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혈로행(血路行)
(1)
석비룡은 불가사의할 정도의 신법으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모습은 태암산의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석비룡은 산길을 올라가며 몹시 난감해 했다.
일단 태암산에 도착하긴 했으나 이 넓은 산중에서 벽소운을 잡아간 그 자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괴이한 일이군. 대체 칠채월화 벽소운을 납치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 누구란 말인가? 평소 그녀의 행적으로 봤을 때 남과 원한을 맺은 일은 거의 없을 테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어쩐지 불쾌하고 뭔가 실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파천붕음까지 사용한 걸로 봐선 굉장한 위기에 처했던 건 분명하고…… 내게 협박성 쪽지를 남겼다는 건 흉수가 날 안다는 얘기고…… 벽소운과 며칠 동안 함께 행동했다고 해서 그녀를 미끼로 날 잡겠다는 걸 보면 최소한 연인 사이쯤으로 오해를 했다는 얘긴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사건은 더욱 복잡해졌다.
석비룡은 곧 심드렁한 표정이 되었다.
"근데 왜 내가 그 천방지축 같은 여자를 걱정하면서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 여자 때문에 내가 당한 고초를 생각하면 얼씨구나 하고 박수를 쳐야되는 일이 아닐까? 분명 그게 정답인데……?"
하지만……
석비룡은 으이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너무 여자에게 약한 게 탈이란 말이야. 그 사이 그 골치 아픈 여자에게도 정이 들었나?"
석비룡은 혼자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
"아무리 천하의 여자들이 다 말라죽어도 그렇지, 내가 그런 천방지축의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록 성격이 모나긴 했지만 청순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또 무슨 이유란 말인가?
삘리리……
삐이릴리……!
문득 숲속에서 피리소리가 느닷없이 들려왔다.
석비룡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이런 심산에서 누가 피리를……."
삘리리! 삘리리!
피리소리는 마치 정다운 님과 속삭이는 듯한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였다. 창공을 유유히 나는 학의 울음 소리마냥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석비룡은 한 순간 그 피리 소리에 도취되었고, 현기증을 느끼는 듯 눈빛이 몽롱해졌다.
"가만? 이 피리 소리는 뭔가 이상한데……."
삘리리!
삐이이……!
두 눈꺼풀이 천근처럼 느껴지며 극도의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거지?"
석비룡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머릿속이…… 만 근 돌이 들어있는 듯 무겁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이 기분까지 피리 소리가 만들어 낸 조화란 말인가?"
그 사이에도 그의 눈꺼풀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그렇군! 이건 단순한 피리 소리가 아니야! 피리 소리가 사방의 산악에 부딪혀 수많은 메아리를 형성해내면서 무서운 조화를 부리고 있어…… 누군가가 지독한 음공(音功)으로 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턱 아래로 식은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석비룡은 지금 극한의 내가진기를 끌어올려 음공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음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뭐야? 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려 심기를 가다듬는데도 정신이 더 혼미해진다는 건가?'
삘리리리리……!
점점 더 극렬하게 들리는 피리 소리.
석비룡의 몸은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기우뚱거렸지만, 그의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지 알았어!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수 있는 음공을 가진 인물이라면 오직 한 명 뿐…… 만취공자(滿醉公子)……
소문만 들었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내게 찾아와 인사를 한단 말이지?'
석비룡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허나…… 이 석비룡이 이 정도에 허무하게 꺾인다면 천하의 천리무영이라는 체면이 뭐가 되겠어?"
흐읍, 숨을 한껏 들이켰다.
눈에 핏발이 서고, 팔뚝의 파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벽력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범천불음(梵天佛音)!"
마치 일시간에 태풍이 휘몰아치듯 나무들이 갈대처럼 쓸려갔으며 바위는 쩍쩍 금이 갔다.
퍼드득!
숲 속에 둥지를 틀고 있던 많은 새들이 날개를 퍼득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사람의 소리로써 이 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상상을 불허하는 신음(神音)이 아닐 수 없었다.
석비룡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 정도면 서로 인사는 나눈 것 같고……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게 어떻소?"
즉각 소리가 들려왔다.
"헛허!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일찍이 하늘도 놀란다는 천경십이음(天驚十二音)이 이 하늘 아래 존재하건대…… 그 가운데서도 세 가지 음공이 워낙 뛰어나 천하삼대신음(天下三大神音)이라 일컬었던가? 노부의 반성적음(反聲笛音)도 천경십이음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천하 삼대신음 중 하나인 범천불음(梵天佛音) 앞에선 그야말로 태양 앞의 반딧불이요, 몽둥이에 얻어맞은 강아지 꼴이로다! 껄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등에는 커다란 술독을 메고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걸음은 비틀거렸지만 그 기상은 늠름했다. 특이한 것은 어수선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였다.
석비룡을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끄억!"
트림을 할 때마다 술 냄새가 주위를 진동했다.
"음음…… 술이 부족해…… 술이……."
만취공자는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손목을 꺾어 등에 멘 술독 바닥을 퉁! 두드렸다.
그러자 술독에서 한 줄기 술 기둥이 위로 솟아오르더니 홱 꺾어져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신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석비룡은 내심 긴장했다.
"커어!"
만취공자는 기분 좋게 트림하며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린 듯 석비룡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무상의 영광이지. 무림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빠르다는 천리무영을 만나게 되다니 말이야."
석비룡이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린 채 허리를 숙였다.
"마찬가지올시다. 무림 육문의 하나인 취검문(醉劍門)의 문주이자, 신비로운 행적으로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는 만취공자를 이렇게 만났으니 말이오."
"껄껄껄!"
만취공자는 발걸음을 비틀거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오늘은 정말 술맛이 나는군. 세상이 빙빙 돌고 나도 뱅뱅 돌고, 덩달아 자네도 돌고…… 돌고 돌다 보면 서로 이렇게 만나는 게 바로 운명이라는 것 아니겠나?"
석비룡도 웃었다.
"핫핫! 그 말씀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 취하는 기분이올시다. 그 술항아리의 술까지 나누어 마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소!"
만취공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석한 일이지만 난 곧 죽을 자와 술을 나누는 건 별로 좋아하질 않네."
게슴츠레하게 감은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달빛을 받은 조약돌처럼 반짝거렸다.
석비룡은 구김살 없이 활짝 웃었다.
"내 벌써부터 만취공자께서 무림맹의 척살령 때문에 찾아왔다는 걸 짐작했소."
만취공자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아…… 잘못 짚었어. 취검문이 무림맹 소속이긴 하지만 그 허수아비 같은 무림맹주의 척살령 때문에 자넬 찾아온 건 아니야."
"그렇다면……?"
석비룡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셔졌다.
"무림맹과 연관이 없다면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고매하신 만취공자께선 황실의 끄나풀이 되신 모양이구려."
만취공자의 얼굴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살쾡이와 같이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오! 역시 소문대로 천리무영의 두뇌회전은 빠르기 그지없군. 그런 의미에서 내 특별히 생각을 바꿔 술 한 모금 선사하겠네!"
손뼉을 짝! 쳤다.
술독에서 술 기둥이 위로 솟구치더니 홱 방향을 바꿔 석비룡을 향해 가공할 기세로 뻗어왔다.
촤아아아!
석비룡은 주저하지 않고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주시는 것이니 고맙게 마시겠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뻗어오던 술 기둥이 갑자기 그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다시 휙 방향을 틀어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석비룡이 입을 쩍 벌리자 술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좋아! 정말 좋은 수법이야."
만취공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헤죽헤죽 웃었다.
그러나 석비룡은 웃지 않고 물었다.
"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자가…… 등룡왕부를 멸망시킨 자와 동일인이오?"
만취공자는 슬그머니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뭘 알아내려고 넘겨짚는지 모르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 난 별로 아는 게 없으니까 말이야! 대신……."
말끝을 흐리더니 손뼉을 짝짝! 두 번 연달아 쳤다.
스스스스……!
땅에서 불쑥 불쑥 솟아올라 빠르게 그의 주위를 둘러싸는 네 명의 인영. 키가 크고 작은이와 똥뚱하고 마른 이가 뒤섞여 있었으나 공통된 것은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싸늘한 냉기가 흐른다는 점이다.
석비룡은 이 자들로부터 느껴지는 기도에서 필시 고도의 수련을 거친 전문살수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친구들에게 한 번 물어보게나.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취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내가 보기에 그 친구들은 별로 말을 즐길 것 같지는 않소."
"껄껄껄! 맞았네. 잘 본 거야!"
만취공자는 갑자기 뚝 웃음을 그친 채 살벌한 기세로 말했다.
"너희들의 앞에 선 인물은 하늘 아래 가장 빠르다는 절정고수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정중히 모시도록!"
휘리리릭!
그들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재빨리 움직여 석비룡을 둘러쌌다.
(2)
쉐에엑……!
파공음이 들리며 네 사람이 일제히 석비룡의 눈 앞으로 빠르게 닥쳐왔다.
그들은 모두 양손에 칼을 쥐고 있었는데, 칼을 마치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짓쳐들어왔다.
석비룡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군! 쌍도법(雙刀法)에 있어 천하제일이라는 쌍도문(雙刀門)의 수법보다 훨씬 날카롭고 독랄하다!'
파파파파팟!
그들이 내리치는 수법은 민첩하면서도 매서웠다.
'도세(刀勢)는 청람독도파(靑嵐毒刀派)의 수법과 비슷한데 몸의 움직임은 남조장(南朝莊)의 세류표신법(細流漂身法)과 흡사하다?'
검세가 더욱 빠르게 변했다.
쉬이잇!
석비룡은 몸을 틀어 피했으나 칼 하나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석비룡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것들이 감히 내 옷에 흠집을 냈어?'
석비룡은 즉시 무영환리보를 펼쳐 그들에게서 사오 장 정도 떨어져 나왔다.
상대를 경시하지 못하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들이 공격을 가해오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갔다.
"그따위 느려터진 공격에 내가 당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석비룡의 신형이 무섭게 빨라졌다.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휘두르는 칼 사이를 헤집으며 그들의 몸 가까이 다가갔다.
"좋구나!"
만취공자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 이건 도무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야. 저런 환상적인 신법(身法)은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거늘…….'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석비룡이 보이는 신법은 무영비록의 비술인 환공보법인 것이다.
만취공자의 눈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또렷해졌다.
'좋아, 좋아……오늘 이 취몽이 그대에게 하늘 밖에 하늘이 존재함을 똑똑히 보여준다!'
갑자기 그는 소리를 높여 외쳤다.
"사대쌍도수(四大雙刀手)는 내 말을 들으라…… 달그림자는 구름을 벗어나고[月影出雲]……."
부르릉!
네 명이 휘두르는 여덟 개의 칼이 바람을 가르며 곧장 석비룡의 가슴을 향해 찔러갔다.
석비룡은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자 내심 적잖이 당황했다.
몸을 뽑아 뒤로 날렸으나 칼이 스치며 그의 가슴에서 촤악! 피가 뿌려졌다.
만취공자의 외침이 계속 이어졌다.
"해는 떨어져 무상한데[落日無想]……."
사대쌍도수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위 아래로 곡선을 그리고 날아왔다.
석비룡은 생각했다.
'이럴 수가…… 이자들의 도법이 어떻게 갑자기 이토록 고강해졌을까?'
내심 섬뜩했지만 그렇다고 놀라고만 있기에는 사태가 너무나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두 마리의 용은 어우러져 하늘을 날고[雙龍出天]……."
파츠츠츠……!
사대쌍도수가 휘두르는 여덟 개의 칼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회전하며 석비룡의 허리를 쓸었다.
"놈의 기력이 떨어지고 있다…… 수많은 길은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萬路歸元]……."
수십 줄기의 도기가 석비룡의 온몸을 갈가리 찢어낼 듯 세차게 덮쳐들었다.
석비룡은 환공보법을 밟으며 간신히 피하고는 있었지만 반격할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뭐야? 이런 기막힌 움직임이라는 건……!'
여덟 개의 칼에서 뻗어 나온 흰 광망이 비처럼 퍼부어졌고, 석비룡은 몸을 크게 한 바퀴 옆으로 회전하며 자신을 가두었던 칼의 그물에서 빠져 나왔다.
허나 그의 옷은 마치 걸레쪽처럼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만취공자는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젠 잡았어!"
그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
"놈, 마지막이다. 사도비천(四刀飛天)!"
파파파팟!
만취공자의 기대대로 사대쌍도수는 석비룡의 몸을 여덟 토막으로 잘라냈다.
그러나 손바닥에 느껴지는 것은 사람을 벨 때의 묵직함이 아니라 너무나 가벼운 느낌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여덟 개로 잘라진 나뭇가지였다.
"허억!"
사대쌍도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석비룡의 모습이 넷으로 나뉘어져, 오히려 사대쌍도수를 석비룡이 포위한 형국이었다.
만취공자는 침착했다.
그는 다시 사대쌍도수를 재촉했다.
"흥! 어림없는 수작이야…… 하나씩 처리한다! 진천뇌경(震天雷驚)!"
사대쌍도수는 급히 발로 땅을 차고 공중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파팡!
석비룡의 몸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또 다른 석비룡의 몸 역시 복부가 꿰뚫려 죽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석비룡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질펀한 뇌수를 사방으로 뿌리며 쓰러졌다.
이제 네 명의 석비룡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나뭇가지로 변해 있었다.
만취공자의 눈이 한쪽에 서 있는 소나무를 응시했다.
"네 개의 허상(虛像)이 지났으니 마지막 실상(實像)이 나타나야지!"
소나무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만취공자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외쳤다.
"놈의 한계는 거기까지다! 천풍귀사(天風鬼射)!"
사대쌍도수는 즉각 소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우우우욱!
거대한 소나무가 여덟 개의 칼이 일으키는 폭풍에 휩쓸렸다.
콰아앙!
소나무는 광오한 도기에 휩쓸려 손바닥 크기의 나무조각으로 쪼개지며 폭발했다.
사대쌍도수는 밑둥만 남은 소나무 앞에 내려섰다.
그때였다.
사방으로 날아가던 조그만 나무조각들이 생명이라도 있는 듯 꿈틀거리며 살아나 그들의 몸을 향해 비수처럼 날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환영에 불과했지만 사대쌍도수의 눈에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였다.
"뭐……뭐야?"
파파파팡!
처음에는 힘 있고 절도 있게 칼을 휘둘러 나뭇조각을 쳐냈지만 그것이 하나 둘도 아니도 수천수만 개로 변해 다시 날아오자 그들이 휘두르는 칼의 예기는 점점 무뎌져가고 있었다.
"정신 차려! 모두 허상이다. 일평도수(一平刀首)!"
만취공자가 소리를 질렀으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쳤다.
다만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후후……! 자네들의 심기(心氣)는 흐트러졌고, 이것으로 승부는 끝이야!'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나뭇조각의 세례가 갑자기 멎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빙긋 웃고 있는 석비룡의 얼굴을……
그의 몸이 유성처럼 사대쌍도수의 한 가운데를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사방천지를 폭풍노도처럼 휩쓰는 가공할 기세가 구름처럼 일어나 그들을 덮쳤다.
사대쌍도수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뒤로 물러서며 무작정 칼을 휘둘렀다.
퍼퍼퍼퍽!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고, 사대쌍도수의 입에서 터져나온 붉은 선혈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네 명의 신형은 태풍 속의 가랑잎처럼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질펀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몇 차례 몸을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후후! 이걸로 원금은 받은 셈이고……."
석비룡은 몸을 돌려 만취공자를 향하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젠 이자를 받을 차례인가?"
만취공자는 약간 멍청해져 있다가 그의 시선을 받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환공보법과 환상진의 절묘한 조화라는 건가?"
석비룡은 상대가 눈치 채지 않을 정도로 낮게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솔직히 약간 애를 먹은 건 사실이오."
"약간 애를 먹었다고?"
만취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늘을 보고 허,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석비룡을 쳐다봤다.
"이봐, 자네가 지금 해치운 자들이 누군지 아는가?"
"……?"
석비룡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만취공자가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들은 사대쌍도수라는 이름뿐이다.
만취공자는 술독을 어깨 위로 들어올려 술을 마셨다. 아니 마셨다기 보다는 들이 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콸콸!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듯 술은 그의 입 속으로 부어졌다.
만취공자는 소맷자락으로 입가의 술을 훔쳐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군. 그 친구들은 무려 십 년 간이나 특수한 비법으로 지옥의 수련을 거쳐 키워진 최고의 도혼(刀魂)들이야! 젠장맞을!"
그는 마지막 남은 안주를 남에게 뺏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허나 좋은 구경을 한 걸로 위안을 삼도록 하지. 당연히 이자는 자네가 아닌 내가 받아야 하고 말이야!"
흐느적……
흐느적……
만취공자는 술취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석비룡에게 접근해왔다.
"꺼억……! 오늘은 정말 술맛 나는 날이야……."
"후훗! 이자를 누가 받는가는 잠시 후면 결론이 날 것이고……."
석비룡은 벙긋 웃어 보이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취공자께 묻지 않을 수 없구려. 인질로 잡은 칠채월화를 대체 어찌하실 셈이오?"
만취공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헛소리! 우리도 지금 그녀를 찾고 있는 형편인데……!"
석비룡은 비아냥거리듯 되받아쳤다.
"설마 그녀를 납치해놓고 날 여기로 유인한 일을 잡아뗄 작정이오?"
만취공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저런 저런…… 우린 자넬 유인한 게 아니라 단지 추적해왔을 뿐이야."
석비룡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그럼 벽소운의 실종은 어찌된 거지?'
(3)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시큰한 술 냄새를 풍기는 공기조차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석비룡은 싸늘하게 웃었다.
"만취공자, 당신이 비록 취검문의 문주이고 대단한 존재라지만 난 안중에 두지 않아. 당신은 결국 내게 패배하고, 원하든 원치않든 등룡왕부를 멸망시킨 흉수에 대해 털어놓게 될 거야."
만취공자는 갑자기 껄껄,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석비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만취공자는 매우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취몽이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즐겨 읊는 싯귀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겠나?"
"……."
"세상을 전부 취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화끈한 싯귀이니 자네도 대장부라면 감히 취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시를 읊기도 전에 이미 시에 취한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때 등에 멘 술독에서 술기둥이 촤아아아아! 솟구쳐 올랐다.
술 기둥이 끝없이 높이 올라갔다가 그 힘이 다하자 분수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술비(酒雨)를 뿌렸다. 그 광경은 마치 자욱한 용처럼 솟아오른 술 기둥을 술안개가 구름처럼 감싸는 듯 절묘했다.
석비룡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내공의 힘으로 삽시간에 술 안개를 만들어 상대방을 환몽(幻夢)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주증술(酒蒸術)이로구나!'
그 사이로 만취공자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주앉아 술을 마시노라니 산의 꽃들이 미소 짓는다.
한 잔 한 잔 기울이고 또 다시 한 잔.
나는 취했으니 자려네. 자네는 가게.
내일 아침에 맘 내키면 거문고 안고 오게나.
兩人對酌山開花.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眠卿且去.
明朝有意砲琴來.
스스스스……!
자욱한 술 안개 속에 아름다운 꽃밭의 들녘, 온갖 웃는 얼굴들의 형상이 허공에 나타났다.
석비룡은 당황했다.
'뭐야 이 광경은……? 벌써 주중술에 내가 걸려들었다는 건가!'
만취공자는 더 없이 행복한 모습으로 그 들녘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렸다.
"헛허……! 더러운 한 세상! 취해서 살아가리라. 모든 근심은 술독에 묻어 버리자꾸나!"
석비룡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기증을 느끼는 듯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정말 기막힌 솜씨야 만취공자……! 소문보다 훨씬 대단해!"
석비룡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만취공자는 어린아이처럼 꽃밭을 이리저리 뛰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벗이 나를 알아주니 더욱 즐겁지 아니한가! 그런 의미에서 술시중을 들 계집들도 부르도록 함세!"
춤을 추며 품속에서 갖가지 색의 종이를 꺼내 허공에 뿌렸다. 종이 위에는 아름다운 미녀들의 전신상(全身像)이 그려져 있었다.
허공에 산산이 뿌려져 흩날리는 종이들이 팔락팔락 꽃밭 위에 내려앉았다.
"자 모두들 잠을 깨거라! 오늘 한 번 진탕하게 취해 놀아보자꾸나!"
만취공자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신기하게도 종이 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미녀들이 꽃밭 속에서 부시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석비룡은 놀라서 두 손을 힘없이 드리우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식은땀이 가슴 사이로 고랑을 파고 흘러내렸다.
주먹은 꽉 쥐여 부들부들 떨렸다.
여인들은 신비로운 미소를 띠며 석비룡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녀들은 속이 환히 비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있어 요염한 육체가 은근히 드러나 보였다.
풍만한 젖가슴과 가냘픈 허리, 그리고 숲이 우거진 삼각지대 등등……
여인들은 그에게 다가오며 화사한 꽃향기 같은 향기를 뿜어내면서 정답게 속삭였다.
"어쩜…… 너무 멋있는 분이야!"
여인들은 풍만한 몸을 석비룡에게 살며시 기대며 방그레 웃었다.
여인의 음성은 달콤하면서도 매우 부드러워, 이 음성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귀머거리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공자님……! 그런 얼굴은 싫어요.…… 무서워……."
잘록한 허리를 배배 꼬며 애교를 떠는가 하면 보드라운 손이 석비룡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가슴을 파고 들었다.
여인들은 벌써 절정에 달한 것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단 내음을 토했다.
"하아!"
석비룡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잔뜩 일그러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만취공자도 내가 미녀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구려! 그야말로 급소를 제대로 찔린 기분이오."
석비룡은 여인들의 몸 구석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결국 만취공자의 주중술에 완전히 넘어간 것일까?
석비룡의 커다란 두 눈에선 야수만이 지닐 수 있는 욕정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소리쳤다.
"자! 어디 한 번 화끈하게 놀아보자꾸나. 우선 모두 그 거추장스런 옷부터 벗어던져라!"
여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아이! 어쩜 그런 말씀을……?"
"싫어……싫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여인들의 옷은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곧 백옥같이 하얀 희고 부드러운 알몸이 고혹적으로 드러났다. 고무공처럼 탄탄하게 솟아오른 젖가슴과 은밀한 비부,
여인의 몸은 어느 한 곳 가린 곳 없이 석비룡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인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며 걸어왔다.
"이제 공자님도 옷을 벗으세요."
"공자님! 우리와 함께 천상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겨 보세요."
여인들이 손을 내밀어 석비룡의 옷을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석비룡의 모습이 마치 안개에 가린 듯 뿌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앞쪽에서 껄껄!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녀들은 당혹스러워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석비룡은 가부좌를 하고 반 장 쯤 공중에 떠있었다.
만취공자의 눈에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호오, 이것 봐라? 내 주중술에 완전히 빠져든 것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
"허상(虛像)은 물러가라! 인화지력(燐火指力)!"
석비룡은 날벼락 같은 고함을 지르며 두 손을 앞으로 쫙 펼쳤다.
화르륵!
그의 손에서 방출된 강기는 불꽃으로 변해 여인들을 덮쳐갔다.
화라라라락!
여인들의 몸은 불꽃에 닿자마자 기름종이처럼 화르륵! 불길에 휩싸였다.
"끄아아악!"
"아악! 살려줘!"
여인들은 본래 그녀들이 나온 종이로 되돌아가 시꺼먼 재로 변하고 있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재가 흩날려갔다.
처척!
만취공자가 재가 뿌려지는 바람 반대편에 섰다. 그의 얼굴은 몹시 신중해져 있었다.
"자네가 처음이야…… 내 주중술에 걸리고도 무사히 빠져나온 인물은……."
석비룡은 씨익 웃었다.
"주중술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애석하게도 나 또한 그 수법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소."
만취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진짜를 보여줄 차례로군!"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단소 하나를 꺼냈다.
"조심하게, 천리무영!"
착!
단소 끝에서 풀잎처럼 얇은 세 가닥의 면검(緬劍)이 쭉 뻗어나왔다.
종이처럼 얇은 검……
만취공자는 검 끝으로 석비룡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삼인취적검(三刃醉笛劍)일세."
촤아악……!
술독에서 다시 술이 솟구쳐 반경 십 장 내에 비처럼 뿌려졌다.
"취검문의 모든 무공은 술 속에서 이뤄졌음이니…… 사방에 술기운이 가득하다면 천하의 어떤 병기가 감히 삼인취적검의 위력을 당해낼 수 있으랴!"
만취공자의 검이 땅 끝을 향하고 손은 하늘을 향했다.
"하늘도 취하고 땅도 취했으니, 나도 취하고 검도 취했노라!"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최강의 진기가 주입되었다는 반증이리라.
츠츠츠츠……!
세 개의 검 끝에서 뻗어나온 세 가닥 검강(劍 )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평생 검을 연마한 검의 달인도 이루기 힘들다는 검강이 만취공자의 검에 의해 실현되었다.
"천리무영! 네가 아무리 빨라도 이 삼인취적검은 피할 수 없다!"
취현검로강(醉玄劍爐剛)!
취검문 최고의 절기였다.
석비룡은 호흡을 가다듬어 내력을 상승시켰다.
"만취공자! 이 천리무영이 피하는 재주만 있는 게 아니야!"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피하지 않고 검강이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눈을 번뜩인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고……
꽈르르릉!
세 가닥 검강이 뒤엉키며 불꽃을 튀겼고 동시에 포성이 터지는 소리가 잇달았다.
만취공자는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만승천화신공(萬承千化神功)!"
가만히 선 채로 검강을 받아낼 수 있는 호신강기는 천하를 통틀어 몇 가지되지 않으리라.
그 중의 하나가 만승천화신공.
만취공자가 그것을 알아본 것은 세 가닥 검강이 마치 무엇엔가 꽉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자석에 착 달라붙은 쇠뭉치처럼 옴쭉달싹하지 않았다.
두 사람 중 어느 하나가 죽지 않고서는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결사(決死)의 승부.
"크크크! 제법 쓸 만한 호신강기로군! 허나 내공이라면 이 만취공자도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다!"
검강과 호신강기가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대치하는 상황이다.
콰콰콰!
장강줄기처럼 밀려가는 만취공자의 내공.
허나 그것은 이내 도도하게 흐르는 바닷물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석비룡의 내공이 검 끝을 통해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손바닥과 단전이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진 듯 뜨거웠다.
만취공자는 위기감을 느끼며 불안스레 석비룡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럴 수가! 나의 삼갑자(三甲子) 내공을 조금도 밀리지 않고 받아낸다는 건가?'
석비룡은 빙그레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만취공자를 마주보았다.
'당신의 한계가 이것이라면 승부는 끝났어!'
석비룡이 입술을 달싹였다.
만취공자를 향해 전음을 보내는 것이다.
'만취공자, 혹 무영탄기라고 들어봤는가? 모르는 사람은 암기로 알고 있지만 실상…… 그건 단전의 내공을 원단(元丹)으로 만들어 몸의 다섯 곳을 통해 발출하는 수법이야! 이 세상 어떤 것이든 파괴할 수 있는 신비지공이기도 하지.'
석비룡은 마치 가래침이라도 뱉듯 입을 오무렸다가 툭, 뱉어냈다.
푸확!
입에서 흰 광채가 번쩍하면서 만취공자의 배를 향해 곧장 직선으로 뻗어 들어왔다.
만취공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 앞으로 날아오는 흰색의 기류를 보고 눈이 찢어져라 부릅떴다.
상대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배를 공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쉐에에엑!
무영탄기는 사정없이 만취공자의 배를 관통했다.
"흐어억!"
단 한 번의 공격에 만취공자는 배에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린 채 십여 장 밖으로 훌훌 날아가 버렸다.
간신히 땅바닥에 나뒹구는 꼴은 면했으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미……믿을 수 없어…… 천리무영 석비룡의 능력이 이 정도였던가?"
석비룡은 그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만취공자! 단전이 파괴되었으니 생명엔 지장 없지만 영원히 무공은 사용할 수 없을 거요."
그의 말투는 은근하게 변했고 얼굴에도 측은히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만취공자는 말을 들을수록 불쾌해졌다.
석비룡은 이 말만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진정 승부를 아는 선배라면 이제 말하시오. 누가 이 일을 청탁했소?"
"정말…… 명불허전이로군…… 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 하겠네……."
만취공자의 입에서 원하는 바를 얻기는 힘들이라.
그럼에도 석비룡은 계속 말했다.
"등룡왕부를 멸망시킨 흉수는 현현교 최강절학인 혈음신장을 익힌 자요…… 결국 만취공자, 당신이 황실과 연관이 있는 것과 같이 현현교 또한 황실과 연관을 갖고 있다는 뜻…… 결론적으로 만취공자 또한 현현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오."
날카로운 시선이 만취공자의 얼굴을 향했다.
"내 추측이 지나친 비약이오?"
만취공자는 창백하게 웃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헛허……! 그것이 천리(天理)이거늘 어찌하리."
"천리?"
석비룡은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크큭큭!"
만취공자는 발작적으로 괴소를 흘렸다.
"설령 내게서…… 내막을 알아낸다 해도 부질없는 짓이야. 자넨…… 어차피 곧 죽을 테니까."
"만취공자,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하오?"
"큭큭큭!"
만취공자는 광소를 터뜨리며 가만히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투명한 광채를 발하는 복숭아 크기의 구슬.
"이 아름다운 구슬이 자네와 날 영원한 안식 속으로 보내 줄 걸세! 너와 난 함께 가는 거야! 누구도 오늘의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석비룡은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불길한 느낌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때 그의 귓전에 들려오는 한 줄기 전음이 있었다.
'멍청이! 어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 늙은이에게서 물러나! 그건 육문 중 하나인 뇌화곡에서 제조한 굉마뢰(轟磨雷), 하늘 아래 가장 강력한 폭약이야! 늦으면 좋은 세상 다 사는 거라구!'
번쩍!
콰콰콰콰……꽝!
천지가 무너져 내릴 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광채가 천지를 뒤덮었다.
그 전음이 조금만 늦었다면……
석비룡은 거대한 굉마뢰의 폭풍우에 휩쓸려 날아가 즉사했을 것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