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동쪽으로 160킬로미터를 이동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현재 튀르키예의 코냐)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반응은 영접과 배척으로 극명히 나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믿음으로 한마음이 되는가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미움으로 연합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불화와 분리를 낳지 않는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눅 12:51-53). 정말 위험한 것은 복음이 낳는 ‘불편한 분리’가 아니라, 두루뭉술한 복음으로 감춰진 ‘거짓된 연합’입니다.
6,7절 바울과 바나바는 박해를 피해 30킬로미터 거리의 루스드라로, 그리고 다시 90킬로미터 떨어진 더베로 이동합니다. 도주가 아니라 새로운 사역지로의 이동일 뿐입니다. 그들의 선교 목적은 효율과 성공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신 대로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10절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된 것은 바울의 마술적인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지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그 믿음으로 일어날 것을 권했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3:1-10) 믿음에 임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주저앉아 있는 나와 가정과 교회를 일으키는 것도 이 믿음뿐입니다.
11-15절 군중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그 지역의 수호신인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숭배하려 하자, 두 사람은 옷을 찢어 그들의 행동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고 무리 틈으로 뛰어 들어가 온힘을 다해 제지합니다.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숭배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추앙받는 것은 박해받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입니다.
16-18절 바울은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근거로 복음을 전하고, 이교도들 앞에서는 자연에 깃들어 계신 하나님을 전합니다. 바울은 전도 대상자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상황에 따라 유연함을 발휘하는 전도자였습니다. 복음을 들을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첫댓글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먼저 바울이 발을 쓰지 못하는 자의 믿음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 곳 곳에는 이러케 숨겨진 보화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자가 걷게 된 것은 바울의 능력과 외침이 아니라 걷고 싶다는 갈망과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버지 다리 못쓰는 자의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처럼 나로 아버지께 갈망하게 하시고 믿음대로 될지어다 와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의 아버지를 신뢰할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