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정토학연구3집
중국 초기 정토신앙
이 태 원 *
․목 차․
Ⅰ. 중국 불교 전래 Ⅳ. 廬山慧遠과 그의 白蓮結社念佛
Ⅱ. 정토경전 번역 Ⅴ. 결 론
Ⅲ. 최초의 정토를 신앙한 사람
Ⅰ. 중국 불교 전래
중국에서 염불신앙이 이루어진 것을 알려고 하면 먼저 중국의 어느 시대에 불교가 들어왔는가를 알아야 하고, 염불 신앙이 이루어지려고 하면 정토경전이 언제 유입되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염불이 행해졌는지 규명하는 것이 중국 초기 정토신앙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가운데 釋慧皎가 찬술한 양고승전 제1권 「攝眠」條를 보면 明皇帝가 꿈을 꾸고 나서 사신을 인도에 보내 法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사신은 인도에 가서 眠을 모시고 洛陽으로 와 白馬寺라는 精舍를 짓고 거기서 거주하면서 四十二章經을 번역하였다고 하는 설로써 이것이 중국에 처음 沙門이 있게 된 계기다. 또 「竺法蘭」條에 보면 眠과 같이 五部를 飜譯하였지만 四十二章經만이 현존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최초로 경전이 있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眠」條에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畵像이 傳來되었다고 한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漢나라 永平의 해에는 경과 어떤 부처님의 畵像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처님의 畵像이 최초로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양고승전에서는 「漢永平中明皇帝」라고만 하여 분명치 않다. 그러나 隋나라 費長房이 찬술한 역대삼보기 제2를 보면 後漢 永平7년인 甲子年에 金人을 꿈꾸고 佛經을 구하기 위해 사신을 인도에 보냈으며, 永平10년(AD. 64년) 丁卯年에 迦葉과 眠이 와 四十二藏經을 번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영평11년 戊戌年에 竺法蘭이 佛本行經 등 5권을 번역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영평10년인 AD 64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眠과 法蘭이 같이 번역하였다는 四十二藏經 序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십이장경 서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모치쯔끼신코박사는 사십이장경이 후대 중국에서 僞撰되었기 때문에 迦葉과 眠이 중국에 온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하여 의심을 제기하였다. 이 사십이장경의 중국찬술 문제는 佛典成立史的인 측면에서 연구 검토할 문제로 간단히 논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이 밖에 역대삼보기 제1권에 BC. 246-210년에 나라를 다스린 진시황제 시대에 釋利防 등 18賢者가 경을 가지고 중국에 와서 교화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眠이 낙양에 온 AD. 64년보다 270여년 이전의 일이다. 시황제의 시대는 부처님께서 入滅하신 후 200여년 이후로 部派佛敎가 시작된 시기이기 때문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기에는 너무 빠른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後漢時代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지 않나 본다. 왜냐하면 後漢記, 後漢書에는 부처님을 黃老와 같은 神仙的인 敎祖라 하였고, 또 승려를 方術士와 같이 神靈界와 交感하는 神仙的인 수행자로 취급하였으며, 이들을 받들어 모시고 공경하며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아마 漢나라에 살고 있는 多數의 商人이나 移民者들이 실크로드를 통해서 西域에 왔다 갔다 하였을 뿐만 아니라 西域人들도 漢나라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 商人이나 移民者들 사이에는 불교를 믿는 신자나 승려가 포함되어 오고 갈 수 있으므로 이들이 漢나라 지방에 와서 불교를 전파했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에 漢나라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처음 불교를 漢나라 지방에 전하는 과정에는 사상적인 혼돈, 民族的인 갈등, 文化的인 면에서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明帝의 꿈에 金人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하나의 說話로만 넘길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무수한 역경을 딛고 佛敎를 한나라 지방에 토착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神秘的인 일이 나타날 수 있고, 가상으로 만들어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Ⅱ. 정토경전 번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漢나라와 西域의 通商이 빈번해짐에 의해 經과 佛畵가 전래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다고 보며, 이 시기를 紀元後 백년 이내라 생각된다. 이러한 근거는 확실치는 않지만 중국에서 본격적인 경전을 번역하게 된 것은 後漢 桓帝시대 建和2년(AD. 147)에 安世高가 중국에 와서 그 이듬해에 無量壽經 2卷을 번역하였고, 이외 安般守意經 등 30여부를 20여 년간 번역하였으며, 또 支婁迦讖은 漢나라 靈帝시대에 낙양에서 光和2년(AD. 179)에 道行般若經․般舟三昧經․首楞嚴經등을 번역하였다. 이것에 이어 靈帝시대 支曜․安玄․嚴佛調 등이 成具光明三昧經․法鏡經 등을 번역해 냈다. 이와 같이 본격적으로 經을 번역하여 많은 경전이 나올 수 있는 것은 漢나라 지방 사람들이 경전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며, 또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불교 經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려면 10년 또는 20년으로는 되지 않고, 半世紀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紀元後 백년 이내에 불교가 漢나라에 전래되어 어느 정도 土着化된 후 본격적인 譯經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정토경전이 流入된 것은 백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眠이 AD. 64년에 낙양에 왔다면 後漢 桓帝시대 建和2년(AD. 147)에 安世高가 중국에 와서 그 이듬해인 148년에 無量壽經 2卷을 번역하였는가 하면 支樓迦讖은 光和3년(AD. 179) 洛陽에 와서 반주삼매경을 번역하였고, 대아미타경을 AD. 178-189년 사이에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토경전이 중국어로 번역됨에 의해 중국 사람들이 경전을 보고 정토 사상을 이해하게 됨으로 인해 본격적인 정토 수행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즉 정토 경전이 중국에 유입됨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경전을 보고 정토 사상을 이해하고 정토 수행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럼 정토 삼부경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을 살펴보자. 먼저 무량수경을 보면 이 경전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만 해도 무려 열두 가지나 된다. 이것을 흔히 5存7缺이라 하여 이 가운데 다섯 가지는 현존하고 일곱 가지는 散失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을 하나하나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無量壽經 2卷 後漢時代 建和2年(148)에 安世高가 번역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② 無量淸淨平等覺經 4卷 後漢時代 支婁迦懺(147-186)이 번역하여 지금은 大正藏 12卷에 수록되어 있다.
③ 佛說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 2卷 吳나라 黃武(223-228)年中에 支謙이 번역하여 이것도 大正藏 12卷에 수록되어 있다.
④ 無量壽經 2卷 曹魏時代 嘉平4年(252)에 康僧鎧가 번역하여 지금은 大正藏 12卷에 수록되어 있다.
⑤ 無量淸淨平等覺經 2卷 曹魏時代 甘露 3年(258)에 白延이 번역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⑥ 無量壽經 2卷 西晋時代 永嘉2年(308)에 竺法護가 번역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⑦ 無量壽至眞等正覺經 2卷 元熙元年(419)에 竺法力이 번역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⑧ 新無量壽經 2卷 東晋時代 永初2年(421)에 覺賢이 번역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⑨ 新無量壽經 2卷 東晋時代 永初2年(421)에 寶雲이 번역하였지만 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新無量壽經 2卷 劉宋時代 曇摩密多(424-441)가 번역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無量壽經如來會 2卷 唐나라 시대 菩提流支(706-713)가 번역한 것으로 大正藏 11권 大寶積經 가운데 다섯 번째에 수록되어 있다.
大乘無量壽莊嚴經 3卷은 趙宋時代 淳化2年(991)에 法賢이 번역한 것으로 大正藏 12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무량수경 異譯을 번역한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가 다르지만 나는 내가 번역한 淨土三部經槪說을 주로 하여 열거하였다.
이상으로 보면 무량수경은 A.D 148년에 安世高가 번역한 이후 법현이 大乘無量壽莊嚴經 3卷을 991년에 번역할 때까지 843년 동안 대대로 이어진 역경사들에 의해 중국어로 총 12종이 번역되었다. 그 가운데 다섯 종류는 현존하여 우리가 볼 수 있으나, 일곱 종류는 散失되어 볼 수 없게 된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그리고 번역된 이들의 원본인 산스크리트本도 한결같이 없어져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많은 정토 학자에게는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날 산스크리트本인 Sukhā-Vatīvyūha sūtras라고 하는 樂有莊嚴經과 티베트本인 S.m. Ārya Amitabhāvyūha Nāma Mahayāna sūtra라고 하는 聖無量光莊嚴大乘經, 그리고 英文本인 THE LARGER SUKHAVATI-VYUHA 등 세 권의 책은 일본 淨土宗에서 淨土宗開宗八百年記念慶讚準備局에서 1972년에 발행한 淨土宗全書 第23卷에 수록되어 있고, 또 1983년에는 香川孝雄이라는 학자가 無量壽經の諸本對照硏究에서 산스크리트本과 티베트本을 비롯한 漢譯本을 비교하였고, 稻垣久雄이란 사람은 산스크리트本과 티베트本 漢譯本을 1985년에 索引을 출판하여 무량수경에 대한 폭넓은 사상을 직접 엿볼 수 있게 하였다.
현존하는 무량수경 가운데 초기의 것은 無量淸淨平等覺經과 佛說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으로 본원도 24원이며, 후기 무량수경은 무량수경․무량수여래회․대승무량수장엄경․산스크리트本인 Sukhā-Vatīvyūha sūtras(樂有莊嚴經)․티베트本인 S.m. Ārya Amitabhāvyūha Nāma Mahayāna sūtra(聖無量光莊嚴大乘經)이며, 본원도 각기 다르다. 즉 무량수경과 무량수여래회는 48원이고, 대승무량수장엄경은 36원이며, 산스크리트本인 Sukhā-Vatīvyūha sūtras(樂有莊嚴經)은 46원이고, 티베트本인 S.m. Ārya Amitabhāvyūha Nāma Mahayāna sūtra(聖無量光莊嚴大乘經)은 49원 등으로 되어 있어 초기 무량수경 보다 많고 구체적이다.
또 무량수경 異譯本에 나타난 往生行道도 각기 다르다. 초기 무량수경은 지금까지 수행한 선근공덕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정토에 태어나고 싶다는 ‘欲生心’이 있으면 성취된다. 즉 上輩段에서는 출가한 사문이 菩薩道와 持戒를 실천하는 공덕을 가지고 왕생하고 싶다면 성취되고, 中輩와 下輩에서는 在家者가 菩薩道를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왕생을 念願하면 왕생이 성취된다고 하여 초기 무량수경에서는 ‘欲生心’이 근본이다. 반면 후기 무량수경에서는 왕생하는 수행이 모두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는 聞名과 ‘發菩提心’, 그리고 一念과 十念에 이르는 염불이 나타나 아미타불의 명호 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무량수경은 인도 논사들이 인용한 것을 보면 용수가 대지도론과 십주비바사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聞名과 염불에 대해 논하였고, 천친은 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라는 논을 지어 五念門으로 나누어 자세히 논하였다. 천친보살이 이 책을 지으면서 어떤 무량수경을 底本으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최초로 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曇鸞(467-532)이 천친의 왕생론을 주석한 왕생론주를 비롯하여 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를 쓴 사람을 보면 淨影寺 慧遠의 無量壽經義疏 2권․嘉祥寺 吉藏의 無量壽經義疏․누가 쓴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돈황에서 발견된 無量壽經義記가 현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신라 시대 玄一의 無量壽經記가 상권은 산실 되고 하권만 남아 있으며, 元曉의 兩卷無量壽經宗要1권, 璟興의 無量壽經連義述文贊 3권이 있다.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源空의 無量壽經釋1권․了慧의 無量壽經鈔7권․聖聰의 大經直談要註記24권 義山의 無量壽經隨聞講錄6권 등 이밖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석서가 나왔다. 이것으로 보아 무량수경에 의한 정토신앙의 발전사를 엿볼 수가 있다.
다음 관무량수경에 대한 기록을 開元釋敎錄에서 찾아보면 畺良耶舍는 2部 2권을 번역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관무량수경이다. 이 경에 대해 “觀無量壽經 1卷을 또한 無量壽觀經이라고도 하며, 처음 道惠의 宋齊錄 및 高僧傳에서 발견된다”고 하여 고승전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고승전권제3 畺良耶舍條에 보면 관무량수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畺良耶舍가 劉宋時代(5세기경)에 관무량수경을 번역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다음 開元釋敎錄의 曇摩蜜多條에 보면 담마밀다는 12部 17권을 번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관무량수경이 1권 있는데 이것은 缺本이라고 하면서 “강량야사가 번역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寶唱錄에 보인다”고 하였다. 이 보창록은 승우의 제자 보창이 571년에 華林佛殿經目錄을 모태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밖에 위그르語로 된 한 조각의 관무량수경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중국어로 된 것을 다시 위그르어로 번역한 것이고 전편이 다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한 조각의 종이만이 남아 있어 전체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한문의 관무량수경을 The Sūtra of the meditation on Amitāyus라 하여 영문으로 번역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일본 淨土宗에서 淨土宗開宗八百年記念慶讚準備局에서 1972년에 발행한 淨土宗全書 第23卷에 수록되어 있다. 이 관무량수경은 산스크리트本이나 티베트本이 없어 중국의 서쪽 지방에서 찬술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져온다. 관무량수경이 중국어로 번역됨으로써 중국의 정토사상 발전과 신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즉 曇鸞은 보리유지로부터 관무량수경을 받고 정토를 신앙하게 되어 왕생론주를 지었고, 정영사 혜원은 觀無量壽經義疏2권을 지었으며, 삼론종의 길장도 관무량수경의소1권을 지었고, 地論宗의 南道派인 慧光의 孫弟子 靈裕에게도 觀經疏가 있다고 한 것이 속고승전9권에 기록되어 있다. 도작(562-645)은 현충사에 들어가 담란의 頌德碑를 느낀 바가 있어 그동안 연구하고 강의하던 열반경을 버리고, 오로지 정토수행을 하면서 관무량수경을 기본으로 안락집을 저술하였다. 다음 선도(613-681)는 관경소4권을 지어 중국불교사 가운데 순수한 정토사상을 대성시켰다. 이후 회감의 관경소가 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고, 천태의 관경소와 법총의 관무량수경소1권 등 이밖에 중국에서는 많은 관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가 나왔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의적의 관무량수경강요1권, 경흥의 관무량수경소2권, 태현의 관무량수경고적기3권 등이 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관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가 나와 정토신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정토삼부경 가운데 마지막인 아미타경에 대해 살펴보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은 姚秦弘始 4년(402) 鳩滅什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1권이 현존하고, 劉宋時代 求那跋陀羅가 번역한 佛說小無量壽經1권은 현존하지 않으며, 당나라 현장이 永徽1년(650) 大慈恩寺 역경원에서 번역한 칭찬정토불섭수경은 현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많이 독송되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아미타경이다. 이밖에 Sukhāvati-vyūha(樂有莊嚴經)이라는 산스크리트本과 S.N. Arya-Sukhāvati-vyūha nāma mahāyāna Sūtra(聖大乘樂有莊嚴經)이라는 티베트本, 그리고 The smaller Sukhāvativyūha mahāyāna Sūtra(小樂有莊嚴大乘經)이라는 영문판이 있다. 이 세 가지 역시 일본 淨土宗에서 淨土宗開宗八百年記念慶讚準備局에서 1972년에 발행한 淨土宗全書 第23卷에 수록되어 있다.
이 경의 주석서로는 天台智者의 아미타경의기1권과 자은사 窺基의 아미타경소1권․아미타경통찬소3권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천태와 규기가 쓴 것이 아니라는 학자가 많다. 다음 원조의 아미타경소1권이 있고, 그의 제자 用欽은 超玄記1권을 지어 원조의 아미타경소를 해석하였다. 명나라 시대 大祐는 아미타경약해를 저술하였고, 주굉은 아미타경소4권을 저술하였으며, 智旭은 아타경요해1권이 있다. 한국에서는 원효의 아미타경소1권이 현존하고 있으며, 경흥의 阿彌陀經略記․원측의 소무량수경소1권․太賢의 阿彌陀經古迹記1권․의적의 칭찬정토경소1권․태현의 칭찬정토경고적기1권 등의 저술이 있다고 하지만 오늘날 전해지고 있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준다. 일본에서는 永觀의 아미타경요기1권․원심의 아미타경약기1권과 아미타경대의 등을 비롯하여 아미타경에 대한 주석서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상으로 보면 정토삼부경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 전해져 많은 주석서가 나오게 되었으며,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일반인들에게는 많은 정토 신앙을 고취시켰고, 정토에 대한 영험담이 속출하였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면 중국 초기에 정토를 신앙한 사람들을 고승전을 통하여 살펴보자.
Ⅲ. 최초의 정토를 신앙한 사람
위에서 논한바 와 같이 148년에 안세고에 의해 정토경전이 번역된 100여년 후에 역사적으로 정토를 신앙한 사람들이 나왔다고 본다. 중국에서 최초의 정토를 신앙하는 사람은 西晉의 武帝시대(AD. 265-274)에 죽었다고 하는 闕公則과 그의 제자이다. 이어서 衛士度(AD. 323년경) 및 士度의 母親이다.
① 闕公則에 대해서는 龍舒增廣淨土文 제5, 念佛三昧宝王論卷中, 法苑珠林卷42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법원주림을 보면 闕公則은 趙나라 사람으로서 성질이 담박하고 조용하여 오직 法事에만 정근하였다. 그는 武(帝) 때에 낙양에서 입적하였다. 승려와 속인 등 동지들이 白馬寺에서 법회를 열고 그 날 저녁 경을 읽을 때 밤중 공중에서 찬탄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우러러보니 어떤 한 사람이 있었는 데 몸은 웅장하고 옷은 단정했다. 그는 곧 말하기를 “나는 闕公則입니다. 지금 서방 안락세계에 태어났는데 여러 다른 보살들과 함께 경을 들으러 왔습니다.”고 하니 온 방 사람들이 다 놀라 모두 직접 볼 수가 있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闕公則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로써 어떠한 修行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방 안락세계에 왕생하였다고 함은 서방정토를 信하면서 왕생하기 위한 수행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또 출가자와 재가신자가 함께 백마사에서 경을 읽고 있을 때 闕公則이 공중에서 소리를 냈다고 하였는데 이 때의 경전은 아마도 정토 경전을 가지고 說法하는 法會가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 정토 경전이 어떤 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대에 번역된 경은 支樓迦讖이 낙양에서 번역한 반주삼매경(AD. 179年譯)과 대아미타경(AD. 178-189年譯), 그리고 지루가참의 無量淸淨平等覺經이 이미 번역되었고, 缺本으로는 안세고의 無量壽經이 있다. 또 白馬寺는 낙양에 있기 때문에 이들 경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② 闕公則의 제자인 衛士度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이 법원주림 제42권 闕公則條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위사도는 給郡 사람으로 苦行을 한 居士다. 그리고 위사도의 어머니는 신심이 돈독하여 승려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공양을 올린 在家信者다. 위사도는 문장력이 좋아 八關懺文을 짓고 晉의 永昌(AD. 322년)의 해에 죽었다. 浩像의 聖賢傳中에 서방에 왕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闕公則에 이은 초기에 정토를 신앙하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다. 위사도는 晉의 惠帝時(AD. 290-306)에 摩訶般若波羅蜜道行經2卷을 간략히 번역하여 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 月支系의 佛敎徒로 생각되며, 반야의 空思想에 精通한 사람으로써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해 往生行道를 실천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③ 僧顯은 위사도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北地의 中原지방 사람이다. 僧顯대한 전기는 고승전 제11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승현은 持戒精神이 투철하고 蔬食만하며 禪을 業으로 하여 정진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晉의 太興 말년(AD. 321)에 劉曜의 戰禍를 피해서 江南으로 와 말년에 병이 들어서 서방정토를 想念하여 무량수불의 眞容을 친견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기록에 “명산을 순례하면서 항상 할 業을 닦았다. 뒤에 심한 병에 걸려 곧 서방에 대한 관념을 계속하였는데 마음은 심히 간절하는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無量壽佛이 강림하시였고, 그 몸에서 광명이 비취는 것을 보고 아픈 곳이 다 나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아 僧顯은 처음은 참선을 하다가 晩年에는 염불을 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선과 염불을 같이 수행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약 승현이 禪淨雙修한 사람이라면 중국에서 최초의 禪淨兼修者이다. 여기서 西方을 念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한 것은 般舟三昧的인 것이기 때문에 반주삼매경에 의한 行道라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關公則․衛士度․竺僧顯 등은 西晋시대부터 東晋초까지 활약했던 사람이다.
東晉時代에 접어들어서는 불교가 지식인들을 교화하여 갑자기 중국인 사이에 불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漢나라 사람 가운데 出家한 사람, 또는 불교를 배우게 되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고, 또 한나라에서 승려가 계속 배출되어 스스로 불교 指導者的인 지위에 오른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그 가운데 支遁을 비롯하여 竺法曠․道安․慧遠등이 불교 지도자로써 활약하였고, 정토를 신앙한 사람들이다.
④ 먼저 支遁에 대해서 살펴보면 양고승전․광홍명집․염불삼매보왕론 등에 기록되어 있다. 支遁은 字는 道林이고, 本姓은 閔씨로 陳留사람이다. 그는 25세에 출가하여 경전에 能通하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위하여 東安寺에서 도행반야경을 강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는 會稽地方의 산 속에 은거하였으며, 道家的 玄學이나 方外的 淸遊를 존중하고 있던 당시의 귀족 사회에서 老莊的佛敎의 大家로써 또는 소위 淸談에 뛰어난 方外의 隱士로써 존경받고 존중되었던 사람이다. 지둔은 大和元年(AD. 366) 閏4月4日에 53세로 입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것은 AD 324년 愍帝1년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임종시에 염불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스스로 匠人에게 부탁하여 阿彌陀佛像을 조성하고 讚文을 지은 「阿彌陀佛像讚幷序」란 찬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지둔은 일찍이 정토 경전을 보았고 정토 사상을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본 정토 경전이 어떤 경인지 의심스럽다. 현존하는 대아미타경과 평등각경에서는 여인은 반드시 轉成男子하여 왕생하는데 지둔의 찬문 가운데 「男女各化育於蓮華之中」이라고 하여 남녀가 같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모치쯔끼신코박사는 失譯인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에서 설한 “阿彌陀佛에게 어머니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 경을 東晋 이전에 번역되어 支道林이 보았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첫째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은 아미타불 신앙과 多羅尼 신앙이 혼용되어 있다. 즉 이 경은 다라니를 외우면서 왕생을 발원한 경이기 때문에 후대에 편찬되어 늦게 流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여기서 이야기한 남녀란 이 세계의 남녀이지, 저 세계의 蓮華 가운데 태어난 남녀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의 남녀가 저 세계에 태어나면 똑 같은 남자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음 支道林의 문장과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을 대조해 보면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에서는 정토장엄을 설하면서 「其地眞金 七寶蓮花自然踊出」이란 글은 있으나 「化育蓮華之中」이나 「化生蓮華」라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아미타경과 평등각경의 三輩段에서 「便於七寶水池蓮華中化生 則自然受身長大」라 하여 「化育於蓮華之中」의 내용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경 가운데 하나를 보고 인용한 것이라고 본다. 또 支道林의 찬문을 보면 지도림 자신이 持戒精神이 투철하고 아미타경을 외웠다는 것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阿彌陀佛像을 만들었고, 阿彌陀佛像 앞에서 귀의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지도림은 염불삼매보왕론 중권에서 關公則이 서방에 왕생한 것을 찬양한 것으로 보아 關公則의 영향을 받아 열렬하게 정토를 신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 초기에 정토를 신앙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극적인 염불수행과 임종염불을 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지도림과 같이 궐공즉을 찬양한 虞孝敬도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정토를 신앙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⑤ 竺法曠(AD. 327-402)의 전기는 양고승전 제5권에 나와 있다. 이것을 참조해 보면 그는 下邳사람으로 일찍이 양친을 잃고 後母를 섬기다가 출가하여 竺曇印을 스승으로 섬기었고, 후에 여러 경전을 보다가 潛靑山 石室에 있으면서 「每以法華爲會三之旨 無量壽爲淨土之因常吟詠二部 有衆則講獨處則論」했다고 한다. 즉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대중들에게 강설하였고, 혼자 있을 때는 이 경들을 독송하였다고 한 것은 이 두 경전이 法曠의 所依經典이었음을 알 수 있다. 敎學的인 면에서는 법화경의 「會三歸一」의 뜻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무량수경을 가지고 來世觀을 정립시켜 실천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적극적인 염불수행을 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 가지 修行法에 치우치지 않고 通佛敎的인 수행생활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法曠은 마을 사람들이 병들어 신음할 때 치료하여 주었다고 한 기록을 보면 자비심으로 사회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竺法曠」條에는 「沙門竺道隣 造無量壽像 曠及率其有緣 起立大殿」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무량수불상을 조성하여 큰 법당을 건립하였다고 함은 한 사찰의 本堂에 主佛이 무량수불이었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에 東晋시대에는 淨土信仰이 뿌리를 깊이 내린 것이라 본다.
⑥ 釋道安(AD. 314-385)은 扶柳 사람으로 姓은 魏씨이고 어려서는 부모를 잃었고, 12세에 출가하여 佛圖澄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竺法濟와 支曇 등에게 수학한 후 여산혜원 등 400인과 함께 襄陽에서 법을 전하였다. 속고승전 제39권을 보면 「又梁襄陽金像寺大六無量壽瑞像者 東晉孝武寧康三年二月八日 沙門釋道安之所造」라 하여 AD 375년에 무량수불상을 크게 조성하여 신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佛像의 내용은 법원주림 제13권에도 있는 데 사찰 이름만이 檀溪寺로 改名되어져 있을 뿐 다른 것은 같다. 고승전과 광홍명집에서는 道安은 다른 한 면으로는 부처님 제자인 法遇 등을 데리고 彌勒菩薩 앞에서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서원하였다고 한 것은 아미타불 정토와 미륵보살 정토를 신앙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도안의 제자 釋曇戒도 彌勒佛의 이름을 외웠다고 함은 적극적인 부처님 명호를 부르기 시작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으로 여산혜원 이전 도안까지의 정토신앙을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한 정토신앙은 엿볼 수 없다. 이 시대는 불교가 인도에서 들어와 토착화되는 기간으로써 인도 승려들의 활약이 많았던 것은 自明한 일이다. 이들 중 일부는 정토를 신앙한 사람들로써 반야사상과 법화사상 등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 중국인이 출가하여 정토를 신앙하는 사람들 가운데 인도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반야사상 등 다른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 정토를 신앙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여러 가지 수행을 혼합하여 행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時代에는 支婁迦讖이 도행반야경을 번역(AD. 179)한 것을 비롯하여 支謙에 의해 그 異譯인 大明度無極經(3세기 전반)이 나왔고, 竺法護에 의해서 光讚經(AD. 286), 無羅叉 등에 의해 그 異譯인 放光般若經(AD. 291)이 나온 것처럼 연이어서 반야경전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들 경전 가운데 설해져 있는 반야나 空思想의 이해는 초기 中國佛敎徒들에겐 커다란 課題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格義佛敎가 노자와 장자의 無爲自然思想과 대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정토신앙도 반야와 공사상 위에서 행해졌다고 볼 수가 있다. 이 通佛敎的인 사상에서 정토를 믿는 중국인들은 道家思想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정토를 신앙하는 것도 神仙的인 종교로서 수용하여 막연히 취급하였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이 시대에 무량수불상이 출현한 것은 稱佛이나 염불을 위한 것이 아니고, 觀念하여 삼매를 성취키 위한 般舟三昧的인 것이며, 禮懺하기 위한 것이라 본다. 즉 불상 앞에서 향을 사르고 예배하며 詠唱하는 儀禮를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Ⅳ. 廬山慧遠과 그의 白蓮結社念佛
慧遠에 대해서는 일찍이 많은 학자가 연구해 왔다. 특히 일본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의 기무라에이치선생이 편집한 慧遠硏究遺文篇과 硏究篇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先學者들의 연구를 참고하여 간단히 논할까 한다.
혜원에 대한 전기는 양고승전 제6권, 불조통기 제26권, 용서증광정토문 제5권, 낙방문류 제1권과 제3권, 여산연종보감 제4권 등에 기록되어 있다.
① 혜원의 생애를 이들 자료에 의해서 보면 혜원은 東晉의 제3대 成帝 咸和9년(AD. 334)에 雁門의 樓煩에서 태어났다. 姓은 賈氏이고, 소년 시절에는 河南의 許昌과 洛陽에 유학하였으며, 成年이 될 때까지 六經이나 老子, 莊子 등 古典을 學習하였다. 다음 慧遠의 家族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단 한 사람 3세 아래의 동생 慧持가 있다. 이 두 사람은 道安의 문하에 들어가 그 會下에서 줄곧 行動을 같이 하면서 수행하였다.
뒤에 혜원이 여산에 들어가자 혜지도 형을 따라서 함께 들어가 수행하였다. 그 후 혜지는 隆安3년(AD. 399)에 혜원의 곁을 떠나 혼자 지방으로 다니면서 佛法을 전파하는 도중에 義熙8년(AD. 412) 龍淵寺에서 입적하였다. 혜원은 그의 동생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뒤 義熙12년(AD. 416) 즉 4년 후인 8월 6일에 입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② 혜원의 저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양고승전권제6의 「釋慧遠」條에 「所著論序銘讚詩書 集爲十卷五十餘篇 見重於世」라고 하여 10권 50餘篇의 저술이 있다고 하였다. 이 내용이 양고승전보다 앞서서 찬술한 출삼장기집권제15에도 그 대로 나와 있기 때문에 출삼장기집의 설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혜원의 저술은 일찍이 양나라 시대에는 10권 50여편이 전해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혜원의 저술을 보면 혜원이 묻고 구마라집이 대답한 大乘大義章 3권을 제외한 다른 것은 斷篇的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승대의장3권의 내용은 주로 혜원이 法性․法身․念佛三昧․四相 등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것을 묻고, 이에 대해 구마라집이 대답하는 글이다.
이 외는 단편적인 것으로 출삼장기집 제9권, 제10권, 제12권, 제15권 가운데에는 43종류의 題名이 열거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제9권에 「廬山出修行方便禪經統序」, 제10권에 「阿毘曇心序」․「三法度序」․「大智論抄序」, 제15권의 「慧遠法師傳」 중에서는 「答王謐書」와 「答秦主姚興書」 등이다. 홍명집 가운데서 살펴보면 제5권에서는 沙門不敬王者論․沙門袒服論․明報應論․「遠法師答」, 三報論, 제11권에서는 「遠法師答」, 제12권에서는 「與桓太尉論科簡沙門書」․「遠法師答」 등 8종류가 나와 있다. 이밖에 광홍명집 제15권과 제18권에 단편의 저서가 있고, 제30권에는 「念佛三昧詩集序」 등 다섯 종류가 나와 있다. 또 양고승전 제2권과 제6권 등에도 여러 단편의 저서가 있다. 이외 廬山記에 나오는 「遊廬山詩」․「廬山略記」와 「遊山記」․「答廬循書」 등이 있다. 또 출삼장기집 제12권과 역대삼보기 제7권 등에서 열거하고 있는 題名을 합하면 총 57종류가 되지만 중복된 것도 있다. 이 중복된 것을 제외시키고 보면 43종류가 된다. 일부 아니면 全文이 남아 있는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30종류이고 題名만 있고, 글이 아직 발견되지 않는 것은 13종류다. 혜원의 저서 가운데 沙門不敬王者論은 우리 나라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지금도 출가한 비구는 왕과 父母에게 禮拜하면 안된다는 풍습이 이어져 오고 있다.
③ 혜원의 염불사상은 대승대의장 및 광홍명집 제3권에 실려진 「念佛三昧詩集序」와 劉遺民의 「廬山白蓮社誓文」, 그리고 王喬之의 「念佛三昧詩」 등 여기 저기에 나타나 그 단면만을 추측하여 알 수가 있다.
이상의 글에서 보이는 혜원의 염불사상은 그가 남긴 글 전체에서 보면 극히 적은 것에 불과하다. 불조통기 제26권, 여산연종보감 제4권과 양고승전 제6권을 보면 혜원은 어려서 道安의 문하에서 般若經 강설하는 것을 듣고 크게 깨달아 儒敎와 道敎등 九流는 모두 보잘 것 없는 것일 뿐이라고 한탄하고 이것을 버리고 道安의 弟子가 되어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 가면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고 道安은 “道를 東國에 流布할 사람은 慧遠뿐인가 한다”라고 감탄하였을 정도였다. 후에 廬山이 깨끗하고 조용함을 알고 이곳이 거주 처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들어가 불법으로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을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廬山의 행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元興元年(AD. 402) 7월에 同志와 함께 般若精舍의 阿彌陀像앞에서 壇을 차리어 서원을 세우고 淨土業을 정진 수행하며 서방에 왕생하기를 기약한 結社念佛이다. 거기에 참석한 劉遺民이 그 誓文을 지었다. 이것이 소위 廬山白蓮社로써 結社念佛의 시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의 수행은 아마도 般若思想이 근본이 된 염불 수행을 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한 것은 廬山에서의 結社念佛을 한 精舍의 이름이 般若精舍이기 때문에 반야사상을 근본으로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精舍의 이름을 般若라고 한 것을 보면 혜원을 비롯한 여기에 모인 대중들이 般若思想을 좋아하였고, 그 사상 위에 염불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隱士劉遺民에게 보낸 글에서
意로 말하면 六齋日에는 마땅히 항상 노력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하여 마음은 空門에 오로지 해야 한다. 그러한 후 생각을 모으는데 돈독히 하고 來生의 생각을 깊이 하라.
여기서 六齋日과 專心空門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한 것은 般若空的인 것을 근본으로 하여 정진한 것이며, 이것은 도안의 반야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야 사상을 가진 그가 여산에 들어가 結社念佛을 한 해는 나이 69세로 東晉 元興元年(AD, 402) 7월28일이다. 이 시기는 혜원의 생애 중 인생의 후반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혜원은 내세의 일을 정립시키고자 하는 생각에 結社念佛을 했지 않나 생각한다.
그는 劉遺民이나 雷次宗등 및 僧俗 123명과 함께 여산의 般若精舍 아미타 불상 앞에서 檀을 차리고 서원을 세우는 동시에 西方을 기약하며 念佛三昧를 수행하였다. 그러면 이 念佛三昧에 대한 혜원의 견해를 살펴보면 念佛三昧詩序에
序에서 말하는 一體, 三昧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생각을 專一하게 하여 想을 가라앉히는 것[思專想寂]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이 專一하면 뜻은 하나로 集中되어 分散되지 않는다. 想이 가라앉으면 氣는 虛로 되고 精神은 맑아져 온다. 氣가 虛로 되면 智는 그 작용을 安靜하게 되고, 精神이 맑아지면 어떠한 道理에도 透徹하다. 이 두 가지[氣가 虛로 되고, 精神이 맑아지는 것]는, (人爲를 초월한)自然의 玄妙한 증거로 兩者가 相合하여 작용을 이루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思專想寂」을 念佛三昧라 하였다. 즉 이 「思專想寂」하기 위한 수행이 혜원의 염불이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켜 잡념이 없이 寂靜한 상태의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혜원의 염불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하기 위한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출삼장기집의 慧遠法師傳을 보면
(혜)원은 곧 精舍 無量壽像 앞에서 단을 차리고 서원을 세워 다 함께 서방을 기약합니다. ---中略--- 동지 息心(出家者)과 在家者 123인 무리를 인도하여 여산의 그늘진 곳 반야정사 아미타불상 앞에 모여 향화를 갖추어 공경히 서원합니다.
라고 되어 있으며, 또 낙방문류에 나오는 劉遺民의 廬山白蓮社序文에는
이제 다행히 이런 저런 생각을 내지 않고 많은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西境에 마음을 두고 篇을 두드리고 信을 열어 밝은 뜻을 發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들을 보면 혜원의 「專心」은 阿彌陀佛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불에 대한 專心念佛을 하기 위해서 무량불상 앞에 모여 檀을 차리고 香華로 공경의 예를 표하며, 또 西境에 마음을 기울이는 등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한 것이다. 다음 염불삼매의 목적을 어디에 둔 것인가를 보면 광홍명집의 與隱士劉遺民等書에
遺民의 精勤은 두루 이르고, 갖추어 禁戒를 지키는데 宗炳과 張野는 따르지 못하였다. 專念坐禪하는 것 처음부터 반년에 걸쳤다. 定 가운데 부처님 친견하고, 길을 거닐 때 공중에 계신 부처님 형상에서 광명을 나타내어 대지를 비치니 모두 금색으로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장을 보면 유유민 등은 定 가운데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였으므로 그들의 염불 삼매의 목적은 見佛, 반주삼매라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혜원의 행적에도 見佛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즉 불조통기 제26권에서는
師가 산에 거주한지 30여년, 자취는 세속에 들어 간 적이 없고, 오직 정토에 대한 염을 부지런히 했다. 처음 11년은 마음을 맑히는 생각을 이어가니 세 번이나 聖相을 보았으나 침착하고 진득하게 말하지 않았다. 후 19년 7월 그믐날 저녁 반야대 東龕에서 바야흐로 定에서 일어나니 아미타불의 몸이 허공에 가득 찼고, 圓光 가운데 모든 化佛이 계시고 관음과 세지 등 두 보살이 좌우에서 모시는 것을 보았다. 또 물의 흐르는 광명을 보니 열네 가지로 나누어지고 상하로 흘러들어 가면서 苦空․無常․無我란 소리를 연설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일러 “나의 본원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와서 너를 위하여 安慰한다. 너는 칠일 후에 마땅히 나의 국토에 태어날 것이다”라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세 번이나 聖相을 보았다고 함은 그의 念佛의 目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見佛라 할 수 있다. 즉 「思專想寂」의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여 見佛하는 것으로 般舟三昧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念佛三昧詩序에서의 念佛은 반야의 空思想에 입각한 無想無念의 理觀, 즉 實相念佛이고, 뒤에 나오는 무량수불 앞에서 하는 염불은 事觀的인 염불이다. 이렇게 보면 혜원은 반야의 空에 근본을 둔 理觀念佛과 般舟三昧에 근본을 둔 事觀念佛을 雙修한 理事兼修念佛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事觀念佛인 반주삼매를 살펴보면 이 삼매는 般舟三昧經에 나오는 설이다. 그의 대승대의장 가운데 있는 「念佛三昧」에 대한 問答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혜원은 구마라집에게 세 가지를 물었다. 즉 첫 번째 반주삼매경에서 「般舟三昧」에 의한 三昧를 얻으려고 實踐하는 사람이 부처님을 친견한다고 설하였는데 이것이 꿈속에서 본 경우와 같다고 한다면 역시 자신의 마음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만일 見佛이 神通力에 의한 것이라면 그때 보여지는 부처님은 수행자가 神足通으로 그 부처님이 계신 장소로 가서 그것을 보는 것인가 혹은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있는 곳에 온 것 중 [하나]이라고 생각되지만 보통 사람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므로 天眼通에 의해서 수행자는 그것을 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그것은 경에서 설한 것에서 벗어나 있으며, (또 이것은) 三昧에 의한 見佛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세 번째 경에서는 수행자에게 持戒와 功德, 그리고 부처님의 威神[力]등 셋이 있어서 이 般舟三昧를 가능케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威神이라고 할 때 그 부처님은 「定(三昧)중의 佛」인지 「밖에서 오는[外來] 佛」인지? 前者라면 「我想之所立」이므로 역시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으며, 後者라면 이것은 꿈속에 보는 것 등을 초월한 고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은 혜원이 얼마나 삼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혜원이 이러한 질문에 구마라집은 「見佛三昧」․「般舟三昧」․「念佛三昧」 등 세 가지 삼매를 가지고 대답하였다. 이 세 가지 삼매는 다 見佛의 뜻을 가지고 있어 색다르게 구별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아무튼 혜원이 반주삼매경을 인용하여 묻는 것은 반주삼매경을 所依經으로 한 것이며, 廬山에서의 結社念佛은 반주삼매경에 의한 염불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똑 같다.
혜원은 염불삼매시서에서 “또 모든 三昧 그 이름 심히 중요하고 무겁다. 功이 높고 앞으로 나아가기 쉬운 행은 염불이 최우선이 된다”라고 하여 삼매를 이루기 위하여 닦기 쉬운 것은 염불이라 하였다. 이 염불삼매를 얻기 위해서 그는 반야대에서 매일 하루 六時에 염불하면서 서방정토를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함은 얼마나 혜원이 열심히 염불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혜원이 어느 정토 경전을 보았는지 살펴보자. 혜원시대의 정토경전에 대한 번역 관계를 알아보면 혜원이 입적한 해 즉 AD. 416년까지 번역된 것은 지루가참이 번역(AD. 178-189년 낙양)한 대아미타경, 축법호가 번역(AD. 308년 天水)한 평등각경과 또 지루가참이 번역(AD. 179년 낙양)한 반주삼매경, 구마라집이 번역(AD. 402년 장안)한 아미타경 등이다. 稱名을 주로 강조한 경전인 관무량수경은 강량야사가 AD. 424-442년 사이에 陽州에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혜원이 죽은 후에 이 경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혜원은 「稱六字名号」의 사상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48원을 설한무량수경이다.
이 무량수경을 번역한 사람과 시대에 대해 여러 가지 異說이 있다. 즉 康僧鎧가 AD. 252년에 번역했다는 설과 AD. 421년에 佛陀跋陀羅와 寶雲이 함께 번역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전자인 康僧鎧가 AD. 252년에 번역한 것이 定說이라면 혜원이 이미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혜원은 무량수경에 대한 언급이 조금은 있을 법하나 전혀 없다.
반면에 후자의 설은 근대에 발표된 가가와다까오博士와 후지다코다쯔博士의 설로 가장 유력한 설이다. 이 설로 미루어 보면 무량수경은 혜원이 입적한지 7년 후에 번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후지하라료세쯔氏는 謝靈運의 「淨土永」에 나오는
法藏 왕궁에서 자라나 道를 품고 나라의 城을 벗어나
원하여 四十八願을 말하고 크게 群生을 濟度할 것을 맹서 하였다.
을 인용하여 명확하게 48원경을 魏譯의 경전으로 인정하여 혜원시대에 있던 경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謝靈運이 이 48원경을 본 것은 분명하다. 사령운은 元嘉十年(AD. 433)에 처형되었기 때문에 AD. 421년에 번역된 무량수경을 볼 수 있는 기간은 12년이다. 그래서 이 12년 사이에 「淨土永」을 지었다고 본다. 그러나 혜원의 경우는 다르다. 혜원은 AD. 416년에 입적하였기 때문에 AD. 421년에 번역된 경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혜원이 남긴 문헌 중에는 48원경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보면 혜원 在世時의 정토경전은 대아미타경․평등각경․반주삼매경․아미타경 등인데 왜 반주삼매경에 의지한 염불을 하였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혜원은 도안이 열심히 연구한 般若學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반야와 염불을 같이 설한 경이 그에게는 흥미를 주었다고 본다. 반주삼매경의 行品을 보면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면 곧 부처님을 念하고, 마땅히 有와 無를 염하지 말라. 내가 세운 것은 空을 생각하는 것 같이 하고[當念有亦無我所立如想空] 마땅히 부처님이 서 계신 것처럼 염하는 것, 진귀한 보배가 琉璃위를 의지한 것처럼 하면 보살은 이와 같이 시방에 계신 한량없는 부처님의 청정한 모습을 친견한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當念有亦無我所立如想空」이라는 문장은 般若空的인 사상이다. 또 뒤에 나오는 게송에서도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한다.
마음에 想을 일으키면 곧 어리석음이 되고, 想 없으면 이 열반이다.
이 법은 견고하지 않아 항상 있고 念에 있다.
解를 가지고 空을 보는 사람은 일체 想念이 없다.
라고 되어 있는 것은 반야사상에 입각한 念佛法이다. 이것을 보면 반주삼매경은 般若經에서 강조하는 「空」의 敎義와 같은 기반 위에서 설한 경전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도안의 般若思想을 계승한 혜원으로써는 반주삼매경을 선택하여 수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초기 정토 경전인 대아미타경과 평등각경의 行道는 作善․悔過․作菩薩道․欲生心등이지 염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반주삼매경에서는 “이와 같이 그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가 있어 持戒를 완전히 갖추고, 홀로 한 곳에 멈추어 마음을 서방 아미타불이 현재 계신 것처럼 염하고, 듣는 바에 따라서 마땅히 염하라.”
라고 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는 念佛人이 갖추어야 할 持戒․場所․方向 등 몸의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설하여져 있다. 또 다음 글에서는
만약 沙門과 白衣가 西方 아미타불국토에 대한 것을 듣고 마땅히 저 곳의 부처님을 염하라. 持戒에 결함이 없이 하고 일심으로 염하는 것을 혹은 一晝夜, 혹은 七日 밤낮을 하면 七日을 지난 후 아미타불을 친견한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마음의 자세와 期日念佛․見佛 등을 상세하게 설하고 있기 때문에 혜원은 초기 정토 경전을 택하지 않고, 이 경을 선택하여 여산의 반야대에서 염불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Ⅴ. 결 론
중국 초기의 정토신앙을 몇 가지 점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般若와 空思想 위에서 행해졌다고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佛敎가 노자와 장자의 無爲自然思想과 대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格義佛敎처럼 정토신앙도 반야와 공사상 위에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通佛敎的인 사상에서 정토를 믿는 중국인들은 道家思想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정토를 신앙하는 것도 神仙的인 종교로서 수용하여 막연히 취급하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승현이나 도안은 空思想을 연찬하다가 정토를 信하여 정토업을 닦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般若의 空과 淨土의 有는 정반대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般若의 空을 硏鑽한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에는 有의 淨土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空은 理想的이며, 法身의 자리에서 보는 세계고, 有는 現實的이며 깨닫지 못한 凡夫의 입장에서 보는 세계다. 젊고 패기 넘칠 때는 이상적인 공의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정진할 수가 있다. 그러나 공의 진리에 대한 見處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인식할 때는 무언가 來世의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승현이나 도안, 그리고 혜원은 정토업을 닦았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초기 중국 정토신앙자는 재가자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졌다. 왜냐하면 闕公則과 衛士度와 그의 母親은 초기의 정토신앙자이고, 이 뒤에 나오는 竺僧顯과 支遁, 그리고 竺法曠은 인도가 아니면 중국 서북쪽 승려이기 때문이다.
셋째 所依經典은 승현과 도안, 그리고 혜원은 정토삼부경이 아닌 반주삼매경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무량수불상이 출현한 것은 稱佛이나 염불을 위한 것이 아니고, 觀念하여 삼매를 성취키 위한 般舟三昧的인 것이며, 禮懺하기 위한 것이라 본다.
넷째 혜원의 염불은 稱名的인 것은 보이지 않고, 理觀的인 念佛, 事觀的인 염불로써 理事兼修的인 염불이라 할 수 있다. 理事兼修念佛로 얻어진 염불삼매는 「思專想寂」, 「故今入斯定者 昧然忘知」의 경지이다. 즉 그의 사상은 대단히 淸虛하고 조용한 상태에서 염불에 專注하면 모든 번뇌는 자연히 소멸되고, 眞如의 理와 계합하여 자연히 깨끗한 경지에서 노니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이것은 반야에 도달하는 實踐的方便으로써 空三昧를 體得하기 위해 염불을 수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혜원이 임종 칠일 전에 화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이 나타나서 내영함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慧遠 스스로의 念佛은 현생에서 반주삼매를 얻는데도 있겠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도 목적을 두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혜원의 염불은 이상적인 면으로는 반야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지만, 현실적인 면으로는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 혜원이 중국 정토교의 시조로써 門下에 모여들어 결사염불한 僧俗이 123人은 중국 각지에 다니면서 정토사상을 전파하였다고 본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전기에 그 일부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기에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23인 가운데 上首가 되는 18賢은 慧遠․慧永․慧持․道生․曇順․僧叡․曇恒․道昺․曇詄․道敬․覺明․劉程之․張野․周續之․張銓․宗炳․雷次宗 등이고, 이외는 劉遺民․畢穎之․張來民․李碩․謝靈運․曇翼․曇邕․僧濟․慧恭․法安․法淨․法領․慧寶․慧要․僧徹․慧然․曇威․道泓․曇蘭․法業․慧義․惠嚴․慧觀․曇果․元弼․僧光․慧堪․慧蘭․孟懷玉․王喬之․殷隱․毛脩之․殷蔚․王穆夜․何孝之․范悅之․張文逸․孟常侍․孟司馬․陸修靜등 59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에 曇恒은 “단정히 앉아서 합장하고 소리를 내어 염불하다가 입적하였다”고 하고, 曇詄은 “跏趺坐하고 염불을 백번하다가 숨을 멈추고 입적하였다”고 하며, 道敬은 “단정히 앉아 부처님을 부르다가 입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稱名念佛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혜원의 門下生들이 稱名念佛을 한 것으로 보아 혜원의 文獻上에는 기록이 없지만 여산의 결사염불도 稱名念佛이 일부에서는 행해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섯째 혜원의 결사염불은 중국 각지에 전파되었고, 특히 남쪽 지방에서 유행하였으며, 이 영향을 받아 省常․導式․知禮․本如․宗賾․道琛 등은 각각 출가자와 재가자를 이끌고 결사염불에 정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멀리 廬山白蓮社의 遺風을 일으킨 것이고, 가깝게는 또한 善導․法照 등이 따른 것이라고 추측하여 알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白蓮結社는 일반 서민들의 남녀사이에 침투되었을 뿐만 아니라 道敎의 사원에서 매년 8월 1일부터 7일까지 白蓮會라고 하는 성대한 法要식이 행해졌던 것은 혜원의 영향을 중국 사회가 받은 것이다. 또 이 결사염불은 우리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고려 시대에는 天台宗 圓妙國師 了世(AD. 1152-1245)의 白蓮結社, 眞靜國師 天𩑠(AD. 1200경)의 念佛結社는 혜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중국 초기의 淨土信仰者가 싹이 되어 발전함에 의해 廬山慧遠法師, 北魏時代의 曇鸞, 隋나라와 唐나라 시대에는 道綽禪師․淨影寺慧遠․嘉祥寺吉藏․迦才․善導․懷感 등이 연이어 출현하여 염불 사상을 고취시켰고, 이 정토 사상이 한국과 일본에 전해졌다고 본다.
.....<본문; 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