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전인가? 내가 담임을 맡고 있던 경주고등학교 3학년 7반에 노지현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가정교육을 무난하게 받아 비교적 온화한 성격과 호기심, 창의성을 조금씩 갖춘 범생이었는데, 노지현은 당시 생물학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나와는 갑장으로 김천고 출신 사업가였다. 김천고는 경북의 전통적 명문으로 경주고와는 라이벌 관계에 있는 학교였다. 노지현의 아버지 노병휘씨는 동일ENG라는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를 한국과 베트남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기념으로 나를 베트남으로 초청을 했다. 베트남 여행은 초행이라 기분 좋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월초 서울대학교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날과 여행 날이 겹쳐서 부득이 그 여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9년 뒤...................
2012년 여름에 노지현과 그의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다. 예전의 약속을 지켜야 겠다고...........그렇게 떠나게된 예기치 않은 베트남 여행..........마침 한여름 무더위 속 3주 장거리 연수 뒤에 베트남여행이라, 그리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또 1주 연수, 연이어 제주도 가족 여행이라..........아무래도 무리수인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이 여행을 포기할 수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그 동안 나는 여전히 베트남에 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2012.7.30일 노지현과 나는 새벽에 경주를 출발하여 김해공항으로 향한다. 중간에 길이 막히는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간신히 공항에 들어선다.
공항에서 모든 수속을 마치고 최종 비행기 탑승 지점으로 왔다. 이제 베트남에 가게 되는가? 양산JC부터 막혔던 도로를 우리는 나의 폭풍 질주와 지현이의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탐색으로, 남양산에서 빠져 나와 낙동강을 넘어 낙동강 동편으로 길을 달려 사상까지 가서 다시 낙동강을 넘어 좁은 길로 김해공항으로 들었다. 지현이가 "우리는 베트남하고 인연이 없는가요?" 하더니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결국 가게 된다.
우리가 타고 갈 Vietnam Airlines.
베트남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다. 북쪽은 중국과, 서쪽은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접하고 동쪽은 바다를 면하고 있다. 베트남의 동쪽 해안은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면서 통킹만, 남중국해, 보르네오해, 시암만과 접해있고, 남북으로 긴 해안선은 무려 3,444Km에 달한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외세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베트남은 1954년까지 정치적 혼란기를 맞게 된다. 1954년에는 북베트남의 공산당정권이 북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세력을 완전히 패퇴시킨 후,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남과 북으로의 분단은 남과 북 사이의 20여 년에 걸친 긴 전쟁을 가져왔다.
통일 전쟁 중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1961년 참전하였으며 한국과 필리핀, 타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지원군을 파병하였으나, 구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베트남이 1975년 사이공(현재 호치민)을 함락시킴에 따라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공산화를 이룬 나라이다. 한국과는 1992년에, 미국과는 1995년에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행정구역은 하노이, 호치민, 다낭, 하이퐁, 껀터의 5개 직할시(centrally administered city)와 59개의 성(省)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행기 내부
베트남 호치민에 도착하자 동일엔지니어링 지사장인 송영주 사장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그래도 아들의 스승이라고 노지현의 아버지 노병휘 사장님은 나름대로는 최고의 서비스를 생각하셨는 모양이다. 베트남 지사장님이 직접 나오시다니..............여행 계획은 미리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다. 관광 코스에서 먹거리까지...........거기다가 베트남에 오래 거주하신 송사장님의 베트남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해박한 설명까지 곁들여 가면서...............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바로 구찌터널로 간다.
구찌터널 입구.
구찌터널이 만들어진 것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였던 베트남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처음이었다.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상대적으로 모든것이 열세인 베트남군은 미군과의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구찌터널을 이용하였다. 구찌는 호치민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미군을 상대로 적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 전술을 펼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구찌터널의 길이는 250km에 이르고 깊이는 지하 3m~8m까지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는 여러 층과 방들이 만들어져 있고 4층구조로 넓게 만들어진 공간도 있다. 터널의 통로는 세로 약 80cm 가로 50cm로 좁고 협소하여 이동하기에 불편하지만 체구가 작은 베트남인들에게는 견딜만한 공간이었으며, 덩치가 큰 미군들은 접근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터널의 입구는 나뭇잎 등으로 정교하게 위장이 되어있어 외부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으며 터널의 규모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터널 위에 미군기지가 있었으나 미군들은 터널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나중에 터널이 발견되어 이를 소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입구 몇 곳을 찾아 파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베트남의 인기 관광지로 개발되어있다.
위 지도는 터널 내부 구조이다.
미군이 투하한 폭탄의 불발탄들이다. 얼마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던지 베트남 전국에 저런 불발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저 포탄 껍질을 이용해 생필품을 만들 정도였다.
베트남전쟁은 30년전쟁이라고도 부르며 2차 전쟁으로 구분한다. 1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46~1956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프랑스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하며, 2차 전쟁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60~197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국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2차에 일어난 전쟁을 통틀어 베트남전쟁 또는 30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들어와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며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불리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베트남 내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프랑스세력을 몰아내고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도차이나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ochina)이 1930년에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베트남 독립연맹인 베트민(Viet Minh)을 결정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8월혁명'이라고 부른다. 8월혁명은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운동이지만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구성원이 결집하여 일어난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베트남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각하였고 하노이, 후에, 사이공(현 호치민) 등에서 성공적인 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해 9월 2일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였다. 베트민은 맑스 사상을 공유한 공산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저항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터널내부, 앞서 가던 네델란드인 부인은 덩치가 커서 굴속에서 애를 먹는다.
1946년 말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 무력 충돌을 제1차 베트남 전쟁(또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9년간 지속됐다. 1950년대부터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프랑스는 베트민을 압도하지 못했다. 베트민은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실질적인 자신의 토지를 받은 농민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고 그로 인해 병력을 동원하는 막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런 토지라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전쟁참여와 게릴라전을 프랑스군은 감당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군사작전에서도 실패를 하였는데 라오스 국경 부근 디엔비엔푸에 집결하여 이곳으로 베트남군을 유인해 한번에 괴멸시키려는 계획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한곳에 집결된 좋은 목표물이 되고 말았다. 뿐만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제네바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국제회담(제네바극동평화회의)이 성사됨에 따라 프랑스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베트민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야자 열매를 깨서 속의 액즙을 먹어 본다. 우리나라 음료수 2%와 비슷할 정도로 당도가 높았다.
베트남은 전쟁이후, 중국과 소련의 공산세력의 지지를 받고 시작한 북베트남과,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응오 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남베트남으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제2막은 남베트남에서 노동당을 중심으로 응오 딘 디엠 정권에 대항하고, 베트남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제네바협정에서 약속한 통일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노동당 조직이 축소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남베트남에서는 메콩강 하류 델타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 점차 확산되었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 NLF)이 결성되었다. 디엠 정권(사이공 정부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때까지 북베트남에서는 본격 개입하지 않았다.
그 뒤 1963년 사이공에서의 불교도들의 시위와 분신자살--미국의 디엠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를 검토--11월 군사쿠데타로 디엠대통령 암살--새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NLF에 대해 중립적인 정책 취함--미국은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을 심각하게 우려--남베트남 혁명세력의 공세가 점점 강해짐--으로 상황이 전개되자, 결국 미국은 베트남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드디어 전면으로 나선다. 호치민 트레일 공격, 통킹만 사건 발생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1961년 캐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결정으로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자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간주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여 전투력을 상실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북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남베트남군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위해 싸우지 않고 오히려 북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별식으로 제공된 고구마 비슷한 식품. 고구마보단 맛이 덜하고 당도도 덜했다. 하지만 어려울 때에는 충분히 구황작물이 될 수 있는 식품이었다.
베트남전쟁에 1964년 9월 11일 대한민국은은 비전투요원 이동외과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였으며 1965년 3월 10일 공병대가 중심이 된 비둘기부대가 파월되었다. 1965년 10월 맹호부대(수도기계화사단)와 해군 청룡부대(해병대)가 파견되었으며 1966년 백마부대(제9사단) 등 약 30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전쟁에 파견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군사 및 경제개발과 관련한 조치였으며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1968년 들어 미국 내에서 반전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1968년 11월에 있은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하자 새로 당선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이듬해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17도 이남지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북베트남과 대치 국면을 유지해 나갔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자 미국은 B-52폭격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1972년 여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평화교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3년 1월에 있은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하고, 미군 전쟁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북베트남에 요구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닉슨 체제의 정통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이에 따라 사이공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초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였고, 마침내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동 반 민(Dong Van Minh) 대통령이 항복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55만 3천 명의 군 병력을 파견했고, 그 중 5만 8천 명이 사망했다. 남베트남 군은 25만 명 이상 사망했고 NLF 군도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백만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병력을 파견한 대한민국은 약 5000명이 전사하였고 1만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백만 이상이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라오스에는 파텟 라오(Pathet Lao)라는 공산집단이 생겨났고, 캄보디아도 1960년대 공산주의자들이 확대되는 현상이 발생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는 공산주의가 확산되었다.
저녁 식사는 정통 베트남 음식점으로 갔다. 나는 몰랐는데 베트남에 와서 보니 베트남이 음식으로 유명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른 바 '미각의 나라' 라고 했다.
여러가지 베트남 음식을 선택하여 먹어보았는데.................고이꾸온과 짜조가 보인다. 월남쌈으로 알려진 고이 꾸온은 쌀로 만든 얇은 라이스 페이퍼인 반 짱을 뜨거운 물에 적셔 닭고기, 쇠고기, 새우, 채소 등을 올려서 동그랗게 만 뒤, 생선 액젖인 느억 맘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이다. 재료를 싼 뒤 쪄 먹는 것은 반 꾸언, 고이 꾸온을 기름에 튀긴 것은 짜 조라고 한다.
우리나라 박상 같은 둥근 밑받침에 해물과 야채 등을 요리한 것들을 얹어서 같이 먹는다. 맛이 별미이다.
베트남의 음식은 태국, 중국 음식과 함께 아시아 3대 음식으로 꼽힌다. 거의 모든 음식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 덕분에, 베트남의 요리는 천 년 이상 계속된 문화만큼이나 전통 있고 다양하게 발달했다. 신선한 재료의 선명한 색 대비와 풍부한 식감, 다양한 향신료로 깊은 맛을 내는 베트남 음식은 건강에도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1. 쌀을 뜻하는 껌 요리..........(여기서는 쇠고기, 닭고기, 새우 등을 이용하는 덮밥 형식의 음식과 볶음밥 등이 많다. 맛과 색깔, 글루텐 단백질의 함량, 질감과 향기가 다른 쌀의 종류만도 열 가지가 넘게 있다. 베트남에서 쌀은 생명의 상징으로 어떤 식사에도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로 여겨지며, 만드는 음식에 따라 종류가 다른 쌀을 사용한다.),
2. 국수요리인 퍼(하노이에서 만들어져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즐겨 먹었으나, 지금은 전국 어디서든 쉽게 먹을 수 있다. 퍼의 요리법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숙주와 고수, 라임, 고추 등을 곁들여 먹으며, 쇠고기, 닭고기, 해물 등 고명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가 있는데 우리는 흔히 월남 쌀국수라고 한다.
3. 위에서 언급한 고이 꾸온 등이 있다.
쇠고기 볶음이다.
이 것이 고이 꾸온이다. 익히지 않은 상추, 민트(허브) 등의 생야채와 익힌 새우와 다진 고기등을 넣고 라이스페이퍼로 싸서 먹는 베트남 음식이다. 월남쌈이라고도 하는데, 라이스페이퍼에 넣는 야채와 고기는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바꾸어 쌈을 쌀 수 있으며 이 경우 각기 취향에 따라 색다른 요리가 될 수 있다. 라이스페이퍼를 이용한 요리는 고이꾸온 이외에 짜조(Cha Gio)가 있는데 짜조와 고이꾸온의 차이점은 짜조가 라이스페이퍼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 쌈을 싼후 기름에 튀겨내는 반면 고이꾸온은 튀기지 않고 생으로 싱싱하게 먹는다는 점이 다르다. 쌈을 싼후 땅콩소스, 생선소스에 찍어 먹으면 더욱 감칠 맛이 나며 베트남에서도 고급 음식에 속해 가격이 비싼 편이다.
튀김국수는 그 맛이 특이하다. 물론 내가 싫어하는 고수 잎들은 제거했다. 고수 잎은 고약한 빈대 냄새가 난다. 그러나 몇번 먹어보면 없으면 안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절대 못 먹을 것 같은데..............
튀김 국수
야채 이름은 모르겠는데 아주 맛이 있다.
이 외에도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으로,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달랏 등의 고원 지대에 커피 농장이 세워져 질 좋고 맛이 뛰어난 커피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커피 까페는 진하고 구수한 맛이 특징으로, 보통 양철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든 필터를 잔 위에 놓고 바로 걸러서 마신다. 밀크 커피는 까페 쓰어 농이라고 하는데 우유 대신 잔에 연유를 넣어 달콤하게 마신다. 까페와 함께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차로는 느억 짜가 있으며, 맛이 진해서 주로 얼음을 넣어 연하게 마신다.
베트남에서 유명한 신 투어(The Sinh Tour). 조그만 여행사로 시작해 지금은 베트남에서는 가장 유명한 자유여행사이다. 우리는 내일 메콩 델타 지역을 둘러보기 위해 이 곳을 이용한다. 미리 티켓팅을 해야지 아니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다.
우리가 묵게되는 봉센호텔. 최고급은 아니지만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위치해 편안한 점이 많아 잡아 놓은 것이라고 했다. 역시 위치나 상가지역이 중심지에 있어 2일동안 편안하게 지낸다.
봉센호텔 입구
이제 룸으로 들어왔다. 지현이 옷을 벗지 않는 걸 보지 한잔 걸치러 나갈 모양이다.
유명한 호치민 야시장.
200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대 베트남 수출액은 804억 달러로 주종목은 기계장비, 석유제품, 비료 등이며, 수입액은 629억 달러로 주종목은 원유, 수산물, 쌀, 커피 등이다. 그리고 삼성, 코오롱, 쌍용, SK 등 150 여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3만 7000여명의 한국민 교민과 5만여 명의 체류자가 있다.
북한과의 교역은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수출과 수입이 모두 100억 달러가 넘지 않은 수준으로.............
야시장의 밤은 늘 아름답다.
불타는 새우를 시켜본다. 맛보다 그저 호기심이다.
근데 이 민물새우는 대단한 것이다. 맛도 좋은 뿐만 아니라 가격도 아주 비싼 귀한 것이다.
술에 취해 호텔 근처로 돌아와 빠에서 한잔 더 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 나리는 사이공이라! 술 맛은 그만이다.
다음날 아침의 신투어는 복잡하다. 전세계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기서 베트남 전역으로 투어를 나간다.
우리도 버스를 타고 메콩델타로 온다. 배를 타게 되는 나루터에 도착해서 잠시 기다린다.
이제 배를 타고 메콩강 관광 시작
메콩강은 길이 4,020km, 유역면적은 80만km2이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강이며 세계적으로도 손 꼽히는 큰 강이다. 처음에는 중국의 칭하이성, 티베트 지방의 여러 강이 창두[昌都] 부근에서 합류하여 란창강[瀾滄江]이 되고 윈난성[雲南省]을 남류하여 라오스와의 국경에 도달한다. 라오스에서는 1,500km에 걸쳐 흐르는데 하류는 폭이 좁아지고 깊어지다가 라오스와 캄보디아와의 국경에서 콩 폭포를 이룬다.
메콩강은 동남 아시아의 다른 강들과 마찬가지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건기인 3∼5월에는 최저 수위를 나타내고, 남서 계절풍이 불어오는 우기에는 수량이 증가한다. 특히 우기에는 통레사프강이 역류하여 그 상류에 있는 통레사프호(湖)로 흘러들어가, 호수의 면적이 건기의 약 3배로 불어나 범람한다.
인도차이나 교통 ·생활상의 대동맥으로, 특히 베트남에서는 종횡으로 수로가 건설되어 없어서는 안 될 요로(要路)이다. 메콩강이 반출하는 이토(泥土)는 연간 10억m3 나 된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하구부의 삼각주가 현저하게 커지고 타이만(灣)이 얕아져 현재는 어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잠시 배에 내려 밀림으로 들어간다.
월남 음식 고이 꾸온을 만드는 라이스페이퍼 공장에 들어선다. 라이스페이퍼를 만들어 말리고 있다.
야자열매가 주렁주렁
점심에 나온 엘리펀트피쉬. 이른 바 꼬끼리생선이다.
같이 동석한 서울 아가씨들이 찍은 사진을 잠시 올려본다. 색채가 그렇다. 이때 우리 모습이 이랬는 모양이다.
이 아가씨들이다. 원선희, 원미소.............사촌간인 두 아가씨는 서울에서 왔다는 데 여행사 통하지 않고 독립여행을 하고 있어 요새 젊은 친구들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우리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다시 배를 타고...............
이런 밀림 속 수로를 지나................
서서히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방문한 어느 농장..............
여러가지를 구경시킨 뒤에 말이 끄는 마차를 타라고 한다.
민속음악도 들려주고..............
이제 영화에서나 봤던 밀림 속 수로를 빠져 나온다.
4명이 타는 보트에 서울 아가씨들이 우리와 파트너가 되었는데...............
이게 바로 월남이다. 나도 오기 전에 이런 것을 생각했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처럼...............
밀림 속 수로는 길었다.
드디어 수로 탈출................
밤 8시에 신투어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아가씨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석식은 지현의 선택대로 중국음식점에서의 샤브샤브 요리이다.
서로 다른 맛의 육수가 둘로 나뉘어져 있고 자기의 입맛대로 식재료들은 넣어서 익혀 먹는다. 어찌보면 굉장히 편한 요리이다.
맛이 있다. 다양한 식재료가 있어 맛이 다양하다. 나는 오른쪽의 매운 맛이 더 좋았다.
나중에는 쌀국수까지.........그러나 이미 배는 부르다.
랍스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념 촬영, 색깔이 이상한 이 컷은 원미소 아가씨의 카메라이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을 나서면서................이제 아가씨들과는 헤어진다. 그녀들도 우리가 가는 하노이 방면으로 가려고 했지만 비행기 티켓과 숙박 티켓이 동이나 실패했다고 하며 아쉬워했다.
저 뒤에 위로 보이는 것이 호치민 최고의 고층 빌딩이다. 높이가 얼마던가?
지현과 그냥 잘 수는 없다. 오늘이 호치민 마지막 밤이 아닌가? 우리는 밤에 다시 나와 지중해식 주점에 들어가 술을 마신다. 베트남인들은 비싸서 잘 들어오지 못하는 곳인데 우리한테는 완전히 껌 값이다. 막 먹어 제낀다.
이런 저런 지중해식 음식이 마구 나온다. 그래 봐야 우리 돈으로 전부 2만원 정도................ㅋㅋ
무엇보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서빙하는 아가씨.........너무 머리가 좋아 우리를 아주 섬세하게 살펴 서비스가 아주 좋았다.
아침의 사이공, 아니 호치민 거리.
송사장님은 우리를 호치민 최고의 퍼 집에 데려간다. 퍼.........쌀국수를 말하는 것이다. 퍼 호아(PHO HOA) 이다.
베트남에서는 이 국수를 포(pho:퍼)라고 부르며 주로 아침에 먹는다. 쌀가루를 불려서 약하게 달구어진 판 위에 빈대떡처럼 얇게 펴 말리다가 약간 마르면 떼어내 칼국수보다 가늘게 썬다. 숙주·칠리고추·고수·라임·양파·고기 등이 들어가 독특한 향과 맛이 나며, 소화가 잘 되고 영양성분이 고르게 들어 있는 데다가 칼로리가 적어 건강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과 요리재료에 따라 조리법이 다양하며 쌀국수에 쇠고기를 얹으면 포보, 닭고기를 얹으면 포가라고 한다.
원래 베트남에서는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나, 1880년 중반 베트남 북부 하노이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쇠고기 요리법을 전해 주면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쇠고기와 민속음식인 쌀국수를 함께 먹게 되었다. 포라는 말도 프랑스군의 식사를 뜻하는 ‘포 토 푀(pot au feu:불처럼 뜨거운 그릇)’의 푀(feu)가 어원이라고 한다. 1950년대 이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남쪽으로 내려간 하노이 사람들이 호치민(옛 사이공)에서 생계 수단으로 쌀국수에 쇠고기 요리법을 더해 팔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지현은 포 가를 아주 맛있게 먹는데 국수를 좋아하는 나는 국물이 아직 입에 맞지 않는다. 여러가지 향신료에 익숙치 않은 것이다.
나는 퍼 보를 먹고 지현은 퍼 가를 먹는다.
기본으로 얹혀 있는 식탁의 간식들
식사 후 바로 호치민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전쟁박물관을 방문한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베트남전쟁 당시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남에 가했던 잔혹한 행위를 중심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개관 당시에는 한국군과 관련된 자료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수교 이후 한국군 관련 자료는 대부분 제거되고, 현재는 전쟁 중 5만 명의 한국군이 참전했다는 기록과 부산을 떠나 베트남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는 모습 등 일부 자료만이 전시되고 있다. 하긴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못된 짓들을 많이 하기도 했다.
7개의 테마로 나누어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 자료에는 10년간 계속된 전쟁 기간에 미군이 쏟아 부은 폭탄이 785만 톤, 화학약품무기가 75만 리터라는 기록이 보이고, 1968년 3월 베트남 중부의 미라이 지방에서는 하루에 504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떼죽음당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 밖에 베트남 어린이들이 그린 전쟁 관련 그림과 감옥, 포로수용소 등 참혹한 장면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 지도. 어찌보면 너무나 기형적인 모습이다. 어떻게 저런 길다란 나라가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의 국가가 되었을까?
전쟁의 참혹함을 전하는 사진
포탄이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전쟁박물관 내부
대통령궁이지만 시간이 없어 차안에서 쳐다보며 지나간다.
재래식 시장에서 쇼핑을 하기 위해서 들런다.
시끌벅적한 재래식 시장. 하긴 요긴하게 살 것들이 있다. 월남고추와 후추, 커피이다. 베트남은 후추와 커피는 세계적인 산지이다.
시장 안 음식점. 우리도 한잔 한다.
잡화점 지역
시장에서 쇼핑을 한 후에 바로 공항에 나가 한국에서 오시는 지현의 아버지 노병휘 사장님을 만난다. 그리고 점심은 한식집인 금도에서 먹는다.
여러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또 헤어져야 한다. 노사장님은 같이 오신 현대중공업 간부(경주 현곡사람으로 우리와 갑장이다)와 비지니스 관계로 가야 하고 우리는 바로 하이퐁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호치민 비행장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하이퐁으로 날라간다. 베트남에서는 남과 북으로 끝과 끝이다.
비행기를 타고 하이퐁으로 간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 쉰다. 나보다 지현이 더 피곤해 한다. 오늘 저녁에 하이퐁에 도착하여 내일 바로 하롱베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노이를 관광하고 귀향할 것이다. 곧 다시 만나기를................
첫댓글 덕분에 여행 잘 했습니다 ㅎㅎㅎㅎㅎ
눈으로 여행 다한 기분 ,,,,, 감사
멋진여행을 하셔군요.
좋은정보가 되겠읍니다.잘보고 갑니다.
구찌터널에서 흰 옷 입고 좁은터널 통과하다 어깨가 다서 옷을 다버린 기억이 납니다. 넘 더워서 힘들기고 했고~
옛 생각에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