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구대교구 교회묘지
1911년 남방교구가 설정되고 대구 계산주교좌대성당에서 묘지조성 및 관리위원회가 결성되어
1929년1월16일 대구 시 달서구 월성 동 일대 임야 약43,000평을 매입하고 주변 논600평을 매입 하여 인근에서 농사 짖던 허 모씨에게 관리를 맞기고(손자 허 분도)
묘지기초를 조성하여
1931년11월2일 묘지를 축성하여
대구본당 모든 신자, 대세 자 들에게 이곳에 묘지를 쓸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해발 100m의 나지막한 산을 중심으로 들판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주변은 논밭으로 형성되어 있고 대체로 강수량이 적어 동리이름이 가무네(물이 없는 천이라 하여 감천 리 로 명명되어 대구성당에서 이곳을 감천 리 묘지로 불리어왔다,) 산 정상에는 좌대를(2m정도)세우고 성모상을 안치하여 서북방향으로 해서 묘지 내 어느 곳에서도 성모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부지가 넓어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매장을 하며 1인분은 2,2평(가로2.4m 세로3m 로 하였으며 가족묘지는 예매도 할수 있게 하였다,
성당묘지가 조성이 되고 교우들 묘지가 늘어나자 교구 내 진목정 공소 뒤에 모셔진 순교자묘지를 이장 계휙 을 세우고 순교자세분을 모시게 된다,
세 분의 유해는 허 인백 의부인 박 조예여사가 수습해 형장 근처 동천강 다리 밑에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난 뒤 1907년 유족들에 의해 경주 시 산내면 진목 정 뒷산인 도매 산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그 뒤 1932년 5월말 허 인백 의 손자 허명선과 김 종륜의 손자 김 병옥 은 남방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계산 성당 페셀 주임신부의 허가를 얻어 세 분의 유해를 대구 감천 리 천주교회 묘지로 이장 하였다,
일반신자들 사이에 모셨던 세분을 1962년 10월 25일에는 대구 가톨릭청년회 주선으로 감천 리 천주교회 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가, 또다시 1973년 10월 19일 대구 시 동구 신천 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1929년부터 1968년까지 36 년간 약5,000기의 묘지가 조성 되고 새로운 묘지후보지를 범물동 산225(임) 번지 등 75,000평을 매입하고 1965년 8월28일 범물 동 묘지를 서 정길 대주교님 주례로 축복미사를 집전하였다,
1965년 범물 동 묘지 터 매입당시 관리자로 이 태백(요셉)님이
초대관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
1977년2대 관리자 이 종석 베드로
1979년까지 묘지업무는 계산 성당에서 관리하며 교구 내 신자 또는 대세 자 에게 묘지를 개인분묘 가족묘지등으로 대지사용권을 매매 또는 예매를 실시하였으며 예매지에한해서 예매증서를 발부하였다,
묘지관리지침이 없고 사무실과 현장이 이원화되어 현장에서매매도이루어지고 구휙 이 없어 경계가 모호하여 이중 매매 등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위령회장 이 재수 회장님 김 원석님
1979년 2월7일 계산 성당에서 관리하던 감천 리 범물 동 교회묘지 업무를 교구로 이관 할 준비 3차례 회의를 거쳐
1979년 9월1일 계산 성당에서 교구청으로 묘지업무 및 부동산
모두이관 (감천 리 묘지 범물 동 묘지)
1979년 9월1일
범물 동 묘지관리소 3대 관리자 전 화수 요아킴
묘지매매 등은 교구 관리과에서 업무가 시작되고 현장에는 묘지 실태파악부터 시작하여 감천 리 5,000여기 범물 동5,400여기 번호를 부여하고 묘적부작성을 시작하였다,
가톨릭신문과 교구주보를 통해 묘주들의 신고 접수를 현장과 교구 관리과에서 접수받아 묘적부보완을 하였다,
감천 리 묘지 주변에는 민가 가없어 묘지주변에 천막2동을 설치하고 숙식을 해결하며 묘지번호부여 묘적부 작성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묘지관리를 하시던 분의이야기를 통해 1930년대 가뭄이 너무 심해서 주변 농민들이 농사를 짖지 못하고 기우제를 지내며 해결책을 찿던중 누군가의 입을 통해 감천 리 공동묘지에 있는 서양귀신 때문이라 결론을 내리고 부락민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거쳐 서양귀신을 몰아내야한다는 결론을 얻어 날을 정하고 조촐한 상차림을 하여 성모상 앞에 모여 모든 부락민 들이 엎드리고 부락민대표가 엄숙하게 서양귀신에게 부득이 저희부락민이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서양귀신으로 인해 가뭄이 들어 이제 더 이상 함께 할수 없음으로 부득이 당신을 몰아내게 되었으니 부디 우리부락민들과 후손 들을 위해 떠나주기를 청합니다,
하고 모두일어서서 몽둥이를 들고 성모상을 치려고 일어서니 성모상은 주민들 반대방향으로 돌아서있어서 다시 주민들은 상을 들고 성모상 앞에 다시 상을 차리고 앞의 순서 되로 다시 몽둥이를 드는 순간 성모상은 원래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고 부락민들은 겁에 질려 모두 도망가 버리고 성모상은 한군데 손상도 없이 지내다 대구시가 확장되고 묘지부지 가 도시 계휙 으로 인해 개장명령으로 무연분묘 2,700여기는 군위묘원에 합장되고 일부는 연고자들 이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가장 정상지점에 월성 성당 이 세워지고 성모 동산도 만들어 그 옜날 감천 리 묘지모습은 상상할수 도 없게 되었다,
참고로 감천 리 당시성모상은 지금 군위묘원 입구에 잘 모셔져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7AFF3A5FE014D51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