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
▶ 견발해사(遣渤海使) : 일본이 ‘발해(渤海)’로 알려진 나라인 중기 고리(高麗)에 보낸(遣) 사절단(使).
▶ 보냄 : ‘파견(派遣)’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
▶ 중기 고리(高麗) : ‘발해’의 바른 이름. 걸걸중상(또는 대중상)이 세웠다.
▶ 전기 고리(高麗) : 장수왕 대부터 시작되어 고(高)보장 태왕(흔히 ‘보장왕’으로 불리는 사람)대에 망한 나라. 고구리(高句麗)가 이름만 바꾼 나라다.
------------------------------------------------------------------------------------------------------------------------------------------------
지금으로부터 열 해 전에 쓰인 한국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보자. 그럼 이런 말이 나온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고구려)’로, 왕을 ‘고려 국왕(고구려 왕)’이라 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밝혔다.”
- 『 중학교 역사 ① 』, 84쪽
그리고 그 교과서는 “발해”로 불리는 중기 고리의 전기 고리와 고구리(高句麗. ‘麗’는 나라 이름으로 쓰일 때는 ‘리’로 읽어야 한다) 계승을 다른 나라들의 기록을 인용함으로써 입증한다.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
- 『 중학교 역사 ① 』이 인용한 『 속일본기 』 의 구절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무리를 이끌고 ‘요동’지역으로 이주하였다.”
-『 중학교 역사 ① 』이 인용한 『 구당서 』 의 기사
교과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확실한 물증인 고고학 유물과 유적으로 중기 고리의 고구리/전기 고리 계승을 못 박는다.
“한국과 러시아(올바른 이름은 ‘로시야’. ‘러시아’는 영어권에서 로시야를 부르는 이름이다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공동 조사팀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최대 규모의 발해 온돌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현장 발굴팀장은 발굴된 온돌 유적이 전형적인 고구려식이라고 밝히고, 약 10세기 발해 말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 중학교 역사 ① 』이 인용한 신문기사
“발해의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는 온돌 장치는 우리 민족 고유의 난방 장치로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잘 보여 준다.”
- 『 중학교 역사 ① 』, 95쪽
이번에는 지금으로부터 열두 해 전에 나온 한국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보자. 이 책에는 중기 고리의 전기 고리 계승이 보다 자세하게 나온다.
“유득공이 통일 신라(후기신라 – 옮긴이)와 발해(중기 고리 – 옮긴이)를 ‘남북국’이라고 일컬은 이유가 무엇일까? 발해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계 유민이고, 그 영역이 고구려의 땅이므로 발해 역사를 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 고등학교 한국사 』, 32쪽
“발해는 8세기 초 일본에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국서를 보냈고, 일본도 자연스럽게 발해를 고(구)려라고 칭하였다.”
- 『 고등학교 한국사 』, 35쪽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스스로 ‘고(구)려국왕’이라고 칭한 점이나, 발해의 지배층 중에 대씨와 고구려 왕족인 고씨가 많은 점이 그것이다. 문화적으로도 발해 지배층의 문화는 고구려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발해의 주거지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 장치인 온돌이 발견되고 있으며, 묘제에서도 고구려 무덤의 독특한 양식인 모줄임 천장 구조가 보인다.”
- 『 고등학교 한국사 』, 36쪽
그리고 고등학교 교과서는 배달민족 역사가의 책에서 따온 글로 자신의 설명이 정당함을 입증한다.
“부여씨(남부여의 왕성[王姓]. 줄여서 ‘여[餘]’씨. 오늘날의 부여 서[徐]씨 – 옮긴이)와 고씨(전기 고리[高麗]의 왕성 - 옮긴이)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大)씨의 발해(중기 고리 – 옮긴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 남북국사 』 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왕건이 세운 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大)씨(중기 고리의 황성[皇姓] - 옮긴이)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고구리 – 옮긴이)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다.”
― 유득공의 『 발해고(渤海考) 』 에서( ‘(주)미래엔’이 펴낸 교과서인 『 고등학교 한국사 』 에 인용된 구절)
두 교과서의 설명을 간단하게 줄이자면,
- 중기 고리는 스스로 전기 고리의 나라 이름을 이어받았고
- 전기 고리의 적국이었던 무주(武周) 왕조와 당나라의 기록이 중기 고리의 가독부(‘대왕[大王]’/‘황상[皇上]’)인 대조영이 고구리(전기 고리) 출신임을 증언하며
- 중기 고리 사람들이 쓰던 온돌이 고구리의 그것과 똑같고
- 일본도 중기 고리를 ‘고리(高麗)’로 불렀으며
- 중기 고리의 지배층 가운데 고구리와 전기 고리의 왕성인 고(高)씨가 많고
- 중기 고리의 무덤 양식이 고구리와 전기 고리의 그것을 이어받았으며,
- 근세조선의 역사가가 중기 고리의 황성인 대씨를 고구리 사람으로 인정하고, 중기 고리가 고구리와 전기 고리의 땅을 차지했음을 강조했으므로
중기 고리가 고구리와 전기 고리를 이어받은 나라임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교과서의 설명은 옳고, 이치에 맞다.
그러나, 이게 전부일까? 다른 증거는 없을까? 나(글쓴이 잉걸)는 이 글에서, 내가 찾아낸 또 다른 ‘증거’를 소개하고, 보충설명을 함으로써, 중기 고리가 전기 고리와 고구리를 이은 나라임을 보다 더 확실하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지나(支那 : 수도 북경[北京]) 정부와 지나 ‘한족(漢族)’ 학자들이 밀고 나가는 이른바 동북공정과 ‘다민족 통일국가론’이 옳지 않음을, 중기 고리는 아사달(‘고조선’)과 원(原) 부여(夫餘)와 고구리와 전기 고리를 이은 나라라서, 결코 지나의 갈마(‘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가 될 수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는 지난해에, 왜구(倭寇)를 파헤친 책을 읽다가, 뜻하지 않게, 우연히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찾아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일본 조정이 서기 8세기 중반에 중기 고리에 전기 고리 왕실의 후손이자, 일본의 귀족인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다는 구절이었다. ↓
“일본은 757년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났던 ‘오노 타모리(小野 田守[한국식 한자 발음은 <소야 전수> - 옮긴이])’를 단장으로 하여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한다.
759년과 760년에도 연이에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이 발해와 적극 교류한 것은 신라 침공시 발해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오노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楊承慶)’이 인솔하는 발해 사절단을 데려왔고, 일본 측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신라 침공 일정이 짜여져 있던 762년에도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코마 오오야마(高麗 大山[한국식 한자 발음은 <고리 대산> - 옮긴이])’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한다.
하지만 발해는 답례사신으로 무관 대신 문관 ‘왕신복(王新福)’을 파견하는 것으로 일본의 신라 침공계획에 사실상 거절 의사를 표시한다.”
- 전경일, 『 남왜공정(南倭工程) 』, 141쪽
이 코마 오오야마는 ‘고마노 오야마’로도 불리는데, 일본의 나라 시대에 활약한 사람이고, 벼슬아치이자 귀족이었으며, 서기 762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마(한자로는 “고리[高麗]”로 쓰고 “고마”로 읽는다. 일본에서 “고마”는 고구리나 전기 고리를 일컫는 말이고, 왕건이 세운 후기 고리는 한자는 똑같으나 “고라이”로 읽어 고구리/전기 고리와 구분한다)’라는 성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기 고리 유민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럼 이 사람의 성씨와 이 사람이 중기 고리에 사신으로 보내진 일이, 중기 고리의 고구리/전기 고리 계승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먼저 전기 고리 유민들이 왜국(倭國)으로 건너간 사연부터 알아야 한다.
전기 고리가 망한 뒤, 전기 고리의 수많은 왕족과 승려와 문관/무관들이 그 일족들과 함께 왜국(倭國)으로 달아난다.
이들이 이렇게 한 까닭은, 당시, 그러니까 서기 668년의 왜국은 남부여 유민들이 정권을 잡은 땅이었고, 남부여 사람들은 전기 고리와 마찬가지로 중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나라를 잃었으므로, 왜국이 자신들을 받아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적어도 서기 7세기에는 ‘적’이 같다는 사실이 이 둘의 오랜 원한과 경쟁과 대립 의식을 불식하고 둘이 손을 잡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쿄 인근인 ‘오이소(大磯[대기])’의 바닷가로 상륙, ‘사이타마(埼玉[기옥])’ 현[도쿄 서북쪽에 있는 현. 일본의 수도권인 관동(‘간토’)지방의 일부분이다]에 뿌리내렸고, 대부분은 처음에는 왜국의 관서(關西) 지방인 오늘날의 ‘나고야’(일본 혼슈 중부에 있는 도시) 근처에서 ‘고마(한국식 한자 발음으로는 거마[巨摩].일본어로는 巨摩도 高麗와 발음이 동일하다)’라는 고을(한자로는 군[郡])을 이루어서 살다가(사이타마를 ‘새 정착지’로 고른 전기 고리 유민들은 그곳이 중기신라나 당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보다 안전한 곳’이라서 그렇게 했을 것이고, 나고야 근처의 고마군에 살기로 한 전기 고리 유민들은 ‘그래도 고국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과 – 도쿄 근처인 사이타마는 아무래도 전기 고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니까 -, ‘왜국 땅 안에서 그래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곳[그러니까, ’문명화‘한 곳]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야.’라는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했으리라. 이는 서기 18~19세기에 미국의 북동부와 남동부는 문명화하고 발전한 곳이었지만, 중부와 서부는 그렇지 않았던 사실과 비슷하다.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서기 7세기의 일본 서부[규슈/시고쿠/혼슈 서부와 중부]는 서기 18~19세기 미국의 동부와 비슷했고, 관동 지방이나 혼슈 동북부는 서기 19세기 미국의 서부와 비슷했다), 마흔여덟 해 뒤인 서기 716년, 일본 왕실이 고마군에 살던 전기 고리 유민 1,799명을 동쪽인 사이타마 현으로 옮겨 살게 해, 이미 사이타마에 사던 전기 고리 유민들과 하나로 합쳤고, 그 뒤 그곳에는 ‘고마(高麗)군’이 세워졌다.
일본이 나고야의 고마군을 없애고, 그곳에 살던 전기 고리 유민들을 관동(간토) 지방에 가서 살게 한 까닭은, 전기 고리 유민들을 한곳에 모아서 살게 해야 관리하기가 쉽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이타마 현에 살던 전기 고리 유민들을 나고야 근처로 옮기는 대신, 반대로 나고야 근처의 고마군에 살던 전기 고리 유민들을 사이타마 현(관동 지방)으로 옮긴 까닭은, 이미 일본열도 서부는 아사달(‘고조선’)/마한/진한/백제/남부여/가야/임나(任那) 유민들과 신라계 일본인들로 꽉 차 있어서 더 이상 새 인구를 수용할(그러니까, 맨 나중에 온 전기 고리 유민들에게 나눠줄) 땅이 없었고, 대신 일본인들이 ‘동국(東國 : 동쪽 나라)’이라고 쓰고 ‘아드마(あづま)’로 읽은 관동과 혼슈 동북(東北. 일본어로는 ‘도호쿠’) 지방은 아직 인구가 많지 않아, 관동(간토)의 땅을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슈 동북 지방은 – 미국 서부가 오랫동안 미국 땅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 오랫동안 왜국 땅이 아니었고, 이곳은 서기 9세기 초까지 ‘에미시[えみし. 한자로는 “하이(蝦夷)”]’로 불리는 원주민이 독립을 누리며 살던 곳이었다.
이곳은 사이타마 현에 고마군이 세워진 지 1세기 뒤에 일본에 정복된다. 서기 9세기에 에미시 족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는 관동[간토]의 일부분인 무사시 국[國 : 여기서는 ‘고을’이나 ‘지방’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출신인 일본인들도 군사로 동원되었는데, 무사시 국은 전기 고리 유민들이 한데 모여 뿌리내린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기 고리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왜국으로 망명했다가, 온 마흔 해[140년] 뒤에는 망명을 받아준 나라의 정부가 명령하는 대로 창칼을 들고 동북 지방의 원주민이자, 조몽인의 후손[또는 ‘아이누’인의 동족]인 에미시 족의 자유와 독립과 땅과 자원을 빼앗으려고 싸워 동북쪽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이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탈바꿈한 사례 아닌가?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슬프기 그지없다)
일본 왕실이 나고야 근처의 전기 고리 유민들을 설득한 명분은, 아마 ‘여긴 당군이나 신라군이 치기가 쉬운 곳 아니냐? 그러니 좀 더 동쪽으로 가서, 안전한 곳에서 너희들의 동족과 합류해라.’나, ‘미안하지만 여긴 사람들로 가득 차서, 너희들에게 나눠 줄 만한 땅이 없다. 그러니, “미개척지”인 동쪽으로 가서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살아라.’였으리라. 아마 둘 다였을 수도 있다.
이때 나고야 근처에 살던 전기 고리 유민들, 그러니까 고마군 사람들이 반발하거나 반박하거나 맞섰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차라리 동쪽으로 가서, 사람 적은 땅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낫겠다. 그곳이 적국인 신라나 당나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안전하기도 하고! 게다가, 동족끼리 모여 살면 더 좋잖아?’하고 판단하고, 일본 왕실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인 뒤 관동 지방으로 간 듯하다.
사이타마 현에 모인 전기 고리 유민들의 지도자는 ‘약광(若光)’이었는데, 그는 사이타마에 새롭게 세워진 ‘고마’군의 책임자였으며, 이 군(郡)은 서기 1990년대 이전까지 남아 있었다. 그가 “고구리(高句麗) 국의 왕족”이었다는 고마(한국식 한자 발음은 ‘고리[高麗]’)신사[사이타마 현에 있다]의 설명문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원래 성씨는 고구리와 전기 고리의 왕성(王姓)인 고(高)씨였음이 확실하며, 따라서 그의 원래 이름은 ‘고약광(高若光)’이다. ‘약광’은 한자 뜻대로 풀이하면 ‘빛(光)과 같다(若).’는 뜻이므로, 그는 어버이에게서 ‘빛처럼 밝은 사람이 되어라.’라는 바람을 담은 이름을 받은 셈이다.
약광은 나중에 일본 왕실로부터 ‘고마(高麗)’라는 성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가 원래 전기 고리의 왕족이었고, 일본 땅 안에서 전기 고리 유민들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 뿌리와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내린 성씨일 것이다.
이 ‘고마’라는 성씨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고마씨 집안은 고마 신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고마씨 집안과, 무사시 지방과 사이타마 현의 토박이들은 전기 고리의 후손인 것이다(비록 코마 오오야마가 원래 성은 코마, 그러니까 고마 씨가 아니었으나[‘세나’씨에서 ‘고마’씨로 고쳤다고 한다], 전기 고리 유민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고, 따라서 이들은 전기 고리와 관련이 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그래, 일본 관동 지방에 고구려 유민들이 정착한 건 알겠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마라는 성씨를 지금까지 쓰며 산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게 <발해>의 고구려사 계승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리라.
이제 그 이야기를 하겠다.
이 글이 다루는 시대보다 830년 뒤의 일이지만, 그래도 일본 조정의 견발해사 파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가 있다.
서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倭軍)을 보내 근세조선을 침략하자(왜국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흔히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불리는 6년 전쟁), 근세조선 왕실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와달라고 빌고,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이라는 장군을 사령관으로 삼아 명군(明軍)을 보냈다.
그런데 이 이여송이 근세조선 사람으로서 명나라로 넘어가 살았던 사람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그는 근세조선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명나라가 근세조선을 돕기 위해 일부러 근세조선과 (적어도 핏줄로는) 관계가 있는 사람을 보냈다면, 일본이 중기 고리에 보낸 사신(코마 오오야마)이 전기 고리 유민의 후손인 까닭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추측/이해할 수 있다.
코마 오오야마가 중기 고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기 고리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적어도 전기 고리와 고구리와 부여를 이었다고 선언한 중기 고리가 코마가 이끌던 일본 사절단을 외면하거나 푸대접하지는 않으리라고(나아가 사절단이 가져온 일본 왕실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어서였으리라(중기 고리가 중기신라가 당 왕조와 함께 전기 고리를 무너뜨린 일을 기억한다는 사실 – 나아가 자주 충돌/대립했다는 사실 - 도, 일본이 중기 고리에 기대를 걸었던 까닭들 가운데 하나였다. 코마가 가져온 일본의 서신에는 아마 “신라 놈들이 그대들의 옛 나라를 한 번 무너뜨린 적이 있지 않소? 게다가 그대들이 나라를 세운 뒤에도 신라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 우리도 신라에게는 원한이 있소. 그러니 손을 잡고 싸워서 신라에 복수합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일본 왕실은 코마(고마)씨 집안과 중기 고리 사람들을 모두 똑같은 ‘고구리/전기 고리의 후손’으로 여겼다는 이야기고, 따라서 일본이 고마 오오야마를 중기 고리에 사신으로 보낸 일은 일본이 중기 고리를 전기 고리와 고구리의 계승 국가로 여겼다는 또 다른 증거인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누리(‘세계[世界]’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의 『 역사 』 교과서는, 서기 762년 일본이 코마(고마) 오오야마를 중기 고리에 사신으로 보낸 사실도 ‘중기 고리가 “지나(支那)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독립국가이자 전기 고리와 고구리를 이어받은 배달민족의 나라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고, 그것과 고마 씨 집안의 내력을 제대로 실어야 할 것이다.
- 단기 4356년 음력 1월 13일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동북공정과 ‘다민족 통일국가론’에 반박할 사료(史料)를 찾아내,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잉걸이 올리다
※ 참고 자료
- 『 남왜공정 』(작은 제목 「 일본 신[新] 왜구의 한반도 재침 음모 」. ‘전경일’ 지음, ‘카인즈소프트 ㈜ 다빈치북스’ 펴냄, 서기 2011년)
- 『 고등학교 한국사 』(‘한철호/김기승/김인기/조왕호/권나리/박지숙’ 지음, ‘(주)미래엔[(구)대한교과서]’ 펴냄, 서기 2011년) → 교과서
- 『 중학교 역사 ① 』( ‘한철호/강승호/김나영/김정수/남종국/박진한/박효숙/방대광/송치중/왕홍식/전영준/조왕호’ 지음, ‘(주)좋은책 신사고’ 펴냄, 서기 2013년) → 교과서
- 『 일본은 한국이더라 』(작은 제목 「 일본 건국과 역사의 비밀을 찾아서 」. ‘김향수’ 지음, ‘문학수첩’ 펴냄, 서기 1995년)
- 『 노래하는 역사 』(작은 제목 「 이영희의 한/일 고대사 이야기 Ⅰ 」. ‘이영희’ 지음, ‘조선일보사’ 펴냄, 서기 2001년)[책 자체는 서기 1994년에 처음 인쇄되어 나왔고, 서기 2001년에 나온 것은 증보판이다]
- < 네이버 지식백과 >
|
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