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인 바랑(Barran) 신부에게 보낸 편지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존경하는 동료 신부님.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조선 땅에 도착하여 신부님께 라파엘 호 -우리 배를 이렇게 명명 했습니다- 를 타고 모험적이며 완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우리들의 여행에 대해 한시바삐 상세하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주교님은 고통의 날들에 대해 회상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 일이 제게 주어졌으므로 저는 이 일을 가능한 한 잘해 보겠습니다.---
우선 조선의 범선이라는 별명을 얻은 우리 배는 길이가 30자, 너비가 12~13자, 깊이는 8자가 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이 훌륭한 범선은 내부와 마찬가지로 외형조차 우아하지 않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높은 돛대 2개에는 거적으로 된, 말하자면 교묘하게 짚으로 엮은 돛이 달려 있습니다.---
첫 번째 폭우를 만났을 때---우리가 출발도 하기 전에 배에 물이 듬뿍 스며들었습니다. 우리 선원들은 이 배와 잘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두세 명만이 아주 잠깐 항해를 해보기는 했다지만 경험이 전혀 없는 셈이었습니다. 나머지 선원들은 용감한 농부들이며 훌륭한 인부들이었습니다. 또 선장이라고 해야 할지, 함장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이 직책은 상하이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서품을 받은 조선인 새 사제 김 안드레아가 맡았습니다. 그는 젊은 신학생으로서의 경험밖에 없지만 부족한 점은 신앙심이 채워 준 것이 분명합니다. 안드레아 신부를 우두머리로 하는 11명의 교우들, 이들 중 한 명은 내내 아팠습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님과 난생 처음으로 느껴본 매우 행복한 마음으로 소생이 배에 올랐습니다.---
첫 번째 돛대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윽고 우리 바구니를 묶고 있던 끈이 끊어지자 우리는 두 번째 돛대도 잘랐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물결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갔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든 시련의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을 때 키가 부러졌다고 알려 왔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희망을 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험한 바다에서 돛대도 없이 키도 없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물을 계속 퍼내야 되는 우리에겐 하느님에 대한 희망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 망망대해 가운데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이런 극한 상황에서 주교님은 눈에 띄는 모든 배에 호소해서 우리를 산동까지 데려 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조선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배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파도는 계속 일었습니다.---배 주위에서 떠다니고 있는 우리 돛대가 잘려 나가고 남은 자리 위에 앉아서 저는 어쩌면 우리가 깊은 곳까지 가보게 될 수도 있을 이 잔인한 바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의 하찮은 점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만족스러웠고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이 배를 타기 전에 저는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고 예측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죽음을 진정한 순교로 여기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영광만이 안중에 있으니까요.---
저녁 무렵에도 날씨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에 대비하여 상호간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마침내 10월 12일에 우리는 충청도 강경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항구였습니다. 우리는 상하이를 출발한 지 6주 만인 10월 12일, 주일 저녁 8시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육지에 발을 내딛자마자 우리는 또다시 하느님의 무한히 자비로운 안내에 감탄하였습니다.---
저는 조선의 어느 궁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주교님은 흙으로 지어진 초라한 초가를 궁전이라고 불렀다) 그 궁전은 돗자리를 침대로 사용하고 난방은 프랑스 수도의 지하 난방 장치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저의 궁전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지루함도 고민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좋으신 주님께서 저의 기도에 이 초라한 방으로 내려오시니 제가 어떻게 행복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우들은 전반적으로 매우 열성적입니다. 신부님은 우리 가엾은 선교지가 하느님의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자주 하느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만큼 도움이 필요한 선교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해가 교우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적어도 교우들 모두가 신앙으로 충만해지도록 빌어 주십시오.---저는 미래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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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매우 보잘것없는 종이며 동료 사제인
A. 다블뤼, 외방전교회의 교황 파견 선교사
공동(Kontong)에서, 1845년 10월 25일
(*공동은 황산포에서 도보로 9시간 거리에 있는 교우촌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