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창의 「이화우 흩날릴 제」를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이유
김우영 시인 지난 봄날 전북 부안에 다녀왔다. 그동안 서너 차례 방문해 반계 서당, 채석강, 신석정문학관 등을 돌아본 바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매창 묘와 매창테마전시관 등이 있는 매창공원은 지나치곤 했다. 이번 여행은 수원에 있는 (사)화성연구회 봄철 답사였다. 화성연 구회엔 나를 비롯한 시인들이 몇 명 있는데 시조문학계의 중진 정수자 시인과 김애자 시인 등이다. 그들과 매창공원을 돌아보는 감회는 남달랐다. 이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매창의 「이화우 흩날릴 제」를 최고의 작품 으로 친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라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정인情人 유희경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배나무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는 봄날 울면서 서로 붙잡고 이별했고 계절이 바뀌었지만 떠나간 사람은 소식이 없다.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건만. 님 계시는 한양 천리 먼 길을 오가는 건 외로운 나의 꿈뿐. 중학교 시절 이 시를 읽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짝사랑의 아픔에 혼자 가슴을 앓으면서 김소월의 「초혼」을 외우고 다니던 무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한때 시조를 써보기도 했다. 《시조문학》 초회 추천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하면 됐다 싶어 추천완료는 사양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시조시단의 창밖에 서있는 것도 아니었구나. 한 발은 걸치고 있는 셈이다. 시조 추천을 받은 사연이 있다. ‘시림’ 동인이었던 이정환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께서 대구 인근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신혼집 을 방문, 소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시를 썼던 나는 시조로, 시조를 썼던 이정환 형은 시로 다시 등단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나눴 고 순진했던 나는 시조를 몇 편 써서 《시조문학》으로 보냈는데 곧바로 추천이 됐다. 정환 형은 아마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내 주변엔 시조를 쓰는 이들이 많다. 젊었을 때 ‘시림’이라는 동인을 엮어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함께했던 시인들 중 시조를 쓰는 사람은 이정환, 박기섭, 오승철 형이 있다. 동인은 아니지만 40년 가 까이 수원에서 티격태격하며 ‘여자사람친구’로 지내는 정수자 시인도 있다. 고맙게도 이분들은 시조문학계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이들의 작품은 내가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러니 시조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현대시조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입에 착 붙지 않고 눈밖에서 겉돈다. 물론 훈련이 잘 안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매창의 「이화우 흩날릴 제」나 홍랑의 「묏버들 가려 꺾어」 같은 시조는 읽기훈련이 안 된 이들에게도 술술 잘 읽힌다. 시조는 고려 말에 나타나서 오늘까지 7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정형시다. 다른 시 형식이 사라졌어도 시조는 남아 있 다. 시조의 생명을 지켜준 것은 무엇일까? 바로 ‘시조다움’이 아닐 까? 전기한 것처럼 시조답지 않은 시조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려면 차라리 자유시를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당신이라는 긴 편지, 한 사막을 읽습니다 어린 낙타처럼 행간 속을 걸으면 때때로 바람이 와서 길을 데려 갑니다 그새 늠실대는 언덕의 저 능선은 당신 등일까, 너무 부드러워 뜨겁게 달려가지만 길이 모두 잠깁니다 밤을 새워도 못 건너는 나의 사막, 당신 어느새 정수리엔 맑은 피가 고입니다 꽃처럼 그 피를 마시며 당신을 읽습니다 (정수자 「당신을 읽습니다」)
앞에 예로 든 옛시조 두 편은 모두 여성들의 작품이라서 현대시조도 여성시인의 시조를 소개한다. 정수자 시인은 몇 년 전 나의 실크 로드 답사여행에 동행한 적이 있다, 아마 그 당시 쓴 것 같은데 “밤을 새워도 못 건너는 나의 사막” 같은 부분에서 이매창이나 홍랑의 그리움이 떠오른다. 이매창이 환생했다면 정수자와 생맥주가 맛있는 다담에서 만나 한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창밖에서 중얼거린 헛된 소리였다.
김우영 경기도 화성 봉담 출생. 1978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후 《시 조문학》 초회 추천. 한하운문학상 대상, 수원시문화상, 한국시학상 대상, 경기문학상, 수원시인상 등 수상. 시집 『당신이 외치는 문』 『겨울 수영리에서』 『부석사 가는 길』. 현 수원일보 논설위원, 경기신문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