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아니 간 듯 다녀가소서
김인규
가을을 재촉하는 공기 사이로 설익은 낙엽 냄새가 실룩샐룩 코끝을 자극한다. 땀샘이 걸쇠를 잠그더니 물이 시원하다기보다 약간 차갑다. 이 신선함도 잠시겠지. 곧 따라올 냉기를 견뎌야 한다. 계절은 꼭 눈으로 봐야 곁에 다가섰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출입이 워낙 잦은 곳이라 여닫이문 손잡이가 새까맣다. 나란하게 늘어선 양변기 칸에는 알 수 없는 스티커 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고, 뒤편에는 소변기 넷 무뚝뚝하게 서 있다. 출입구 우측엔 자주 닦이지 못한 세면대, 그 위에는 몽당비누 한 조각 외롭다. 아래엔 둘둘 말린 호스와 삼색의 나일론 빗자루가 이방인처럼 어색하다. 거미줄 쳐진 작은 창문엔 분주하게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가 적잖이 시끄럽다. 길게 늘어뜨려진 휴지 바로 위에는 아껴 달라는 부탁의 문구가 큼지막하지만 공허하게 느껴진다.
내가 있는 공간을 지저분의 대명사처럼 칭하기도 하고, 가장 아래에 있다고 천대와 멸시도 받지만 수많은 이들이 나를 꼭 거쳐 가야만 한다. 절에 가면 마음의 근심을 덜어내는 곳이라 하여 해우소란 예쁜 이름을 주었다. 영어로 Toilet이라 불러 지지만 화장실이란 이름이 가장 흔하다. 예전에는 뒷간이란 명칭도 받았다. 어떻게 부르던 나와는 별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난 늘 이 자리에 있었고 또 떠나지 않을 거니까.
난 이곳 공원과 같이 태어났다. 벌써 삼십 년이 넘었으니 한참 청년 시기를 지나고 있다. 두 번의 재건축이 있어서 나의 둥근 얼굴도 세 번째이다.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푸근한 내 모양이 참 좋다. 맡은바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스스로에 대견할 때도 있다. 뭇 군상들을 쳐다보노라면 혀를 끌끌 찰 때도 많다. 특히 시원하게 볼일 보고 나가면서 발끝으로 나의 물주머니를 사정없이 밟기도 한다. 교양과는 담쌓은 듯 타액을 소리 내어 내 얼굴에 뱉는 몰지각한 사람도 있다. 내 소망은 소박하다. 지저분하다고 학대하거나 방관하면서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봄. 쥐똥나무 향기가 나의 후각을 간지럽히는 화창한 날 오후. 카키색 원피스에 하늘색 모자, 높지 않은 분홍구두를 신은 숙녀가 손지갑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나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아주 부드럽게, 불과 몇 분 되지 않아 떠났지만 아카시아 향수까지 한 방울 떨어뜨리는 센스까지 챙겨주니 그 흐뭇함이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기분 좋은 일은 가끔씩 찾아온다. 험한 세상 한 줄기 빛이 되는 선한 이들을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또 한 가지 첨부한다.
나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젊은이도 간혹 본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 마신 결과물을 나에게 와서 확인시키는 것이다. 참 좋을 때다 싶다. 고민도 많을 나이, 해보고 싶은 일 무작정 뛰어들어 헤쳐 나갈 수 있는 시기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그저 묵묵히 받아만 줄뿐 내가 베풀 수 있는 환경이 제한적이라 아쉽기만 하다. 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넓은 시야로 멀리 볼 수 있도록 기원해 주고 싶다. 응원만큼만은 지구를 팔아서라도 해주고 싶을 따름이다.
나의 목을 조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제일 곤혹스럽다. 숨이 막혀 질식사 일보 직전이다. 특히 여성분들이 나에게 주면 안 될 우주의 선물 찌꺼기를 넣을 때면 사양도 못 하고 받지만 이내 목이 졸리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한다. 표현 하지 못하는 내겐 너무 큰 고통이다. 나의 상태가 응급일 때는 모든 이가 날 외면한다. 아니 욕까지 해댄다. “제 잘못 아닙니다.” 항변해 볼 재간이 없다.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손길은 분주해진다. 인공호흡기 같은 막대로 여러 차례 얻어맞고 나서야 시원하게 뚫어지는 폭포 같은 소리를 듣는다. 세상 다 가진 듯하다. 관리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난 속속들이 느낀다. 두고두고 미안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가 아닌 걸 알기에 얼굴까지 깨끗이 닦아주고선 쓰~윽 쳐다볼 땐 고맙기 그지없다.
가득 차버린 그릇에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더 이상 채울 순 없다. 아집으로 둘러쳐진 울타리에는 그 어떤 훌륭한 말이라도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겐 필요 없거나 과욕으로 도배된 정서가 있다면 말끔히 씻어낼 필요가 있다. 비운다는 것은 또 다른 무엇을 채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채울지는 순전히 본인의 몫이다. 난 텅 빈 여백 그 자체를 좋아한다. 애초부터 나의 역할은 모든 이에게 비움을 추구하고자 태어났으니 말이다.
난 공원에 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나 공간에서 몹쓸 물건 취급받는 친구도 많은 줄 안다. 쉴 틈 없이 일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쾌적하고 아늑한 곳에서 융숭한 대접까지 받으면서 비데라는 신문물까지 체험한 동무도 이젠 많다. 덤으로 공기도 신선하며 새들이 노래하는 음향까지 추가된다. 나도 밖에 나가 새소리, 물소리도 듣고 싶고 여름이면 해변에 누워 한 겹씩 밀려드는 동해의 몸짓도 느끼고 싶다. 모깃불 향에 게으른 졸음도 느껴 봤으면, 가을이면 낙엽을 몰고 다니는 만추의 바람과 어깨도 나란히 하고 싶다.
누구나 급박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여 본 적 한두 번씩은 꼭 있으리라. 아무리 급해도 날 외면하고 엉뚱한 짓을 아무데나 할 수는 없을 터. 조급하더라도 기다릴 줄 알아야 신사, 숙녀라 칭할 수 있다. 나에게 와서 누구를 욕하거나 원망해도 괜찮지만, 뒤처리는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깨끗이 했으면 좋겠다. 난 언제나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날 보고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빙그레 웃어줄 것이다. 삼십육 점 오도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도록.
공원 화장실 남, 여 공용에서 일하며 사색을 즐기는 난 양변기이다. 꼭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아니 간 듯 다녀가소서.’ 창밖 꽃댕강나무 향기가 사뿐히 넘어와 온통 나를 감싸고 있다.
(《수필문예》 제22집, 2023.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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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문예회 회원.
대구수필문예대학 36기 수료
kdk589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