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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부산 출생
1965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 <내란> 당선
시집 <<인간의 악기>,<항해일지 외 다수
<<현대시>>, <<신년대>> 동인
제2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5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장
봄편지 1신
- 이화은
목 쉰 까치 소리
동봉합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잘 펴 말린다고 말렸지만
제 젖은 손끝 더러더러
묻어 있을지 몰라 염려됩니다
마음 자락 젖기 전 그대
밝은 눈에 잘 털어내시길
어젯밤엔 제가 당신께
그 여자로 불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자 아득한 그
3인칭의 여자 갑자기
우리의 촌수가 궁금해졌습니다
꿈은 다 그런 거라지만
마음의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겠습니다
문 하나 열면 바로 거기가
바람의 길목이라 이 봄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꿈은 다 그런 거라지만
*이화은
시와시학 등단
시집 <절정을 복사하다>
제9회시와시학상
삼월의 눈
- 백우선
봄눈 펄펄 날려
아, 물속이구나
연어 떼 뿌옇게 산란하듯
꽃샘 잎샘 바람결 휘감으며
겨울이 내쏟는
꽃의 알, 잎의 알, 싹의 알
봄, 봄, 봄 ― 봄을 막 풀어놓는구나
홀쭉해진 배로 뜰
어미 하늘물고기 떼의 등빛
삼월의 하늘은 더 푸르겠구나
*백우선
1981년 《현대시학》/1995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시집 <춤추는 시> / <길에 핀 꽃> <봄비는 옆으로 내린다>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각설이 3
- 이영유
학교로 가는 길이 보였다
하루저녁에 詩를 오십 편씩 만드는
시인과 커피를 마신다
모두들 측은하였다 삼월 진눈깨비가
진득진득 내렸고
갈 길이 참으로 많았다
학교로 가는 길이 보였다
말았다
개천 건너 불쌍한 학교가
진득진득 서 있고
거기를 가면 학교 구내 다방에 쭈그려
앉아 하루에 詩를
오십 편씩 읽는 제자들을 만난다
만나는 것은 모두 만남을 당하는 이나 만나는
이나 모두를 측은하게 만들었다
개천이 점점 넓어져 江이 되었고
측은한 제자들은 뱃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있었다
학교로 가는 길이 보이고
불쌍한 제자들이 보이고
불쌍한 개천이 보이고
*이영유
1950 서울 출생
건국대 국문학과 졸업
1982 <<우리세대의 문학>>에 시 <유혹이냐 복음이냐>를 발표하며 등단
<<한글세대 시인과 시>> 동인
그녀
- 권현형
할 줄 아는 일이란 그뿐인지
늘 쪼그리고 앉아 쑥을 다듬는다
아파트 앞 사거리 길모퉁이 여자
손바닥만하게 좌판 벌여 오글조글
봄나물을 팔고 있는 아낙숲에서
고개를 들어 본 일이란 없는 것인지
신문지 위 쑥만 그저 다듬는다
아예 쑥을 팔 생각은 없다는 듯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은 받지도 않는다
쉰인지 칠순인지 알 수 없는 얼굴
쉰 같기도 하고 칠순 같기도 한 언제나
그 월남치마, 눈꽃 하얗게 내린 그
단발머리
투박한 손끝에서 실바람이 까불까불
미끄럼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봄볕이 새록새록 다듬어져
제 빛깔로
빛나는 것을
*권현형
1966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95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9 시집 <중독성 슬픔> 출간
수양산조
- 박재삼
궂은 일들은 다
물아래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 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떨리는 가장가지를
볕살 속에 내 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뇌어
강은 좋이 빛나네.
*박재삼
1933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1955년<현대문학>에 <섭리>,<정적>으로 추천 완료,문단에 데뷔
시집에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 <추억에서> <해와 달의 궤적>등
제7회 노산문학상, 제10회 한국문학작상 수상
검은머리 동백
- 송찬호
누가 검은머리 동백을 아시는지요
머리 우에 앉은뱅이 박새를
얹고 다니는 동백 말이지요
그 동백은 한번도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지요
거친 땅을 돌아다니며,
떨어져 뒹구는
노래가 되지 못한 새들을
그 자리에 올려놓는 거지요
이따금 파도가 밀려와
붉게 붉게 그를 때리고 가곤 하지요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빨갛게 멍들었는지
거울도 안 보고 살아가는 검은머리 동백
*작가 약력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등
동백, 그대 붉은 절망 앞에서
- 김금용
동백꽃 찾아 한 숨 안 쉬고 날아온 동박새,
봄은 산보다 바다가 먼저라고 일렀을까
사정없이 일어서는 봄은
파도 끝에 매달려온다고 일렀을까
속절없이 무릎꿇는 바다 앞에서
목숨 떨어뜨리는 붉은 동백꽃의 절망,
차라리 바다에 죽어
고해성사 하고픈 한 가닥 바램이 남았을까,
오동도 산자락 너머 향일암 높은 절벽까지
까마득히 길을 막는 동백향 짙은 그림자,
어둠 벗겨내는 첫 새벽 간절한 기도 아래
봄맞이 해돋이를 바라보는 사람들 곁에
잔인하게 모가지채 떨어지는
동백, 그대 붉은 절망이여
*작가약력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중등학교 교사, 덴마크와
중국 주재 한글학교 교사,
한국시인협회원
시집:『광화문 쟈콥』1998년
씀바귀 무덤
- 도종환
산새 들새 울고 넘는 고개 아래 냉이꽃 피고
당신의 무덤 위엔 씀바귀 먼저 솟네
앞산 뒷산 진달래 속살처럼 고운데
당신이 무덤위엔 쑥잎 한 폭 솟아나네
살구꽃 복사꽃 눈물처럼 피어 번져도
한 번 간 당신은 영영 오지 아니하고
봄 하늘 빈 노을 혼자 곱다 사위는 동안
쓰디 쓴 것들만 소복소복 피워올리네.
*작가약력
1954년 충북 청주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제 1집에 <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접시꽃 당신><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등
1997년에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목련
- 정일근
나비 날개 같은 부드러운 오수에 빠진 봄날 오후
창문 아래 사월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누군가 사랑의 전화 버턴을 꼭꼭 누루고 있다.
뜨거운 목소리 앚혀진 첫사랑의 귓불을 간지럽히고
화사한 성문이 잠든 몸을 깨워 열꽃의 뜸을 놓는다.
누구일까. 저렇게 더운 사랑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내려다 보니 없다 아무도 없는 봄날 오후를 배경으로
담장안의 목련만이 저홀로 터지고 있다
작가약력
1958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4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발표
1984 <<월간문학>>에 시조 <비오는 날의 변주> 발표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냉이꽃
- 이근배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작가약력
1940 충남 당진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0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발간
1961 <<경향신문>>에 시조 <묘비명>, <<서울신문>>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1982 가람시조문학상 수상
재능대학 교수
봄비 속을 걷다
- 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봄 소동(騷動)
- 전영경
삼월은 가고 사월은 돌아와 있어도
모두다 남들은 소위 대학교수가 되어 꼬까옷에
과자 부스래기를 사들고 모두다
자랑 많은 나라에 태어나서
산으로 바다로 금의환향을 하는데
걸레 쪼각 같은 얼굴이나마 갖추고 돌아가야 하는
고향도 집도 방향도 없이
오늘도 남대문 막바지에서
또다시 바지 저고리가 되어 보는 것은 배가 아픈 까닭이 아니라 또 다시
봄은 돌아와 꽃은 피어도
뒤 받쳐주는 힘 없고
딱지 없고 주변머리가 없기 때문에
소위 대학교수도 꼬까옷도
과자 부스래기 하나 몸에 지니지 못하고
쓸개빠진 사나이들 틈에 끼어
간간이 마른 손이나마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보내야 하는
남대문 막바지에서
우리 모두다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 모두다 밑천을 털고 보면 다 똑같은
책상 물림이올시다
삼월은 가고 사월은 돌아와 있어도
봄을 싣고 산으로 바다로
아스라히 멀어만 가는 기적소리
못다 울 설움에 목이 메인 기적소리를
뒤로 힘 없이
맥없이 내딛힌 발끝에 채이는 것은
어머니 돈도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자유도 아무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돌멩이뿐이올시다
작가약력
전 영 경 (1930- ) 함남 북청 출생.
연희전문 국문과 졸업.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선사시대(先史時代)」가 당선되어 등단. 수도여사대 교수, 동아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려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작가약력
이 호 우 (1912-1970) 호는 이호우(爾豪愚). 경북 청도 출생.
경성 제일고보 졸업. 1940년 『문장』에 「달밤」이 추천되어 등단.
『죽순(竹筍)』 동인으로 시조 창작운동을 전개. 영남시조문학회를 창립하여 동인지 『낙강(洛江)』을 발행.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이호우시조집(爾豪愚時調集)』 등
진달래
- 신경림
얼마나 장한 일이냐
꽃과 잎 꺾이면 뿌리를 그만큼 깊이 박고
가지째 잘리면 아예
땅속으로 파고 들어 흙과 돌을 비집고
더 멀리 더 깊이 뿌리 뻗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피해서 꺾이지 않고
숨어서 잘리지 않으면서
바위너설에 외진 벼랑에
새빨간 꽃으로 피어나는 일이
작가약력
1933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6년<문학예술>에서 '갈대' '묘비'등이 추천되어 시단에 나옴
시집으로 <새제> <가난한 사랑노래> <남한강>외 다수
제1회 만해문학상.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제2회 이산문학상. 제8회 단제문학상 수상.
이른 봄날 아침에
- 정은희
이 봄에
아프지 않은 것 있을까
아직 살아 있는 것 중에
숨가쁘지 않은 것 있을까
눈을 뜨고도
나는 아직 보지 못하는
그 어둠의 맑은 水液
아픔을 삭이며
외면했던 꽃잎이 돌아 오고,
빛을 향하여
땅을 향하여
제각기 무언가를 향하여
기울어지는 生命,
물결처럼 돋아나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새로 門을 연 하늘가
종일 몸살로 뒤채는 계절,
이른 봄날 아침에
마른 기침 소리로 깨어나는
길모퉁이 작은 풀들을 본다.
조심스레 일어나는
작은 아픔들을 본다.
작가약력
정은희 (1956-)
부산 출생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미래시>동인
시집 <쓸쓸한 곰팡이를 아십니까>
들에도 봄이
- 박라연
앞산 뒷산에서 울음으로
全生의 몸을 팔던 두견새 눈물
한올한올 진달래 되네
궁항의 물결 바라보다 바라보다 지친 진달래
사람물이 드는 돌이 되네
봄이 오면 사람도
물이 되고 꽃이 되고 새가 되네
작가약력
전남 보성 출생
방송통신대학 국어과 졸업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어과 졸업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가 당선되어 시단활동 시작
시집으로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새들어 사는 사람> 외 다수
봄
- 김용택
바람 없는 날
저문 산머리에서 산그늘 속을 날아오는
꽃잎을 보았네
희고 고운 몸짓으로
물에 닿으며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을 보았네
아아, 나는 인자 눈감고도 가는
환한 물이네
작가약력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에 작품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
시집 <섬진강><맑은날><누이야 누이야 날이 저문다><강 같은 세월>외
김수영 문학상 수상
진달래
- 홍정덕
신 김치
국물 다스려
국수를 말아 놓고
뛰노는
아들을 찾아
이 동산에
오르셨지
어머니
이마에 번지던
붉디 붉은
저녁
노을
작가약력
의정부 출생
<문학세계>시조부문 등단
한국문인협회 의정부지부 회원
봄 날
- 김 남 조
타던 불 다 사위고
새로이 불붙는 불살들을 보시려면
창을 여십시오
성인 같은 덕성으로
억만초목이 돋아남을 보시려면
창을 여십시오
창을 여십시오
굳은 마음 아지랑이로 푸는
참말로 사랑보다 더 좋은
자연을 만나실 거예요
오늘은
이름도 안 붙은
어린 봄날일 거예요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1944년 일본 후꾸오까 규슈 고녀 졸업
1947년 서울대학교 문예과 수료
1951년 서울대 사범대 국문과 졸업
시집으로 <나아드의 향유><나무와 바람>
<겨울바다><빛과 고요> 외 다수
제1회 자유문학가협회 문학상수상. 제2회 5월
문예상 수상 제7회 시인협회상 수상.서울시 문
학상 수상.
봄비
- 번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졸음 잔뜩 실은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아려- ㅁ풋이 나는, 지난 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난에 자리러지노나!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니!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봄
-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익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 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랭이고 싶은 놈은 아지랭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
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봄길에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시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직유로써(~ 같이) 성공한 흔하지 않은 시입니다. 시인의 꿈이 뭉게 뭉게 피어오르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수 있습니다. 우리 말의 숨결과 정서가 잘 스며서 독자에게 아름다운 상상을 펼쳐주리라 생각합니다
봄의 성적표
- 강석관
감색 바닷바람 머금은 출발신호에
서귀포가 분주하더니
하룻밤새 한라산이 정복 당했다는 소식이다
제일 먼저 목련의 화려함에 넋잃은
개나리가 정겹게 스타트라인을 밟는데
5 일 뒤 진달래가 뒤쫓으며
익숙하게 북상을 시작한다
다음은 벚꽃차례
개나리 출발 뒤 열흘만의 일
꽃구름으로 산정을 점령한다
온 산 온 들 덧씌우며
꽃들은 도미노처럼 북상을 거듭
저마다 깃발을 휘두른다
보름도 더 걸리는 장거리 경주지만
길은 언제나 화려하고 언제나 새로왔다
새벽마다 이슬 뿌리며
그리움을 한웅큼씩 쏟아낸
관악산 입구 라스트라인에는
서귀포에서 서울까지의
승전보가 걸려 있다
개나리 시속 1.27킬로미터
진달래 시속 1.35킬로미터
벚꽃 시속 1.20킬로미터
꽃들은 해마다 경주를 벌이지만
성적표의 북상기록은 해마다 그대로다
*강석관
1980 시문학에 '백자',농무',시,추천 문단데뷔
윤동주문학상 운영위원
한국사보기자협회 회장
한국청년문학상
[시집] 겨울주막 ,작은우주
[산문집] 겨울바다에서 잠자는 여자
[역 서] 테레사 수녀, 을지출판사
라이락
- 정두리
가지마다 숨겨진
작은 향기 주머니
이름 석 자 뒤에도
묻어나는 냄새
향기로만
나무가 되려는 나무
소올솔
작은 주머니가
올을 풀어서
봄 하늘을
향긋하니 덮어 버렸다.
곡우-동동별사.4월령
- 조예린
동남풍 좋은 바람 서리 담가 둔
님 그린 눈물다이 맑은 淸明酒
더운 피 품에 안아 술병 다숩고
뒷산 연한 죽순 뜯어 놓았네
산마다 산메나리
들엔 들메나리
흙고무신 채마밭엔 씨앗이 트고
곡우날 고마운 비 돌아오는데
하물며 그린 님도 정녕 오겠네
바라맞는 산마루엔 실아지랑이
아지랑이 뒷짐엔 짙오는 신록
님 그리는 믿음은 벌써 재 너머
꿈꾸는 사월 숲 넘쳐오는데,
동남풍 맑은 바람 좋은 청명주
대숲 연한 죽순 뜯어 놓았네
*조예린
시와시학 당선
시집 < 바보당신>(시와시학사)
보리암을 오르며
- 조유금
한지 위에 산수화를 그려놓은 듯이
남해의 푸른 물결 감싸안고
무한히 바라다 보이는 비경속에서
선승이 풀어놓은 산 안개를 타고
내게 다가온 빛 바랜 환영을 만났다.
산사계곡을 오르는 동안
한 발자국도 내 딛을 수 없이
바람이 산 안개를 데리고 능선을 내려가고
산 벚꽃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그저 뜬 구름 속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허공을 내딛으며
산 안개가 되었다.
세속의 방황과 번뇌도 사치스러운 타락이었음을
불당에 무릎꿇고
화두를 묻고 또 물으며.
작가약력
목포 출생
예술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문협.현대시협.예술세계 작가회
시집으로 <슬픔이 타는 축제><그대 노을 속으로>
매화가 필 무렵
- 복효근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핏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5년 「편운문학상」신인상 수상.
1997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수상.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1993년)
『버마재비 사랑』(1996년)
『새에 대한 반성문』(2000년)
현재 : 남원중학교 교사
만취
- 최호일
봄 산을 바라보니 뽕 맞은듯
정신이 몽롱하다......
정작 나를 취하게 하는 건
시간이었구나
그 시간 위에 내리는
푸른 기억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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