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에 생긴 결절이 암세포가 맞대.”
“그럼 몇 기인 거야?”
“4기지 뭐.”
아빠는 2021년 12월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나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도 2년이 지나서야 택시 기사로 밤낮없이 일하던 아빠에게 건강검진을 시켜 드렸다. 검진하며 대장의 한 부분을 막기 직전인 암 덩어리를 발견했고, 급하게 수술에 들어갔다. 장폐색은 면할 수 있었지만 장기에서 림프절로 전이가 이루어진 3기여서, 병원에서는 우선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흐르곤 했지만, 다행히 곧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교사 인원 감축으로 2년 만에 새로운 학교로 이동해서 새로운 일들을 배우고 새 학기를 준비해야 했지만 모든 것을 멈춰두었다. 대신, 인터넷 서점에서 암과 관련한 책을 이것저것 구입하고, 네이버의 암환자 동행 카페에서 투병 후기를 읽었다. 다행히 대장암은 암환자들 사이에서 그나마 예후가 좋은 ‘착한 암’으로 불리는 병이었고, 5년 이후의 생존율도 50~60%로 높은 편이었다. 나는 인터넷에 등장하는 40%의 사례에는 뒤로 가기를 눌렀고, 60%의 사례는 하나하나 캡쳐를 하며 아빠에게 보냈다. 60%의 확률에 마음을 기대며 그 해 겨울 자취방이 아닌 고향에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3월이 도래하자 다시 일터가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사업 실패 후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공장 생활이나 택시로 버는 돈에 인생을 헌납하던 아빠에게 찾아온 암. 59살인 아빠에게, 29살이던 나에게 너무 일찍 찾아온 투병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10번의 항암 치료가 끝나면 무사히 이 시련도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희망이 마치 이미 도래한 것처럼 여기며 서울의 나는 다시 일터에서의 역할에 몰입했다. 방학 동안 미리 준비하지 못헀던 업무와 수업에 대한 부담으로 새 학기에 들어서는 주말이 와도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물론 주말 이틀 내내 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만 그 압박을 회피하고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침대에서 유튜브로 낭비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허망하게 주말을 보내면 그 시간에 차라리 집이라도 다녀올 걸이라는 후회와 자책이 뒤따랐다.
고향에 내려가서 아빠와 시간도 보내고, 남는 시간에 짬짬이 업무를 하는 이상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향에만 내려가면 아빠와 밥먹고 장보는 시간을 제외하고 잠에 빠져들거나 휴대폰에 몰입하던 나를 믿을 수 없었고, 주말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일을 해놓지 않았을 때 다가올 평일이 무서웠다. 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까지 고향에 내려가서 일할 의지와 절실함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아빠는 10번의 항암 치료를 견디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니까. 나는 매일 아빠에게 안부 전화를 하며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나도 내 삶을, 나만의 주말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희망만을 크게 그린 채 나의 게으름과 욕망과 타협하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향에 가는 마음을 냈다. 이마저도 가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아빠는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구역질과 피부를 콕콕 찌르는 고통으로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항암 끝난 후 돌아갈 일상을 생각하며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부지런히 걷고 뛰며 체력을 키우셨다. 아빠와 함께 사는 동생들이 아빠의 끼니와 말동무를 책임졌다. 내가 한 달에 한 번만 가더라도, 아니 그마저도 가지 않더라도 아빠의 투병 생활은 큰 문제 없이 이어지는 듯 보였다. 그렇게 1년 8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6개월마다 이루어졌던 정밀 검사에서 이상이 없자 아빠는 다음 새해부터는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하며 다시 사회로의 복귀를 준비했다. 나는 올겨울에는 가족끼리 처음으로 여행을 가보자고 말하며 다가올 새해를 기대했다.
그런데 11월에 검사한 아빠의 폐에 새로운 결절이 나타났다. 병원에서는 아직 크기가 작아 양성인지, 음성인지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양성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폐를 절제하는 수술이 필요했다. 아빠의 폐에는 결절이 많았지만 여태껏 암과는 무관한 단순한 결절이었다. 병원에서는 양성이 아닐 확률이 높지만 혹시 모르니 수술하자고 했고, 아빠는 23년 12월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수술했다. 그리고 새해 첫 달에 떼어낸 폐조직이 양성으로 판독되었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대장에서 림프로, 림프에서 다른 장기로 전이된 상태를 병원에서는 ‘4기’라고 불렀다. 3기도 충격적이었지만 4기는 충격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인터넷에 대장암 4기 생존률을 치니 27%라고 나왔다. 생존 기간은 2년 7개월이라고 나왔다. 나는 이 숫자를 쳐다보고 있는 내 눈을 의심했다. 생존률 60%와 27%는 너무 다른 숫자였다. 사망률 40%는 모른척할 수 있었지만 73%는 모른척하기에는 너무 큰 숫자였다. 인터넷에는 대장암 4기에도 2년 7개월을 넘어 생존하고 있는 환자의 사례도 있었지만 27%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생각하니 마냥 희망을 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암은 5년이 지나서야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데, 60%라는 숫자에 기대어 고작 1년 8개월 지났다고 마치 다 완치된 것처럼 아빠를 대했던 나를.
병원에서는 지난 항암보다 강력하게 항암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번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머리도 빠지고 피부도 검게 착색될 거라고 했다. 아빠는 선택의 여지 없이 다시 항암을 시작했다. 아빠는 새로운 항암을 시작한 후 눈에 띄게 체력이 약해졌다. 산책과 헬스장은커녕 밖에도 나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머리가 빠지고, 얼굴이 붓고, 팔다리는 얇아졌다. 돈 버는 삶과 여행가는 삶 모두와 다시, 멀어졌다. 재발과 함께 아빠의 제2의 투병기가 시작되자 나는 예전처럼 희망만을 크게 그릴 수는 없게 되었다.
희망을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마냥 믿을 수만도 없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직장에는 무급 간병 휴직이 있지만 그 휴직 기간을 버틸 수 있는 쌈짓돈이 내게는 없다. 담임이라는 굴레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학년 담임, 새로운 업무, 한 주 20시간의 수업. 쉽지 않은 일터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줄곧 퇴근 이후와 주말 시간을 일부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욕심껏 내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신청한 글쓰기 수업, 명상 수업, 요가 수업, 수업 연구 모임도 있다. 빈틈없이 얽혀있는 많은 것들 중 나는 아빠를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포기해야 할까. 희망만큼이나 절망을 직시하고 내가 해야 할 선택은 무엇일까. 어제 나는 이번 달에 언제 올거냐는 아빠의 물음에 꽉 찬 일정을 떠올리며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이제 물음에 제대로 답할 때이다. 캘린더를 응시한다. 3월이 아무리 버겁더라도 집에 한 번은 가자는 마음으로.
첫댓글 마음이 소란스럽겠네요. 그래도 희망은 꼭 잡고 있으면 좋겠어요. 내일은 밍밍밍 볼 수 있게 해주세요. ❤🧡💛
돌멩이 댓글을 본 순간 이번주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 보내주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