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26
4월13일[부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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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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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AhR9oI-ypE
[서울대교구 이준 바오로 신부(창4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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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사도들처럼 약자의 작은 목소리를 경청합시다!>
요즘에야 먹을 것이 넘쳐 흐르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얼마나 굶주리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기름기가 흐르는 하얀 쌀밥이나 고깃국은 명절이나 생일 때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이면 큰일 날 일이지만, 가족 안에서도 사람에 따라 밥상의 질이 달랐습니다. 어르신들이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게는 반찬에도 특별대우가 있었습니다.
한참 먹을 나이때, 어린 제 눈에도 먹는 것에 대한 불공평이 그리도 커 보였습니다. 음식이라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큽니다. 식사 한 끼 그럴듯하게 잘 하고 나면 불평불만이 확 사라지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누구에게는 한우를 내놓고 누구에게는 수입산 돼지고기를 내놓으면 즉시 얼굴빛이 변합니다. 음식에 대한 차별대우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거룩한 지향을 가슴에 품고 시작한 초대교회 공동체에도 만만치 않은 문제점들이 발생했습니다. 나이, 성별, 학벌, 출신지 등등 모든 것이 다른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살다 보니 너무나도 자연스레 사소한 어려움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바로 배식에 있어서의 차별대우 문제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따진 것입니다. 그리스계 과부들이 음식 배급을 받는데 홀대를 당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들이 취한 조치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자마자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약자들인 그리스계 과부의 민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약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경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취한 조치는 공평한 식량 배급을 위한 훌륭한 협조자를 일곱 뽑았고 그들에게 식량 배급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사도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은 오늘 우리 공동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곧 오늘 우리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커다란 도전과 문제 앞에서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되풀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인내와 용서, 그리고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수렴, 그도 안 될 때는 아주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데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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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아님)
[양승국신부님의 기도레슨(1)]
<기도 대체 무엇입니까?>
기도, 나도 정말 잘 해보고 싶은데, 왜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을까요?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될 것입니다. 정말 쉽고 간결하게 우리를 기도생활로 인도 하셨던 헨리 나웬 신부님은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신학자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기도는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비상금 같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안식처, 다시 말해서 영혼의 집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집을 지니고 있습니다. 새에게는 둥지가 있고 여우에게도 굴이 있고 벌에게도 벌집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집입니다. 기도가 없는 영혼은 집 없는 떠돌이 영혼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물고기에게는 물과 같은 것, 우리 인간에게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놓치며 산다는 것, 기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산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기도 한다는 것>
때로 엄청 어려운 작업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담으면 그게 기도입니다. 우리 내면에 사랑을 품으면 그게 기도입니다. 복음을 묵상하고 삶에 옮기면 그게 기도입니다. 이웃의 복을,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면 그게 기도입니다.
최고급 드럼 세탁기를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세탁기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작업이 있습니다. 우선 세탁기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포장을 뜯어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제품에 달려 있는 플러그를 전원에 꽂아야 하겠지요. 그래야 작동이 시작되고 그 세탁기는 제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통교하지 않고,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고 고립된 섬처럼 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저 한 목숨 부지하고 있는 단순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진정 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는 플러그를 하느님이라는 전원에 꽂아야 됩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측은지심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 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일생일대의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 그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에 한번 맛을 들여 보시길>
기도의 대가이신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기도를 얼마나 잘했으면, 얼마나 기도에 깊이 몰입했으면 하느님과 완벽한 일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탈혼 상태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데레사 성녀는 탈혼 상태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달콤했으면 탈혼 중단 후의 슬픈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기분, 귀양살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기도를 잘 하려면 우선 기도의 맛을 느껴봐야 합니다. 일단 기도에 한번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시간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모릅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요?>
여러 정의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이 천국이 아닐까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단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분이 너무 아름다워, 나를 잊는 것, 그분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나를 감싸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주파수가 하느님이라는 안테나에 잘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가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현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기도시간은 그야말로 꿀맛입니다. 그 시간이 정녕 천국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기도 시간은 지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통 그 자체입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선 알아야 되고, 기도에 맛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즐겨야 합니다. 기도는 마음 없이, 준비 없이, 무조건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기도의 주체, 기도 안에서 대화의 상대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나를 이 세상에 내신 분,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사랑하시는 분....
기도에 왕도는 없습니다. 기도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 늦었지만 다시 한 번 기도를 시작해 보시려는 분들, 학업에는 왕도가 없듯이 기도에도 절대로 왕도가 없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기도가 잘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자주 찾아 가십시오. 그들에게 기도의 노하우를 배우십시오. 이웃끼리 좋았던 기도체험을 나누고 공유하십시오. 시간을 쪼개 하루 단 10분 만이라도 기도를 위한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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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강연 100도씨’에서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건축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주호 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른 오른 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른 손의 손가락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추고 찍었고 길을 걸을 때도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 앞에서 오른손을 보였을 때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는 더욱 큰 상처와 열등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년이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해야 할 때는 더욱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 창피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싫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당에 갔을 때 새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악수를 청하더랍니다. 머뭇머뭇 거리며 오른 손을 내밀었더니 신부님이 자기에게 호통을 치며 혼을 내었다고 합니다. 뭐가 부끄러워서 손을 자신 있게 내밀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부님에게 야단맞은 것이 자신에게는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의 불완전한 손에 대해 부끄러워했음에도 아무도 그런 모습에 대해 야단을 쳐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았지만 신부님은 그를 정상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당당해 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나니 ‘두려움은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구인 손에 대해 자신만 부끄럽게 느낄 뿐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받아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 혼자 열등감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자신 안의 괴물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허상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풍랑 속으로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 하자 배는 이미 목적지에 닿아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지만 항상 두려움과 함께 오십니다. 그 두려움을 거부하지 말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 안으려고 할 때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물고기 잡고 있던 시절 처음으로 예수님이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해서 많은 물고기가 잡혔을 때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가 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두려움을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려고 하니 풍랑은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 허상 뒤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두려움도 이길 수 없고 예수님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두렵습니다.
여자를 만날 때는 헤어질 것 때문에 두려웠고, 학생일 때에는 선생님이, 군인일 때는 선임 병이, 신학생 때는 신부님이, 신부가 되니 선배들이 무섭습니다. 아마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질질 끌려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젠 깨닫습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두렵게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보이고,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에게 핑계를 대게 된 것은 이제 자신 안에 죄가 들어와서 상대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남이 나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내가 잘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 또한 상대의 문제입니다. 상대 안에 미움으로 가득 찼다면 내가 아무리 잘 해 주려 해도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동의 변화로 상대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놓으니 상대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나쁘게 보지 않도록 나를 정화하는 것뿐입니다. 정화해서 사랑으로 가득 채워 모든 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해결 방법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언제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으라고 두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위로 올라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항상 그 두려움 뒤에 있습니다. 두려움을 먼저 품지 않으면 평화는 뒤따라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회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두려움이란 것이 그저 나의 그림자나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체의 겉모습은 밀떡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겉모습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뒤에는 반드시 평화가 선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다고 나를 속이지 맙시다. 먼저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합시다. 그래야 자유와 평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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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의 기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1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가 있을 것, 다를 줄 아는 악기 한 가지 있을 것,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을 것,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공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 약자를 도우며 봉사를 꾸준히 할 것” 그런가 하면 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할 것, 월 급여 500만 원 이상일 것, 중형차를 소유할 것, 통장 잔고 1억 이상일 것,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다니는 정도, 골프장이나 콘도 회원권 소유할 것”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가치와 수치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존재와 소유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는 도덕적인 가치, 인격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재화와 소유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기준으로 볼 때, 비록 재화와 소유가 적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끄럽지 않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도덕적인 허물이 있더라도, 인격적으로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재화와 소유가 충분하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셨을 까요? 가난한 과부와 바리사이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적은 헌금을 하였지만 정성을 다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헌금을 하였지만 그것을 과시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세리와 바리사이의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단식과 희생을 다했음을 기도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비용이 들면 나중에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혈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로마의 백인대장일지라도 굳센 믿음이 있다면 구원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성껏 봉헌한다면, 우리가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면, 우리가 굳센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상류층은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나약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던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회개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곱절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기도하였던 성모님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 성인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상류층이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고, 필요한 것들만 받았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궁핍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나눔과 기도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중산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상류층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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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6-21: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빵의 기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카파르나움으로 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어 늦도록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배를 타고 떠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제자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그 상황이 제자들을 더욱 절박하게 한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배를 어디로 저어가야 할지 몰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7절) 그들의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상황은 적어도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분의 거룩한 법에서 떠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밟고 인간의 모든 교만을 내리누르며 물 위를 걸어오신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가며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재난이 찾아오고 이런 일이 많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파도를 밟고 건너오신다. 그러나 너무 어려움이 커서 끝까지 견뎌내려 노력하는 이들마저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 복음과 성경을 통해 답을 찾아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럴 때 예기치 않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구해 주신다. 당신의 권능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의미하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것을 실현하게 해 주시는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며 귀에 익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21절) 김찬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적을 똑똑히 보도록 배 위에 오르시지 않고 물 위를 걸으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배에 모시려고 하는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배와 주님께서 모두 뭍에 닿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이미 목적지에 닿았다고 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의탁할 때, “어느새”(21절) 바람이 걷히고 목적지에 닿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파의 난관, 박해자의 손길, 그 안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분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려 노력하는 삶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우리,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항상 목적지에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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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체험한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제자들도 저녁때가 되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납니다.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지만 노를 저어 목적지로 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가 역풍 속에 분투하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도 풍랑이 일고 파도가 출렁이는 밤바다의 상황을 그대로 대면하시며 그 역풍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께서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트시어, 허둥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이미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오늘 독서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할 때의 혼란을 묘사합니다. 공동체에 불평과 분열의 조짐이 발생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배에 예수님을 모시듯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사도들이 하여야 할 첫 번째 임무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늦은 밤, 낯선 길을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멀리서 다가오는 정체 모를 형체가 주는 섬뜩한 공포가 무엇인지, 그러다 상대가 익숙한 목소리로 “나야.” 하고 말하여 올 때 드는 안심이 무엇인지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심은 모든 상황을 돌려놓는, 그 자체로 평화이고 사랑인 완전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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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물 위를 걸으시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파도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빵의 기적 이야기’와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 사이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빵의 기적 이야기’의 결론 역할과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요한 6,15), 제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둘러서 제자들을 군중에서 분리시키셨고, 그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마태 14,22; 마르 6,4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상황은 아마도 몹시 어수선하고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빵의 기적’ 때문에 크게 들뜬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들어서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할 때(아우성칠 때), 제자들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군중과 함께 행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ㅠ제자들은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청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시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우선 먼저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고, 그리고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하셨는데, 뒤의 22절을 보면,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그들의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고, 꽤 오래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만난 ‘큰 바람’과 ‘파도’는, 그들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군중의 분위기에 크게 흥분된 상태였을 것이고, 또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왜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셨을까?”라는 의문과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신 것에 대한 실망감 같은 것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큰 바람’과 ‘파도’는 제자들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진정제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제자들은,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 또 예수님에게서도 떨어져 있으면서 어둠 속에서 배를 저어 가면서 차츰 흥분이 가라앉았을 것이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좀 더 신앙이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때도 있고, 그 어려움들 덕분에 어떤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들 자체가 은총은 아니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해지고 도약하는 것은 은총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고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연계도 지배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임금이 되기를 청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가셨을까? 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22절) 만일에 타고 가실 배가 있었다면? 아마도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 깨달음은 뒤의 68절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일과 밤에 호수에서 큰 바람과 파도를 겪은 일과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일이 합해져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이 크게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그냥 단순하게 “저희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는 말을 먼저 한 것은, “빵을 배불리 먹이겠다고 약속하는 세속의 임금들에게는 가지 않겠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만을 따르겠다.”라는 다짐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4)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 다가온다고 생각해서 겁에 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14,26; 마르 6,49), 요한복음에는 그 말이 없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것을 몰라서 무서워한 것과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무서워한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무서워하지 마라.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라는 뜻이고, 요한복음에서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왔으니, 나를 무서워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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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
우리는 부활시기에 내내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곧 예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장면입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낌새를 알아채시고 이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호숫가로 “내려”가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공관복음 (마태 14,22; 마르 6,45)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치 제자들을 군중들과 떼어놓기라도 하듯 재촉하여 제자들을 카파르나움으로 보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스스로 떠나가는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치 군중들과 같은 생각을 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자 반발이라도 하듯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만나를 먹고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에집트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히브리인들처럼, 좌절하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처럼,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그러나 떠나온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러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 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카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관복음(마태 14,32; 마르 6,51)에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배에 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믿고 받아들이자 “어느새”(즉시, 갑자기) 목적지에 가 닿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계시하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이요, “나다”라고 스스로 밝히심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함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특별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심을 밝혔을 때, 다른 이들이 다 떠나갈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 곁에 남았던 제자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은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도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독수리가 바람에 몸을 태우듯 흔들림에 자신을 태우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여행을 할 수 있기에,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며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있기 마련인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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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주 적은 양의 음식으로 오천명이 넘는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다음에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해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군중들은, 그분을 통해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듭니다.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면 그분께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해결해 주시리라 기대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의 그런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벗어나 홀로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곳에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시지요. 그리고 그로 인해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승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자, 자기들끼리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 있으려고 배를 타고 길을 나섰는데, 뜻하지 않게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풍랑은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과 서쪽에 있는 지중해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마주쳐서 생기는 강한 ‘맞바람’이었습니다.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밤에 깊은 호수 위에서, 거센 두 바람이 만들어내는 맹렬한 풍랑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가 얼마나 컸을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게 되었을지 알 것도 같습니다. 양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배는 이리저리 크게 휘청거리고 높은 파도로 인해 배 안에 물이 가득 들어차서 당장이라도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겠지요. 게다가 스승님마저 함께 계시지 않으니 ‘이러다 물에 빠져 죽겠구나’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던 그 때 예수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시어 그들 곁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께서 오시는데도 그분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날이 어둡고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분을 유령으로 오해한 것일까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표징’과 ‘상징’을 중시하는 요한 복음사가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보다 심오한 영적 의미가 있다고 봐야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땐 보통 ‘십자가’를 지고 오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려면 그분이 지고 계신 십자가까지 함께 감당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내가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본능적으로 주님이 나에게 오시는 것을, 그분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지고 계신 십자가는 내가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감당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님을, 그분께서 건네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내 안에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지요. 그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자기들이 탄 배 안에 모셔들이려고 하자, 그들이 탄 배가 ‘어느 새’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걸 감당할 힘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런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큰 고통과 시련도 ‘어느 새’ 지나가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 하는게 신앙생활이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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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20)
제가 다녀온 곳 중에서 아름다우면서도 사람과 함께 공존하고 공생한 호수가 어디였지 라고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곳은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접하고 있는 ‘티티카카 호수’, 캄보디아의 ‘톤레삽 호수’ 그리고 미얀마의 ‘인레 호수’ 등입니다. 외적으론 아름답고 낭만적인 호수 같지만, 성경에 나오는 호수는 삶의 양면적인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의 시선에서 보자면, 부활은 죽음과도 같은 바다를 건너 저편 땅으로 통과하는 여정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죽음과 생명이 함께 공존하는 호수를 항해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우리네 인생은 끊임없이 죽음과도 같은 상황을 수시로 직면하면서 호수를 거슬러 생명의 땅으로 나아가는 형국입니다. 불교에서도 이를, “인생은 苦海와 같다.”하고 표현하잖아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휘몰아쳐 오는 거친 파도에 휩싸여도,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조금씩 건너편 생명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과 갈망이 없다면 그 여정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여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이미 어두워졌는데도”(6,17) 그들만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떠나는 그 시간이 바로 어두운 저녁이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않은 그 자체가 우리네 신앙 항로에서 ‘어둠의 때’이고, 이 어둠이 다가오면 우리 내면에서부터 ‘두려움과 불안’이 서서히 일어나서 우리를 휩쓸 만큼 강한 바람으로 불어오고 거친 파도처럼 덮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란, 곧 교회를 상징함을 즉각적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는 교회는 지금 어두운 가운데 도달해야 할 빛과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항해하는 중입니다. “그때에 큰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지만.”(6,18) 예수님은 아니 계셨습니다. 이런 상태였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하였다.”(6,19) 하고 묘사합니다. 이 광경을 마태오 복음에서는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13,26) 하고 직접적으로 제자들의 반응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상상이 가잖아요. 밤중에 그것도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물 위를 걸어오신 분이 설마 예수님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지하기보다 오히려 유령처럼 두려운 존재로 인지하고 더 무거운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게 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전에 저는 혼자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 제 엄마가 다가오면서 ‘무서워하지 마, 엄마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다. 아, 이젠 살았다. 무섭지 않아’라고 말했던 기억과 그때의 느낌이 새롭게 되살아납니다. 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20)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4,18)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셨기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친 사랑으로 참된 평화와 위안을 충만히 만끽하였습니다. 이는 부활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충만한 평화와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 항해에서도 예수님의 ‘현존과 부재’로 인해 때론 위안을 때론 위험을 겪을 수 있지만 마침내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부재 가운데서도 당신의 성사적인 현존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다 보면, 혼자 버려짐의 두려움과 불안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함께함의 평화를 느낄 때 이내 사라지고 평온과 안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이 체험이 바로 부활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두려움에서 평화로 자신들이 안정을 되찾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했습니다.”(6,21)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평화와 평온을 되찾은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굳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미 부활의 선물인 평화로 가득 찼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도 주님의 현존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않아도 신앙적 차원에서 이미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눈과 손길을 돌리신 순간은 한순간도 없습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3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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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달이었을 것입니다. 태국과 우리나라의 월드컵 예선 축구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3:0의 승리였습니다. 1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해서 불안하다고 언론에서 말했지만, 2차전에는 3:0의 완승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골에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압도적인 승리 때문이 아닙니다. 또 이제 이겼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 골을 넣은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박진섭입니다. 이 선수는 작년 12월에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무명의 시간을 보냈었지요. 실업팀, 그것도 2부리그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K리그1’까지 도달하는데 자그마치 6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구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생생하게 꿈을 꾸면 이뤄진다는 믿음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그가 골을 넣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저 역시 큰 기쁨을 얻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킨 이의 웃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좌절, 절망이 우리의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란 단어를 품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 희망이 지금과 다른 또 다른 삶을 살게 해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죄 중에 있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다시 힘차게 사는 용기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저녁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그런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이는 것이 아닙니까? 어둠 속에서 작은 배를 탄 채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을 뚫고서 건너편에 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어둠을 뚫고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 말씀따라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주님을 모시려고 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으려고 할 때,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아직 배 안에 모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에 이릅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멀리하고 잊어버린다면, 두려움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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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함께 길을 가다>
요한 6,16-21 (물 위를 걸으시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함께 길을 가다>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
당신과 함께
제가
지금여기까지
저와 함께
당신께서
지금여기까지
당신과 함께
제가
앞으로 어딘가로
저와 함께
당신께서
앞으로 어딘가로
당신과 함께
제가
가려는 곳이
저와 함께
당신께서
가시려는 곳이기를
++++++++++++++++++
<(2)두 가지 두려움>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넙니다. 큰 바람이 일고 거센 파도가 몰아칩니다. 호수를 건널 때에 쉽게 만나는 풍경입니다. 익숙한 만남이지만 제자들은 두렵습니다.
삶과 죽음, 참을 수 없는 몸과 마음의 고통홀로 겪는 극도의 외로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끝 모를 무기력함. 이 모든 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만, 이 삶의 일부가 나를 향할 때 견디기 힘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기에 삶은 두려움의 여정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현존에,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에 제자들은 또 다른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두려움은 일상의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에 상상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평화와 희망 머금은 새 삶을 낳습니다.
낡은 천 조각처럼 느슨하고 생기 없는 삶의 순간에 섬광 같이 주님은 다가오십니다. 붙잡을 틈도 없이 스치듯 사라지십니다.
잠든 영혼 깨우는 주님의 음성에 쳐진 몸 핏기 돋우는 주님의 손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총 가득한 두려움으로 죽은 것 같이 살았던 나는 죽음도 없앨 수 없는 생명으로 다시 납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은 삶의 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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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껏 노력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는데 어둠이 짙어졌을 때 큰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 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예수님 없이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인생 항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의 위기 상황을 당할 때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 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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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 항해 여정-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자애를 베푸소서.”(시편 33,22)
오늘 화답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새삼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우리 삶의 중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도 일어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작년 8.15일 광복절이후 계속되는 만세칠창의 기도입니다. 두 팔을 번쩍 들으니 기도와 동시에 전신 운동도 됩니다.
때로 집무중에도, 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도 바치는 몸과 마음이 하나된 만세기도입니다. 이보다 유쾌하고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참 많이도 권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삼위일체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새롭게 고백하는 만세칠창의 기도입니다. 제가 수도사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35년동안 여기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했던 강론 주제가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무질서에 방황과 혼란이요,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또 하나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10년 동안 참 많이 사용한 강론 주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및 우리 요셉 수도원을 생각하던중 떠오른 강론 주제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항해 여정”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 은혜롭습니다. 인생항해 여정중인 주님의 제자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잠시 부활하신 주님이 부재할 때 어둠과 더불어 거세어지는 파도에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바로 인생항해 여정중의 제자공동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의 개입입니다.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자 파도와 더불어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시는 오늘 복음의 중심 말마디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I AM!)’ 바로 하느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제가 40년전 이미 타계하신, 1970년대 한때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당시 해직된 연대 김동길 교수의 특강때 들은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밤늦게 귀가하여 문을 두드릴 때 “누구요?” 물을 때 “나다!” 대답하는 아버지이고, 이때 “나가 누구요!” 묻는 사람 없을 정도로 자명한 존재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성 요셉 수도 공동체의 중심 자리, 십자로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님상 바로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말마디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 공동체의 중심 자리에 머물러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며 위로와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다양한 두려움의 어둠에 포위되어,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하느님의 이름이자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영어 I AM에 보어 둘을 붙이면 하느님의 정체는, 예수님의 정체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계신, 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나오는 고백이 시편 23장 1절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입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무서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모두 통합니다.
성서에도 참 많이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이며 무려 365회 나옵니다. 날마다 우리를 향해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용기백배, 사기충천케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항해 여정중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임을 다음 대목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바로 인생항해 여정중 삶의 기적을 상징하는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삶에 모실 때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앞당겨 미리 지금 여기서 목적지의 하늘나라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가 목적지에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 요셉 수도원이 1987년에 설립되어 올해 37년째 인생항해 여정중인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요 주님께서 늘 공동체의 중심에서 함께 해 주셨음을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아 세상 바다를 항해하다 폭풍에 파선되거나 조난당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인생항해 여정중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을 선장의 중심 자리에 모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성 요셉 수도원의 십자로 중심 자리에 있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공동체를 보호해 주셨고 앞으로도 늘 보호래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도 깊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그 잘 나가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흡사 인생항해여정중 내적분열로 난파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외적의 침입에 망하는 경우보다는 내적 분열이나 부패로 무너지는 경우가 태반인 공동체인데,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교회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차별로 인해 발생한 내분입니다.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불평을 터 뜨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공동체가 내분과 분열로 파선될 위험에 처한 순간 사도들의 분별력의 지혜와 신속한 결단의 행위로, 또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공동체는 다시 원상복구되어 계속 항해 여정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사도들의 빛나는 리더십이 공동체를 살렸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고, 사도들은 참 기민하게 그들을 안수합니다. 마치 마리아의 관상가들과 마르탄의 활동가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니 공동체가 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순탄대로 항해 여정에 오르게 됐음을 봅니다. 사도들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인생 항해 여정중의 공동체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지요.
이래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수도원의 중심인 이 거룩한 성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 성 요셉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를 날로 견고히 해 주시며, 성공적 인생 항해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시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시편33,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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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그 무렵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트리게 되었다.”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이것이 오늘 묵상의 주제입니다.
무소유와 공동소유의 그 완벽할 것 같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불평이 터져 나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완벽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들로 공동체가 이루어지니 공동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서나 갈등과 분열과 불평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하고 훌륭한 공동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회복력이나 복원력 같은 것이 얼마나 있는가 그겁니다.
사실 미성숙한 공동체는 문제가 생기면 서로를 파괴하고 구성원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하고 결국 공동체가 쪼개지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 면에서 성숙하고 훌륭하고, 모든 것을 공동체에 내놓았던 처음보다 더 성숙하고 훌륭합니다.
잠시 혼란이 있었다가 다시 기도하는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각자 자기 하느님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무슨 성숙한 공동체입니까? 같이 기도하지만 일치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무슨 성숙한 공동체입니까? 선교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문제없이 산다면 그것이 무슨 성숙한 공동체입니까?
그런데 오늘 초대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결정을 내립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 수도회 공동체, 재속 프란치스코회 공동체 평의원들도 오늘 사도행전의 일곱 부제를 본받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기를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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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풍랑과 광야!>
오늘 복음(요한6,16-21)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결이 높게 이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가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오두막'이라는 영화에서 본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불행하게 막내 딸(미시)을 잃고 깊은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아버지 '맥'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도움으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와 성자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호수 위를 달려가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풍랑이 이는 물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또한 걸어가야 할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구약의 파스카인 출애굽 사건과 신약의 파스카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는 늘 크고 작은 풍랑이 이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풍랑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이 풍랑들을 이겨내고 부활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즘 구약의 파스카인 출애굽 사건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집트로부터 구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자,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여정 안에 크고 작은 풍랑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름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로 인도합니다.
'풍랑과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그래서 '부활하는 곳'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크고 작은 풍랑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 손잡고 부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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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2x5uCLkW3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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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20)
일렁이는
풍랑도
주님과
나누면
고요가 됩니다.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는
풍랑도 있습니다.
믿음을 깨우는
풍랑입니다.
풍랑 속에서
자라나는
믿음입니다.
살아있기에
두려운 풍랑도
우리는
체험합니다.
풍랑이 호수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넘실거리는
물결은
넘실거리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풍랑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의 내면입니다.
들끓는 욕망과
서로의
좋은 마음까지
삼키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욕심의 풍랑으로
갈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다시
고요한 길이
되어주십니다.
두 손을 모으는
감사가 됩니다.
두려움도
감사가 되고
풍랑도
감사가 됩니다.
주님 없는
풍랑은
언제나
목적지를
놓치지만
함께하는
믿음은
이미 목적지에
가 닿는 행복이
됩니다.
파도를 넘듯
마음을 넘어
마음의
물결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행복한 마음의
날 되십시오.
파도가
거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이
높고 거친 것입니다.
꿈틀거리는
욕심이 아닌
고요와 감사가
시작되는 믿음의
새 날입니다.
++++++++++++++++++
(2)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20)
조금씩 더 진하게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연두 빛 생명의 물결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말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자아로부터 시작되지만 참된 평화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거셀수록 평화는 더욱 가까이오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다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다시 시작할 용기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목적지로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풍랑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보게 됩니다. 욕망은 두려움만을 되풀이하며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욕망에 묶여있는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주십니다. 다시금 생명의 주인, 제 마음의 주인이 정녕 누구신지를 깨닫습니다. 흔들리는 이 마음마저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이 모든 두려움마저 맡겨드립니다.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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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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