥! 또 쓸데없는 장난을 하시면 소녀는 정말 가버릴 거예요."
"아..알았다."
그때 가마 속으로부터 싸늘한 교갈이 터져나왔다.
"그대들은 대체 누구냐?"
순간 막 가마를 향해 시선을 돌리려던 홍포괴승이
소태 씹은 표정으로 다시 흑의미소녀를 바라보았다.
"저것 보아라.
저 얘, 어른 못가리는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하고 내 어찌 말상대를 할 수 있겠느냐?
청아, 제발 부탁이니 네가 좀 대신 처리하거라."
"흥! 사부님께서 꼭 힘든 일만 소녀에게 떠맡기려 하시는군요?
안되겠어요. 오늘 일은 중요한 일인만큼 사부님께서 직접 처리하세요."
흑의미소녀가 냉담하게 홍포괴승을 외면하자,
홍포괴승은 잠시 울상을 짓더니 어쩔 수 없었던지 이내 가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손가락으로 툭 퉁겨냈다.
"노납은 이런 사람이다."
쐐애액-!
하나의 백색 물체가 가마를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천동면구인들은 황급히 그 백색 물체를 막으려 했으나
그것이 쏘아지는 속도는 결코 그들이 막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백색 물체는 순식간에 가마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탁!
가마 속에서 일성 경미한 소성이 일었다.
순간,
"아...! 당...당신이 바로...?"
가마 속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허나 홍포괴승은 여전히 풀 죽은 표정이었다.
"노납은 나이 어린 사람들과 다투고 싶지 않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할 수 없지만.."
"좋아요. 내 당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물러가지요
. 하지만 당신의 오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는...
본 암흑마천의 금제(禁制)가 완전히 풀리는 날 똑똑히 보여 주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명심하세요."
"뭘 명심하라는 것이냐?"
"설사 당신이 막는다 해도 본녀(本女)가 환영경을 탈취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하지만 본 암흑마천에선 환영경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암암...물론 그럴테지!"
"본녀는 이곳을 우연히 둘러보았을 뿐
애초 환영경을 취할 목적을 품고 온 것이 아니예요. 가자!"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가마를 에워싸고 있던 홍의소녀들이 재빨리 가마를 어깨에 들춰맸다.
스스스...
가마는 삽시간에 밖으로 미끄러져나가기 시작했다.
홍포괴승은 그모습을 보며 버럭 호통성을 질렀다.
"네 이년! 나 주육광승(酒肉狂僧)이 아무리 못났기로서니
그깟 암흑...뭐를 두려워 할 것 같으냐?"
"호호호...당신의 그 호기로 인해 본 암흑마천이 정식으로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
, 과거 당신의 사문(師門)이었던 소림(小林)은 피로 물들 것이예요."
음성의 끝부분은 어느새 대웅보전의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광오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었다.
감히 천하 무학의 본산이자 무리의 태두(泰斗)인 소림을 피로 물들이겠다니...
헌데 기이한 일이 아닌가?
삼백 년 전 천하를 제패했던 암흑마천이 금제(禁制)에 묶여 있었다니,
도대체 누가 있어 암흑마천에 금제를 가할 수 있었던 말인가?
모를 일인데...
홍포괴승은 이순간 안색을 무겁게 굳힌 채 무슨 생각엔가 깊이 잠겨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오송학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 주육광승(酒肉狂僧)이라는 늙은 중은 실로 대단한 위력을 지녔구나!)
실상 주육광승은 오송학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내력을 지닌 무림기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
백팔마녀대가 천하를 피의 혼돈(混沌) 속으로 몰아 넣었던 바로 그 직후,
소림(小林)은 한 명의 제자(弟子)를 파문(破門)시킨 일이 있었다.
광덕사 대혈전 당시 장렬히 전사한 십방대선사의 다비식(茶毘式)을 거행하는 도중
술에 만취한 채 한 마리의 통돼지를 뜯으며 난동을 부린
십방대선사의 한 제자가 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어인 연유인지 그는 불제자(佛弟子)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망동(妄動)을 부렸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사부의 경건한 다비식 중에...
그것은 너무도 큰 범계(犯戒)요, 불경(不敬)인지라
소림(小林)은 그 제자를 즉시 파문시켜 버렸다.
그렇다.
그때 파문된 제자가 바로 지금의 주육광승이었다.
당시 그가 무슨 연유로 그런 망동을 부렸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는 그 일에 대해 한 마디의 변명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쨋든 그 이후로 그는 스스로를 주육광승(酒肉狂僧)이라 자칭하며
천하를 떠돌며 숱한 괴행(怪行)을 벌여왔다.
단언컨대 천하에 그보다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인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어쨋거나 내가 아직 죽지 않은건 분명하구나!'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으로 홍건히 젖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환영경을 탈취하기 위해 벌써 몇 명의 기인들이 이곳에 나타났는지조차
기억이 안날 지경이었다.
이때 돌연,
한줄기 고막을 찢을 듯한 굉렬한 호통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멍청한 놈! 노납이었다면 벌써 환영경을 내팽개쳐도 수십 번은 내팽개쳐 버렸을 것이다."
오송학이 흠칫 바라보니 주육광승은 두 발끝을 석불상의 머리에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악취가 풍기는 싯누런 이를 드러내고 징글맞게 웃고 있었다.
오송학은 재빨리 녹상아를 몸으로 막으며 물었다.
"당신도 환영경을 원하오?"
"쯧쯧...업보로다! 어린 나이에 보물에 대한 욕념(慾念)이 하늘에 닿아 있도다."
"모름지기 보물이란 천하를 혈겁에 빠뜨리는 마물(魔物)에 지나지 않는 것...
어린 중생아. 네놈의 표정을 보건대 죽으면 죽었지 결코 환영경을 내놓지 않을 것 같구나."
"나는 당신이 환영경을 원하느냐고 물었소."
"그렇다고 불자(佛子)의 손에 피를 묻힐 수도 없고..아미주육타불.."
주육광승은 잠시 고뇌어린 표정을 짓더니
돌연 우수를 번쩍 쳐들어 석불상의 귀를 싹둑 살라 들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공력이다.
오송학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어린 중생아, 보물을 영원히 그 속에 묻어 버리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천하의 홍복(洪福)..."
꽝...!
주육광승(酒肉狂僧)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거대한 석불상의 귀로 귀속을 콱 틀어막았다.
"네놈도 그 보물과 떨어지기 싫을테니 함께 그안에서 죽도록 해라."
"안돼!"
오송학은 다급히 외치며 막힌 돌을 밀어내려 했다.
허나 그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 돌은 한 치의 미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끙...이..이런! 야, 땡초 중아! 빨리 이 돌을 치워라! 이 안엔 어린아이도 있단 말이다!"
그러나 주육광승은 이미 가버렸는지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고 보자. 이 땡초중! 내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겠다!"
오송학은 노기가 충천하여 버럭버럭 악을 써댔다.
그때 등 뒤에서 녹상아의 들뜬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야, 여기 좀 봐!"
"시끄러!"
"여기 좀 보라니까! 굴이 뚫려 있어."
"굴이라고..?"
그제야 오송학은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가 막혀 있는지라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으로 변해버린 귓속의 안쪽,
그곳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송학은 조심스레 그곳으로 다가가 빛이 새어들고 있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동혈(洞穴),
어디로 연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납작하게 엎드리면 간신히 기어들어 갈 수 있는 동혈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녹상아가 오송학의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오빠야, 빨리 이 안으로 들어가 보자."
"좋아."
오송학은 달리 방도가 없는지라 그 동혈 속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아. 오빠 뒤를 바싹 따라와야 한다."
"알았어. 지금 따라가고 있어. 그런데 오빠 발에서 냄새가 나."
녹상아는 이 와중에도 천진한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오송학은 약간 창피한 생각이 들어 급히 변명했다.
"재수없게 아까 오다가 똥을 밟았기 때문이다."
"에이, 더러워."
"그렇다고 바싹 따라오지 않으면 오빠 혼자 가버릴 거다."
"아...알았어."
동혈은 넓어지지도 않고 좁아지지도 않았으나
언제부터인지 비스듬히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이 분명 빠져나가는 길인 듯 하다!'
오송학은 동혈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한가닥 기대감이 일기 시작했다.
본래 석불상의 귀는 칠 팔 장의 높이에 위치해 있었지 않은가?
허나 그의 기대감은 이장 여를 더 나아갔을 때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동혈이 하나의 좁은 공간을 형성하며 끊겨진 것이다.
'제길...! 여기서 죽으라는 것인가?'
그때 녹상아가 물었다.
"오빠야, 다 왔어?"
잔뜩 기대감이 어린 음성이다.
오송학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상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럼 빨리 나가지 않고 뭘 하는거야? 냄새나 죽겠단 말이야!"
'제길...누군 나가기 싫어 이러고 있는 줄 아느냐?'
"빨리 나가 오빠."
"지금은 못나가."
"왜?"
"앞에 뱀이 한 마리 있어."
"뱀? 엄마야!"
뱀이라는 말에 녹상아는 기겁을 하고 오송학의 발을 붙잡았다.
냄새난다고 투정하던 그 발을..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이어 그는 좁은 공간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그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공간의 천정,
그곳에 거의 육안(肉眼)으로 가늠할 수 없는 콩알보다도 작은 돌출부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혹시...?'
오송학은 생각과 동시에 손을 들어 그 돌출부를 힘껏 눌렀다.
순간,
덜- 컹!
그가 엎드려 있던 바닥이 좌우로 쫙 갈라지며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져들어왔다.
오송학의 몸과 녹상아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 것은 그 직후였다.
"앗!"
"아악!"
콰- 쾅!
바닥은 눈깜짝할새에 다시 본래의 상태대로 굳게 닫혀 버렸다.
* * *
드드드드..
마찰음,
돌과 돌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대웅보전 안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마찰음은 석불상의 왼쪽 귀를 틀어 막은 돌이 빠져나오며 나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주육광승이 틀어막은 그 거대한 돌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
한 사람은 방립을 깊숙이 눌러쓴 흑의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백발(白髮)이 온통 얼굴을 덮다시피하여 용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폐표노인이었다.
그들은 암흑마천의 혈살귀화로 인해 이곳을 떠났던 시계명과 소소실혼이었다.
그들은 본래 이곳을 완전히 떠난게 아니었다.
떠나는 척 하고는 주위에 몸을 숨겨 이곳에서 벌어진 광경을 은밀히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암흑마천의 인물들과 주육광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환영경을 취하고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윽고,
석불상의 귀를 틀어막고 있던 거대한 돌을 제거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일단 입구를 트기는 했으나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가 문제였다.
"시계명, 자네가 먼저..."
"허헛...아니네. 자네가 먼저..."
누가 되었든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위험부담을 안게 된다.
뱃속에 구렁이가 들어 앉아 있어도 수십 마리나 들어 앉아 있을
천하의 노마두(老魔頭)들인 그들이 어찌 서로를 믿을 수 있겠는가?
헌데 돌연,
시계명이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노부가 먼저 들어가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성큼 석불상의 귓속으로 몸을 들이 밀었다.
소소실혼의 입꼬리에 득의의 미소가 빠르게 스쳤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이내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젠장..!'
시계명이 머리쪽이 아니라 두 발부터 동혈속으로 들이밀고 있지 않은가?
즉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들어가자는 심산이었다.
'천하에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
소소실혼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으나
마지못해 시계명과 얼굴을 맞대고 동혈 속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계명도 나름대로 내심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흐흣... 엉큼한 놈!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노부인줄 알았더냐?
노부의 발이 그 어린 놈의 몸에 닿는 순간 네놈은 끝장이다!'
두 노마두는 아마도 머릿속에까지 각기 수십여 마리의 구렁이를 들어 앉혀 놓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뭔가 잘못되었다는걸 깨달아야만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대체 놈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결국 그들은 헛탕을 친채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심정으로 되돌아 나오는 헛수고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들이 동혈을 빠져 나왔을 때는 여명(黎明)이 뿌옇게 터오는 새벽녘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석불상의 귓속에 앉아 머리를 굴렸지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리 만무했다.
스슥!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석상아래로 몸을 날려 내려섰다.
그들의 안색이 크게 일변한건 바로 그때였다.
삼인(三人),
그들은 터오는 여명을 등뒤로 받으며 대웅보전의 정중앙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거늘..?'
나란히 앉아 있는 삼 인 가운데 두 명은 바로 주육광승과 제자인 흑의미소녀였다.
나머지 한 명은 단아한 문사(文士) 차림의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백의인(白衣人)이다.
그 백의중년인을 살피던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삿 인물이 아니구나! '
그렇다.
물처럼 잔잔한 시선에 온화한 미소마저 띄우고 있는 백의중년인,
그의 전신에선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기도와 위엄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천하에 저런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결코 벽라천군 금무천의 아래가 아니다!'
이때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주육광승이 입을 열었다.
"이분은 대명황실(大明皇室)의 황친(皇親)이시오."
황친이라면 다름아닌 황제(皇帝)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임을 뜻하는 것,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의혹의 눈빛을 교환했다.
황실의 황친이 어찌 무림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을수 없소! 증거를 보이시오!"
"증거라.."
백의중년인은 담담히 뇌까리더니
품속에서 붉은 물체를 하나 꺼내 그들에게 들어 보였다.
정교한 흠사옥패(欽賜玉牌)...
<大明之王親臨>
옥패엔 그 열자의 글자가 금빛으로 뚜렷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 대명황실의 왕(王)의 신분인 인물만이 지닐 수 있는 옥패임이 분명했다.
'사실이었구나!'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전신을 석상(石像)처럼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천민(賤民)이 삼가 황친을 뵈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으며 황망히 부복대례를 취했다.
백의중년인은 묵묵히 그들의 예를 받았다.
이어 그는 오른손에 든 학익선(鶴翼扇)을 펼쳐 자신의 일 장 앞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예를 거두고 이리 다가와 앉으시오."
나직한 음성이다.
허나 그 음성엔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은은히 서려 있었다.
"황공하옵니다!"
백의중년인이 가리킨 곳으로 다가온 시계명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후에야 비로소 조심스럽게 몸을 앉혔다.
그러자 주육광승도 품속에서 백색물체를 하나 꺼내 그들에게 들어 보였다.
그것은 암흑마천의 미지(未知)의 소녀가 타고 있던
가마 속으로 쏘아 보냈던 것과 같은 것으로써 일종의 명첩(名牒)이었다.
"시주들은 노납의 신분도 알아 둘 필요가 있소."
그는 말을 끝내는 순간 이미 명첩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그 명첩 위에 쓰여진 두 글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오...!"
"대사께서 바로 칠십 년 전의...?"
주육광승은 홀연 장탄식을 터뜨리며 소소실혼의 말을 가로챘다.
"노납은 애초 소림을 이끌만한 그릇이 아니었소. 지금 와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오."
그러나 소소실혼은 이때 주육광승을 향해 진정어린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시계명도 마찬가지였다.
주육광승,
도대체 그의 진정한 신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때 백의중년인이 학익선을 접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고자 하오.
이 일은 그대들이 몸을 담고 있는 천하...바로 그 천하를 위한 것이오."
"그대들은 나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시계명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일인지부터 말씀해주시지요."
"나는 분명 천하를 위한 일이라 밝혀 두었소."
백의중년인의 음성은 시종 조용했다.
그러나 시계명은 반감을 느낀 듯 분연히 말을 받았다.
"본래 황실은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는다는 것이 철칙(鐵則)으로 이어져 왔소이다.
아무리 황친이시라 하나 노부 등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오이다."
백의중년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 나 또한 강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나 역시 무림인이라는 사실이오.
내가 굳이 그대들의 대답을 먼저 듣고자 하는 것은
이 일이 극히 비밀리에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오."
"만약 내가 먼저 부탁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얘기했을 때,
그대들이 거부를 한다면 나는 그대들을 제거해야 하는 불상사를 초래할 수밖에 없소."
시계명과 소소실혼은 동시에 안색이 굳어졌다.
그것은 결코 허언(虛言)이라 여길 수 없는 말이었다.
이미 그들은 처음 백의중년인을 대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기도를 느끼지 않았던가?
'정말 괴이한 일이군....!'
대체 천하를 위한 그 일이란 어떤 것이기에 백의중년인은 저토록 신중을 가한단 말인가?
잠시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이윽고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시계명이었다.
"노부는 기실 무림에 출도(出道)한 이래로 천하인들의 무수한 지탄을 받아왔소이다.
허나 황친께서 노부 등에게 이미 호의를 베푸신 바,
노부는 맹세컨대 황친의 부탁을 사심없이 받아들이겠소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소실혼이 의연히 말을 받았다.
"노부도 맹세하오!"
"고맙소."
백의중년인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밝게 미소 지었다.
시계명이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황친께서는 방금 스스로를 무림인이라 밝히셨소이다
. 노부가 짐작키에 황실(皇室)의 성(姓)인 주씨(朱氏) 성을 쓰는 무림인 중
황친 정도의 신위(神威)를 지닌 인물은 단 한 사람,
오작(五爵) 중 유작(儒爵) 뿐이오이다."
소소실혼이 빠르게 말을 받았다.
"노부도 동감이오이다. 황친께서는 혹시 유작이 아니신지..?"
순간 백의중년인의 입에서 낭랑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하핫..! 내 어찌 두 분의 날카로운 안목을 벗어날 수가 있겠소?
그렇소. 내가 바로 유작이오."
오오..
놀라운 말!
바람처럼 표홀하며 손속이 이를데 없이 잔인독랄하다는
이 시대 최고의 신비인(神秘人) 유작(儒爵) 주위천(朱偉天),
그가 뜻밖에도 대명황실의 황친이었을 줄이야!
한데 그가 꾀하고 있는 천하를 위한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