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왜관수도원장 이형우 아빠스 선종
29일 장례미사 봉헌
한국 교부학 발전 초석 다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4대 수도원장 이형우(시몬 베드로) 아빠스가 11월 27일 오전 6시25분 지병으로 선종했다. 향년 70세(수도서원 45년).
이 아빠스의 장례미사는 29일 오후 2시 수도원 대성당에서 박현동 아빠스 주례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수도원 묘지에 안장됐다.
이 아빠스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아왔다. 최근 들어 건강이 악화돼 대구파티마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21일 퇴원했다. 지도를 맡고 있던 마산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녀원으로 돌아와 휴양하다 27일 새벽 주일미사 집전을 위해 성당 문을 들어서는 순간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인자하고 묵묵한 성품으로 존경받아 온 이 아빠스는 2001년 왜관수도원장에 선출된 후 2013년까지 ‘서로 섬기자’(Serviamus invicem)를 모토로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 2007년 수도원 대형 화재로 힘든 가운데 재건에 노력해 2009년 8월 새 성당을 봉헌했다. 새 성당 봉헌을 시작으로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며 심포지엄, 성베네딕도회 총연합 세계 총재 아빠스 회의 등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특히 이 아빠스는 한국교회 교부학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2002년 1월 교부학연구회 설립 때부터 초대회장을 맡아 2013년까지 연구회를 이끌며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 「교부문헌 용례집」 「교부들의 성경주해」 등을 펴냈다. 국내 교부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 신자들에게 교부들의 가르침을 전했다.
1946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이 아빠스는 1965년 왜관수도원에 입회한 후 1971년 첫 서원, 1974년 종선서원했다. 이어 로마 성 안셀모대학에서 유학한 후 1977년 사제품을 받았다. 1984년 성 아우구스티노대학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수도원 역사편찬 책임, 구미 원평, 대구 대명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2001년부터 수도원장을 역임하며 덕원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를 겸했다. 2013년 4월 사임한 후 마산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녀원 지도 신부를 맡았다.
이 아빠스 선종 소식이 알려지자 27일 오후부터 지역 신자와 봉헌회원 등 빈소가 마련된 수도원을 찾아 연도를 바치며 고인의 안식을 기원했다.
장례미사 고별사에서 박현동 아빠스(왜관수도원장)는 “늘 호탕한 웃음으로 형제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셨던 아빠스님은 수도원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아 헤쳐 나가셨다”면서 “아빠스님의 성실함과 충실함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했다”고 추모했다. 박 아빠스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대림 제1주일 복음 말씀처럼,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빠스님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청했다.
박경희 기자 july@catimes.kr
이형우 아빠스가 걸어온 길
수도원 화재 아픔 딛고 공동체 일궈… 교부학 연구에도 헌신
‘서로 섬기자’(Serviamus invicem)라는 모토에 따라 수도공동체를 이끌었던 이형우 아빠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으로 재임했던 12년은 형제들과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보여주신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었다.
수도공동체는 갑작스러운 비보에 슬픔은 크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이 아빠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했다.
■ 시련을 딛고 희망을
2001년 8월 수도원장에 선출된 후 2013년 4월 사임하기까지 이 아빠스는 왜관수도원 한국 진출 100주년,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 시복시성 추진과 같은 굵직한 과제들을 수행했다. 2007년 대화재로 수도생활 터전을 잃는 아픔 속에서도 한국교회 신자들의 기도와 후원 속에 새 성당을 봉헌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2002년 1월, 폐원 위기에 처한 미국 뉴저지주 뉴튼수도원을 인수해 성장 기틀을 놓았다. 현재 뉴튼수도원은 영적 쉼터 역할을 하며 내년 1월 봉헌회 정식 설립도 준비 중에 있다.
인수 당시 본지와 인터뷰에서 이 아빠스는 “참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왜관수도원이 독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제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것에 회원 모두가 공감했다”고 말했다.
2009년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아 영성과 전례, 역사, 건축이라는 네 분야로 나눠 다양한 사업을 준비했다. 새 성당 봉헌식에 이어 역사 심포지엄, 안셀름 그린 신부 초청 강연회, 100주년 기념전시관 개막, 음악회 등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 아빠스는 오늘날 수도원의 역할에 대해서 말했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발전된 사회입니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돈이 최상의 가치인양 평가의 기준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수도원은 영적으로 메말라있는 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쉼터가 되었으면 합니다.”
2001년 9월 11일 아빠스 축복식에서 이형우 아빠스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목장을 받고 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한국 교부학연구회 초석 닦아
2002년 한국 교부학연구회 설립 때부터 회장을 맡아 11년 넘게 교부들의 영성과 삶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설립 이듬해부터 해마다 논문발표 등 학술발표회를 열어왔는데, 내년 2월이면 23차 정기모임을 갖는다. 회원들은 교부학연구회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데는 이 아빠스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 총장, 한국 교부학연구회 총무)는 “큰 형님처럼 품어주며 힘든 일은 도맡아 하셨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그것이 아빠스만의 카리스마”라고 전했다.
노 신부는 “교부학연구회가 시작될 때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든든한 지지와 지원을 보내주셨다”면서 “회원들뿐 아니라 미래 세대인 신학생, 개신교 신자들에게까지 교부학 연구의 장을 넓히셨다”고 말했다. 또 “현재 ‘대중판 교부문헌 총서’까지 준비 중인데, 이 아빠스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이러한 성과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부학연구회의 가장 큰 결실로 2008년 출간을 시작으로 현재 20권째 나온 「교부들의 성경주해」를 들 수 있다. 이뿐 아니라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 「교부문헌 용례집」 「내가 사랑한 교부들」 등을 통해서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아빠스는 국내에 교부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문헌을 번역해 온 교부학 1세대다. 1984년 로마 성 아우구스티노대학에서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이전의 규칙서들에 나오는 형제적 교정’에 대한 논문으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가톨릭대 대신학원에서 교부학 강의를 하며 영성적 가르침을 전하기도 했다.
■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맏아들
1946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아빠스는 첫돌이 되기 전 남한으로 내려왔다. 어머니 김봉덕(아가다·89·대구대교구 신동본당) 여사는 자신이 수도자가 되지 못한 대신 뱃속 아기를 수도자로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
하지만 장남으로서 가정 형편을 걱정하며 수도원에 가는 것을 고민하는 아빠스에게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라”며 격려했다.
아빠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이석진 신부(왜관수도원 본원장)는 “세상에서 많은 수고와 고통을 내려놓으시고 기도와 묵상 중에 주님 품안에 가셨으리라 믿으며 슬픔 중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 드린다”면서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아빠스님께서는 참으로 복된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애도했다.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녀원의 한 수도자는 “수녀원에 계시는 동안 매일 저녁기도를 함께 하셨다. 늘 충실히 영적 생활을 하셨다”고 말했다.
1977년 7월 11일 사제서품식 후 함께 한 이동호 아빠스, 서정길 대주교, 이형우 아빠스, 진토마스 신부(왼쪽부터).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지난해 2월 왜관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한국교부학연구회 제21차 정기모임 참가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