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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일촉즉발
1
쿠쿠쿠쿠……!
장강 하구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轟音)이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굉음은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였다.
도대체 얼마만한 선단이 지나가기에 천지를 울리는 듯한 굉음이 들린단 말인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셀 수도 없는 배들이 강을 메우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같이 거대한 배들이었다.
작은 배도 그 길이가 삼십 장이 넘었고, 큰 것은 거의 오십 장이 넘는 크기의 거선들이 무려 이백여 척 가까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펄럭이는 깃발에는 은빛 수실로 용사비등하게 수놓아진 한 마리의 용이 있었다.
열 척이 한 조가 되어 갈매기 모양으로 진을 형성한 채 물살을 가르는 선단이 있었고, 그것을 선두로 이십 줄의 거선들이 강을 가로지르는 수십 척의 함선들은 거센 장강의 물결도 아랑 곳 없었다.
그리고 열 번째 줄 정중앙에 자리한 거선.
모선(母船)이라 할 수 있는 중앙의 배에는 일광에 번쩍이는 용이 금시라도 불을 뿜을 듯 조각되어 있었다.
해왕맹의 중원 정벌군의 제일 선발대 해왕풍(海王風)이었다.
그 배의 뱃머리에 나와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휘날리는 인물.
그는 바로 해왕맹의 제 삼인자인 사자검(獅子劍) 모위(某委)였다.
"드디어 중원에 입성(入城)했군!"
강줄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강렬한 눈빛이 타올랐다.
"소종사의 원수는 이 손으로 꼭 이루겠습니다!"
그때 야조(夜鳥)처럼 갑판 위로 떨어져 내리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그는 뱃전에 내려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해왕풍 제 일대 소속 장평(張平), 맡기신 일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모위의 심복이었다.
모위는 뒷짐을 진 채 장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고하라!"
"임시로 연합한 구파일방의 무리들은 백 리 밖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인원은 삼천여 명 정도입니다."
"흠. 백 리라면 한 시진 정도면 적들과 마주치겠군."
모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급조한 인원이라지만 구파가 연합했는데 겨우 삼천뿐이라는 것이 의외였다. 그러나 사람이 더 많다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모위가 천천히 돌아서며 재차 물었다.
"매복은?"
"전진으로부터 사방 이십 리를 샅샅이 뒤졌으나 매복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은 본 맹과 강에서 결전을 벌이겠다는 것인가?"
돌연 모위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놈들은 미쳤거나 용기가 지나쳐 만용을 부린 것, 물위에서 우리와 싸우겠다니…… 하하하핫……!"
모위는 다시 몸을 돌려 장강의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급살맞은 듯 미친 듯 굽이치는 물줄기는 상류의 바닥을 긁고 내려왔기 때문인지 핏빛과 흡사했다.
앞으로 그 물줄기에는 진짜 혈수가 흐르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장강은 혈하(血河)가 되리라!"
2
구파의 연합 결사대가 진을 치고 있는 호진(湖津).
넘실대는 장강의 푸른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삼천여 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긴장감과 질식할 듯한 공기로 인해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해왕맹의 일차 선단을 막아서기 위해 구파일방에서 급히 파견한 고수들이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한 시진 후면 적의 선발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급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양문룡의 손에 땀이 묻어났다.
양문룡을 바라보는 도열한 무사들의 병기를 쥔 손에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굵은 힘줄이 일어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양문룡의 눈빛이 번쩍였다.
'왔구나!'
그가 직감적으로 누군가 기다리던 인물이 왔다는 것을 느낄 때였다. 그런 그의 귀로 가는 전음성(傳音聲)이 들려왔다.
'무적해룡이 해왕신검 해천웅과 함께 해왕맹을 떠났다는 보고입니다. 현재 그들은 대북(臺北)을 경유하고 있으며, 그 속도로 보아 두 시진 뒤에 이곳에 당도할 것이라 합니다.'
'두 시진이라…… 한 시진 뒤라면 해왕맹의 일차 선단이 도착할 것이니 적어도 한 시진은 버텨야 된다는 얘기군.'
양문룡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봤다.
'철웅회의 친구들이 잘 해 주어야 할 터인데…….‘
* * *
장강의 푸른 물결이 하늘에 닿아 있다.
깎아지른 급박한 절벽이 강의 양옆에 기다랗게 늘어져 있다.
회룡탄(回龍灘).
그렇게 불리는 곳이다.
강폭이 넓었지만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구불구불해서 강물의 그 끝은 보이질 않았다.
강 양쪽에 깎아지른 절벽 면이 온갖 형상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물살이 그다지 거칠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그 강물 위에 십여 척의 작은 소선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서둘러라!"
유수검협(流水劍俠) 위지연수(慰遲淵秀)는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십 오 세의 젊은 나이이지만 쟁쟁한 이름을 얻고 있는 무림 사대세가 중 호북(湖北) 위지세가(慰遲世家)의 당당한 가주인 위지연수였다.
강물 위에 떠 있는 오십여 척의 작은 소선들, 작은 배였으나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청년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고 그런 그들을 위지연수가 지휘하고 있었다.
십여 척의 작은 소선에 나누어 탄 채 바삐 움직이고 있는 청년들은 모두 철웅회에 속한 무사들이었다.
자전신룡 양무룡과 다지문성 양문룡 형제가 제창한 단체 철웅회는 천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의 의혈(義血)단체였다.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혈마천의 붕괴(崩壞)였다. 혈마천을 상대하려고 만들어진 단체였다.
위지연수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가득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다. 최소한 반 시진은 해왕맹의 발걸음을 늦추어야 한다.'
맨 앞에서 나아가는 선미에 서서 위지연수는 준엄하게 외쳤다.
"조심조심해서 다뤄라. 수뢰탄(水雷彈)은 미세한 충격에도 폭발(爆發)하기 때문이다."
그의 명에 따라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아주 조심하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들은 두 사람이 한조[一組]가 되어 묘하게 생긴 물건을 다루고 있었다.
사람 머리통만 한 둥글고 검은 원구(圓球)를 조심스럽게 강물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검은 원구에는 머리카락 굵기 만한 가느다란 세침(細針)들이 고슴도치 마냥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수뢰탄이라는 이름의 원구를 청년들은 조심스럽게 강물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쇠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원구는 물에 반쯤 떠 있을 뿐 가라앉지는 않았다.
원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강물을 따라 일정한 폭을 유지하며 강물 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수백 개는 됨직 했다.
"문룡형의 계략이 맞는다면 수뢰탄을 피해 가느라 해왕선단은 배의 속도를 삼분지일(三分之一)로 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반 시진 가량은 능히 벌 수 있다."
청년들의 하는 양을 보며 위지연수는 낮게 독백했다.
헌데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수뢰탄이 저리 많다니.
예전 하(夏)나라의 황제였던 우왕(禹王)이 범람하는 황하의 물줄기를 다스려 치수(治水)하면서 산을 깎을 때 사용했던 것이 바로 수뢰탄이었다.
그 파괴력은 단 하나의 수뢰탄으로도 작은 산 하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뢰탄이 하나도 아닌 수백여 개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이었다.
위지연수는 고개를 들어 강 상류를 돌아보았다.
"당비(唐飛)는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강상류에는 사천당가(泗川唐家)의 대공자인 팔비풍운(八飛風雲) 당비가 위지연수처럼 해왕선단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 대 사천당가의 가주가 될 팔비풍운 당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도 철웅회에 속해 있었다.
* * *
양문룡이 진을 치고 있는 호진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강가.
사람 키보다도 훨씬 커다란 갈대들이 십여 리에 걸쳐 장쾌하게 펼쳐져 있었다.
십리백원(十里白原).
그렇게 불리는 곳이다.
화사하게 핀 갈대꽃이 십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 곳이다.
갈대가 자라고 있어 수심(水深)이 낮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강바닥이 마치 산처럼 들쭉날쭉하게 하나의 산맥을 형성하고 있어 깊은 곳은 오십 장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곳의 갈대숲이 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도 있지만 부유하는 갈대 숲도 있다는 것이다.
부유하는 갈대숲은 평상시에는 양쪽의 갈대 숲에 머물며 조용히 있지만 물이 범람하거나 유난히 바람이 심한 날이면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에 이곳의 물길을 잘 아는 어부가 아니면 지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팔비풍운 당비는 철웅회의 청년들을 인솔하고서 갈대숲을 지나고 있었다.
작은 배 이십여 척에 나눠 탄 철웅회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기골들이 장대했다. 그리고 그에 맞게 그들의 어깨 위에는 자신들의 키보다도 더 커다란 대궁(大弓)을 걸머지고 있었다.
그 대궁에 맞게 그들의 등과 허리춤에 메어진 전통(箭筒)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화살들이 가득했다.
"자리를 잡아라!"
"네."
당비의 명에 세 명의 청년이 허리를 숙였고, 자신들이 탄 배를 몰아 갈대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들이 당도한 것은 비스듬히 경사진 절벽 면이었다.
쾅!
배에서 내린 세 명의 청년들은 장력을 내뻗어 자신들이 타고 온 소선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는 절벽 면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삼십여 장 올라간 그들은 벌어진 바위 면에 몸을 숨겼다. 그런 그들에게 당비가 손을 한 번 흔들었다.
"무운을 빈다."
당비는 다시 배를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가는 도중에 이십여 척의 배는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부숴졌으며 배에 탄 청년들은 강 중간 중간에 절벽 면에 올라가 자리들을 잡았다.
당비도 배를 부수고 절벽 면을 타고 올라갔다. 다섯 명의 청년들이 그를 뒤따랐다.
당비가 자리한 곳은 강물이 아주 높은 산을 끼고 도는 곳이라 갈대숲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명당이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당비는 하늘을 보았다.
"문상(文上)의 계획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계획대로 된다면 해왕맹과의 분쟁은 무난히 해소될 것이다."
철웅회의 문상이라면 바로 다지문성 양문룡을 말함이리라.
당비의 말속에는 양문룡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3
해왕선단은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백여 척의 선단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강 상류로 나아갔을까. 어느 시점에 이르러 해왕선단은 그 속도를 늦추어야만 했다.
쾅쾅!
돌연 해왕선단의 앞쪽에서 굉음이 터져나왔고 배의 부숴진 파편들이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 사자검 모위의 눈에 들어왔다.
곧 수하의 보고가 올라왔다.
"강물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에 부딪친 제일 선단의 배 세 척이 완파됐습니다."
"검은 물체라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형상으로 보아 상고(上古)의 수뢰탄이라고 보여집니다만."
"수뢰탄!"
모위의 두 눈이 번뜩였다. 수뢰탄이라면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수하의 보고는 계속되어졌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수뢰탄으로 보이는 것이 무려 수백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수…… 백?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모위가 눈을 부릅떴다.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상고의 치수(治水)의 도(道) 하나로 천하를 안정시킨 하의 우왕도 천하의 장인(匠人)들을 모아 기껏 열 개의 수뢰탄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수백 개라니.
모위는 당장 수하를 앞장세우고 선단의 앞으로 나아갔다.
"믿을 수 없군."
모위는 아예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분명 수뢰탄이었다. 하나 그 수효는 상상을 불허했다.
이 넓은 강물 곳곳에 떠다니고 있는 것이 수뢰탄이라니.
또한 수뢰탄은 한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강물 위에 이어진 수뢰탄의 행렬은 끝이 안 보였다.
모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행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틀 뒤에 중원에 들어올 해왕맹의 본 진을 위해 동정호까지 진입해 들어가 길을 닦아 놔야 했다. 하나 지금 자신들의 길을 수뢰탄이 막아서고 있었다.
수뢰탄이란 것이 워낙 예민해 물이 아닌 다른 외부의 미세한 충격에도 폭발하기에 분수자(分水刺) 같은 것으로 밀어서 길을 만들 수도 없었다.
모위는 강물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다행인지 모르나 절벽 근처 물살이 빠른 곳에는 수뢰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절벽과 수뢰탄 사이에는 한 척의 배가 간신히 지나갈 틈이 나 있었다.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절벽에 바싹 붙어서 거슬러 올라간다. 최대한 수뢰탄을 피해 간다."
모위의 명에 따라 해왕선단은 다시 전열을 짜 한 척씩 상류로 나아갔다. 이백여 척의 선단이 뱀이 나아가듯 일렬로 서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하나 배가 나아가는 속도는 처음과 비교해 삼분지 일로 뚝 떨어졌다. 그 커다란 배들이 한 척씩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갔을까.
상황이 돌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수뢰탄에 부딪친다! 모두 옆의 배로 옮겨 타도록!"
강이 꺾어져 급류를 이루는 곳을 지나가던 해왕선단의 배 중 하나로 수뢰탄 세 개가 다가들고 있었다.
그 배에 탔던 해왕무사들이 재빨리 옆의 배로 모두 옮겨 탔다.
배가 폭파되는 것에 대비해 해왕무사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나 배는 터지지 않았다.
수뢰탄이 분명 배에 달라붙었으나 수뢰탄은 터지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던 해왕무사 중 하나가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가 수뢰탄을 살폈다. 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럴 수가 조롱박으로 만든 거잖아?"
"뭣이라고?"
경악하던 무사들이 너도나도 배 아래로 내려와 수뢰탄을 살펴보았다. 수뢰탄들은 하나같이 조롱박에 검은 색을 칠해 철침을 박은 것이었다.
"으, 속았다!"
쾅!
의자의 난간을 주먹으로 치며 모위의 얼굴에 어이없음과 치욕의 빛이 어렸다.
수뢰탄은 단지 처음의 것만이 진짜였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조롱박으로 만든 가짜였다.
"중원 놈들의 약아 빠진 꾀에 속았다니."
부르르 떨던 모위는 즉각 전진 명령을 내렸다.
"전속전진(全速前進)!"
그의 명이 떨어지자 해왕선단은 박으로 만든 수뢰탄을 짓뭉개며 다시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가짜 수뢰탄들이 부숴지며 강물이 급격하게 격랑을 일으켰다. 폭풍을 일으키듯 해왕선단은 앞으로 전진해 갔다.
"문룡형의 작전을 한 치의 어김없이 수행했고, 저들의 발걸음을 반 시진 가량 멈추는데 성공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위지연수가 저 멀리 사라져 가는 해왕선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당비의 역할이 남았군. 부디 반 시진만 저들의 진군을 막아 주게."
해왕선단이 굽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위지연수와 청년들도 절벽에서 사라졌다.
* * *
해왕선단은 계속해서 북상했다.
가짜 수뢰탄으로 인해 해왕맹 무사들은 분노했고, 오히려 사기는 더욱 드높아 선단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선단은 어느 새 십리백원의 초입에 접어들고 있었다.
"십리백원에 접어들었군."
강 옆에 끝없이 이어진 갈대숲을 보며 모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지나 십 리 정도만 더 간다면 구파일방의 연합체가 모여 있는 호진에 닿을 수 있었다.
그가 조용히 상념에 잠길 때 앞 선단을 이끌던 장평이 그의 앞으로 날아 내렸다.
"단주!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모위가 이맛살을 모으며 반문했다.
"또 뭐지?"
"십리백원의 갈대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강이 범람하지도 않고 바람도 거의 없는데 갈대들이 부유하다니."
십리백원의 갈대에 관한 건 이미 파악이 끝난 상황이었다. 지금은 절대 갈대들이 떠다닐 때가 아니었다.
모위의 배가 앞으로 나가며 선단의 앞쪽으로 왔다.
"음, 정말이군."
해왕선단의 앞쪽에서 갈대 숲들이 무수히 떠다니고 있었다.
"낭패군."
해왕선단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리백원 근처의 강물은 수심이 일정하지 않았다.
작은 크기의 배라면 별로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해왕선단같이 거대한 배들은 수심이 낮은 곳을 가지 못한다.
본래 물길을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갈대들이 부유하고 있다면 알고 있던 길도 잃기 마련이었다.
"설마, 이것도 중원 놈들의 농간이란 말인가?"
수뢰탄에 당한 기억이 남아 있는 그들이기에 돌연 움직이기 시작한 갈대를 보며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진군을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수심을 일일이 짚어서 통과한다!"
모위의 명이 떨어지자 십여 명의 무사들이 작은 소선으로 갈아타고는 선단의 맨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쇠로 만든 추(錘)가 매어진 작은 쇠고리가 연달아 이어져 있는 쇠줄이 들려 있었다.
츄츄츙!
쇠줄에 이어진 추가 그들의 손을 떠나며 물속으로 박혔다. 그렇게 해서 일일이 물 속 깊이를 알아내는 것이다. 시간이 더디 걸리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해왕선단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얼마 정도 앞으로 나아갔을까.
피잉! 피이잉!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에 뒤이어서 무언가가 연달아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펑! 퍼펑!
갑자기 해가 사라진 듯 사위가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위는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에 휘감겼다. 어디에선가 날아와 터진 것은 일종의 연막탄(煙幕彈)이었다.
"사천당가의 백일흑막탄(百日黑幕彈)……?"
모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막탄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다. 백 일이 지나도 검은 연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천당가의 백일흑막탄임을 알아본 것이다.
모위는 다급히 외쳤다.
"모두 몸을 감추고 적의 암습(暗襲)에 대비해라!"
이런 어둠 속에서 적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락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위의 말에 따라 어둠 속에서 해왕맹 무사들은 신속히 신형들을 감추며 사위를 경계했다.
하나 우려했던 적의 암습은 없었다.
일각의 시간이 그렇게 조용히 지났다. 그때까지도 적의 공격은 없었다.
마냥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횃불을 밝히고 앞으로 나간다."
적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자면 불을 밝혀야만 했다. 여기저기서 불이 밝혀지자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됐다.
해왕선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멈춰야 했다.
"갈대에 불이!"
떠다니는 갈대숲에 불이 붙은 채로 해왕선단으로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비명을 내지르며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물체들.
불화살들이 날아와 배에 박히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어서 불을 꺼라!"
불이 붙은 갈대 숲을 피하랴, 배에 박힌 불화살을 처리하느라 잠시 해왕선단이 시끄러웠다.
하나 그런 소동은 차츰차츰 진압되었고 해왕선단은 여전히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멈춤 없이 전진하는 해왕선단을 보며 모위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 불화살을 날린 자들은 정확하게 선실들만을 맞춰 날아왔다. 사람들과 돛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그랬다.
백일연막탄을 터뜨리고 불화살을 날린 자들이 진정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해왕선단의 삼분지 일이 이 십리백원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상대는 분명 중원의 무사들이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헤칠 마음이 없었다.
해왕무사들의 마음에도 그러한 의혹이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암중에 우리의 길을 막아선 자들은 마치 시간을 지연시키려 하고 있지 않는가?'
모위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생각 같아서는 닻을 내리고 이 일에 깊이 생각해 봤으면 했다. 하나 내일까지는 동정호에 닿아 있어야 했다.
일단은 전진할 뿐이었다.
십리백원을 통과하는데 반 시진이 넘게 걸렸다.
손상은 많이 됐지만 부숴진 배들은 없었으며 인명 피해도 없었다.
여기서부터 호진까지는 별로 걸리는 것이 없었다.
저 멀리 호진이 자리한 산이 보였다.
그제서야 사자검 모위의 눈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수하들 역시 사기가 충천해 있다. 두 번의 위기를 무사히 지나왔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창검을 높이 쳐들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중원의 허수아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자!"
사기충만한 해왕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진군했다. 다시 처음과 같은 진형을 짜며 앞으로 나가는 해왕선단에 의해 장강의 거친 물살이 그 기세를 잃었다.
거칠 것이 없는 해왕선단의 진군이었다.
해왕선단이 호진에 거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쾅쾅!
돌연 해왕선단의 앞에서 일단의 선단이 나타나 포(砲)를 쏘며 들이닥치고 있었다.
이십여 척의 거선들이 빠르게 쏘아 오며 포를 쏘아 대고 있었다. 더불어 강노(强弩)들을 빗살처럼 쏘아 댔다. 깃대에 걸린 표기에 화산(華山)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화산파의 정예들이었다.
"바다 개구리들에게 중원의 쓴 맛을 보여 줘라!"
화산장문 군불악이 뱃전의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쾅! 쾅쾅!
푸슈슈슈……!
해왕선단의 여기저기에 포탄이 떨어졌고 우박처럼 강노들이 떨어졌다. 그 중 몇 개의 포탄이 해왕맹의 배에 맞았지만 그 정도의 포탄에 부숴질 해왕선단이 아니었다.
"후후, 우리하고 해전을 벌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가 있었군."
군불악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모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모위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옆에 선 장평이 양손에 든 깃발을 아래 위로 휘둘렀다.
개전(開戰)의 신호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해왕선단이 속도를 줄이며 진로를 뒤틀었다. 그 순간 해왕선단의 몸통 부분이 일제히 열리며 대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파가 쏜 포들보다 두 배나 커다란 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콰쾅! 콰쾅!
천지가 개벽했다.
중원의 포와 달리 해왕맹의 대포들은 그 위력이 천지차이였다.
해왕맹의 대포에 격중된 화산파의 배들이 산산조각 나며 침몰해 버렸다. 또한 무수히 날아가는 해왕맹의 강노들은 중원의 것보다 더한 위력으로 중원무사들을 꿰뚫고 있었다.
"크악!"
"카아악!"
포탄소리, 폭발하는 소리, 처절한 비명소리 등등.
강은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로 뒤덮이며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 * *
"계획은 예상대로 진행됐다."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치열한 수상전(水上戰)이 벌어지는 장강을 내려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마종사뇌였다.
혈마천의 군사 마종사뇌, 그의 얼굴에는 지금 사악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득의의 미소를 지을만 했다.
그가 세운 계획에 따라 해왕맹이 중원으로 진군했고 중원에 들어온 해왕맹의 선발대와 구파일방의 연합체가 지금 접전을 벌이고 있으니.
그의 시선이 모위의 해왕대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자검 모위, 생각이 있는 자다. 다지문성이 화해의 의지를 보인 수뢰탄과 갈대숲에서의 공격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대화를 원하는 다지문성에게 기울 수 있을 것이다."
전장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하나 화산과 청성의 무사들이 공격한 만큼 그런 생각은 사라질 것이다. 흐흐,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저희들끼리 서로 치고 받으며 힘을 소모할 것이다."
전장을 다시 한 번 주시한 그는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어디선가 황소 세 마리를 합한 것 만한 한 마리 흑응이 날아왔다. 마중사뇌는 그 흑응의 등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가자! 천하군림을 위한 무림 멸살대계의 첫 장은 이미 시작되었다.“
* * *
밤은 낮보다 길다 했건만 지금 두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용해린과 해왕신검 해천웅은 밤새 바다를 헤쳐 나갔건만, 아직 장강의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용해린의 배는 말 그대로 쾌속이었다.
해천웅은 그것도 모자라 배의 후미에서 장력을 쏘아대며 배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군요. 일각의 시간이라도 늦는다면 그만큼 사상자가 속출할 것입니다."
용해린은 힐긋 해천웅을 쳐다보았다. 장력을 내치느라 정신이 없는 그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배가 물살을 가를 때마다 튀는 물줄기 때문이 아니었다. 땀이었다.
용해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해천웅은 물론 용해린 같은 절정고수가 땀을 흘릴 정도로 그들은 혼신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혼신내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배는 실로 섬전(閃電)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쏜살처럼 배가 나아갈 때 해천웅의 입에서 반가운 음성이 터졌다.
"용공자, 장강입구요.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용해린의 배는 어느 새 장강 하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4
"군불악장문인과 청성(靑城)의 단무외 제일장로가 독단으로 먼저 나갔다고?"
"그렇습니다."
"이런……."
멀리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에 양문룡은 침음성을 삼켰다.
'오해를 풀고 화해를 시키려 그렇게 준비했건만…….'
하나 급박한 성격의 화산장문인과 청성의 장문인들이 먼저 일을 벌인 것이다. 일이 더 확산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급히 서둘러 포구로 내려갔다.
한 명의 수하가 갑판을 박차고 내려와 양문룡 앞에 부복했다.
"전투준비를 서두르셔야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는 중앙 대선(大船)에 급히 올랐다.
대선을 중심으로 오십여 척의 선단이 도열해 있었다.
양문룡의 눈에 강렬한 의지가 치솟으며 한 손에 든 부채를 척 펴자 신속히 수십 척의 배가 횡으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화산과 청성의 두 장문인으로서는 해왕선단을 상대할 수 없소. 해왕선단은 반 각 내에 이곳으로 올 것이오."
양문룡의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공하나 없는 백면서생이나 그의 화술과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에 대다수 무림인들은 압도당하고 있었다.
양문룡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해왕맹의 대포는 화력이 뛰어나나 그 사정거리는 중원의 포보다 짧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포를 쏘며 제일 선단은 해왕맹을 이곳으로 유인해 와야 하오."
"명심하겠소."
차세대 개방을 이끌 소선개(笑仙 ) 유풍(柳風)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몇 척의 배들을 이끌고 유인 작전을 펼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출발하겠소."
소선개 유풍이 포권을 하고는 이내 배에 올랐다. 해왕맹의 강노를 대비해서 배의 앞쪽에 강판(鋼板)으로 막은 형태였다.
유풍이 탄 배가 강을 내려갔다. 그의 뒤를 따라 십여 척의 배가 그를 따랐다.
* * *
쿠콰콰쾅……!
해왕선단과 화산, 청성의 연합, 양측의 포문에서 쉼 없이 화염이 토해지고, 포탄과 강노들이 빗발치듯 날았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커억!"
"크아아악!"
화산의 문하들 쪽에서만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포의 위력과 강노에서 너무나 차이 났기 때문이다.
분명 해왕맹 무사들보다 월등한 무공을 지닌 그들이었지만 해왕맹의 대포와 강노의 엄청난 위력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단 붙어 봐야 싸울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날아오는 포탄을 향해 장력으로 맞받아 칠 수도 없었고 검을 휘둘러 포탄을 갈라 버린다는 따위의 일은 생각도 못했다. 또한 빗발치는 해왕맹의 강노들은 중원 무사들의 무기들을 퉁겨내며 그들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중원 무사들은 해왕선단에 상대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뱃전에 포탄이 작렬해 배가 침몰하게 될 때 죽지 않기 위해 다른 배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접근전이 아닌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후퇴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장문인인 군불악이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청성의 제일 장로인 단무외
가 군불악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화산, 청성 두 파는 전멸을 금치 못했으리라.
후퇴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지만, 그때 마침 소선개 유풍이 포를 쏘며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콰콰쾅……!
소선개 유풍이 이끄는 선단이 포들을 쏘아대며 엄호하듯 해왕선단 앞에 막아섰다.
유풍은 해왕선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해왕선단의 포 사정 거리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것이다.
유풍이 이끈 십여 척의 배에 달려 있는 대포는 해왕맹의 포보다는 위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극히 정교하고 사정거리가 길었다.
놀랍게도 대명제국(大明帝國)의 군(軍)에서 사용하는 대포 중 가장 사정거리가 긴 포가 달려 있었다. 더구나 배는 군선(軍船)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다지문성 양문룡이 대명제국의 배와 포를 마련한 것이다.
해왕선단에서 쏘아 올린 포탄들은 유풍이 이끄는 배들 한참 앞에 떨어질 뿐이었다. 포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강노가 무수히 날아왔으나 배에 앞을 막은 강판에 모두 부딪쳐 강물에 떨어질 뿐이었다.
유풍은 군웅들을 이끌고 유유히 후퇴하고 있었다.
그런 유풍의 선단을 해왕선단이 기를 쓰고 쫓아왔다. 하나 유풍이 이끄는 선단은 최강의 함대(艦隊)를 소유한 대명제국의 군선이었다.
해왕선단을 요리하는 건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유풍이 이끄는 선단이 커다란 호(湖)를 이루는 넓은 강물에 다다랐다. 여러 개의 지류(支流)가 한 곳에 모이는 곳이었다. 해왕선단은 유풍의 유인책에 말려 이곳까지 도달했다.
해왕선단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둥둥둥둥!
"와아!"
"와아아!"
갑자기 천지를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며 사방에서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더불어 무수한 선단이 팔방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다지문성 양문룡이 이끄는 구파일방의 연합체였다.
총 합이 백여 척 정도 됐다. 하나 그 위세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백여 척의 배가 이백여 척의 해왕선단을 포위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백여 척의 배들이 해왕선단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고, 반대로 수적으로 두 배가 넘는 해왕선단이 위축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구파일방의 백여 척의 배는 일정한 방위를 점하고 다가들고 있었다.
휘류류륭! 파라라라랑!
강물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해왕선단을 뒤흔들었다.
"대풍운팔방세(大風雲八方勢)! 능히 해왕선단을 제압할 수 있다."
양문룡은 수중의 팔색(八色) 깃발을 흔들며 구파일방의 배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팔진도를 응용해 양문룡이 만든 진세였다.
적은 수로 다수를 상대할 때 아주 유용한 진법이었다.
진세에 갇힌 해왕선단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진세 때문에 일어난 바람으로 그 큰 거선들이 요동치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배의 중심을 잡아라!"
모위의 말에 해왕무사들이 침착하게 돛을 내리며 요동치는 배들을 안정시켜 갔다. 그 모습에 양문룡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긴, 태풍에 비하면 저들에게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양문룡이 이내 손에 든 팔 색의 깃발을 쥔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해왕선단을 포위한 백여 척의 배들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방위를 선점해 갔다.
기이한 기운들이 진세에서 일어나 강물을 휘감았다. 그 기운들은 순식간에 해왕선단을 그물처럼 엮었다.
"배,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
진세로 일어난 기운이 해왕선단의 배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더욱 점입가경인 것은 구파일방의 배들이 일제히 포문(砲門)을 열었다는 것이다.
양문룡의 손짓에 의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양문룡의 엄명이 떨어졌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발포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발포하지 말 것이며 이를 어길 시 목숨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추상같은 양문룡의 명령에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양측은 미묘한 상황에 처해 적막감을 유지했다.
양문룡의 모습을 바라보는 군불악과 단무외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눈에 어린 진한 살기(殺氣)였다.
'다지문성 양문룡, 실로 무서운 자다! 적은 수로 다수의 해왕선단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다니…… 마종군사가 우려한 이유를 알만 하다.'
내심 묘한 말을 중얼거리는 군불악이었다.
'어쨌든 해왕맹과 접전을 붙여놨으니 내 할 일은 끝났다. 과연 다지문성이 이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그는 전장을 주시했다.
모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유인 작전에 걸려 독 안에 든 쥐꼴이라니……!'
대해 최고의 세력인 대해왕선단이 수적인 우세에도 포위를 당한 상태였다.
실로 말 같지도 않은 상황에 처한 것이다.
허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모위는 분을 삭이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적의 제일 선단과의 거리는 약 백십 장 정도이며 우리의 화포의 사정거리는 약 백 장 정도다.'
모위는 내심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구파일방을 이끄는 자의 탁월한 전략에 감탄하고 있었다.
'적의 대장은 본 맹의 포의 사정거리를 정확히 꿰고 앉아 교묘한 거리에 진을 치고 있다……. 포의 궤도를 올리면 사정거리가 길어져 약하나마 적 선단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들이 포를 쏜다면 구파일방의 배에서도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을 것이 분명했고, 그리 되면 해왕선단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
다.
모위의 시선이 다지문성 양문룡에게로 돌려졌다.
'저 자가 구파일방 연합체의 지휘자이다. 저곳에 열발[十發]의 파천뇌시(破天雷矢)를 쏜 후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진군한다면…… 승산이 있을 수도…….'
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그의 심복 장평은 조용하게나마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왕대선의 중앙 선실 뒤편에서 열 명의 무사가 커다란 대나무 통 같은 것을 끌고 나왔다.
해왕맹 비전의 폭시(爆矢)로 해왕맹에서도 몇 발 없는 것이다. 서역(西域) 저 멀리에서 넘어온 것으로 한 통에 한 발씩밖에 화살이 들어 있지 않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한 발에 방원 삼장을 초토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파천뇌시가 양문룡에게 향해 있었다.
모위는 힐끗 파천뇌시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갈지는 미지수다. 이렇게 대치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그에게는 후발대가 오기 전에 전진로(前進路)를 열어 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모위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 있는 양문룡도 숙고(熟考)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양문룡은 줄곧 모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위가 고뇌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제발, 조금만 참으시오. 해천웅 부맹주가 오기까지 말이오.'
양문룡은 입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모위가 고뇌하다 결전을 하기로 결정을 내리면 양측은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고, 중원과 해왕맹은 돌이킬 수 없는 대혈전(大血戰)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양문룡은 철웅회의 친우(親友)들을 비밀리에 동원해 해왕선단의 진군을 늦춘 것이다.
말로 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해왕맹은 절대로 중원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문룡이 모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모위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 당하는 것보다는 먼저 공격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뢰탄으로 자신들을 막은 것과, 갈대숲에서의 화살 공격 등을 본다면 적은 자신들을 공격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하나 화산과 청성이 공격한 것을 떠올리면 그것도 아니었다.
모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결전이다! 설혹 이것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이내 결정을 내린 모위의 손이 쳐들렸다. 그의 지시에 따라 해왕대선에 매달린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둥둥둥둥!
개전을 알리는 전고(戰鼓) 소리였다.
양문룡이 탄 대선에서도 북소리가 울렸다.
"아! 어쩔 수 없단 말인가?"
탄식하며 양문룡도 깃발을 들고 있었다. 해왕맹이 공격을 한다면 그로서도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치하고 있는 양측 세력 사이로 일촉즉발의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허공에 떠 있는 모위의 손이 파르르 경련했다.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내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쿠아아아앙……!
돌연 엄청난 굉음이 천지에 울려 퍼졌다. 강 하류에서 들려오는 굉렬한 굉음.
그와 더불어 기쾌한 파공성과 함께 물기둥이 치솟아 양측의 선단 정 가운데를 양단하며 지나갔다.
물기둥 속에는 하나의 물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배를 저을 때 사용하는 하나의 노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양측 무사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저것은 노가 아닌가……!"
양문룡의 눈이 반짝였다.
"아! 창룡노다!“
3
쿠아아앙……!
그것은 무적해룡 용해린의 창룡노였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용해린의 쾌속선이 대치한 양쪽 선단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해왕맹과 중원제파의 무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난데없이 노 하나가 날아오더니 일촉즉발의 긴장을 깨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양측은 싸움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기둥을 일으킨 노는 허공에서 커다랗게 한 번 선회하고는 강물로 떨어져 내렸다. 바로 거기 온통 검은 빛 일색인 하나의 배가 멈춰 서 있었다. 거기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확인한 사자검 모위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부맹주님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해왕신검 해천웅이 선수로 나오며 웅후한 사자후를 터뜨렸다.
"모두 싸움을 멈춰라 !"
양문룡은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기대만큼 훌륭하게 해 주었소, 매제.'
만약 지금 이대로 다시 싸움을 일으켰다면 양쪽이 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장차 중원과 해왕맹은 상상할 수 없는 혈전을 벌여야만 했었다.
해천웅은 뱃전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어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모위 앞에 떨어져 내렸다.
무려 삼십여 장을 날아 왔는데도 착지하는 순간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모습을 본 중원 무사들의 눈빛이 감탄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가공할 경공이었기 때문이다.
해왕대선에 오른 해천웅이 해왕맹 무사들을 향해 우렁찬 함성을 토했다.
"철수할 준비를 서둘러라!"
모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문했다.
"철수라니……?"
해천웅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주위에 늘어서 있는 수하들을 살폈다. 처음 떠날 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들이었다.
'무모한 싸움이었다. 일당백의 해왕맹의 무사들이 이렇듯 초췌해 지다니…….'
해천웅은 모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세한 것은 철수한 후 말해 주겠다."
해왕맹이 철수할 준비를 하자 구파연합의 무사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들을 깨우는 외침이 있었다.
"싸움을 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도망가다니. 여기가 네놈들의 안방인 줄 아느냐?"
화산 장문인 군불악이었다.
그와 그의 수하들은 당장이라도 달겨들 기세로 해천웅을 에워쌌다. 군불악을 바라보는 해천웅의 눈빛에 살기가 일었다. 하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오해로 비롯된 것이니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겠소."
"누구 맘대로."
군불악이 당장이라도 덤벼들 태세였다. 한 방파의 수장이 보이기엔 너무 급박하고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러나 해천웅은 고개를 흔들더니 양문룡을 돌아봤다.
"금번 본 맹의 소종사가 피습 당한 것과 신주오룡이 죽음에 이른 것은 여기 계신 다지문성에게 일임할 것이오. 진실이 밝혀진 후에 중원과의 은원을 해결하겠소."
"으음."
군불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양문룡은 중원의 인물, 헌데도 해천웅은 다지문성 양문룡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것이다.
해천웅이 저렇게 말하는 데야 달리 군불악으로서도 더 이상 도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양문룡이 그들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해천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부맹주의 결단을 높이 사오이다. 미거한 본인은 빠른 시일 내로 모든 은원을 해결하도록 노력을 할 것을 약속드리오."
"천하제일의 현자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소이까?"
해천웅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지금의 일은 용해린과 같이 오는 도중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해천웅은 고개를 돌려 용해린을 돌아보았다. 용해린은 허공의 창룡노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서 있었다.
"용공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
"저는 마침 중원에 볼일이 있어서, 여기서 하직 인사를 올리까 합니다."
돌연 해천웅의 전음이 용해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빠른 시일 내로 찾아 주게나. 내 자네를 조카사위로 점찍었네."
"예?"
용해린은 놀란 눈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벅찬데 또 여자라니? 그런데 해천웅은 이미 신형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모위가 물었다.
"저 젊은이는 누구입니까?"
"무적해룡!"
"아!"
모위가 놀람을 발하며 용해린을 돌아볼 때 해천웅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카사위감이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위가 무슨 말인가 하고 해천웅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나 해천웅은 대답하지 않고 해왕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해왕천도로 돌아간다!"
해천웅의 명에 따라 해왕선단은 장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양문룡의 명에 따라 해왕맹을 막아섰던 중원연합의 배들이 모두 길을 내주었다.
해왕선단은 유유히 장강을 내려갔다.
거대한 혈란이 벌어질 뻔했던 일촉즉발의 긴장된 순간이 지나자 비로소 긴장이 풀린 무사들이 여기저기 주저앉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진실로 안도의 빛이 역력했다.
하나 한 사람, 화산 장문인 군불악은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자가 군사가 말한 무적해룡이란 말인가?'
묘하게도 용해린을 바라보는 군불악의 시선에는 적의(敵意)와 살기가 가득 했다.
또한 그런 그의 눈가에는 은은히 마기(魔氣)가 내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용해린이 양문룡의 선실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양문룡은 선실 안으로 들어온 용해린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마우이, 매제! 매제가 수십만의 생명을 살렸소."
"별말씀을……."
용해린은 겸연쩍어 했다.
이어 그는 그 간의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양문룡은 용해린의 얘기를 들으며 수시로 눈빛이 변했다.
"해옥랑소저가 기억을 잃었다니……."
용해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떠나올 때 어린아이처럼 보채던 해옥랑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양문룡이 정색을 했다.
"해왕맹주가 반년의 여유를 주었으니 그 안에 이 모든 일의 주범인 혈마천의 음모를 분쇄해야겠군."
양문룡의 말에 용해린은 조용히 그의 얘기만 들었다. 이미 양문룡에게서 혈마천에 대해 들었던 터였다.
양문룡은 용해린이 천패문의 제 삼십대 문주란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은 내가 천패의 후예란 것을 알릴 필요는 없다.'
용해린은 당분간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밝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굳이 밝혀 혈마천을 경계시킬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의 얘기는 점점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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