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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금의 땅(콜롬비아)
아비앙카 항공의 보잉 747은 기수를 아래로 숙이기 시작했다. 날개
쪽에 앉아 있었으므로 보조익이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
아오면서 기체를 하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천장위에는 좌석 벨트와 금연 사인이 함께 켜져 있었고 스튜어디스
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0분 후면 엘도라도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것이다.
엘도라도(21 Dorado)는 황금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콜롬비아는 오히
려 에메랄드가 더 유명하다. 전세계 에메랄드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값지고 유명한 특산물이 있
다. 마약이었다.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작년에 오리엔탈 산맥 중
심부에 근거지를 둔 카를로스의 마약 왕국을 소탕했다. 그러나 카를로
스는 잡히지 않았고 조무래기들만 백여 명 사살하거나 체포했을 뿐이
다.
작년에 라파엘 대통령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카스틸로 장군
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금도 소탕작전을 하고 있다. 라파엘
대통령은 수년 동안 끊임없이 마약조직과의 싸움에 시달렀고,마침내
작년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오리엔탈 산맥에 군대를 보냈지만 성과
가 없었다. 부패한 관리들과 군 지휘관들이 카를로스와 내통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카스틸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라파엘과 부패한 관리,
무능한 군 지휘관들을 숙청하자 국민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
도 잠깐이었다.
콜름비아는 국토를 남북으로 세 갈래로 가르는 산맥이 있고 전국토
의 41퍼센트가 고원이나 산악지대이다. 나머지 59퍼센트는 삼림이나
평원지대이므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적도
가 지나는 열대권이므로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나 고원지대는 기후
가 온랭하여 생활하기에 알맞은 기후이다.
천연자원도 풍부해서 커피의 품질은 세계 제일이고 지금도 수출액
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에메랄드를 비롯한 석탄이나 광물의
수출량도 많다.
그러나 마약의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북부와 서부의 밀림지대에서
는 막대한 마약자금을 바탕으로 강력한 또 하나의 국가가 건설되고 있
었던 것이다.
카스틸로 정권은 일년 동안 마약과의 싸움에 라파엘처럼 지쳐 갔고
라파엘의 추종자들과 카를로스의 잔당을 상대로 끝없는 소모전을 계
속하고 있었다.
서두르던 스튜어디스들이 보이지 않았고 이제 기체가 숙여지는 것
이 몸으로 느껴졌다. 고영무는 좌석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LA에서
부터 열 시간의 비행이었다. LA에서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세 시간이나 기다렸으므로 스물다섯 시간이 걸린 셈이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빨리 온 셈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다섯 트렁크나 되는 짐을 찾는 데 시간이 째 걸렀
다. 그리고 세관원 두 명이 달려들어 그의 짐을 수색했으므로 세관을
빠져 나왔을 때는 같은 비행기에 탓던 승객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
았다. 대합실로 나와 산더미처럼 짐을 쌓아 실은 수레를 밀고 가는데
옆쪽에서 동양인이 다가왔다.
"고영무씨 아님니까?"
사내가 소리치듯 물었다. 반가운 듯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변양호 대리 님이십니까?"
수레에서 허리를 편 고영우가 눈을 검뻑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변양호요."
그는 고영무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
그의 표정이나 말투에는 진심으로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른네
살로 뉴욕지사에 3년 동안 근무하고 나서 보고타에 온 지 1년 반이 되
었다고 들었으므로 외국 생활만 5년 가깝게 하고 있는 셈이다.
"대리님이 이렇게 나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그가 수레를 밀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온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 전부터 싱숭생숭
합디다. 오늘은 아침부터 준비하고 있었지요."
대합실은 판초를 걸치고 있는 베스티조나 물라토 등도 보였다.
인구의 구성은 백인이 30퍼센트 가량, 흑인이 3, 4퍼센트,인디오가
2퍼센트 정도이고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조(MestiEo)가 50퍼
센트 정도,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Mulato)가 10퍼센트가 조금
넘는다. 그리고 인디오와 흑인의 혼혈인 삼보(Sambo)도 3퍼센트 가량
이므로 혼혈왕국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영무는 눈이 번적 뜨
이게 아름다운 여자들을 아비앙카 항공의 비행기에 탓을 때부터 볼 수
가 있었다. 혼혈미인은 각기 다른 피를 가진 부모의 우성 유전자만을
외모에 받는 모양이었다. 보고타는 표고 2천 6백 미터의 고원지대였으
므로 공항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었다.
8월 중순이어서 한국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 텐데 적도 바로
밑의 이곳은 서늘한 것이다.
"잠깐 기다려요. 내가 차를 가져올테니까."
변양호가 서둘러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오후 다섯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 건기여서인지 하늘은 밝게 개어 있었다. 판초에 중절모자
를 쓴 베스티조가 다가왔다. 검은 눈에 콧날이 우쪽 셨고 입 매무새가
단정한 미남이었다.
"세뇨르, 택시를 타지 않습니까? 리무진으로 당신 가방을 모두 실을
수 있습니다. "
그는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주 싼값으로 서비스하지요."
"난 친구가 있어요. 차를 가지러 갔습니다. "
"친구보다 제가 싼값으로 해드립니다. "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쉴새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고영
무에게 바작 다가셨다.
"달러가 있으면 좋은 가격으로 페소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
"그것도 사양하겠어, 미안하지만."
그를 향해 고영무는 지그시 웃어 보였다.
"세뇨르, 은행보다 훨씬 싸게 해드리겠습니다. 나하고 거래하시는면l
차가 그들의 앞에 멈추고 변양호가 밖으로 나왔다.
"고형, 그 새끼 뭡니까?"
"달러를 바꾸라고 하는데요."
고영무가 웃으며 말하자 사내는 몸을 돌렸다.
"조심해야 합니다, 저런 놈들은 사람들을 첫눈에 알아보니까. 콜룹
비아에 처음 온 사람을 쪽집게처럼 집어내지요."
변양호의 차는 포드 왜건이어서 됫좌석에 고영무의 이삿검을 싣기
에 안성맞춤이었다. 짐을 실은 그들은 엘도라도 공항을 떠났다.
"난 일주일 후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
차에 속력을 내면서 변양호가 말했다.
"고형이 오시지 않았더라도 난 귀국할 예정이었어요."
대답할 말이 없었으므로 고영무는 잠자코 앞쪽을 바라보았다.
숙소는 보고타 시내의 중심부에 있었는데 빌딩의 3층을 개조하여 반
은 지사 사무실로 반은 숙소로 사용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도 규모
는 켰다.
지사장이 귀국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이어서 방이 세 개
나 되었고 욕실과 응접실도 널찍했다. 아파트의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80평형은 될 것이다. 짐을 응접실의 한쪽에 쌓아 놓은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고형, 보고타 생활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괴롭지 않아요. 서울에서는
무어라고들 하는지 모르지만."
변양호는 이마가 조금 벗겨진 둥근 얼굴이었다 나이보다 더 먹어
보이는 형이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난 고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즘 들었습니다. 조정수 대리가내 입사
일년 후배가 되 거든요."
"아아, 예."
윗사람들이 저희들끼리 아랫사람 평가하는 것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성건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고영무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집안을 둘
러보았다. 이곳저곳에 이삿짐이 잔뜩 꾸려져 있어서 집안은 을씨년스
러웠다 변양호가 싣고 갈 세간살이였다.
"그까첫 놈들의 인사고과 같은 것에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
서 한 일년 지내고 나면 모두 우습게 보일테니까."
"그렇죠, 저는 본래 ‥‥‥‥
고영무가 느랫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관심없습니다. "
"윗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지요?"
웃는 얼굴로 그가 물었다.
"아니, 저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랬거든.뉴욕 지사에 있을 때 지사장이 말도 안되는 지시를
하길래 서류를 놈의 얼굴에 던져주었지. 그했더니 놈은 나를 콜롬비아
로 내쳤어."
"저는 그런 일 없습니다. "
"하지만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디다. "
변양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때가 되었으
므로 창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건너편 빌딩의 옥상에는 코카콜
라의 대형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 었지만 변양호의 들뜬 듯한 태도를 보자 고영무의 가슴은 조
금씩 가라앉아 갔다.
변양호가 손에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고형, 이건 본사에서 보내온 통신인데 대외비 서류요.고형에 대한
평가와 관리요령이 적혀 있습니다 "
그는 서류를 고영무에게 넘겨주었다.
"지사장에게 보내는 인사서류인데 내가 지금은 지사장 직무대행이
지.그리고 난 귀국하면 회사를 그만둘테니까 알량한 사규를 지킬 펼
요도 없어."
놀란 고영무가 머리를 들자 그는 빙긋 웃었다.
"우리는 같은 입장이오.문제 사원으로 적혀서 최악의 조건인 이곳
으로 보내진 것이 말이오. 나는 고형에게 이곳에서 살아남는 요령만
가르쳐 주겠습니다. 회사일은 그 다음이오."
고영무는 문득 창밖이 조용해진 것을 느줬다. 차량의 소음이 끊겨
있었다. 사람의 기척은 말할 것도 없었다. 통금시간이 된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던 고영무가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둥그렇게 였다.
사무실은 40평쯤 되었고 7, 8개의 책상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는데
책상 위를 밖고 있는 여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작년초까지만 해도 과
장급의 지사장에 네 명의 지사원이 근무하던 3급지사였다. 그러나 지
금은 지사장 대리인 변양호가 폐쇄되기 직전의 지사를 흔자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 누구요?"
그쪽도 이쪽을 바라보며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으므로 고영무가 물
었다.
여자가 볼 위로 홀러내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걷어 넘겼다.
"밀리 카."
검은 눈이 똑바로 고영무를 향했다. 갈색의 피부에 연한 보라색 원
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키가 켰다.
"당신은 미스터 고이시죠?"
그러면서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가 혼혈이라는 것
은 알겠는데 메스터조인지 물라토인지를 고영무로서는 아직 가려낼
수는 없었다.
"미스터 변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보고타에 오신다고."
"그런데 그 미스터 변은 나한레 아무 말노‥‥‥
고영무는 창가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 옆에 있는 책상 한 개만
사람이 일한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변양호가 사용했던 책상 같았다.
깨끗하게 비워진 또 다른 책상들 위는 먼지만 쌓이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해요,저야 이 회사사원이 아니니까.작년말에 회사를 그만두
었거든요.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와서 사무실 청소나 잔심부름
을 해주었어요."
걸레를 내려놓은 밀리카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쪽 뻗은 다리에서
눈길을 델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다 빠져나가서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고 그 사람마저도 내일 모레
하는 상황이다. 현지인을 고용할 여유는 물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미스터 변이 반가워했겠군요."
"당신은 실례지만 메스티조입니까?"
"네. "
밀리카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스페인 통치하의 남미지역은 남아
프리카나북미지역처럼 인종차별이라는 것이 없다. 가틀릭교단은 개척
자와 함께 언제나 선두에 서서 원주민을 교화시켰고, 그들과의 사이에
서 난 흔혈아는 모두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예정이지요?"
그녀가 물었을 때 숙소 쪽의 문이 열리고 변양호가 들어셨다.
어젯밤 늦도록 함께 술을 마셨으므로 아직도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여어, 밀리카, 때맞추어 나왔군."
"안념하세요, 미스터 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인사를 했습니까?"
고영무를 향해 그가 물었다.
"네, 했습니다. "
"그럼 됐군. 이 여자를 고용할지 안할지는 고형이 결정하세요."
소파에 앉은 변양흐가 앞쪽의 밀리카를 바라보며 한국어로 말했다
얼굴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다.
"보수는 한 달에 7만 페소면 돼요."
7만 페소는 2백 달러가 된다. 고영무의 1개월 봉급이 2천 달러가 조
금 넘었으므로 개인적으로 고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꼴로 나오면 내가 10달러 정도 주어서 보냈
는데 ‥‥‥‥
"학력은 어떻게 됩니까?"
밀리카의 영어가수준급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영무와 변
양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밀리카는 얼굴에 옷음을 띄줬다.
"대학을 나왔어요, 보고타에서. 재치있고 성실합니다. "
"다행이군요. 변대리님이 가시고 나면 혼자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
했었습니다. "
"오늘 내일 중으로 현지인 몇 사람을 소개시켜 줄 작정이었는데 이
여자가 먼저 왔구만. 인연이 되려는 모양이오."
변양호가 옷자 밀리카가 따라 웃었다.
"밀리카, 커피 한잔 만들어 주겠어?"
변양호의 말에 밀리카가 일어셨다.
"미스터 고, 설탕을 몇 스푼 넣습니 짜?"
"블랙으로 주시오, 콜름비아 커피 맛을 볼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몸을 돌렸다.
"여자가 필요할 땐 힐튼 호텔로 찾아가면 래요. 고형이 어떤 유형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을거요."
그녀의 됫모습을 바라보며 변앙호가 말했다.
"저런 애들,잘못 건드리면 오빠나,동생,외삼촌에 작은아버지까지
총을 들고 몰려옵니다. "
변양호의 심각한 표정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빙긋 음었다
"고형, 웃을 일이 아니에요. 작년에 동보그룹의 주재원이 메스티조
여자 하나를 건드렀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여러 군데를 칼에
쩔린 채 귀국했는데 회사에서는 보상금을 1만 달러나 지불했단 말이
오."
"여자가 미 인이었던 모양이네묘."
"미인이라떤야 이곳에는 흔하지, 허지만 대부분 위험해. 즐기려면
호텔의 클럽에 가서 돈을 주고 사는 게 나아요."
"마약은 어떻습니까? 시중에서도 흔하게 나옵니까?"
변양호는 잠시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흔하지요, 그 돈으로 경제가 움직이니까 카를로스는 굵직한 기업
들에 자금을 대주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것까지 캐내려고 하지는 많아
요. 그런다면 당장에 경제가 흔들릴테니까."
"철저한조직이어서 마약의 소매자들만 걸려들고 말지요.그리고 누
가 밀정인지도 알 수 없고. 어줬든 마약과는 담을 쌓는 게 상책이오.
모르는 게 약이니까."
밀리카가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회사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고영무와 밀리카는 생활용품을 왔다. 우
선 제일 필요한 것은 식료품이었다. 슈퍼마켓에는 쌀에서부터 제법 여
러 종류의 식료품이 구비되어 있었으나가격은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
인지 손넘은 한산한 편이었고 주로 상류층이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스터 고,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살 필요가 있어요?"
그를 따라다니던 밀리카가 물었다.
"지금 산 것만 가지고도 한 달은 먹겠어요."
수입식품 중에는 한국산도 끼어 있었다. 고영무는 김치 통조림을 다
섯 개 집어서 수레의 바구니에 던져 놓았다.
"일성의 지사가 페쇄된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미스터 변은 귀국한다
고 하면서 올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요."
밀리카는 옆에 붙어 서서 스폐인어 억양이 약간 밴 듯한 영어로 말
을 하고 있었는데 밝은 표정이었다.
고영무는 한국산 참기름 병을 집어들고 살펴본 다음 수레의 바구니
에 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스터 고가 온다고 연락이 왔어요.그래서 저는 회
사에서 지사를 폐쇄시키지는 않을 모양이라고 생각했지요."
"사고뭉치가 온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녀가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어제밤 미스터 변이 보여주더군, 내 인사 기록을. 거기에 그렇게 쓰
여 있었어 ."
그녀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면 변양호가 그녀에게도 말해 준 것 같
았다.
"모두들 내가 배겨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할거야, 혼자서. 밀리카 당
신도 그렇지 않아?"
"나는 아직 당신을 잘 몰라요."
"당신도 내 기록을 보았을텐데.그 기록대로라면 얼마 가지 않아 여
기를 떠날 사람이야, 나는."
고영무는 수레를 끌고 카운터로 나왔다. 점원이 산더미처럼 쌓인 물
건들을 보고는 입이 딱 별어졌다. 옆쪽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백인과 다른 점원 한 사람이 거들려고 다가왔다.
"일본인이오?"
기분이 좋은 듯 백인이 셈을 하면서 물었다.
"아니, 그는 한국인이에요."
밀리카가 정확한 영어로 대답하자 그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고영무는 주머니에서 한 묶음의 1천 페소짜리 지폐 뭉치를 꺼내었
다. 어첫밤 변양호가 가지고 있던 페소를 달러와 바꾼 것이다. 물건을
셈하고 있던 점원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변양호의 왜건은 이계 고영무의 차지가 되었다. 본래 지사장의 차였
는데 대를 물린 것이다. 왜건에 짐을 싣고 슈퍼마켓의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 밀리카가 그를 돌아보았다.
"미스터 고, 사람들 많은 데서 돈뭉치를 꺼내지 말아요. 위험해요."
오후 여섯시였고 거리에는 행인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가게 앞이나 골목 입구에 드문드문 서 있는 것이
보일 뿐 계엄령미 내려져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밝은 옷차림과 떠들씩한 분위기 때문이어서인지도 몰랐다.
"강도가 많아요."
"고맙군, 밀리카."
회사는 가까웠으므로 그들은 회사 빌팅의 정문에 차를 세줬다. 차에
서 내리는고영무의 앞에 양복 차림의 사내가다가왔다.
"당신이 미스터 고인가요?"
"그래요, 그런데 댁은 누구요?"
사내는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이었다. 붉은 얼굴에 광대뼈가
두드러졌는데 머리는 쟃빛이었다.
밀리카가 차에서 내리더니 사내를 바라보았다. 불안한 표정이었다.
"난 경찰청의 페드로 경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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