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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2:11-22절
제목 : 담을 허물고 길을 냅시다.
서론
기록은 기억보다 강합니다. 심방을 가보면 성도님들 가정의 벽에 글씨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한문으로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 가정의 글은 읽었습니다. “삼사일언” 세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라는 뜻입니다. “삼사일언”은 말을 많이하는 목사에게 꼭 필요한 글입니다. 제 책상 앞에는 “아사교회생”이란 글씨가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겁니다. 책상 왼쪽에는 제가 나무에 직접 새긴 글이 있습니다. “집중, 반복, 지속”입니다. 우리 예배당 앞쪽에는 큰 글씨가 붙어있습니다. “예수닮기”입니다. 벽에 글을 붙여놓는 이유가 뭘까요? 1번, 멋있으라고. 2번, 자랑하려고. 3번, 기억하려고. 답은 3번입니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본론
기억하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단어의 원문은 ‘므네메’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바울이 기억하라고 하는 내용은 11-12절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기억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겁니다. 과거를 기억해야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에베소교회는 이방인교회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라고 했죠. 유대인과 이방인의 가장 큰 특징은 할례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입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런 의미로 본문 11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들은 할례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을 본문 12절에 열거합니다. 너희는 예수 밖에 있고, 언약에서 버려진 사람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기억하라고 한 이유는 예수 믿기 전에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예수의 피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조강지처는 버리는 게 아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고생한 아내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제가 현재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간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런 쳐 죽일 놈, 돈 없는 신학생일 때 결혼해서 딸 다섯 낳고 갑상선 수술까지 해가며 뒷바라지 했더니 한눈을 팔아?’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면 현재를 거역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와 지금이 다릅니다. 아플 때와 건강할 때가 다르고,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가 다르고, 개척교회 때와 대형교회일 때 다르고, 돈이 없을 때와 있을 때가 다릅니다.
나의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면 교만해집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세우려고 제비를 뽑았는데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그 상황을 사무엘상 10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나는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자신의 시작을 기억하지 않을 때입니다. 다윗도 그럽니다. 자신의 시작을 잊어버릴 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범하고 사람 수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수를 세는 건 자기 힘을 과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옵니다. 언제인가요? 자신의 처음입니다. 시편 78편 70-71절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나는 원래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양치기였음을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12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지옥이 결정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단테는 지옥의 입구에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는 지옥을 이렇게 말합니다.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지옥은 영원히 고통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지옥을 묵상합니다. 이유는 예수를 똑바로 믿으려고 그럽니다.
주님은 바울의 입을 통해 그때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기억하는 겁니다. 지옥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천국이 얼만 좋은 곳인지 알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구원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 겁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알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기억하며 삽니다.
이제는
그때를 기억했다면 그다음 기억할 게 무엇일까요? “이제는”입니다. 바울은 과거를 말한 다음 현재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13절은 “이제는”으로 시작합니다. 13절에서 18절까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뭔가요? 화평입니다. 화평과 비슷한 단어도 등장합니다. 13절에는 까가워졌느니라가 나옵니다. 14절은 화평, 15절에도 화평, 16절은 화목, 17절은 평안이 두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겁니다. 그때는 죽었으나 이제는 산 겁니다. 13-14절을 읽어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6절을 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오늘 제목을 여기서 잡았습니다. “담을 허물고 길을 냅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담이 있습니다. 그 담이 죄입니다. 담을 누가 허물어 주셨는지 보십시오. 14절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이 담을 허셨습니다. 그때 흘리신 게 뭔가요? 13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이 막힘 담을 허물기 위해서 지신 게 뭔가요? 16절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역시 16절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무엇을 말하나요? 소속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12절에서 우리의 과거 소속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13절에서 현재 우리의 소속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란 의미를 가진 문장이 다섯 번 등장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음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부자인가요, 내부자인가요? 내부자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소속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자기를 편지를 쓸 때마다 자기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로마서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입니다. 가치를 알면 소속을 자랑합니다.
배우 박신양이 말합니다. “바보야, 왜 말을 못해? 저 남자가 내 남자다. 저 남자,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구!” 그때 배우 김정은의 대사입니다. “어떻게 그래요. 내가 어떻게 그래요.” 드라마 속 박신양과 김정은의 상황은 남자에 비해 여자의 형편이 많이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남자, 내 애인이지만 사람들에게 말을 못합니다. 꼭 우리 이야기 아닌가요? 너 예수 믿는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다. 나는 천국에 간다고 왜 말을 못합니까? 어떻게 그래요. 내가 나를 봐도 예수 믿는 것처럼 안 사는데, 이 모습으로 천국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소속을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는 속한 교회는 건물이 작지 주인이 작지 않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이 죽어서 살리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크기에 주눅들지 마십시오. 여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숫자에 흔들리지 맙시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이 이미 허물어놓은 담을 다시 쌓고 있습니다. 건물의 담, 재정의 담, 숫자의 담, 성공의 담 말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 휘장이 찢어집니다. 마태복음 27장 50-5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성소의 휘장은 두께가 약 10센치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성소 휘장을 찢으셨을까요? 막힌 담을 허시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의 오솔길을 따라 하나님께 직접 가십시오.
18절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풀이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 되었다는 겁니다. 질문합니다. 그 길은 아내의 치마폭을 잡으면 같이 들어갈까요, 오직 나 혼자 가는 길일까요? 혼자 가는 길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직접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십시오. 예배를 직접 드리십시오. 하루를 자기 믿음으로 사십시오. 부모의 담이 허물어졌어도 내 담은 여전히 있을 수 있고, 아내의 담, 목사의 담, 권사님과 집사님의 담이 허물어졌다고 나의 담까지 자동으로 허물어지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이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자신이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기적인가요, 이타적인가요? 이타적입니다. 십자가가 증명합니다. 가룟 유다는 어떤가요? 이기적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왜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예수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길을 내시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화평하고, 담을 쌓는 가룟유다가 있는 곳에는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나요? 오늘 제목입니다. “담을 허물고 길을 냅시다” 그래서 19절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새사람의 사명입니다. 19절부터 22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큰 아픔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담’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건 교회 밖도 마찬가지입니다. 묻지마 살인은 점점 늘어나고, 정치인들은 서로 헐뜯고, 야당 대표의 목에 칼을 꽂고, 지역적 감정은 여전합니다. 이게 과연 세상만의 문제인가요?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말씀하시듯 세상 풍조가 교회 안에도 들어오지 않았나요? 교회와 교회가 경쟁하고,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담은 없던가요? 여러분의 가정은 정말 괜찮습니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담이 없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그때에 죽었던 너희가 이제는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희는 담을 허물고 길을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담을 허물어주시고 길을 내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겁니다. 너희도 담을 허물고 길을 내라고.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화평이 증명한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성경은 새사람이 된 증거가 화목에 있다고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멈추지 마십시오. 18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화목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 <노희경의 명대사>란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그 자존심 버려, 내가 버렸듯. 자존심 가지고 사랑을 어떻게 하니?” 저는 이 대사가 이렇게 들립니다. “박 목사, 너 자존심 버려, 내가 버렸듯. 목사가 자존심 가지고 성도를 어떻게 사랑하니?” 이런 대사도 있습니다. “엄마도 이해 못 하는 놈이, 무슨 드라마 속 인간을 이해해!”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시나요? “같이 천국에 갈 성도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무슨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
마지막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핏줄은 그러는 게 아니야. 핏줄은 피로 이해하는 거야. 무조건 이해하고 무조건 용서해줘.” 이 말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십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때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옥이 당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를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담을 허시고 길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담을 허물고 길을 냅시다. 우리는 함께 천국 갈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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