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7(수) -창랑 장택상을 생각함- (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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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상이 판서‧관찰사 등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의 후손으로 경상도 칠곡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본디 총명하여 향리에서 한학을 익혔고 10살이 되던 해 서울에 올라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 뒤에는 일본의 와세다대학과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하고 ‘조선 독립’에 큰 뜻을 품고 귀국하였으나 당장에 할 일이 없어서 형이 경영하는 경일은행의 상무로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이 터져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투옥,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석방된 뒤에도 독립 운동가들에게 꾸준히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고, 도산 안창호에 대한 존경심은 평생 변함이 없어서 그의 이름은 일경이 작성한 요시찰인 명단에 올라 있었습니다.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그는 비로소 날개를 펴고 할 일을 찾은 셈입니다. 그가 경찰간부가 되어 수도 청장으로 뛰던 때의 모습을 지금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남노당의 ‘정 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누가 그토록 철저하게 파헤쳐 공산당이 숨도 못 쉬게 만들었겠습니까. 테러단체로 잘못 알려져 있던 당시의 서북청년단을 누가 공공연하게 자금으로 도와, 적색 반동분자들의 박멸을 촉구하기도 하였겠습니까. 그는 여운형이나 김구나 김규식의 정치적 노선보다는 이승만의 판단이 보다 애국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확신하고, 때로는 이승만에게 그가 듣기 거북한 직언을 하여 미움을 사서 멀리 밀려나기도 하였지만, 이승만에 대한 창랑의 충성심은 우남이 세상을 떠나기까지도 또는 우남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치의 변함이 없어서, 우여곡절 끝에, 그는 군소정당이 되어 버린 자유당의 총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의 초대 외무장관, 3대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조봉암의 사형만은 안 된다고 당국에 탄원하다 큰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 소신이 뚜렷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창랑이 세상을 떠난 지가 어언 43년이 되었건만 그는 지금도 그리운 사람입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
첫댓글 " 그는 진정 소신이 뚜렷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창랑이 세상을 떠난 지가 어언 43년이 되었건만 그는 지금도 그리운 사람입니다."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의 초대외무장관, 3대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조봉함의 사형만은 안 된다고 당국에 탄원하다 큰 오헤를 받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았습니다".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의 초대 외무장관, 3대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조봉암의 사형만은 안 된다고 당국에 탄원하다 큰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 소신이 뚜렷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몽달귀신과 폐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모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