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책
‘자서전’ 저자: 오채원
1993년 07월 21일 [탄생]
“응애~응애”
태어나자마자 들리는 탄생의 소리가 수술실 안을 가득 메운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손은 바빠지고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종이에 족장을 찍는다, 의사는 수술실 밖으로 나와 어떤 남자에게로 가서
“산모도 아기도 무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예쁜 공주님 입니다.”
그 남자는 기뻐하고 아기를 보는 곳으로 가서 아기를 보면서 웃는다.
바로 이날이 내가 세상에 첫발을 내딛은 날이다. 이 날부터 난 ‘오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다.
1998년 [죽음]
평소 잘 따르던 큰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 왔다. 평소 당뇨병에 시달려서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 끝에 큰 아버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두고 하늘나라로 발걸음을 돌려 버렸다. 친척오빠도 큰 어머니도 친척 동생도 모두 모여서 그 자리에서 큰 아버지가 하늘로 갈수 있기를 빌었다. 너무도 어렸던 나이 5살 때 처음으로 슬픔이란 것과 죽음이란 것을 한꺼번에 같이 보게 되었다.
2005년 02월 14일 [6학년이 된 날…]
드디어 5학년이라는 허물을 벗고 6학년으로 탈바꿈 하였다. 6학년이니 만큼 학교에서 최고 학년이니 다른 학년의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마땅하였으나. 난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신 ‘김희자’선생님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옷도 참 멋있게 입고 우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와 모든 다른 과목의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을 수 있게 협박(?)을 한 덕인지 우리는 다른 선생님들께 칭찬을 매일 듣다 시피 했고 반의 분위기도 좋게 흘러갔다.
2006년 02월14일 [중학교 입학식]
초등학생이라는 이름을 때어내고 이제는 중학교라는 이름의 학년을 가져야할 날이다. 내가 가게 된 학교는 ‘산본 중학교’라는 곳으로 우리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지각할 걱정을 안 하고 살았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잘 따르던 언니와 잘 아는 언니, 오빠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반 배치고사를 쳤는데 나는 다행이도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중간정도 되는 반인 5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수행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고 중1의 생활은 수학과 한자를 빼면 탄탄대로 이었었다.
2007년 02월 14일 [2학년으로 올라가며]
2학년으로 올라가서 좋은 일이 있었다. 바로 3층까지 올라가지 않아서 좋다는 것이다. 중학교는 1학년이 3층 2학년이 이층 3학년이 1층을 쓰기 때문에 1학년이 이었을 때는 위에 까지 올라 가야해서 괴로웠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의 꿈을 정할 나이라면서 자신의 꿈을 적어 내라고 해서 나는 두 가지를 적어 냈다. 바로 경호원과 디자이너 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 길래 난 경호원은 평생 동안 직업으로 삼기에는 수명이 너무 짧아서 경호원을 할 수 없으면 디자이너나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때 말한 꿈이 지금 까지 이어저서 지금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앙드레 김’의 선생님의 뒤를 이어 나 역시 세계에서 알아주는 한국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작은 사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O.H’그룹을 운영 하고 있다. 아! 이야기가 딴 데로 세어나갔군
2008년 02월 14일 [3학년으로]
이 때는 동아리 활동이다 고등학교 입시준비다 뭐다 하는 덕에 너무 바빴던 시기여서 정신없이 살았다. 고등학교는 ‘안양 예술 고등학교’ 들어가기로 했다. 미술도 열심히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부인 팔방미인부의 부장이 되는 바람에 후배들의 발성부터 연기 연습까지 봐주는 바람에 쉴 세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얼마 남지도 않은 학원에 반배치 고사 때문에 정말로 바쁘던 시기 이었다.하지만 모든 것을 성공 적으로 마치고 얼마 안남은 축제 때 입을 옷과 춤도 추기 때문에 안무를 맞추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축제 날 모두들 만족 할 수 있는 무대를 보여줬고 이 것으로 나의 꿈이었던 연예인이 될 계기가 생겼다, 우연히 축제를 보러온 한 소속사의 심사위원관이 우리의 무대를 보고서는 캐스팅을 한 것이다. 모두들 기뻐했고 우린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지는 못 했지만 단기간에 많은 팬을 만들 수 있었고 우리의 실력을 마음껏 뽐 낼 수 있었다. 모두들 우리노래를 좋아했고 사랑했으며 우리를 동경해서 가수가 되려는 사람들과 일부러 cd를 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는 3집 까지만 내고 해체 되었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2009년 02월 14일 [고등학교 입학식]
고등학교는 역시 ‘안양 예술 고등학교’로 갔다. 집과 거리가 너무 나서 안양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기로 했다. 돈이 많이 드는 학교를 골라서 전문학교로 갈까 했었는데 그것은 내 꿈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 예고를 들어가기로 했다. 시험은 연기로 봤다. 그 동안의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줘서 다행이도 성적이 좋게 입학 할 수 있었다. 가족들 모두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왠지 동생이 걱정된다고 했다. 언니가 이렇게 잘하는데 동생은 산본고에 들어가면 어쩌냐고 그 말에 동생은 자신은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안양예고에서 예의가 바르다고 칭찬도 듣고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좋다고 했다. 예체능 쪽으로 들어 와서인지 야간자율학습은 없었다. 한번 꼭해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난 아직도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엄마가 늘 하던 말 “니 친척오빠는 과천외고에 들어갔는데 넌 뭐니?”라는 그 말에 열받아서 열심히 한 공부가 다 이 쪽으로 왔다.
2010년 02월 14일 [2학년이 되며]
내가 선생님 복은 많은지 이번에도 재미있는 선생님이 우리 반의 담임이 되셨다. 모두들 정말 재미있게 지냈다, 2학년이 되고나서 한 1주일 즘 후에 남자친구가 생겼다. 워낙에 남자같이 생겼던 나여서 남자 교복까지 입고 다녔는데 무슨 활기차고 건강하고 깡쎈 모습이 좋다나 뭐라나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서 두 번 다시 올수도 없을지 모르는 기회를 버려 버렸다. 하지만 몇 달 뒤 다시 고백을 하 길래 이번에는 받아 줬다. 2학년 역시 인기 짱으로 살았다.
2011년 02월 14일 [마음의 결정]
이제 대학을 어디로 갈지 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가고 싶은 대학이 없다. 연새대나 홍대를 지망 하고 있지만 그래도 홍대 쪽이 훨씬 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술대학이니 인문계 쪽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동복 디자이너 보조를 맞고 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홍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후부터 디자인아카데미에 들어갔고 수학능력시험 당 일날 정말 파격적인 점수인 바로 커트라인에서 1점 더 맞았으므로 겨우겨우 합격 했다. 그리고 우연히 ‘앙드레 김’선생님의 수제자가 내 작품인 옷을 보고는 감각이 아주 좋다며 스카웃해 갔고 나는 20살의 나이로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이제는 세계진출까지 눈 앞에 두고 있었다.
2012년 03월 25일 [청혼]
고2때부터 사귀던 남자친구가 입대 전에 날 찾아와서 결혼을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2년 동안 기다리겠다고 했으며 이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2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빨랐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만든 옷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브랜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때 나는 작은 회사를 차렸는데 부하직원을 잘 둔덕에 우리 회사는 근세 쑥쑥 자라갔고 남자친구의 제대 날에는 대기업으로 번창해 있었다. 우리 회사는 기획사도 있고 웹디자인 등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했다. 그리고 회사의 이름은 나와 남자친구의 이름을 때서 O.H그룹이라고 지었다.
2014년 05월 24일 [출생]
우리는 금방 아기를 가질 수 있었고 바로 이날에 내 사랑스러운 일란성 쌍둥이인 천신이와 천하를 낳았다. 천신이는 남자이지만 천하는 여자였다. 이런 쌍둥일 갖는 것은 참 드문 일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예쁘게 커줬고 건강하게 컷 으며 어린이 집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다. 아이들을 칭찬하는 수리를 들을 때 마다 왠지 흐뭇해 졌다.
2015년~2045년 까지
힘든 일도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난 특히 이게 기억이 남다 신이와 하가 아주 심한 폐렴에 걸려서 죽을 뻔한 일이다. 그때 아이들의 나이는 겨우 15살밖에 안됬다. 어디서 뭘 하고 들어 왔는지 밤에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까지 냈고 기침을 할 때 마다 피가 같이 딸려 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괴로 웠다. 다행이도 친척동생이 수술을 아주 잘 해줘서 우리 애들은 나을 수 있었다. 내 친척동생은 폐렴에 걸렸다가 살아서 그 아이들의 고통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아무리 발전한 세상이라지만 의술은 발전이 덜되어서 걱정이 많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20살 되던 해에는 아이들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줬고 둘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쌍둥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둘은 곶 잘 일을 해냈기 때문에 믿고 맞길 수 있었다. 우리 회사는 더욱더 번창해 나갔고 나는 지금까지 평히 살수 있었다.
정년퇴임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에게 자릴 물려주는 것 뿐 이지만 무언가 있던 게 빠져나가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허전했다. 이제 나의 인생의 책을 닫을 시간이다. 비록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내 가슴속에 한 황금 액자틀 속에 끼워질 것이다.
첫댓글 와! 채원이도 글 잘쓰네 ^ ^ ;; 이거 꾸며쓰는 글이야?
ㅇㅇ 수미도 여기 다니네 수미글도 봐야지~
ㅋㅋ 잘썻다?!
출생에서 오타..ㅋ 소리를 수리로 오타낫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