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께 드리는 글 이제 칠순을 넘긴 나이 고독함에 더 익숙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인간이 지나간 자리엔 어김없이 쓰레기가 남기에 내가 쓴 詩가 행여 쓰레기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몇십 편의 詩로 서로 공감하며 밤 새워 읽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맨 처음 시집을 낼 때는 많이 부끄럽기도 했는데 많이 뻔뻔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만 내 뿜는다는 행운목의 향기를 담아서 보내드리고 싶네요 내 평생에 작은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던 꿈이 어느결에 4권의 개인 시집과 또 꽃詩마을 동인시집 4권을 펴냈으니 작은 소망이 다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여기에 더하여 작년에는 예술인으로 등록되어 창작지원금도 두둑히 받았으니 조금은 뿌듯한 마음입니다 역시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지며 불가능은 없나 봅니다 다니엘 키시는 장님인데도 음파를 통해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고 하네요 딱딱 혓바닥으로 소리를 내어 파장이 돌아오는 시간으로 주위의 사물과 거리를 측정하였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주위 분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늘 궁리만 하다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꿈을 포기하는 경우를 더러 보았습니다 인생은 망설이며 허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말하지 않았던가요 앞으로도 한 권의 시집과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권의 책을 더 내고 이에 더하여 시다가소(詩茶歌笑) 카페를 열어 찾아오는 분들의 눈요기가 될 만한 캘리그라피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담소할 수 있도록 전시장을 만들어 쉼터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소풍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와 엮어진 인연에 깊이 감사드리며 부디 즐거운 인생길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목정 /박해대 드림 # 제 1부 사랑의 무게 1) 시다가소(詩茶歌笑) 사는 게 뭐 별거든가 詩 한 줄 흥얼거리다가 대추 차 한 잔 음미하고 실컷 노래 부르다가 질펀한 해학 즐기면 되는 것을 누구나 할아버지 할미 주연하다 바람의 노래엔 티끌이 되더이다 가드락가드락 해본들 여유보다 못한 것을 오늘 종종걸음이면 내일도 그럴 것이고 오늘 느긋하면 내일도 그럴 것 바쁜 분들은 종착지도 빠르더이다 내 모습 할비 되고 보니 더 크게 들리는 바람의 노래여! 2) 연밭에서 정오가 막 지난 시간 낮잠 자던 연잎들이 청개구리 울음에 실눈을 뜬다 조용히 내리는 빗물을 은쟁반에 소담스레 담아 뭘 하려나 궁금했는데 마실 갔던 산들바람 돌아오니 살랑살랑 또르르 몽환적인 몸짓으로 춤을 춘다 흥에 겨워 격하게 추다 구슬을 떨어트리면 흥이 멈춘 듯 춤도 멈추는데 다시 받은 빗물로 청룡이 여의주를 문 듯이 격이 다른 춤사위로 즐기며 논다. 3) 그때를 생각해 봤니 딸아 아빠의 고향에 오면서 그때를 생각해 봤니 일 년에 몇 번 택시 구경만 할 뿐 버스만 다녔던 깡촌에서 아빠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을 아마 네가 비행기표 달랑 한 장 들고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이었고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기분이었을 거야 새벽에 타면 밤에나 도착했던 시절이었으니 너흰 참 좋은 여건에서 살고 있지 네가 시골 와서 살기 어렵듯이 시골 사람들도 서울로 가서 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단다 무작정 서울로 가서 온갖 고생 다 하며 서울 시민이 된 사람도 많았지 모태 서울 시민 그건 모든 시골 사람들의 로망이었어 4) 당신이 떠난 후에 늘 함께할 줄 알았던 당신 당신이 떠난 자리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습니다 한동안 우울증을 앓다가 정말 강한 의지로 가까스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떠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건 황량한 들판뿐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당신과 함께 다녔던 길을 다녀보는 일이 내 일상입니다 그 길에는 당신이 뻐꾸기로 소쩍새로 때론 작은 들꽃으로 위장하여 나를 반기기 때문입니다 식구가 많을 때는 그렇게 좁던 집안이 천둥.번개가 칠 때면 지구보다 더 넓은 느낌입니다 가끔은 꺼억꺼억 고라니가 내 슬픔을 대변하지만 그렇게 잘 놀아주던 정원의 꽃들도 말을 걸어주지 않네요 오늘도 당신의 향기를 찾아 함께 다녔던 들길을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춰 서서 당신의 향기 추억을 곱씹어 봅니다 5) 그저 숨쉬고 삽니다 추억을 송환해서 뭘 어쩌겠습니까 이미 흘러간 강물인데 야속한 세월의 입은 악어보다 더 크게 벌리고 삼킬 기세인데 별들이 숨죽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다 아련한 모습 그리며 침 한번 삼킬 뿐입니다 햇볕 쨍쨍하던 때의 그림자는 구름이 머물면 사라지듯이 우리의 추억도 그렇게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 그대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6) 작은 추억 어릴 적 해가 넘어가는 서산마루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넘어가는 해를 가로 막고 서 있었는데 잠시 한눈팔다 해를 놓치고 말았지요 아무리 막아도 넘어가는 해를 막고 또 막다가 어느 날 허리가 부러져 버렸지요 나의 가지에 한동안 머물렀던 달이 산등성이에서 미끄러져 사라지니 어둠은 목구멍을 타고 내 속을 가득 채웠는데 그리움의 싹을 피웠습니다 7) 튤립 튤립은 함부로 피지 않는다 바람 불어도 비가와도 날씨가 흐려도 붉은 입술 꼭 다물고 있다가 날씨가 화창할 때만 치마를 활짝 펼치며 웃는다 노오란 혓바닥을 내밀고 유혹하면 내 코는 벌룸벌룸거리고 눈을 떼지 못한다 어둠이 찾아오면 대문을 닫고 홀연히 잠자리에 드는 정열의 대명사 너의 이름은 튤립 8) 아름다운 별 담담하게 그대를 떠 올리기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 열정 하나로 채웠지요 바로 캘리그라피 그림 속에 글귀 속에 그리움 품어 벽에 걸어 두었습니다 때로는 낙엽되고 때론 나비가 되어 유채꽃 핀 내 마음속을 마음껏 날아다녔습니다 한순간의 뒷걸음이 이대로 은하수의 찾지 못할 별이 될 줄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아름다운 별이었기를 . 9) 연민 추억은 스멀스멀 기억은 가물가물 기쁨으로 피어오르던 물안개 핀 오솔길 가을 낙엽으로 종적 감추고 이제 아픔은 오롯이 나의 몫 허리 한번 접었다가 폈더니 지팡이 다리 하나 더 생기고 눈썹엔 고드름이 봄을 밀어내는데 새봄은 언제 수혈하러 오려나 10) 칠순 생일에 왼발은 집에 오른발은 산에 있는 나이 이 나이 먹도록 힘찬 도루로 홈 밟았으니 큰 축복 아니던가 남은 세월 가진 것 하나씩 버려가며 비움의 진리 경험하리 북두칠성으로 피어난 일곱 개의 촛불을 북극성이 빤히 쳐다보며 웃는구나 때론 용서할 일 있어도 외면했던 고집쟁이 이제 훌훌 다 털고 나면 얼마나 가벼울까 분주한 아내의 손길에 푸짐한 식탁 그대 안에서 나래 접으리 11) 가족 사진 세상이 힘들면 내가 더 강해지면 된다 여기며 살아 온 세월 겹겹이 쌓인 연륜 슬며시 펼쳐 본 앨범에서 격정과 고요가 교차하네 지워지지 않은 얼굴이 향기만 남기고 홀연히 떨어진 꽃잎들에 먹먹해지는 가슴 캄캄한 터널 용케 빠져나와 뒤돌아볼 여유도 생겼는데 . 12) 가을 단풍이 마실 나와 창가에 기웃거린다 한참을 바라다 보니 추억도 슬며시 단풍 들어 눈앞에서 드라마를 연출하는데 추억도 단풍 들다 낙화하려나 13) 베로나 작은 우물을 지나 능선을 타고 광야를 지나 점점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숲으로 들어가니 상큼함과 안온함이 맞아주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빨려들어 갔다 거기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판타지아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음악이 있고 매력적인 그림이 있고 정갈한 음식이 차려진 동화 속에 나오는 집들과 아리제강이 피에트라 다리를 애무하며 지나니 아레나 스타디움 앞 브라 광장엔 새싹이 불쑥불쑥 자라나는 머드팩 음악이 들렸다 흡사 첫날 밤 같았다 베로나 :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이름 14) 애마를 보내며 프랑스 산 코냑은 아니지만 이제 막 성년이 된 22세 국토 종단 40만 킬로 네가 서 있던 자리엔 피눈물이 흘렀고 고열로 고통이 심했더구나 애견을 키우다 묻은 후로는 다시 키우지 못했는데 너마저 내 곁을 떠나면 내 어이 새 식구를 맞으리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이치가 불문율이라지만 희로애락 함께한 세월 어느 누가 네 몫을 다 하랴 특식 한번 못 먹이고 한 가지만 먹고도 잘 견딘 네게 새 신발 신겼다가 도로 벗기고 꽃가마는 못 태울망정 내 손으로 고려장이라니 차마 네 가는 길 보지 못해 망부석이 되었구나 15) 촌음(寸陰) 계절의 고랑 사이로 세찬 바람 불어오니 훨훨 날개 단 시침 녹아내리는 세월 속에 추억이 촛농 되어 미리내로 흐르네! 유유히 꼬리치며 헤엄치니 애초에 잡을 수 없고 닿은 듯 아스라하니 애오라지 즐기며 함께 가리라 *애오라지: 좀 부족하나마 16) 시인의 가을 가을을 사는 사람은 봄이 오지 않을망정 봄이 온다는 신념 종교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인간에겐 봄이 없지요 생각해보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그러나 나의 봄은 꼭 있습니다 왜냐고요 종이에 또박또박 봄 씨앗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17) 바닷가에 앉아 개울물 구정물 다 받아들여 찰싹찰싹 두들겨 자신을 정화해내는 바다 인간도 그런 바다일 수 있다면 스스로에겐 짜면서 넘실넘실 춤추는 바다 한 평생 행한 일 다 지우고 단 한 줄 남는 출생일과 졸업일 뿐인데 한 줄 詩라도 남겨야지 바다 닮아 춤추게하는 詩 18) 이웃집 할머니 동짓달 긴긴 밤만큼이나 긴 그리움의 꼬리 세월도 가끔은 되돌아오는 연어였으면 좋으련만 지나간 자리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로 남아 잠시 코끝에 머물다 흩어지는 아카시아 향이다 땀내 나는 삶에도 고이 간직한 귀중품이 터진 호주머니로 새나간 허전함이 드는 건 왜일까? 이웃집 혼자 사는 할머니는 외로움에 절인 배춧잎 되어 유모차에 의지한 삶을 호두알 굴리듯 굴리는데 도시로 간 자식은 제 그림자에 갇혀 사느라 석고상이 굳는 줄도 모르네! 19) 사랑 식목일 귀향해서 몇 년 째 봄 가을 두 차례 나무를 심는다 주로 사과를 심는데 입안 가득 첫키스의 아리송한 맛으로 보답한다 라일락 허브를 심으면 향기로 피련만 봉숭아를 심어 놓고 박하향을 기다린다 심은 데로 열리건만 욕심을 심고 무관심을 심었으니 그게 가끔 외로움으로 핀다 내일은 보드라운 흙 속에 정성 다해 사랑 하나 심어보리라. 20) 갑과 을 평등해야 하는 세상 어느 곳 누굴 만나도 갑과 을이 존재하니 힘 있는 자는 갑 약한 자는 언제나 을입니다 가진 자와 배운 자는 갑 쪽에 가깝고 나머지는 을입니다 갑돌이 갑순이는 갑 을이 없지만 신혼엔 주도권 다툼 산속에 집 짓고 텃밭 가꾸며 살면 갑 을이 사라지려나? 21) 사랑의 무게 최근 체중이 좀 늘었기에 저울에 올랐더니 눈금이 제법 삐뚤어집니다 그게 얼마나 되랴 싶어 저울에 난 화분을 올려보니 딱 그 무게입니다 난 화분을 들고 온종일 다닌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합니다만 전혀 무게를 못 느끼기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부부로 한 몸 되면 부담스럽거나 불편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워하고 애태우는 사랑은 정점에 도달하지 못해 화분 든 상태의 사랑입니다 결혼하여 서로 믿는 부부는 특별히 그립거나 애태움 없어 그냥 또 다른 자신 같습니다 22) 사뿐 사뿐 오는 봄 앙상한 가지 잔설에 멍드니 보다 못한 봄 바람 안 쓰러운 듯 입김으로 호호호 양지쪽 햇살만 골라 먹은 개나리 노란 혀 내밀고 암노루 오줌 받은 진달래 말갛게 피겠지 뒷산엔 봄 처녀 겨울 총각 등 떠미네 마실갔던 뭉게구름 산등성이 돌아오고 실컷 자고 난 개구쟁이 봄 바람 지휘봉에 시선 고정하고 저마다 갈고 닦은 춤사위 보여 줄 테지 23) 지금 창 밖에는 봄을 시샘한 황사 오던 날 창밖이 궁금하여 내다보니 사람도 건물도 자동차도 온통 희뿌옇게 보입니다 창문을 살짝 열고 바라보니 그것은 나의 선입견 겨우내 창문을 닦지 못해 창밖이 그렇게 보였을 뿐 하늘에 종달새는 없어도 새봄은 햇볕 속을 꼬물꼬물 목련가지로 개나리 줄기로 기어오르고 귀뿌리를 빨갛게 달구던 찬바람이 강 건너 북쪽으로 도망치느라 잠시 일으킨 먼지였습니다 24) 관악산의 봄 산길은 긴장이 풀린 채 햇살 자분자분 걸어간 자리엔 잘 반죽 된 찰흙이 신발에 붙어 봄을 실어 나르고 훈풍이 쓰다듬고 간 자리 봉오리들은 파란 숨을 내 쉬고 겨울은 폭탄주를 마신 듯 음지의 벼랑에서 비틀거린다 도시락을 비운 배낭은 배고픈 듯 함몰된 채 매달리고 땀을 방출한 몸은 막걸리를 불러들여 웃고 있었다 이런 마음이 부자가 아닐까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 백 억을 가지고도 주린 듯 갈망하는 불쌍한 중생들이여! 25) 그대 그리운 봄날에 내게서 떠난 줄 알았던 그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웅크린 채 숨어 새싹 틔우고 있었네 아련히 남아 있는 그대 모습 밀물에 묻혔다가 썰물에 나타나는 조개처럼 잊힌 듯 떠오르는 그대 그대 잊힐까 염려하는지 새들은 날아와 추억을 노래하고 꽃은 졌다가 그대 얼굴로 피는구나 봄바람에 실어오는 그리움! 망각의 망태 담아 그대 다니는 골목길에 추억의 꽃잎으로 뿌리리라 # 제 2부 지상에 열린 천국 26) 침묵의 봄 봄비가 내리던 날 목련 봉오리의 센스는 제일 먼저 감지하여 축포를 터트렸건만 나비 날비 아니하고 새들마저 외면하니 봄은 왔어도 나의 봄은 없었습니다 그대 보내고 난 가을 그리고 겨울은 단풍과 함박눈으로도 축제 열지 못하였고 꽃 중의 꽃 목련으로도 포근하고 아늑한 봄을 초대하지 못했습니다 27) 地上에 열린 天國 부드러움이 강함을 천연색이 흑백을 미소가 근엄함을 훈풍이 강풍을 온기가 차가움을 몰아내고 그리하여 되찾은 봄! 얼었던 마음도 녹고 불만으로 가득하던 마음에 넉넉한 배려 생기고 내가 지상의 천국에 있네 눈길 주는 곳마다 배시시 눈을 뜨는 초목들 잃었던 가족 상봉한 마음 여유만이 베풀 수 있음을 절대자의 솜씨에 감탄할 뿐 ! 28) 종달새의 노래 하늘에 사는 새일까 보리밭에 사는 새일까 요들송도 아니요 버들피리도 아닌데 천지간 공간을 다 채우고도 남을 만한 종다리만의 봄의 교향악 들녘의 바람조차도 종다리의 날갯짓에 따라 불었다가 그친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청아한 노래로 그 넓은 들녘을 다 채운다 찌르르 찌르르르 들판을 흔들어 깨우고 내 마음의 공허까지 모두 모두 채워준다. 29) 사랑은 봄바람 타고 끊어졌던 전선 이어지듯 영감 받은 두 마음 합쳐지니 개나리 얼굴에 핏기 돌고 진달래 목련 기지개 켜네 그대 마음 내 마음 함께 연분홍 아무도 몰래 훨훨 날아 깜깜한 밤하늘 은하수 건너 그대 꿈꾸는 배갯머리 간다 봄바람 술래 꽃나무마다 손대니 몽글몽글 움트는 봉오리들 생명의 신비에 탄성 지르며 사랑이란 글자에 바퀴를 단다 그대 곁 쪼르르 굴러 가는 마음 마차엔 꽃다발 한 꾸러미 봉오리 터트리며 사랑 싣고 간다 간지름 태우는 봄바람과 함께. 30) 추억의 하얀 목련 마음은 잔잔한 호수로 돌아와 아련한 바닷가의 추억들을 곱씹어 봅니다 활력이 있고 설렘이 있던 바다 밀려오던 파도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달려오는 그대로 보였지요 바짓가랑이 젖는 줄도 모르고 파도를 마중하던 시절 그대는 막 피어난 한 송이 목련 아무리 비가 와도 또르르 굴러 내릴 뿐 고고한 기품 흩트리지 못했지요 박하향 같은 추억의 하얀 목련 가슴 저 밑바닥에 요처럼 깔고 추억을 베개 삼아 누우니 구름이 앨범처럼 넘어갑니다. 31) 봄 풍경 잔설(殘雪)에 멍들었던 앙상한 가지 보다 못한 봄바람 안쓰러운 듯 정성스레 입김으로 호호 부니 가지엔 다시 파랗게 생기 돌고 멍든 자국 사이사이 연초록 애벌레 살아서 꿈틀꿈틀 양지쪽 노란 햇살만 골라 먹은 개나리 노오란 혀 내어 밀고 암노루 오줌 받은 진달래 말갛게 피었네 시냇물에 발 담근 채 노는 버들 아기 졸졸 노랫소리 옷 젖는 줄 모르고 뒷산엔 봄 처녀 겨울 총각 등 떠미네 마실 갔던 뭉게구름 산등성이 돌아오고 개구리 담배 피우다 들킨 듯 안으로 숨 들이 쉬며 입 못 벌리네 실컷 자고 난 온 동네 개구쟁이 봄바람 율동에 시선 고정하고 저마다 예쁜 모습으로 춤사위 시작하네 32) 분명 꽃길인데 까만 눈동자 갈색 되도록 봄 기다리다 지쳐 감기지 않는 눈 활짝 열린 꽃길에 또 한 번 넔 잃고 바라보니 있어야 할 벌 나비 보이지 않네 이지러져 가는 생태계 개발의 뒤뜰에 볼모로 잡혀 무지개조차 본지 먼 옛날 봄은 쪼그라 들고 네 폭 병풍은 두 폭으로 줄었네 점점 숨 몰아 쉬는 지구 가끔 열도 토하고 간질병 환자 되어 부르르 떠니 봄이 와도 봄이 없고 꽃 피어도 향기가 없네 나풀나풀 윙윙 벌 나비 없으니 꽃길 걸어도 착잡한 마음 그림인지 실물인지 분간 못 하니 아! 그리운 옛날이여 옛 봄 그리다 지그시 눈을 감노라 33) 산장에서 클래식 풍의 봄바람 노래에 잣나무는 춤을 추고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구경하네 다정한 까치 두 마리 신혼부부 흉내 내며 토닥토닥 놀고 송골매는 공중에 매달린 듯 머물러 있네 산 등성이 타고 올라온 바람 숨 가쁜 듯 호이호이 욕심도 경쟁심도 녹아 버린 산장의 하룻 밤! 34) 입춘(立春) 때 이른 남녘의 봄 소식에 산은 혹시나 하고 실눈 뜨고 내다보는데 자신의 하얀 모습에 흠칫 놀라는 눈치 지구 온난화의 가속으로 계절도 본분 잃은 채 황사에 시달려 시름시름 앓고 백 년 후 해수면이 60센티나 오른다니 산들은 키가 작아지고 생태계도 눈에 띄게 변한 모습이다 바다는 수온 상승으로 어종이 바뀌고 인간의 감정도 점점 메말라 사랑, 눈물, 기쁨도 없는 로봇이 되어간다 러시아엔 노란 철분 눈이 내리고 빙하는 둥둥 미지의 여행길에 나서는데 지구는 부글부글 끓다 밖으로 솟구치네! 35) 목련을 바라 보며 혜풍(惠風)의 입맞춤에 활짝 핀 목련 언제 보아도 내 마음 사로잡네 길은 하늘로 열려 있으나 끊어진 전선엔 녹이 나고 있다 유구불언 하는 마음은 유목민을 닮고 재갈 물린 입은 좀체 열리지 않으나 순교하는 마음은 갈매기 등에 업혀 동쪽으로 날고 있다 구름이 머물다 간 자리 장명등 켠 북극성 그대와 함께 바라보던 개울가에는 추억이 졸졸 과거로 흐르네! 36) 아름다운 풍경 화창한 봄날 순풍을 받고 거침없이 가는 돛단배 활짝 피어있는 자주색 하얀색의 감자꽃 젖 물린 엄마의 온화한 모습 자식의 공부하는 뒷통수 노을진 석양의 귀갓길 까치밥으로 남긴 붉은 감 썰물이 반가운지 고개 내밀고 옆으로 기는 거품 문 방게들 둥지에서 입 벌리고 받아먹는 노란 주둥이의 새끼 제비 단풍 사이로 내리는 철 이른 함박 눈 봄꽃이 활짝 핀 한라산에 내리는 눈 눈이 녹았다 다시 얼면서 수정 속에 박제가 된 꽃들 이런 풍경들을 떠 올리다 보면 나도 어느새 빙그레 웃는다. 37) 가슴에 내리는 봄 눈 새싹이 내다보는 틈으로 하얀 눈이 사정없이 내린다 사자가 새낄 단련시키는 훈련 차원의 예방주사일까 가슴으로 내리는 눈은 차곡차곡 샇여 화로에 묻어 둔 알밤을 꺼내 옛 추억을 쏟아 놓는데 강물에 내리는 눈은 아무리 내려도 흔적조차 없이 펑펑 내리는 눈은 눈물로 강물 속에 흘러든다 냉철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 이것저것 다 품고 오로지 바다만을 향한 채 한 마리 갈매기만 데리고 간다 38) 늦둥이 사랑 불혹에 태동한 늦둥이 세월의 강 건너다 실족하여 물 먹느라 못 챙겼는데 내 키보다 더 큰 동량 되었네 손바닥에 올려놓고 장난감 삼아 놀았는데 팔짱 끼;고 걷는 기분 상큼하다 못해 우쭐해지네 혼자 크게 놔둬서 미안했고 훌쩍 커버린 게 마술 같지만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던 가슴 찡한 사랑, 네게 주노라 39) 내 인생에 손님 그대 인생에 즐거운 때는 있었나요 소중한 시간은 언제였나요 그대 만난 사람 중에 최고는 누구였나요 여태껏 살면서 가장 보람있는 일은 또 어떤 일이 있었나요 조용히 눈 감고 생각에 잠겨 보세요 아름다운 만남! 하얀 눈 위로 내 달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던 그런 시간이 그대에겐 있었나요 붉은 노을 만큼이나 예쁜 추억에 젖어 더운 여름밤도 즐겁습니다 40) 그대를 불렀을 때 내가 그대의 이름을 맨 처음 불렀을 때 한 마리 비둘기가 되어 가슴의 둥지로 날아들었고 두 번째 그대를 불렀을 때는 노란 해바라기로 피었지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한동안 목련으로만 피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내가 그대를 부르면 보일 듯 말 듯한 도요새로 먼 허공을 빙빙 돌다 갑니다 41) 사랑의 간이역 어느 누구의 잘못 없이도 일이 꼬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십중팔구 서로 원망하게 되지만 잠시 일상 접고 여행길 오르는 게 좋습니다 삶의 리듬 맞지 않으니 조정해 주면 정상궤도 복귀합니다 평소 보지 않던 경치 감상과 남들 살아가는 모습 보노라면 자신의 좁은 소견 들여다 볼 기회가 생깁니다 기차여행 하다 간이역 내려 발자국 적은 길 걸으며 지나온 인생길 회상해 보는 것도 참 의미 있습니다 늘 불타오를 줄 알았던 사랑도 때론 간이역이 필요한 건 인간의 마음은 늘 움직이는 바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가던 길 잘 가다 심술 나면 회오리바람으로 둔갑하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조물주가 실수한 인간입니다. 42) 사랑과 우정 사랑은 믿음과 배려 먹고 자라고 우정은 믿음과 의리 먹고 자란다 사랑은 잘 꼬아진 동아줄 같고 우정은 나란히 깔린 철로 같다 사랑은 가끔 합선이 필요하고 우정은 간간이 접선이 요구된다 사랑은 고이면 썩는 시냇물이고 우정은 많이 담을수록 좋은 호수다 사랑은 자주 그리움을 잉태하고 우정은 가끔 걱정을 안겨준다 사랑은 열매 맺는 과일나무요 우정은 꽃만 피워도 좋은 화초다 사랑이 오래가면 우정이 피어나고 우정도 오래가면 사랑이 꽃핀다. 43) 돌아갈 수 있다면 세월의 소용돌이에 멀지도 않은 지난날이 영화 한 편 본 것 같이 어렴풋하지만 향기 품은 달콤한 눈매 살짝 패이던 볼우물 하얗게 드러내고 웃던 상아색 꽃잎 잊고 싶을수록 사랑했던 깊이만큼 고장 난 레코드처럼 자꾸만 재생되는 얼굴 세월의 먼지 쌓여도 그대 얼굴만 반질반질 윤기 흐르니 제발 세월로 덮어주오 가스불 위 주전자는 의미 있는 주술이라도 외듯 휘파람 불며 사라지는 요술을 부린다. 44) 행복은 가까이에 날씨 연일 쾌청하면 옥토가 사막 되고 좋은 노래도 종일 들으면 귀가 싫어 거부한답니다 자식사랑 지나치면 사회 적응 잘 못 하고 칼날도 날 넘으면 아주 무딘 칼 되겠지요 배려 지나치면 상대방이 힘들고 사랑도 과하면 집착되니 항상 적당한 게 좋습니다 돈이 너무 많으면 집안이 시끄럽고 로또복권 맞은 예비부부 파경 소문났습디다 위성처럼 맴도는 행복 빨리 찾아가라 외치는데 우매한 인간이라 멀리서만 찾아 헤매지요. 45) 알 수 없어요 눈썹도 없는 모나리자가 완성작품인지 아닌지 자투리 김밥의 또 다른 맛 세로로 죽죽 찢어먹는 김치의 색다른 맛의 원리 분명히 똑같은 생선인데 무딘 칼로 요리하면 맛조차 달라지니 세상엔 알듯 모를듯한 일이 많아 곁에 있을 땐 귀찮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리워하는 연인들 낙화하면서까지 고운 향기 내뿜는 라일락 조국 떠나면 애국자 되고 살아생전 불효한 사람도 무덤가면 천하에 없는 효자 되니 살아갈수록 아리송한 세상 46) 얼음 조각상 사랑은 녹아내리는 얼음 조각상 처음엔 모습에 반했다가 나중엔 추억으로 향긋하니 보이지 않아도 늘 곁에 있네 목련으로 왔다가 해바라기로 웃고 유행가 가사에도 숨어 즐거움과 괴로움 함께 나누네 기억 희미해져 얼굴 잊어도 장미만 보면 해바라기만 보면 그대 얼굴 기억할 수 있으니 소유하지 않아도 함께 있고 행여 잊을세라 계절 따라 꽃으로 피어나니 나 그대 향기에 취해 사노라 47) 추억의 휴지통 미련일까 정일까 쏟아 버리지 못하고 긴 세월 보관한 추억 버리려다 도로 넣고 가끔 꺼내 보고는 눈가에 가녀린 미소 무덤 갈 땐 버리려나 궁금해서 꺼내 보고 생각나서 못 버리네 바닷가에 버려 놓고 뒷산에다 숨겨 놓고 화분에는 심어 놓고 구름 위에 얹어 놓고 고향 땅에 묻어 놓고 가슴엔 화단까지 만들었네! 48) 이른 아침 풍경 수다로 꼬박 지새운 별님들 구름 뒤에 숨어 잠들고 덩치 큰 달님 미처 숨지 못해 서성이는데 밤새 잠 못 자고 뜨는 태양 피로한 기색 없이 안개 걷어내며 당당히 왕좌에 앉았구나 식을 줄 모르는 열정 줄기차게 내뿜는 에너지 샘 널 닮을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에도 당당 하련만 저녁엔 주연자리 배려하는 양보심 많은 너는 진정한 풍운아! 널 닮는 날 멋쟁이 되겠지. 49) 인연 인연이라는 것은 마른 하늘 소나기 되어 예고 없이 다가오니 준비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의 동공은 확대되고 영화 속 엔지 장면처럼 어설픈 행동조차도 마냥 멋져 보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타는 눈빛만으로 알 수 있으며 거미줄에 걸린 나비되어 서로 노예 되고 말지요 탄생에 선택이 없듯이 인연도 미리 점지 되어 어느 순간 커플모자 쓰고 닮은 얼굴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50) 인생의 향기 人生은 수중 발레 백조의 우아함 이면에 처참하리만큼 바삐 움직이는 가냘픈 다리 그대 물속에 코 박아 본 적 있는가 가라앉고자 하면 뜨고 얼굴 내밀면 스르르 가라앉지 않던가 씨앗 하나 온전히 썩지 않고 새싹 나오는 걸 본 적 있는가 끊임없이 겪고 상하고 찢기고 나서야 그대 겸양함을 배우지 않았던가 겸손과 배려는 인생의 윤활유 어둠 속에서만이 신비한 반딧불을 볼 수 있지 우리가 살아감에 꼭 필요한 여섯 단어 깡, 끼, 끈, 꼴, 꾀, 꿈 이것만은 꼭 지녀야 해 자신에겐 엄격하고 남에게만은 관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생의 향기 싱그러울 거야 제 3부 행복한 전쟁 51) 그대에게 가는 길 내게로 오는 길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 뭉게구름으로 왔다가 철쭉꽃으로 왔다가 어떤 때는 바람으로 오다가 가랑비로도 오니 결국 내게로 오는 길이 다양하였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도 한 길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둥근 달로 어떤 때는 찰싹대는 파도로 고요할 때는 똑똑 동굴 속 물방울로 그대에게 가련다. 52) 고염나무 인생 처음부터 단맛을 내는 단감나무나 알이 굵은 수수 감나무는 없습니다 고염나무에 접을 붙인 것이지요 애당초 우리 인생 고염나무였지만 교육이나 주위 환경에 의해 여러 감나무로 거듭났습니다 옛날 고향집에 뿌리는 고염인데 접붙여 반시감, 고종감, 오리 감인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후천적으로 결심만 하면 여러 형태의 삶을 살 수가 있지요 오늘 웃는 사람은 내일도 웃거니와 찡그린 사람은 모레도 번데기 얼굴 이제라도 단감의 접을 붙여 남은 인생 누구나 좋아하는 단감의 인생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53) 가지산 터널 아담하게 잘 뚫린 콧구멍으로 밀양의 심장 가득히 울산의 바닷냄새를 공급하고 마산의 젖비린내가 나가는 곳 I M F 터널을 닮았는가 능동 터널 통해 담금질했건만 한번 들어서면 퇴출 구가 없는 듯 가도 가도 끝이 없네 이틀을 돌아다녔던 먼 거리로 꽃만 보고 단풍은 못 본채 겨울 맞았으니 내 마음 뭉게구름되어 하염없이 동해로 둥 둥 떠가네! 54) 걸레의 가르침 더러운 손으로 이것저것 만지니 만지는 것마다 다 더러워집니다 깨끗이 빨지 않은 행주로 식탁을 문지르니 무늬가 생기고 닦은 식기에도 얼룩이 남습니다 한번 더럽혀진 마음은 더욱 씻어내기가 어려운지 전과자들은 새로 피는 듯하다가 끝내 뿌리를 뽑지 못합니다 나를 정갈하게 다스리지 않고는 무슨 일을 해도 도로 더러워짐을 걸레를 통해 알았습니다. 55) 얄미운 사랑 슬픔 꾹꾹 접어 만든 종이비행기 두둥실 보름달 향해 날렸더니 그리움의 새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고 그리움 잘근잘근 씹어 바닷가 돌 위에 놓았더니 파도가 궁금했는지 뒤꿈치 들고 바라보다 삼키고 가네 파도가 안고 간 그리움은 돌아올 줄 모르고 수평선 저 너머로 고래처럼 물 뿜으며 달아나네 일곱 살 아이처럼 청개구리로 행동하니 그리움아 그냥 가 버려라 이제는 자유롭고 싶어 돌아서니 등 뒤에서 날 꼭 껴안으며 누구게 묻네 돌아보지 않아도 아는 아는 그리움이 ... 56) 예방 주사 늘 평행 이룰 수는 없지만 사랑은 둘이 타는 시소 올라가서나 내려와서 멈추어도 문제 사랑은 노 젓는 작은 배 한쪽 노만 저으면 진행 못 하고 빙빙 믿음 없는 사랑은 아침 안개 찬란한 햇빛 받으면 흔적조차 없지 조건없는 믿음만 필요할 뿐 한여름밤의 얼음 될 수도 있으니 겨자씨만 한 불신조차도 사랑의 꽃잎 낙화할 수 있지. 57) 행복 하냐고 물어 오면 혹 꿈이 있느냐 물어오면 끄덕끄덕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물으면 역시 끄덕끄덕 삶이 즐거운가 물으면 아리송해 행복이 무어냐고 물어오면 갸우뚱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이 있고 기다려 줄 사람이 있는 나는 정녕 행복한 사람이다 봄 가을에 피는 진달래 코스모스도 아무렇게나 피는 들꽃조차도 다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천둥이 날 야단칠 때도 성난 파도가 덮치려 할 때도 산이 날 위해 버텨주고 정열적인 태양이 구름을 다스린다 삶이 즐거우냐고 언제건 물어와도 꿈이 있느냐 다시 물어도 변함없이 끄덕끄덕 생각을 바꾸면 모조리 바뀌는 것을, 58) 사랑의 블랙 홀 가랑비가 올 때는 사랑에 젖지는 않았습니다 소나기가 요란스레 내리고 흙탕물이 모여 빙빙 돌면서 사랑의 블랙홀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 후론 나도 모릅니다 그냥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오솔길이 열려 있고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길을 새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59) 다시 없는 하루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달력에 떠밀린 하루 술에 취해 마술사에 속은 하루 어떤 이는 재충전이라 하지만. 계획하여 산 날보다 떠밀린 날이 많은 삶은 오래 살아도 거품이며 옹골차게 산 사람은 눈빛부터가 온화하고 여유롭다 놓친 하루 되찾는 일은 지구를 들어 올리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 미리 계획하여 스스로 지구본을 돌려야 산 날이다 달력에 까만 숫자들이 톡톡 분해되는 소리 들으며 이 순간도 땀 흘리는 사람들 결승테이프 가슴에 닿는 날 표정은 둘로 갈라질 게 분명하다. 60) 세월이 흐른 후에 아무리 뼈아픈 이별이라도 삼 년이면 견딜 만하다는 걸 군에 다녀온 후에 알았습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왜 온몸을 내 던지는지 부모 되고 난 후에 알았습니다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며 잘게 가루가 되는지 겨울비가 온 후에 알았습니다 노인들은 왜 체구가 작아지며 뼈가 푸석푸석해지는지 고운 흙을 만지며 알았습니다 이렇듯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진리인 줄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네요 61) 커피 한 잔 호젓한 산장의 상큼한 솔 향 코 끝에 와 닿는 커피 향과 더불어 하얀 낮 달처럼 다가오는 얼굴 시간의 게으른 흐름 속에 현실을 까맣게 망각한 채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 내게 전부인 것처럼 다가온 유난히도 커피 향을 즐기던 은은한 미소의 주인공을 모락모락 한가하게 떠 올리며 커피 한 잔에 위로와 채우지 못한 빈 가슴을 달랜다 아무에게도 숨기고 싶지 않은 사랑을 위해 훨훨 타던 하와이의 가로등처럼 정열을 닮고 싶다 커피잔 바닥에 남아 말라버린 추억 자국에 참지 못해 폭발하는 활화산 처럼. 62) 장미로 쓴 이름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언덕 위 빨강 노랑 보라색 장미로 화원을 만들었네 가까이서 보면 평범한 장미 원 멀리서 보면 또렷한 이름 석 자 사랑하는 모모 얼마나 애틋한 사랑이었으면 이름의 주인공이 와서 보면 얼마나 감동할까 공해로 찌든 세상에 비가 그치고 난 후의 산야처럼 산뜻한 순수가 묻어 있네 무공해의 말간 사랑 앞에 모두 부러워하며 제각기 주인공 되어 즐기네! 63) 네 잎 클로버의 추억 한 떨기 목련 고고하게 피었다 비바람에 무참히 흩날리니 잇몸 후벼 파는 치통의 고통 어지러운 마음 추스르고자 마음에 촛불 켜고 고요히 눈감고 명상에 잠기니 과거는 주마등으로 돌아가는데 등걸째 썩어가는 나무처럼 다시 움트는 신기루는 없겠지 옛날의 고운 추억 반추해 본들 이미 싸늘히 식은 커피 맛 기억 속에 접은 네 잎 클로버 잔잔한 추억 적어 깊이 두었다 내 마음의 촛불 흔들리는 날 빙그레 웃으면서 꺼내 보리라 64) 하늘이 울면 지난여름에는 그 시끄럽던 매미 소리를 자주 듣지 못했습니다 공사장의 요란한 굴착기 소음에 눌려 안 들렸는지 놀라 도망이라도 쳤는지 슬픔도 큰 슬픔 앞엔 작은 슬픔은 묻혀 버리니 기쁨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늘이 크게 울 때 바다도 어쩔 줄 몰라 요동치는 걸 보았습니다 그대가 괴로워 울면 이 몸도 어쩔 줄 몰라 이성 잃은 파도가 됩니다. 65) 징검다리 냇물을 가로지른 돌 수제비 동동 종이배가 떠내려오다 징검다리만 지나면 냇물의 노래에 춤을 추고 올망졸망 물 위에 얼굴 내민 두더지도 소나기엔 귀찮은 듯 검붉은 머리 감추고 만다 하굣길 어린이는 원망스레 검은 하늘을 쳐다 보다가 달달 떨리는 다리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한발씩 옮기는데 주인 찾아 마중나온 강아지는 시범이라도 보이는 양 네발로 살랑살랑 헤엄친다 우리네 인생 잠겼다가 고개드는 징검다리 같아도 폴짝폴짝 건너는 동심이 있어 발랄한 생기로 살아갈 테지 66) 춤추는 분수 보라매공원과 호수공원에 가면 광선과 물줄기가 만나 밤마다 열정적인 사랑을 한다 구경꾼이 많을수록 더 신나서 포옹하고 철벅거리고 손뼉까지 치며 야단법석이다 오색 불빛 속에 길게 또는 짧게 폭포로 흐르다가 때로는 둥글게 부채모양으로 아치를 그리면서 흡사 공작 수십 마리가 모여 웅장한 매스게임을 하는 듯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해 낸다 음악의 흐름에 따라 얼싸안고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왈츠와 탱고 그 어떤 음악에도 주저함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신나게 탭댄스를 추며 하늘의 별들을 마음껏 조롱한다. 67) 바닷가에 혼자 앉아 한가로이 날고 있는 갈매기 집어삼킬 듯한 검푸른 바다 파도는 추억 실어 모래밭에 감추고 갈매기는 추억 물고 구름 따라 정처 없이 나르네 그대 떠난 내 마음엔 하얀 물거품만 남고 공허한 마음 되돌아가는 파도에 실어 봐도 출항했다 돌아오는 빈 배처럼 하염없이 흔들리네 파도야 너는 아니 갈매기야 너는 아니 그리움이 어디서 왔다가 어드메로 가는지. #박대통령이 썼던 제목에 붙여 68) 꽃은 곁가지에 낮에도 많은 별이 떠 있지만 밝은 태양 때문에 존재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오면 성냥불만 그어도 존재가치 살아나지요 이 세상엔 어둠 속에 태어나 한 끼 끼니 걱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부자에겐 아무리 베풀어도 대낮에 별 격이니 차라리 그믐날을 밝힙시다 굵은 가지에는 아무리 정성 기울여도 꽃도 열매도 맺지 않습니다 69) 주홍 글씨 태풍이 쓸고 간 자리처럼 그대와의 추억 가슴에 주홍글씨로 너무도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사랑의 끝은 어디인가요 메우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구멍만 크게 뚫었습니다 아직도 그대 눈 속에 잔영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눈까풀의 이불로 이미 보금자릴 만들었겠지요 석양은 내일을 약속하지만 냇물에 던져진 종이배는 찾지 못할 것을 알기에 마음은 겨울로 다가섭니다 70) 숲의 가르침 하늘이라도 찌를듯한 숲 속에 설 자리 잃은 잡목 햇빛 한번 제대로 못 본 체 운명 다하고 잡목 우거진 곳에 키 큰 소나무 혼자 잘난 체하더니 벼락 맞은 몰골 흉물스럽다 서민은 서민동네 살아야 스트레스 덜 받고 부자는 부자동네 살아야 신변이 안전 한 동네 아파트 평형 따라 담쌓고 산다니 자라나는 새싹 가슴 멍들까 염려스럽네 세상 이치가 시소처럼 양쪽이 동시에 올라갈 수 없고 어차피 백 년을 못 사는데 움켜쥔다고 해결되겠는가 71) 행복한 전쟁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던 시대는 내 기억엔 없다 나의 출생도 전쟁의 화약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태어났으니 그러나 우리의 전쟁은 참으로 행복한 전쟁이니 이 전쟁이 끝나는 날 어느 한 쪽은 긴 한숨을 쉬리라 잠을 자다 심한 압박감에 깨보면 적군은 통나무를 동원해 깔아뭉개기로 돌진하는 척하다 굴착기를 걸쳐놓고 기다린다 낭떠러지에 몰려 도저히 더는 물러날 수 없어 안간힘을 쓰며 버텨 보지만 육중한 통나무를 당할 순 없다 오백여 회의 상륙작전 중 성공은 인천과 노르망디뿐이지만 멋지게 돌아 성공한 후 이 몸은 적 진지에서 잠이 든다. 72) 영리한 꽃 채우는 만큼 비워내는 것이 건강의 첫째 비결 욕심도 채우는 만큼 비워낸다면 존경의 영순위 도무지 못 받은 것 같아도 요모조모 따져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가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꽃은 아낌없이 꿀을 비우고 대를 이어 번성케 하고 사랑은 고귀한 희생으로 명예는 오직 봉사로 얻으니 화마로 다 잃은 것 같아도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겨울의 하얀 눈을 잃으니 풍성한 자연 곁에 와 있네! 73) 굴렁쇠 인생 산은 높고 험할수록 물은 깊을수록 좋다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부부는 많이 싸울수록 빨리 맞물려 간다 나무는 푸를수록 좋고 비는 오래 기다릴수록 반갑다 네모는 늘 부딪히고 잘 굴러가지 못하니 둥글게 살자 굴렁쇠는 보기에도 부드럽고 걸림돌 가로막아도 속도만 줄이면 쉽게 넘어가니 장애물 문제 될 리 없지 굴렁쇠 굴리는 아이 깨달음 빠르고 모난 돌이 발에 채이니 우주 만물이 둥글게 생긴 건 보고 배우라는 뜻일 게다. 74) 자연의 신비 식탁에 올려진 메추리 알 삶지 않았으면 한 마리 새가 되었을 텐데 목구멍을 넘겼더니 마음속에서 날아다니네 주먹만 한 알에서 탄생한 타조 정, 난자가 합심하여 만든 만물의 영장 인간 살펴보면 신비롭지 않은 일이 없네 산 보다 더 깊은 바다 어제만 해도 남이었던 사람 가슴에서 죽순으로 자라는 인연 바다가 육지를 사랑하여 새벽부터 짝짓기를 시도하니 사랑은 하얀 거품으로 남는구나 75) 아들 딸에게 하늘에 총총한 별보다도 어제 내린 비보다도 하늘 공원 앞에서 뿜어내는 분수의 입자보다 더 하고 싶은 말 어른이라서 못하는 걸 알아주는 너희들이기에 더욱 아린 마음 낮달 이고자 하는 마음이란다 인생을 어렵게만 가르친 것 같은 죄책감에 내린 비의 양만큼 슬퍼도 남몰래 증발하는 수증기 마음 역경을 이겨낸 무덤가에 휘어진 머리 위로 붉은 정열 토해내며 바람에 몸 맡기는 할미꽃 바로 어미 아비의 마음이란다 # 제 4부 천국의 영역 76) 울타리 봄을 경험하지 않고는 봄을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물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얼마나 숨을 참을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넘어져 보지 않고는 충격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고 자식을 낳아보지 않고는 핏줄의 끌림을 알 수 없었지요 죽을 병에 걸려보지 않고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도무지 몰랐습니다 살아가면서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인생을 더 깊숙이 알 테지만 행복은 가정의 울타리에 있고 웃음은 졸졸 따라다닙니다. 77) 오십보백보 같지만 그대는 오늘 하루 길게 느끼며 살았나요 아니면 금방 보내셨나요 길게 느꼈다면 오래 산 것이니 서러워할 일이 아니지만 오래 사신 만큼 늙은 건 분명하답니다 짧게 산 그대는 분명히 세월을 도둑맞고 살았지만 되찾지 않아도 받은 상금 짧게 산 만큼 늙지는 않았습니다. 78) 국립묘지 오십여 년 전 까맣던 유월 하늘 말없이 둥둥 떠가는 구름 속엔 아직도 검은 슬픔이 남아 있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걸린 현수막은 미친 듯 살풀이춤을 추며 호국영령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누운 님들은 한결같이 조용한데 위정자들은 저 혼자만 잘난 듯 압력솥의 추로 요란스럽구나 애국자들은 자신의 침묵도 모자라 군데군데 정숙이라는 팻말로 방문객조차 입 다물라 고언 하네 79) 천국의 영역 이별의 뼈저린 고통을 맛본 사람은 검은 사랑을 느꼈을 것이며 그대가 있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이건 간에 천국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대 눈이 볼 수 있는 곳 기억이 다다라는 곳 그곳이 천국의 영역입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서도 함께 보고 있겠거니 느끼면 바로 천국이지요 만일 그대가 날 잊었다면 나는 이미 지구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곧 지구이며 지구를 떠나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인간의 일이라지만 그대 기억 속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80) 삶의 촛불 조금 길고 짧은 촛불 사이 내가 켜 둔 촛불도 이미 많이 타서 몽당촛불 이 짧은 초가 다 타고나면 영혼은 훨훨 혼자 날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내가 태어났던 곳으로 멀고 먼 여행을 떠나겠지 그기엔 생각도 존재 않고 부모 자식 간에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어쩌면 인간의 본향일지도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다만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오늘이 다시는 없다는 거야 81) 파도의 마음 아스라이 먼 수평선 저 멀리서 보고 싶다며 쫓아와서는 정작 눈앞에서 주저앉고 마는 가슴 밑바닥에 담아 둔 말은 끝내 말 못하고 돌아서야했던 파도의 애달픈 마음 땡볕에 삐죽삐죽 땀 흘리더니 밤비로 도란도란 내 가슴에 흥건히 쏟아 놓네 모래톱을 건너지 못하던 그대 기어코 수증기로 변신 하늘에서 육지로 길을 만들었네 82) 미인의 기준 인간을 형성하는 뼈와 피부는 흙과 원자구조가 같고 심성은 하늘의 구름과 같아 늘 변화무쌍하답니다 한가운데 매달린 마음의 추는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의인도 악인도 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가 인정했지요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들은 진흙 팩을 열심히 하지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미인은 살짝 그을린 구릿빛 얼굴입니다. 83) 그리움의 종점 하룻밤에 만리장성이라지만 낭만적이고 감미로운 하루가 지루한 일 년보다 나을까 한낮보다 해거름의 그림자가 더 큰 것과 같이 갈수록 꼬리 길어지는 그리움 서산으로 해가 기울고 나면 캄캄한 밤이 안식을 주듯이 이별도 그럴 수 있을까 창문을 노크할 이 없는데 바람불어 나뭇가지 흔들더니 똑똑 마음 문을 노크하네 가는 봄 뒤꽁무니에 매달린 그리움의 풍선 터질 듯 말듯 매달려가네! 84) 추억의 골목길 낙엽 밟던 소리 정겹던, 발걸음 소리 잦던 골목길 하얀 융단 깔아도 진달래 꽃길 만들어도 길은 언제나 황량하다 저벅저벅 올 것만 같은데 커튼을 올렸다 내렸다 살짝 들추고 내다봐도 골목길은 그림자로 부산하다 끝내 떠내려 보낸 고무신 세월의 징검다리 건너는 발은 병아리라도 밟은 듯 후들후들 떨고 있다 추억은 살아 기어다니고 맷돌은 닳아 빈틈없는데 사랑은 이쑤시개가 필요하다 오늘도 커튼을 올렸다가 봄바람만 불러들인다. 85) 모유 없는 세상 태어나 우유만 먹고 자란 아이 사랑을 못 배워 부모와 이별해도 슬픔이 없네 인스턴트 식품 좋아하더니 건망증 늘어 자신이 누군지 조차 모르네 그의 친구 돌아보니 감정도 없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부모 잃은 장례식장에도 웃음꽃 피어나니 오히려 떠나는 영혼이 통곡하네! 86) 무정한 세월 아파트 모서리 돌아 코트 깃 흔들며 세월 쫓는 바람아 무엇이 그리 급하더냐 이제 솜털 보송보송 아기 같은 봄 아장아장 오고 있는데 좀 천천히 가자꾸나 방금 갈대 보고 왔으니 꽃피면 떨어질 게 걱정이로다 아직도 푸른빛이 그리운 걸 정수리 하얗게 밝아 오니 내려가는 발길 더 가볍구나 바람아 멈추어다오 제발 세월 쫓지 말고 87) 헛발질 서로 잘 맞는 반려자 만나 빈틈 작으면 작을수록 행복지수는 올라 갑니다 하지만 너무 완벽한 커플도 때로는 발 헛디뎌 안타까운 수렁에 빠지지요 작은 틈이라도 미리 대처 못 하면 저수지의 쥐구멍과 같이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습니다 너무 완벽해도 헛발질이 많아도 사랑은 잘 여물지 못하니 이해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서로에 대한 끈을 놓아서는 안 되며 등대지기의 모습이 좋습니다. 88) 걱정 메뚜기가 잡힐 때는 흔적없이 사라질 줄 몰랐다 반딧불이 흔할 때는 여름이면 으레 오려니 했다 눈만 뜨면 옆에 있는 당신이 한평생 옆에 있을 줄 믿지만 메뚜기가 반딧불이 알려주어 오늘도 나는 그대를 염려한다. 89) 마음의 달 꼬부랑 골목길 같은 내 마음의 뒤안길 달빛 스며들 만하면 달은 지고 별 눈뜰 만하면 별도 지고 바싹 마른 마음의 대지에 상아색 달빛 한 줄기 구석구석 밝히더니 새싹의 신비함 보여주네 이제 달빛 닮은 꽃도 피고 별 닮은 열매도 열리려나 바람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별꽃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보름달 그대 90) 아름다운 이별 사랑하므로 헤어진다는 말 언뜻 이해하기 어려우나 아무리 궁합 잘 맞아도 첫단추 잘못 끼운 상태라면 가슴에 피멍 들고 머리에 하얀 우유 들어찰지라도 서로 손을 놓아야 불행의 고리 끊을 수 있지요 엉거주춤하게 입은 상태로 우스꽝스레 살다 보면 불행의 이끼 파랗게 생겨 자칫 미끄러지기 쉬우니 현명한 사람은 가슴 속 비밀 금고에 숨겨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그리움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대의 행복 위해서라면 노스탤지어에 얼굴 묻고 눈물 꽃 피울망정 기꺼이 고이 보내 드립니다. 91) 확실한 증거 만일 인간이 다시 살지 못하고 삶이 이생뿐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육체는 사람, 짐승, 새, 그리고 물고기로 하늘에 속한 형체는 영 땅에 속한 형체는 육체지요 그리하여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늘로 육체는 땅으로 돌아간답니다 선진국도 인정하는 신의 존재 우리가 못 봤다고 하여 믿을 것을 믿지 못한다면 절대자가 보기에 얼마나 딱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그대여 내가 그대 눈앞에 없을지라도 그대 사랑하는 맘 변함없음을 믿어 주오 이 세상에 헛된 수고는 없으며 날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 그 수고가 결코 잊거나 헛되지는 않을 것이오. 92) 끝이 없는 사랑 처음엔 쩍 벌어진 석류알로 웃는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가 미소 너머 샛별 닮은 당신의 눈과 마주쳤고 결국 그 샛별에 눈 멀고 말았지요 당신이 오래도록 둘러본 자리는 어느덧 내게도 익숙해져 갔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고부터는 당신 전부를 사랑하게 되었지요 잠시 일에 몰두하면서 한동안 사랑하는 방법을 잊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의 흰 머리카락 주름진 얼굴에도 고운 사랑으로 채울 겁니다 사랑은 언제나 시작이지끝은 없으니까요 93) 잠 못 이루던 밤에 단잠을 깨우는 손길이 있어 눈 비비고 일어나 돌아다보니 고요한 바람이라 바람이 인도하는 대로 옥상에 올라보니 가슴을 시원케 하는 또 다른 바람 있었네 하늘을 올려다보니 꾸벅꾸벅 조는 별들 사이 내게 윙크하는 별이 있어 가슴을 잘 겨냥하여 큐피드의 화살 쏘아 올렸지 94)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선남선녀가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 말을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이미 혼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가슴은 쿵쾅쿵쾅 물레방아가 되어 힘차게 돌고 생각했던 언어들은 무지개가 되어 별을 만나러 갑니다 인간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때는 자기 일에 푹 빠져 주위의 일에 관심이 없을 때이지요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하늘이 맑았는지 구름이 끼었는지 도무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95) 혀와 치아 치아는 가릴 것 없이 씹어 넘기고 강하기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 부러질망정 휘어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세 치 혀는 너무나 부드럽고 혀가 움직이지 않으면 한마디도 표현할 수 없게 되는데 잘 못 움직이면 비수보다 날카롭고 바늘보다 더 깊이 찌르지만 때로는 침으로 작용 치료도 한다 나이가 들면 치아는 흔들리다 빠져 볼품없어지지만 혀는 끝까지 살아 재산을 움직인다. 96) 사랑의 정리해고 추억 똘똘 뭉쳐 눈사람 만드니 남의 눈엔 눈사람 내 눈엔 영상 살아 영화 한 편을 보네 봄 가을 그리고 겨울 한해가 저무는 날 정리해고 영 순위에 올려놓고 추억을 불사르는데 심장박동 요란하더니 뜨거운 불길 가슴으로 번져 한바탕 요동치며 해일로 덮치네 날개 찢어진 한 마리 작은 새 추억의 깃털 뽑아 던지며 도망치듯 제자리 향해 날아가고 마네! 97) 소중한 이별 푸른 창공에 행글라이더 타고 훨훨 날아오르던 마음 작열하던 태양만큼이나 뜨겁던 그대와의 사랑 산호색 붉은 노을로 검푸른 바다 숲에 깊이 잠기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새싹으로 두근거리며 고운 꽃을 피우다가 열매 맺지 못하면 한낱 조각으로 지구의 반대편에 떨어져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낙엽으로 이 골목 저 골목 외로이 떠돌다가 가을비에 찰싹 붙어 몸은 영원히 떠나지만 그리움은 낙엽의 허물을 남기고 시야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우리에게 이별이 있는 건 사랑하고 있을 땐 행복의 척도를 잴 수 없다가 헤어지고 나면 과거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일깨워주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98) 은방울 꽃의 속마음 그대 잠든 창가에 초롱초롱 북두칠성 되어 내려와 새근새근 잠자는 모습 어여쁜 볼도 꼬집고 싶구나 그대 가는 길에 등대 되어 어두운 길 환히 비쳐주고 그대와 동행하며 위로받고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어라 은방울꽃 속에 속내 담아 꼭꼭 숨겨 두었다가 그대 우울한 날 진한 향기로 마음 달래며 책갈피에 곱게 끼워두었던 네 잎 클로버에 그리움 적어 그대 마음에 감동 주고 오래도록 비워 두었던 마음 이제는 사랑로 채우고 싶다고 보름달의 모습으로 고백하고 깨알 같은 은하수의 언어로 내 마음 전하고 싶어라 99) 사랑의 粉 갈이 잎사귀만 무성한 蘭 몇 그루 보살핌이 부족했던지 봄이 와도 꽃 피울 줄 모르기에 粉 갈이에 영양제 주사 정성 쏟아 부었더니 미안했던지 꽃대 쑤욱 내미네 예쁜 蘭에 들려 주려 감미로운 음악 틀어 놨더니 마누라 더 좋아 엉덩이 실룩샐룩 코에 봄바람 들어가니 바람이라도 들었나 오늘은 그대와 함께 봄나들이라도 가볼까나. 100) 가을의 고독 호수에 떨어진 단풍잎 한 닢에도 고독의 물결이 번지고 가늘게 우는 귀뚜라미 울음에도 슬픈 소름이 돋는다 실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갈대 환히 웃는 보름달을 보고도 입은 꽉 다물어져 이유 없는 고독이 나비처럼 난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비집고 향긋한 커피 향마저 입맛이 쓰다 젊음의 뒤안길 스포트라이트는 꺼지고 동녘의 정열은 조금씩 멀어져 반쯤 바람 빠진 타이어 모양으로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나뭇잎 점점 그루터기가 되어가는 중년 *잠실 석촌호수에서 # 제 4부 거울이 본 신수 101) 해바라기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입 꼭 다문 하루방이 됩니다 이런 저런 얘기 도란도란 하고 싶었는데 그대 눈동자만 바라보면 내 언어의 스위치는 꺼지고 그대 일거수일투족에 내 눈은 활기 찾아 생기돕니다 그대가 해바라기꽃이고 내가 태양인 줄 알았더니 해바라기는 바로 나였습니다 102) 이 가을에 이 가을에 나는 나를 잃고 산다 푸른 창공에 나를 빠트리고 스산한 갈 바람에 추억을 움켜쥐어 보지만 생의 속도감에 어지러움 느끼며 손가락을 펴고 만다 우리는 늘 바늘 끝으로 모래알을 집어 올리는 곡예를 하지 않으면 경쟁에 낙오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시대가 혼란스럽고 존재 가치가 퇴색되어 가는 요즘엔, 정의가 무너지고 이데올로기가 상실되고 빛바랜 정치가가 설쳐대는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삼류 연극을 감상해야 하는 이 가을에 나는 나를 잃고 산다 . 103) 거울이 본 신수 행여 속내 들킬까 봐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지 미래에 대한 나의 운명을 거울도 무덤덤하게 그 얼굴로는 힘들어 친구 고생 좀 하겠네 돌아서서 연습 한 뒤 웃는 얼굴로 다시 질문했지 갸우뚱하던 거울 아까 내가 잘못 봤나 분명 그 얼굴 같은데 친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똑같은 얼굴이지만 내가 봐도 어찌나 다르던지 웃다 보면 운은 저절로 오는 것을 104) 홀로 맞는 가을 날마다 단풍 만드느라 노을에 담가지는 잎사귀들 그리하여 빛고운 단풍들이 설악산에서 미끄럼을 탄다 아득히 깊고 먼 하늘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파란 거울로 맵시 가다듬고 사랑 태운 채 빙빙 도는 가을 우리 처음 만났던 단풍나무 길 그 언덕에서 절정 이루고 사랑은 미아가 된다. 105)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엔 작은 반딧불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겨우 보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호롱불, 촛불, 등불로 상대방의 영역을 넓혀가며 알다가 이유도 없는 작은 오해로 때때로 정전이 되어 캄캄해지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가족과 동네, 친구들이 눈에 익으며 영혼이 합쳐지는 것이다. 106) 술이 가르쳐 준 교훈 오랜만에 친구 만나 마신 술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자정을 넘깁니다 처음엔 입에 쓴 술을 마시고 나중엔 달콤한 술을 그 후엔 술 아닌 물을 마십니다 집으로 오는 길 전봇대가 휘청거리고 아스팔트가 친구로 일어섭니다 종교에 심취하다 보면 처음엔 사람이 절대자를 믿고 나중엔 절대자가 사람을 믿지요 술로 몸이 통제되지 않듯이 마음의 제어장치 풀려 언제나 절대자가 동행합니다 술은 몸을 피곤하게 하지만 절대자의 따스한 손길은 마음을 푸른 초장에 누입니다. 107) 그리운 사람 아스라한 곳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 병아리처럼 깨어나 종종걸음으로 내게로 온다 땅에 귀 기울이고 있다 낙엽 구르는 소리 애처로워 허겁지겁 내게로 온다 먹구름 바삐 움직이니 걱정되어 봇물 터진 그리움 자다 깨어나 내게로 온다 꿈결인 양 찾아 와 생시보다도 선명한 모습으로 마구 흔들어 깨우고는 간다 나는 어쩌라고. 108) 들지 못한 사랑 보험 갈등의 풍랑도 없이 바다에 다다른 강물 되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그대와 나 빨간 등산복 입고 거침없이 건너던 모습에 영문도 모른 채 지켜 보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난 후 조금은 알 것 같아 단풍드는 골짝을 막고 섰습니다 차마 그대와 함께했던 단풍 길은 볼 수 없어 행여 그대 오려나 기다리다 새우등이 되었습니다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도 민물고기는 살지 못하기에 이제 다시 그대 만난다면 사랑 보험 하나 들겠습니다. 109) 고향집 마루에서 종려나무 가지에 앉아 쉬는 새 집안 가득히 들어찬 꽃들 형제의 삶이 시작된 시발점 교체 멤버도 없이 도회로 가버린 형제들 간간이 자동차 지나는 소리뿐 한나절은 매미가 채워주고 차분한 고요는 나뭇잎 하나 흔들지 못한다 앙코르 송을 거부하는 매미는 관중은 의식 않고 노래만을 위해 일생 바치고 팔십이 다 된 노모는 추어탕을 한 양동이 끓여 아들의 식욕을 흔들어 깨운다 대들보에 걸터앉아 쓰시던 단기 4292년이란 글씨가 고향집의 추억만큼 희미하다. 110) 고추 이야기 단풍은 산 위에서 물들고 고추는 밑단에서 단풍 들어 레드카드 받고 퇴장한다 잘난 체 까부는 풋고추는 땡볕을 쪼여도 푸른 얼굴 어른 고추는 그늘에서 쉬어도 탱탱하다 굵을 대로 굵어지고는 주체할 수 없는 혈기가 부끄러운 듯 붉은 얼굴로 색시도 없는데 장가 준비다 게으른 소나기는 오줌 몇 번 찔끔 싸고 논두렁에서 엿보던 개구리 신난 얼굴로 다이빙한다. 111) 건빵과 별사탕 로맨스든 불장난이든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덤에 가보면 분명하게 판가름 납니다 로맨스로 끝난 사랑은 나란히 옆에 누웠고 불장난으로 끝난 사랑은 외관상 외롭습니다 건빵과 별사탕이 만나야 건빵에도 달콤함이 배어 순간은 즐겁고 감칠맛을 더해주겠지만 참사랑의 맛은 그리 황홀하지는 못하지만 무덤덤한 건빵이 주린 배를 꼭 채워줍니다 112) 쫓기는 세월 아파트 모서리 돌아 코트 깃 흔들며 세월 쫓는 바람아 무엇이 그리 급하더냐 이제 겨우 꽃구경했는데 여름으로 내몰고 있으니 좀 천천히 가자꾸나 방금 갈대 보고 왔는데 멀리 또 갈 빛 보이니 아직도 푸른빛이 그리운데 장미 뒤엔 갈대가 숨어 있어 선뜻 곁으로 다가가기 두렵구나 귀밑머리 서리 맞고 나니 내려가는 길 미끄럽다 바람아 멈추어 다오 제발 세월 쫓지 말고 113) 행복이 사는 집 참 현명하기도 한 행복은 찌푸리거나 짜증 내는 사람 곁에는 얼씬도 않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 곁에도 가기 싫어 조용한 사람을 좋아하며 그런 사람과는 팔짱 끼고 다닙니다 너무 큰 집은 황량해서 싫어하고 다정다감한 사람만 좋아해서 빙그레 웃는 사람만 찾는 얌체 같지만 행복은 뚜렷한 규정을 정해 놓고 엄격히 심사하며 부모형제조차 눈감아 주지 않습니다. 114) 잊을 수 있다면 소주 몇 잔에 그대와의 추억 잊을 수 있다면 고량주로 마시겠습니다 눈물 몇 방울로 간단히 지울 수 있다면 아예 비로 내리겠습니다 호화저택이 도움이 된다면 궁전이라도 빌려오겠습니다 밤새워 별들이 위로해도 온 세상 향기로 뒤덮은 아카시아 꽃길을 걸어도 뷔페식당에서 배불리 먹어도 채우지 못한 가슴 그댈 지우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대 사는 도시 떠나 잊을 수 있다면 화성으로 이주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산호섬이 이 마음 위로할 수 있다면 아예 바다 밑에서 살겠습니다 잊으려 애쓸수록 더욱 곁으로 다가오는 그대 이럴 땐 그대가 참 밉습니다. 115) 그리움의 망태 도심 속 녹색 바다 달콤한 향기 따라 발길 돌리니 언젠가 함께 찾았던 눈에 익은 공원 라일락 향 손 내밀고 해맑은 등꽃 미소로 반기는데 내 눈은 초점 잃고 먼 하늘만 바라보네 별친구 위로할 말 못 찾아 쌍꺼풀 없는 눈으로 깜박깜박 내 눈치만 살피는데 적막 깨트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그대 그토록 좋아하던 이 소리 망태에 담긴 추억 한꺼번에 줄줄이 쏟아 놓네 마음은 오래 머물고자 하나 반달이 종종걸음으로 와 빈 망태에 추억 쓸어 담으며 내 손을 낚아챈다. 116) 세상은 상대성 물속에 들어가 가라앉으려 애써봐도 물은 사람이 싫은 듯 자꾸 물 밖으로 밀어올립니다 전생의 원수가 이승의 부부라더니 알고 보니 물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유명한 수영선수 요철(凹凸)이 잘 맞음은 어느 한쪽은 늘 수용하기 때문 세상에 잘 난 사람만 있으면 분쟁 끊어질 날 없을 테니 둥근 형은 긴 얼굴 좋아하고 키 큰 사람은 아담한 사람 좋아하니 세상은 이래저래 상대성 경치조차도 산 곁엔 물이 있으니 117) 연극 한 편 긴 칼 찬 고드름 장군 활짝 웃는 동백꽃 여인 호걸과 절대 가인의 만남 신명나게 펼쳐지는 계절의 연극 감상 단풍 내세워 우세한가 싶더니 고드름 장군 올라오고 봄은 미인계로 동장군을 밀쳐 내니 그걸 감상하느라 나 늙는 줄 몰랐네 세월의 분장사는 관객까지 분장시키는 희대의 마술사!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내 얼굴 전당포에 맡겨야겠다. 118) 사랑의 마취주사 하루만 안 보면 못 견디던 사랑도 세월의 마취주사엔 무기력하니 참으로 고마운 게 세월이다 세월 지우개로 기억 지우고 흉터에 새살이 돋고 나면 아득히 먼 날에 잃어버린 고무신 실체도 모호한 오래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사랑이야기인양 어렴풋한 기억 속의 주인공일 뿐 무덤에 피어난 할미꽃에서 생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듯 물결 속에 일렁이는 얼굴이 된다. 119) 행복의 조건 인생은 칠, 팔십 년의 경주입니다 성공해서 정상에 오른 정치가나 대를 이어 거부로 사는 사람조차도 평생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중간 중간 시련과 고통이 찾아 와 기억하기 싫은 굵은 마디 만들지요 특히 건강에 이상이 올 때는 행복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아침에 잠시 헤어진 가족 저녁에 다시 만날 보장 없이 살면서 남과 비교하여 행복의 계란을 스스로 깨트리지는 맙시다 우리의 삶이 진지하지 못하다면 불행의 그림자는 늘 미행한답니다 계란에 사랑의 품을 제공하면 노란 희망의 병아리가 태어나리니 120) 이방역 고향 떠난 지 사십여 년 고향 역은 낯선 사람들로 붐빈다 어느새 이방인이 되고 만 셈 한때는 아는 얼굴로 북적대던 역 고뇌와 희열이 교차하던 곳 세월을 질타할 수도 없고 다람쥐 제방 드나들 듯 다녔는데 이젠 반겨 주는 이 없는 이방역 두리번거려 보지만 온통 딴 얼굴 내가 늘 쓰던 말투조차도 왠지 낯설고 이들에겐 어느새 내가 이방인 세월 무상함을 맥주잔에 달래보지만 씁쓸한 기분 감출 수 없네 기적을 타고 세월을 훌쩍 넘어 보는 수밖에 121) 누전의 밤 一失一得이라 했던가 텔레비전 소리 자취 감춘 집안에 모처럼의 대화 오고 가고 정겨운 웃음소리 캄캄하던 마음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밝히느라 분주하네 우리 어렸을 적엔 호롱불 가운데 두고 돌아가며 이야기꽃 피웠었지 무서운 얘기엔 오줌 마려워도 바깥 나갈 엄두 못 내고 꾹꾹 참다 찔끔 사곤 했었지 막걸리 몇 잔에 젓가락 장단이면 유행가 한 권 정도는 안 보고도 불렀는데 전등 켜고 바보상자 열고부터 가족은 떠나가고 연예인 가족만 곁에 남았구나 122) 먼 훗날엔 알 거야 그대 아픔 대신할 수는 없어도 그대 위해 수고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 내가 해줄 것 아무것도 없다고는 하나 다 해 주고픈 마음 헤아리고는 있을 거야 세 치 혀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이 목숨 던져 그대 구할 수 있다면 그때는 증명해 보일 거야 사랑이 그리 쉬운가 먼 훗날 언젠가는 이해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흰 머리카락 색깔 하나 바꿀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해 줄 거야 누구나 사랑할 만한 그대지만 참사랑이 결코 쉽지는 않지 이 세상 다 하는 날 그때는 알 거야 얼마나 내가 그댈 사랑했는지 아마 그때는. 123) 아이의 꿈 푸른 풀밭에서 만난 새끼 고라니의 눈과 마주쳤을 때처럼 맑은 아이의 눈엔 참 꿈이 많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흘러가며 맑은 눈망울에 스쳐 지나듯 길거리에서 화가를 만나면 화가가 되고 싶고 무대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마술사나 가수를 만나면 그 주인공이 되고 싶고 운동장을 누비며 포효하는 선수라도 만나는 날이면 꿈은 또 뭉게구름의 한 조각이 되고 만다 아이가 어느 장면이든 눈 속에 가두는 날이면 먼 훗날 아이는 꿈의 주인공이 되리라 124) 참 소중한 당신 척박한 고산에도 꽃은 핍니다 벌을 불러오려고 더 많은 꿀과 큰 꽃을 준비한답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쉽게 쓰지만 그대 위해 무얼 했나요 나를 가꾸는 일은 그대 위한 일 내 인생 그대 빼곤 계획이 없습니다 자그마한 성공조차도 그대 위한 것 내 인생 그대가 주인공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그대 없으면 모든 것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대는 내가 숨 쉬는 이유랍니다. 125) 좁은 길의 끝에는 정체되는 좁은 터널을 지나면 넓은 길이 나오고 개울물의 종점에는 넓은 바다가 두 팔 벌려 기다립니다 혹시 터널 안에서 꿈을 던졌나요 머지않아 넓은 광야가 그대의 눈을 황홀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오솔길은 절대 끊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대로와 연결되어 있지만 대로는 가끔 길이 끊어져 길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여! 부디 좁은 길을 택하세요 지나고 보면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억에 남게 되는지 군에 다녀온 이들들이 거품 물고 알려줍니다. # 제 5부 누에가 쓰는 詩 126) 겨울 바다 오지 않을 임인 줄 알면서도 바닷가를 서성이는 파도 두렵다고 포기하는 건 삶의 자세가 아니기에, 군인은 전쟁이 두려워도 임무를 감당해야 하며 이별이 두려워도 많은 이들은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별보다 더 두려운 건 긴긴 기다림이고 기다림보다 더욱 두려운 건 조금씩 지워져 가는 기억인데 미련스레 파도가 되어 오늘도 모래밭을 부질없이 거슬러 오르기를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합니다. 127) 내 인생에 휘슬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러도 끝난 다음에 점수가 나오고 마라톤을 뛰어도 결승점을 통과해야 기록이 나오는데 우리네 인생 중간 점검이 너무 많아 성공 실패를 섣불리 결정 내린다 한번 실족하여 흙탕물에 발이 빠지기라도 하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법석을 떤다 각자의 가치와 가는 길이 다르고 하물며 슈퍼마켓에 가도 음료수마다 맛이 다른데 내 인생의 휘슬은 반드시 내가 분다. 128) 버릴수록 편한 인생 이 세상에 버리지 않고 편하길 바라는 사람 많지만 작은 실천이 해답 줍니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벗을수록 몸과 마음 조금씩 편해짐을 느끼지요 피곤하고 어깨 축 쳐질 때는 넥타이를 풀거나 양말만 벗어도 시원합니다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고 하늘도 구름 끌다 지치면 미련없이 비를 쏟아 놓습니다. 129) 행복 유인술 행복에는 상한선이 있지만 불행에는 하한선도 없는 듯 태어나 부모 얼굴 한번 못 보고 자란 고아가 있습니다 계절에 봄 여름 겨울이 있듯이 지구를 다 뒤져도 한평생 언제나 행복한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나는 왜 불행하고만 단짝일까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 자기 최면 통해 행복지수 끌어올려야 합니다 행복은 전해 받을 수도 있지만 샘물처럼 가슴 속에서 샘 솟으니 마음을 누르는 돌들을 스스로 걷어내야 합니다 거울보고 웃는 연습 하며 행복의 발걸음 소리 들을 때까지 마술의 시동 걸릴 때까지 혼자 연습하는 방법밖엔 없지요. 130) 누에가 쓰는 詩 보슬비 오는 소리인가 임의 발걸음 소리인가 사그락사그락 잘도 큰다 배를 채운 누에들은 자기만의 둥지를 짓고 고독을 충분히 즐기고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비단 실을 줄줄이 뽑아 머리 흔들며 詩를 쓴다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에 사르르 윤기 흐르는 촉촉한 언어로 하소연한다 훨훨 날고 싶었노라고 131) 그대의 역 잠시 머물렀던 그대의 역 봄 정원처럼 아늑했지만 그대와의 추억이 넘쳐 가슴의 둑이 터지기 전에 그대 역을 떠나렵니다 연극의 한 장면이 끝나고 커튼이 내려오고 나면 더 허전할 것 같기에 하얀 손수건을 위로 삼아 그대역을 떠나렵니다 물러날 줄 모르는 멧돼지 닮은 마음이지만 나를 더 사랑하고 아끼며 인생의 다음 역을 향해 망각의 기적을 울립니다. 132) 향기만 남은 사랑 그대 허브향 같은 사랑 가슴 벅차 하마터면 고백할 뻔 했습니다 가벼운 사랑으로 오해받을까 숨기고 있던 마음 하마터면 들킬 뻔 했습니다 장미 원의 붉고 노란 장미 보아주지 않아도 곱게 단장하듯 내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대 아무 말 없어도 날 사랑함 내가 알듯이 그대도 내 맘 알 줄 믿습니다. 133) 보고픈 날엔 내 마음 구름에 띄워 바람이 가자는 대로 마냥 따라가 봅니다 준령도 따라 넘고 계곡 건너다 헛디디면 같이 흘러내립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엔 계수나무에 내 마음 살며시 매달아도 보고 정처없이 떠돌이로 그대 잠든 창가에 살며시 앉아도 보다가 그래도 보고플 땐 멍든 빗물로 하염없이 주룩주룩 쏟아집니다. 134) 이구백과 십장생 황금빛 전파 타던 사오정 시대 지금은 이구백 십장생 시대로 진입하고 이십대 구십 퍼센트 백수라는 찜찜한 신조어에 동네 마다 울음 그치는 신생아 씁쓸한 주인공의 등장에 위정자는 바삐 펭귄 숫자 늘려 실업자 수 줄이느라 안달하네 십대 장래 생각 백수라는데 이러고도 금 뺏지 달고 활보하며 뻐길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난 한강은 막걸리 들이키고 비틀대고 신문의 활자는 매일 삐걱거리네! 135) 사랑은 마술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클레오파트라의 사랑도 양귀비도 종말은 슬픔입니다 슬픔이나 그리움이 두렵거든 사랑일랑 생각도 마십시오 사랑은 곱게 물든 단풍입니다 보기는 아름답지만 실상은 이별의 아픔 때문에 마음이 탄 증거물이지요 하늘이 뇌성으로 흥분하고 바다가 땅을 치며 우는 것도 마술에 걸린 증거입니다 입맞춤은 혼을 빼는 마술이니 사랑하는 사람과는 매일 아끼지 말고 마술을 겁시다. 136) 천국 여행 팔십여 년의 행적이 고달픈 듯 꼼짝도 않고 드러누운 나 귓전에 자식들의 울음과 웅성거림도 잠시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축축한 냉기가 가슴을 스치더니 이내 감각을 잃고 육과 영으로 분리되어 팔십 년의 긴 여행을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해진 노인의 모습에서 중년으로 또 젊은이의 얼굴로 그러다 동분서주하는 삼십대로 이 승의 무게가 먹은 음식의 무게만큼 무겁다 바람이 분다. 창에 비친 나뭇가지가 발버둥을 친다 가을이 여름을 걸터앉아 주리를 틀고 있나 달력의 개미가 빨리도 기어간다. 137) 인연 인연이라는 것은 마른 하늘 소나기 되어 예고 없이 다가오니 준비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의 동공은 확대되고 영화 속 엔지 장면처럼 어설픈 행동조차도 마냥 멋져 보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타는 눈빛만으로 알 수 있으며 거미줄에 걸린 나비되어 서로 노예 되고 말지요 탄생에 선택이 없듯이 인연도 미리 점지 되어 어느 순간 커플모자 쓰고 닮은 얼굴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138) 목적이 이끄는 삶 맥주에 양주 타면 폭탄주 되어 자칫 인생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습니다 사랑도 양다리 걸치면 진정한 행복은 맛볼 수도 없고 눈동자의 초점만 잃고 맙니다 마음을 비워내지 않고 다른 것을 담으려면 결국 반밖에 채우지 못하니 하나님도 부처님도 마음에 온전히 거처하지 못하고 들락날락 거립니다 염색도 본래의 색상을 두고 염색하게 되면 원하는 색상을 얻지 못하지요 목적을 두고 몰두하는 삶은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어 보름달 미소 선물로 받습니다. 139) 나만의 유토피아 세상에는 다양한 모양의 아름다운 집이 있고 인간에게도 자기만의 맞춤형 행복이 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그림 한 점으로 잠은 아무 데라도 좋고 죽을 먹어도 표정이 밝지요 방랑시인 김삿갓은 술 한잔에 詩 한 수로 세상 부귀영화와 맞서 고독의 꽃을 피웠습니다 수석 채집가는 마음에 드는 돌 하나면 행복하고 서예가는 먹을 갈면서 엔도르핀이 솟아납니다 보통 사람은 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돈 자랑만 하다 무덤갈 때 비로소 손을 펴고 간답니다. 140) 음악의 위력 길거리 리어카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기에 음악에 맞춰 가볍게 걸었더니 심신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하찮은 비에 씨앗이 움트듯이 내가 베푼 작은 친절 한 번 못난이가 떠올리는 미소조차 상대방에 전파됨을 알았지요 정성 쏟은 작은 蘭 몇 송이가 거실 분위기를 바꾸듯이 삭막한 세상 약간은 실성한 듯 빙그레 웃는 것도 보약입니다. 141) 바람 같은 친구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항상 곁에 있는 친구 어디 있느냐 물으면 살짝 옷깃을 여며줍니다 궁금하여 들여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친구 내 안에서 꿈틀대며 옛 추억을 퍼 올립니다 잃어버린 세월이 아쉬워 명상에 잠길 때면 머리를 툭 치며 한 마디 고민하며 살 거 없노라고 친구 이름이 하늬 인지 돌개 인지 알 수 없지만 잠자는 영혼 일깨워 주니 그냥 친구가 좋습니다. 142) 갈림길 사랑은 앞마당으로 사립문 열고 왔다 뒤 담장 틈새로 빠져나가고 인생의 기회 등 뒤에서 빛으로 번쩍하다 바람처럼 갈대밭 지나니 사랑은 아름다운 노을 남긴 채 캄캄한 밤 속에 뛰어들고 인생은 달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구름 속으로 숨어드니 기억에 남는 건 허무한 단상 사랑의 추억은 점점 단풍들고 인생은 늘 갈림길뿐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반추하면 영화 한 편 내 인생 *단상(斷想) : 때에 따라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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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꽃씨뿌리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보라카이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