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우 시조 모음 >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달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 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개화(開花)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균열(龜裂)
차라리 절망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영어(囹圄)
벽에 옮아지는 가느다란 햇볕을 지켜
오늘도 진종일 시간을 징헌타가
불현듯 하늘이 보고파 발돋움을 하였다
아직도 짐승이 다 되지 못했는가
바람결 풍겨 드는 봄의 내음새에
한 가슴 와락 치미는 이 어리런 情이뇨
가만이 헤어보니 진달래 이미지고
江마을 살구꽃이 철 맞아 곱겠구나
어머님 날 생각하시고 그 얼마나 우시랴
날 새면 저물기를 저물면 또 새기를
다만 바램이란 세 끼의 끼니뿐이
목숨이 진정 목숨이 욕되기도 하여라
이단(異端)의 노래
높디높은 하늘아래 땅은 넓기만 하고
사람의 사랑과 노래 금수(禽獸)보다 복(福)되던 그날
목숨은 불꽃처럼 붉고 뜨겁기만 했으리라
선(山))과 들과 물이 있는 곳 어데나 기름졌고
마시고 먹음이 모도 절로던 후예(後裔)이든
어이들 가슴을 앓으며 여위어만 가는가
꽃 같은 젊음인데 봄바람을 돌아서서
슬픔도 罪이런가 울 수조차 없는 터전
지구(地球)를 번쩍 쳐들어 던져 버리고 싶다
금단(禁斷)의 동산이 어디오 지옥(地獄)도 오히려 가려니
생명(生命)이 죽음을 섬기어 핏줄이 욕(辱)되지 않으랴
차라리 이단(異端)의 자랑 앞에 내 나로서 살리라
바람 벌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보자고 아아 살아보자고.
욕(辱)이 조상(祖上)에 이르러도 깨다를 줄 모르는 무리
차리라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江山)이 눈물겹다.
벗아 너 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 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旗幅)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처 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설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祖國)의 밝음을 기약함이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아래 가신 이는 복(福)되기도 했어라.
깃발
깃발! 너는 힘이었다. 일체(一切)를 밀고 앞장을 섰다.
오직 승리(勝利)의 믿음에 항시 넌 높이만 날렸다.
이날도 너 싸우는 자랑 앞에 지구(地球)는 떨고 있다.
온 몸에 햇볕을 받고 旗빨은 부르짖고 있다.
보라. 얼마나 눈부신 절대(絶對)의 표백(表白)인가
우러러 감은 눈에도 불꽃인양 뜨거워라.
어느 새벽이드뇨 밝혀든 햇불 위에
때 묻지 않은 목숨들이 비로소 받들은 旗빨은
성상(星霜)도 범(犯)하지 못한 아아 다함없는 젊음이여.
매우(買牛)
松花가루 나리는 황혼 江을 따라 굽은 길을
어슬렁 어슬렁 누렁이 멀리 간다
그 무슨 기약 있으랴 정이 더욱 간절타
山마을 농사집이 끼인들 옳았으랴
육중한 몸인지라 채찍도 심했건만
큼직한 너의 눈에는 아무 탓도 없구나
너랑 간 밭에 봄보리가 살붓는데
걷우어 찧을 제면 네 생각을 어일 꺼나
다행히 어진 집에서 털이 날로 곱거라
목숨
저리도 넓은 하늘 어딘들 못 하리오
이리도 좁은 하늘 어디서 살으리오
수유(須臾)의 목숨을 안고 내 우러러 섰도다
봄
얼마나 아름다운 젊음의 숨결이기
이 江山 이다지도 푸르고 다사오리
새하얀 옷자락들이 나래인양 가벼워라
시냇가 실버들은 아련히 꿈이 절고
미나리 살찐 골에 풀피리 연연하다
胡나라 강낭이밭에도 봄은 아니 오는가
임이 아마 보냈으리 저 하늘 종달새를
노래만 전해주고 기약은 말이 없다
이 봄도 진달래처럼 홀로 붉다 지오리까
원수 없는 몸이 도리어 외로워라
미움도 사랑처럼 쏟아볼 길 있는 것을
즐기얄 봄이요 시절을 두견같이 우닌다
가는 봄
먼 영(嶺) 위로 사라져 가는 무지개의 엷은 빛깔
여일(餘日)은 한꺼번에 소낙비로 쏟아져라
오히려 아낌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져
춘정
일찍이 하늘로도 다스릴 수 없던 젊음을
한 가슴 감당치 못하여 쏘대는 춘풍
애정은 고성(孤城)을 지키는 기폭(旗幅)처럼 괴롭다.
이단(異端)의 이름밖에 남김없이 가버린 시절
다시사 않으리라 다지고 다진 꿈이
소보다 미련한 정일다 진정 미워라 미워라.
달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매화
아프게 겨울을 비집고
봄을 점화한 매화
동트는 아침 앞에
혼자서 피어있네
선구(先驅)는 외로운 길 도리어
총명이 서러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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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우 연표
1912.3.2 경북 청도 대성면 내호동(현재 청도읍 내호리) 259번지
부 본관 경주 이 종수와 모 구 봉래 사이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필명 이호우(爾豪雨)
1924 밀양보통학교 졸업
1926 일본 동경 예술대학에 유학
1930 신경쇠약 증세 재발과 위장염으로 학업 포기. 귀국
1934 경북 칠곡의 본관 김해 김 진희의 영애 김 순남과 결혼
1936 시조"연춘송"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없는 가작 입선
이후 40년 추천전까지 동아일보 독자투고에 <낙엽>,<진달래>,<새벽> 등을 투고, 선을 맡은 이 병기 선생이 엽서를 보내 문장지 추천제를 안내함
1940 시조 <달밤>이 문장지 추천됨
1946 고향 가산정리 대구 대봉동으로 이사. 이후 한 때 대구고등법원 재무장, 적산인 문화극장 사무국장
1949 남로당 도간부로 모략 받아 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 받음
1950 봄, 무죄 방면(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인 시인 김광섭의 진언으로 석방)
1954 윤계현과 함께 「고금명시조정해」(문성당) 출간
1955 시조 <바람벌> 대구대학보(현 영남대)에 발표, 이 작품이 반공법에 저촉.
첫시조집 「이호우시조집」(영웅출판사) 출간
1956 "경북문화상"(문학부문) 수상
1956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
1958 KAL기 납북사건 때 매일신문 사설로 필화
1960 청마 유치환과 전국예술단체 총연맹(예맹) 결성
1967 영남시조문학회장(초대)
1968 시조집 「휴화산」(중앙출판사) 발행
1970.1.6 대구 동문다방을 나와 귀가 중 심장마비로 졸도 경북대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타계
1970.1.10 10시 협성상고 교정에서 문인장 거행
1972.1.6 대구 앞선 공원 이 호우 시비 제막
1991 이호우 문학상 기금 마련 전시회
1992.1.6 이호우 시조 전집 「차라리 절망을 배워」간행
1992.1 제1회 이호우시조문학상 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