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사업을 하겠습니다.”
“사업에 좌우되지 말고 사업을 좌우하라.”
이 16자로 조합된 이병철 아버지의 말씀이 이병철로 하여금 세계의 경제인으로 만든 근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호암자전에 이병철의 창업관이 무엇인가를 예측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사업은 한 개인이 제 아무리 부유해도 사회 전체가 빈곤하면 그 개인의 행복은 보장받지 못한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사업이다.”
1934년 10월, 아버지로부터 300석분 땅을 받은 이병철은 서울을 비롯 대구, 부산, 평양 등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사업대상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본인이 준비한 자금으로 큰 도시에 진출하기에는 부족함을 느꼈다. 결국은 고향 의령과 가까우면서 당시 큰 도시인 마산을 후보지로 선택했다.
1899년에 개항한 마산항은 1910년 12월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본병참기지 수탈물자, 전쟁물자 적출항이었다. 또한 경남 일대의 농수산물 집산지이기도 했다. 수백만 석의 쌀이 마산항에 모였다가 일본으로 송출되는 등 물자와 돈, 사람의 움직임이 제법 큰 항구도시였다.
협동정미소 운영할 때 정미소 야적장에 적재된 쌀./제일모직 50년사/
일제강점기 식민지 산업정책으로 공출을 위해 농토와 쌀 생산이 많은 남쪽에는 식량증산이나 경공업 중심관련 경제정책이 펼쳐졌다. 당시 마산에는 쌀을 도정하는 정미소 중 제법 큰 규모는 모두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하는 정미소는 도정능력이나 시설이 열악했다. 이병철은 정미소 사업을 결심했다. 규모를 크게 하면 일본 정미소와 경쟁을 해도 뒤처지질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이 초기 투자금 1만원으로 원하는 규모의 정미소를 운영할 수 가 없었다. 이병철은 공동사업을 제안했다. 세 사람이 각자 1만원씩 출자해 1936년 3월, 자본금 3만원으로 지금의 마산 북마산거리에 정미소를 설립했다. 그렇게 이병철은 스물여섯 살에 생애 첫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의 청년 창업가였다.
창업 시작 1년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경험부족, 도정사업 내용 이해부족 등으로 자본금의 절반 이상을 손해 보았다.
실패를 인정했지만 이병철은 첫 사업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의 원인은 장사의 원리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과 시장조사를 게을리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렇게 실패의 원인을 면밀히 검토한 후 이병철은 다시 정미소사업을 계속했다. 다음 결산에서는 보란 듯이 작년도의 손해를 만회하고도 이익을 창출했다.
이병철의 정미소가 있었던 회원천 다리를 중심으로 한 도로변의 2021년 풍경./이래호/
# 삼성의 원조 마산이어라
이병철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9월까지 1년 6개월 정도 북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된 삼성그룹 창업주의 첫 사업지 터는 그 상징의 가치가 매우 높다. 필자는 협동정미소에 대한 티끝 같은 기억의 증언, 문서검증, 전문가 및 학자 의견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정미소 터를 찾아보았다. 현장검증에 도움을 준 95세 되는 분도 85년 전 아버지가 방앗간을 갈 때 따라간 기억은 나지만 정확하게 그 장소를 지정하지는 못하였으나 증언 내용은 협동정미소 공장터 근접한 거리에서 맴돌고 있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이병철과 정미소 동업을 한 정현용과 박정원 두 분 이름만 가지고 합천의 집성촌을 찾아 탐문도 해보았다. 1930년대 당시 20대 젊은이가 정미소를 운영하는 것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이 될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증언의 내용은 대부분 ‘~ 카더라’, ‘했다더라’에 제한돼 있다. 일제 강점기 기업자료인 ‘조선기업요람’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은 협동정미소가 주식회사와 같은 법인이 아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911년 마산에 전기가 들어온 후 전기를 사용한 기계화 정미소는 1930년경 약 27개가 있었다. 최초의 법인 정미소 1호는 1937년 지금의 남성동에 손형업이 설립한 흥업정미소이다.
지역 역사학자가 추천하는 3곳은 아직 문서로 증명할 수 없어 결과를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 출판 서적을 통해 추측해보면 도정을 하는 공장터와 부속건물, 그리고 북마산역을 통해 대량 유입되는 곡물을 저장하는 대형창고가 있는 야적장 등 협동정미소는 2곳을 사용한 것으로도 추측된다. 4곳의 정미소 터 주소를 확보해 최종 확인을 위한 문서증명을 신청했지만 개인정보 공개불가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100년이 되어 가는 사회적 자산이 될 경제, 문화 자료에도 개인정보보호법이 적용되니 필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시청, 관광기관, 경제기관, 대학 등 공공기관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요즘 같은 정보화 세상에 이병철의 협동정미소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흔적을 사실로, 기억을 기록으로 할려면 결국 문서나 사진의 증명이 필요하다. 사람을 통한 기억으로 찾는 것은 이제 어려울 것 같다.
대구에는 이병철이 사용한 삼성상회 터에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끊임없이 방문을 하고 있다. 이른바 삼성의 원조는 마산인데. 아쉽고 안타깝다. 요즘은 무명시절 작품을 쓰기 위해 1개월 머문 곳도 그 흔적을 중요시 여겨 작가가 머문 집 이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마산 협동정미소는 세계적 기업이 된 삼성의 뿌리이다. 반드시 찾아 흔적과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산 경제사의 자존심이 아니라 한국 경제사의 자존심이다.
늦었다고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출발하면 그것이 가장 빠른 출발이라고 한다. 벌써 85년이 훨씬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찾는 것이 어려울 수가 있다. 협동정미소를 반드시 찾아서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복주머니에 쌀 한줌을 기념품으로 넣어서 삼성의 부자기를 받도록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기대한다.
1899년 개항된 마산항은 물자의 교역은 많았지만 경남을 비롯 전국으로 배송되는 운송수단은 충분하지 못했다. 화물 운송에 많이 쓰이는 트럭의 경우 그 운임이 매우 비쌌다. 이병철은 정미소 사업의 쌀을 운송하는 것 외에 독립된 운송업을 추진하는 것도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정미소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자 이병철은 다음 사업으로 정미소의 쌀을 운반할 수 있는 운송회사를 생각한 것이었다. 훗날 무역업이 잘 되자 직접 제조하는 제당사업을 검토했고, 실행했다. 이병철은 이러한 창업형 성장을 통해 시대에 필요한 제품을 생산, 개발하거나 몇 년 후를 예측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병철이 거래했던 식산은행 마산지점(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의 옛 모습./김형윤의 마산야화 캡처/
이병철은 본격적으로 운수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일출자동차의 화물차 20대를 인수했다. 이때가 1936년 8월이었다. 당시의 화물자동차 한 대의 값은 엄청난 고가였다. 두 번째 사업인 운수사업은 자체에서 생산한 정미소의 쌀 운송지원 업무 외에도 마산항이 물자 집산지로 화역 물품이 많아 운수업은 조기에 정착했다. 트럭을 통한 운송사업에서 적지 않은 현금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이병철이 경영하는 정미소와 자동차사업장에는 특이한 경영방식이 도입됐다. 50여 명의 직원이 무질서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구체적으로 개개인이 해야 할 업무분담을 세분화했다. A직원은 도정이 끝난 쌀 무게만 달게 하고, B직원은 사무실에서 물건이 나가고 돈이 들어오는 전표업무만 전담하게 했다. C직원은 무게 측정이 끝난 쌀 가마니 포장과 반출 업무만 보게하는 등 분업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숙련과 전문성을 가지도록 함과 동시에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분업시스템 제도는 훗날 삼성그룹의 경영시스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화물자동차가 도입된 것은 1926년이다. 마산은 1930년 이후로 보고 있다. 이 시기 마산 남성동에 영업소를 차리고 마루낑, 마루이찌 등 일본인이 운영하는 운송회사는 총 36대의 화물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9년부터 일본 정부는 트럭의 경우 유사시 전시동원령에 대비, 차출이 쉽게 되도록 합병해 1개만 운영하도록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휘발유도 배급제로 실시했다. 중·일전쟁 등 계속된 일본의 전쟁 참여로 1940년부터는 눈물만큼 주던 휘발유 배급도 중단시켜버리자 나무를 태워 운행하는 목탄차가 나오게 됐다. LG그룹 구인회가 실패한 사업 중 하나도 목탄차 사업이었다.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 세 번째 사업, 경남부동산 경영
정미소 사업과 자동차 운송사업으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한 이병철은 세 번째 사업으로 토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1936년 9월이다. 자동차사업과 동시에 시행한 사업이다.
정미소 사업과 쌀 거래 등을 통해 땅값의 동향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레 토지가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논 한 평이 25전으로 한 마지기 200평이 50원 하던 때였다. 김해평야를 비롯 경남 일대 토지를 매입해 1937년 6월에는 연 수확 1만석이 가능한 약 200만평의 논을 소유하게 됐다. 호사다마랄까.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 정부는 비상조치로 모든 은행 대출을 중단했다.
이렇게 되자 토지 구입하기도 힘들어지고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등으로 토지 시세가 하루가 다르게 폭락하는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이병철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들인 전답을 다시 팔아야 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다. 1937년 9월, 마침내 이병철은 시가보다 싸게 전답을 처리하고 자본 확보를 위해 협동정미소와 일출자동차운수회사까지 청산했다. 그야말로 1년의 짧은 기간에 천당과 지옥을 체험한 것이다.
이병철은 “3가지 이익이 있으면 반드시 3가지 해로움도 있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아직 없다” 서당에서 배웠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실패가 훗날 사업경영에 다시 없는 교훈이 되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정미소 사업과 운수업을 정리하고 이병철은 수개월 동안 상업이 발달한 북경, 장춘, 상해, 청도 등 중국 대륙을 견학했다. 중국 상인의 거래액, 거래품목, 거래방법을 알고 또 한 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그 대상지를 선택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대구 삼성상회이다.
# 중국을 보고, 세상 넓은 것을 알다
이병철, 구인회, 조홍제 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서당에 다녀 한자 교육, 유교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러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집안의 재산은 조홍제, 이병철, 구인회 순으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처음부터 많은 자본을 투입해 큰 공장을 세우고 제조업을 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제한된 금액을 받아 어렵고 힘들게 사업을 펼쳐 성장해 나갔다. 창업자금이 부족하자 이병철의 정미소는 지인과, 구인회의 포목점은 동생과 함께 사업 밑천을 만들었다.
이병철은 중국 견학을 하고 귀국 후 대구로 가서 제분업과 무역업을 시작했다. 구인회는 첫 사업인 포목점 외 어채(고기와 청과), 그리고 운송회사를 경영하면서 더 큰 사업을 위해 중국을 견학하고 견문을 넓혔다. 귀국한 후 부산에서 동동구리무라는 화장품을 사업 주요품목으로 했다. 조홍제 역시 일본 법정대학 졸업 후 비료 관련 사업을 첫 사업 품목으로 결정하고 일본 전역에 시장조사를 추진하다가 장남의 건강 악화로 급히 귀국한다. 귀국 후 고향 함안 군북에서 정미소 도정 일과 가마니 짜기 등의 관련 사업을 하다 해방 후 마산에서 철가공사업을 시작했다.
# 관광스토리빌딩 경남 1호
이병철은 마산에서 정미소를, 구인회는 진주에서 포목점을, 조홍제는 마산에서 철가공업을 했다. 세 분의 고향이 의령과 진주, 함안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 창업주의 고향과 첫 사업 시작지는 모두 경남이다. 기업가의 경제유산이 풍부한 경남을 관광스토리빌딩(대중에게 흥미와 관심을 제공하고, 교훈적이면서, 구전이 아닌 사실적 이야기에 흔적과 현장이 있는 명소) 1호로 지정해 중국, 일본을 비롯 세계 관광시장에 출시해도 제 몫을 충분히 할 것 같다.
<이병철의 한마디>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고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청산하고 차선의 길을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