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
'창조의 신학'은 박영식 교수가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을 제시한 저서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성경의 창세기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되,
과학적인 지식과 신학적인 이해를 조합하여 창조의 의미와 성격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박영식 교수는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현대 과학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이를 통해 신앙과 과학 간의 대립을 넘어,
두 분야 간의 상호 이해와 조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창조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새 생명을 펼쳐 내는 하나님의 현재적 활동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답답함 속에서 창조신앙은 기존의 상황 속에서 새롭게 미래를 열어줄 재료를 발견하게 한다.
▪︎창조신앙 안에서 삶을 위협하는 요소였던 흑암과 공허와 깊음과 혼돈은 새로운 미래의 자원으로 변화된다. 이처럼 창조신앙은 고된 삶에 기쁨과 평안을 약속하는 버팀목이 된다.
'창조의 신학'의 요점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적 해석과 과학적 이해의 조화
: 박영식 교수는 성경적인 창조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결과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적 신학적 관점과 과학적 사고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2. 창조의 의미와 목적
: 책은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세계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창조가 어떻게 이해되고 믿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합니다.
3. 과학과 신앙 간의 관계
: 박영식 교수는 과학과 신앙 간의 관계를 다룹니다. 과학적인 사실과 기독교적 신앙 간의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두 분야 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합니다.
4. 신학적 고찰과 현실적 사고
: '창조의 신학'은 신학적 고찰과 현실적 사고를 결합하여, 창조에 대한 종교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창조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신학] 박영식
별아저씨의 집 2018. 10. 13. 12:54
박영식 교수님의 [창조의 신학]을 읽었습니다. 말그대로 창조를 이해하려는 창조에 관한 신학입니다.
▪︎300페이지의 단행본이지만 책이 품고 있는 범위가 넓습니다. 성경의 창조기사부터 시작해서 창조주인 하나님과 그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먼저 두개의 챕터로 다룹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학문인 과학과 대화 가능성을 다룹니다. 과학과 종교 간의 전쟁이라는 잘못된 관점에 대한 역사적 반성들을 서두로 풀어내면서 이안 바버의 4가지 모델, 1.충돌(Conflict) · 2.독립(Independence) · 3.대화(Dialogue) · 4.통합(Integration)을 설명해줍니다.
※Ian G. Barbour(1923 – 2013)
▪︎ 핵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 진화와 양자물리학에 기초하여 뉴턴과 데카르트의 결정론적-기계론적 세계가 아닌 총체적이면서 유기적이며 세계를 주장했고, 화이트헤드의 급진적 경험론을 수용하면서 세속 신학에 반응하여 과학과 종교간 대화를 추진하여 1999년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 시카고 대학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네소타에 소재한 대학에서 재직하면서 포드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에서 1년간 신학과 윤리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리처드 니버 등을 만나 1년 더 계속하여 공부를 하다가 결국 종교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끝에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
▪︎ 이안 바버는 자신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출간된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저서에서 '자서전'을 간략하게 기술했는데 여기에서 "20대는 물리학을 공부하는데 바쳤고, 30대는 종교학을 가르치는데 보냈으며, 40대에는 과학과 종교를 연결하는 일을 하며 보냈고 50대에는 기술과 윤리를 공부하고 60대에는 과학과 종교 그리고 기술과 윤리를 연결하는 일을 했으며 70대에는 진화, 인간의 본성, 환경윤리, 종교다원주의를 공부하며 보냈다"고 밝혔다.
▪︎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에 있어 충돌·독립·대화·통합이라는 제4대 유형론으로 유명한 이안 바버는 아서 피콕, 존 폴킹혼과 함께 종교-과학 분야의 거장으로 뽑히는 학자다. 대표적 저서인「과학과 종교가 만날 때」에서 이안 바버는 "다윈 진화론의 옹호자인 토마스 헉슬리와 다윈의 진화론을 반대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 사이의 논쟁"을 회고하면서 "논쟁에 참여한 양편 모두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와 해석 철학으로서 진화론적 자연주의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더 나아가서는 보다 최근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논쟁]에서 다룬 젊은지구, 오랜지구, 지적설계, 독립론, 유신진화 입장을 흥미롭게 기술합니다. (네, 이 책은 제가 20년 전에 번역한 책입니다. 번역의 질은 알 수 없답니다. ^ㅋ)
▶4장으로 넘어가면
▪︎ 본격적으로 창조와 진화 문제를 다룹니다. 창조에 관한 신학적 작업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이지요. 젊은지구론과 창조과학회에 관한 신학자의 비평도 빠지지 않지만 특히 지적설계론에 대한 비판이 흥미롭습니다.
▪︎흔히, 젊은지구론이나 창조과학이 문자적 성서해석이나 근본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점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최근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지적설계 입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신학자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창조과학의 대안으로 생각되고 신의 설계를 주장하는 바람직한 견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사실 신론의 입장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말그대로 자연신학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가는, 심각한 신학적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입장입니다. 과학적 비판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박영식 교수님은 이런 흐름들을 책에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창조의 신학을 다룰 믿을만한 신학자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에 대해서도 5장과 11장을 통해서
▪︎ 도킨스와 월슨, 그리고 호킹을 다루면서 적합한 비판을 가합니다. 저도 과학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비판했지만 신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내용을 읽어보시는 것이 흥미로울 겁니다.
▪︎자율적으로 보이는 자연의 과정과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 안에 과정으로 보면서, 지나친 결정론과 예정론을 넘어서고, 인간과 자연에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전능성을 가진 창조주를 다룹니다.
▪︎자연세계의 우발성과 하나님의 섭리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두 관점,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두 관점, 창조와 악이라는 신정론의 문제들을 교부들의 이해해서 부터 종교개자들을 거쳐 샤르댕, 폴킹혼, 호트 등 현대신학의 이해까지 간단하나 포괄적으로 잘 다루고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이 흐름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지침이 되겠습니다.
▪︎특히 뒷부분의 신정론에 관한 부분은 단순한 신학적 이해를 넘어서 삶으로서의 신학이라는 관점으로 보다 실천적이고 목회적으로 다룬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삶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라는 소제목의 본문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창조와 관련해서 자연신학적 시도가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신학적 사변을 양산하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갖가지 궁금증을 해소하기도 하지만, 더 미궁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삶을 위한 신학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305쪽)
▪︎그렇습니다. 창조의 신학은 또한 우리 삶의 신학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자나 과학자나 창조를 이해하려는 근원적 동기가 있지만 그 동기는 또한 실천적이고 목회적이어야 합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의 경험과 숙고와 찬양이 농축되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하며 동행했던 하나님의 경험과 그분에 대한 고백과 찬양이 여러 층으로 켜켜이 쌓이고 다져지며 형성된 것이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 본문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단편적인 이야기도 여러 시대를 거쳐 전승되어 형성된 것이며, 그 속에는 여러 시대의 다양한 신앙적 경험들이 층층을 이루며 쌓여 있다.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 단위들은 통시적 관점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승과 형성의 과정속에서 성서의 기록자들은 당대 자신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이야기, 노래, 시 등을 통해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고백을 표현하게 된다.
▪︎창조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곧 창조주이시다는 고백을 이들은 익히 알고 있던 다른 창조 신화를 빌려 표현하였다. 그러나 빌려 표현하는 그 과정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고백을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1장_ 성서의 창조 해석〉 중에서
▪︎성서가 보여주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가 존재론적 연속성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 인해 세계의 신성화에 대한 모든 시도는 거부된다.
▪︎세계는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으며 신적인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며,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이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출 20:4).
▪︎이처럼 강력한 형상 금지 명령은 자연을 신성화하여 숭배하는 모든 종교적 행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성서의 창조 신앙은 자연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 사유도 거부하지만, 오늘날 팽배해 있는 물신(物神)숭배도 거부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몸도 아니며, 세상의 그 무엇도 인간이 숭상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2장_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중에서
▪︎독립 이론은 과학과 종교 두 영역을 철저히 분리시켜 각각의 고유성과 자주성을 확보하여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하고자 한다.
▪︎독립 이론은 과학이 인간의 관찰과 이성에 근거한다면,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어떻게’를 물으며, 종교는 ‘왜’를 묻는다. 과학은 객관적 데이터에, 종교는 내적 경험에 의존한다. 특히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사용되고 통용되는 삶의 기반 안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과학의 언어로 종교적 언어를 판단해서도 안 되며, 그 역도 안 된다. 과학적 언어는 자연현상과 관련된 관찰과 규칙, 예측 등을 표현하는 데 유용하다. 이에 반해 종교의 언어는 공동의 삶의 태도와 입장, 신에 대한 경험과 경배를 표현하는 데 유용하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된 언어 영역을 가지고 있기에 불필요한 충돌과 간섭은 무익하다.
〈3장_ 과학과 종교의 대화 가능성〉 중에서
■오늘날 진화론에 대해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대다수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진화가 양립 불가능한 서로 상충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양자택일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한국’ 기독교의 특수한 상황과 연관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기독교는 미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러 온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 복음을 들고 선교 활동을 전개했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며, 이들은 성서 무오설이나 문자주의적 해석에 입각하여 창조 신앙과 진화를 양자택일로 생각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 신앙의 기초를 닦게 된 한국교회가 오래전부터 창조와 진화를 대립적으로 이해한 것은 쉽게 납득이 되는 부분이다. 다만 여전히 이러한 입장에 서 있어야 할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주제이다.
〈4장_ 창조와 진화〉 중에서
▪︎도킨스는 실제적인 측면에서 현실 종교를 통해 일어나는 여러가지 부정적인 상황들을 지적하며, 종교가 일종의 악의 축이라고 꼬집을 때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실제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들만을 예로 든다면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측면에서는 인간 자체가 악의 화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종교든 뭐든세상 속에 악을 생산하는 존재는 결국 인간이니 말이다. 인류가 겪는 수많은 고통 중 대부분은 인간에 의해 자행된 일들의 결과이다. 선을 행하는 존재도 악을 행하는 존재도 결국엔 인간인데, 결국 종교 공동체 속에서 인간은 사회적 선을 생산하기도 하고 악을 생산하기도 한다.
▪︎종교가 악의 축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인간이 악의 근원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며, 종교가 악의 축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면 악의 근원인 인간의 종말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5장_ 과학주의 무신론의 도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