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사랑꾼, 푸른 눈의 사나이 브라이언 배리
사랑에 빠지면 오로지 하나만 보인다고 한다.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단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여기에 변산 풍경에 반해서 그만 부안 사랑에 푹 빠져버린 푸른 눈을 가진 이방인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양 청년, 변산에 홀딱 반하다
그 옛날 젊은 양코배기가 낯선 한국 땅에 왔다. 그것도 변산반도 시골 벽촌인 산내에 와서 한눈에 홀딱 반했더란다. 산과 들, 바다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고, 사람들 인심 또한 얼큰한 된장 뚝배기처럼 구수했다.
그는 봉사활동을 왔다가 40여 년 동안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안 부 씨”로 불리면서 변산반도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다. 그렇게 변산의 매력에 빠져 평생을 부안에 주저앉아 살다간 이가 바로 브라이언 배리다.
살래에 살아서 “큰 출세했고먼 그려”
브라이언 배리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미국 보스턴에 살던 그는 평화봉사단원에 지원하면서 한국에 오게 됐다. 그리고 1968년 전북 부안군 산내면 보건지소로 파견된다. 배리는 보건 요원 보조로 활동하며 결핵 관리, 예방접종, 모자보건, 가족계획 관련한 일을 맡았다.
그는 그렇게 2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변산반도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1년 만에 그리운 변산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보건지소에 근무하면서 지냈던 하숙집 주인 내외와 식구들은 아들이나 형제처럼 보듬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에도 하숙집 식구들이 여러 컷 등장한다. 변산의 수려한 자연과 가족처럼 대해주는 인심 좋은 사람들에 브라이언 배리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가족까지 생겼으니 큰 출세했고먼 그려.”
이방인의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
한국에 살면서 배리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빠져든다. 호남 우도 굿 꽹매기로 전국을 다니는가 하면, 도예와 한지공예도 배웠다. 또한 염색공예로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에 입선도 했다.
성철스님 법어집을 비롯해 여러 불교 서적을 번역했고, 특히 배리는 단청과 탱화를 조성하는 일에 몰두해 자신의 불화 작품을 국내의 사찰에 공양했다. 또한 태국의 와트 수타트 왕실 사원의 단청 문양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 불교와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문화의 날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변산 풍경을 따라가다
브라이언 배리에게는 미국에서 올 때, 형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야시카 카메라 한 대가 있었다. 어깨에 둘러메고, 산이며 들이며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찍고 다녔다. 변산의 자연 풍경과 길을 가다 만난 다양한 이웃들의 표정을 담았다. 농사일이나 바닷가에서 일하는 광경, 그리고 흥겨운 나들이 모습도 배리의 눈에는 무척 신기했으리라.
당시에는 귀했던 슬라이드 필름을 딱 한 통 찍었는데, 한국에서 현상하기가 어려워 미국에 있는 형님에게 보냈다. 그리고 40년이 넘도록 둘 다 까맣게 잊고 지냈다.
2012년 연말에 그 형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재에서 먼지 덮인 슬라이드 필름 한 통을 발견해서 현상했더니 한국에서 찍은 사진이더라는 소식이었다. 브라이언 배리는 데이터로 만든 사진 파일을 받아보고는 신이 나서 닷새 동안 잠을 설쳤다. 무심코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변산 풍광이 영화 필름처럼 되살아났다. 이제야 사진이 주인을 만난 것이다.
푸른 눈으로 본 변산의 표정
1960년대 당시 배리가 찍은 변산 사진은 부안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원마포 판타지 1968년 변산면 마포삼거리 풍경이다. 내소사와 격포 방면으로 통하는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이다. 배리는 격포 가는 길로 들어서 가다가 길 양쪽으로 벚꽃이 무성한 나무 그늘에 이르러 신작로에 다니는 사람들 모습을 담았다. 초가집 담장이 보이고 신작로를 지나는 소달구지가 한가롭다. 하늘은 벚꽃이 만개해 덮었고, 신작로에는 벚꽃 그림자가 피어 환상적이다. 오늘날 큰 도로가 뚫려 삭막한데 예전에 이런 멋진 마을이었다니,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논에서 먹는 점심 사진을 찍고는 배리도 농부들과 같이 둘러앉아 막걸리 한 사발 잡아당기기도 했단다.
중계 멋쟁이와 개구쟁이 여자애들은 한껏 폼을 재며 멋 부리고 서 있고, 남자애들은 장난기가 가득하다. 책보 안에는 공책과 도시락이 들어 있었으며, 뛰어다니면 빈 도시락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이고 볼 때마다 웃기는구먼!” 배리의 털털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결핵 예방접종 예나 지금이나 주사는 무서웠다. 주사 맞고 신이 난 아이들은 이장 댁 마당에서 접종한 기념으로 사진까지 찍었다.
회갑 잔칫날 변산면 지서리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하숙집 할머니의 회갑 날이다. 하숙집 어머니가 배리에게 한복을 지어주었다. 뒤에서 병풍을 들어 올린 사람의 다리만 덩그러니 나온 모습이 재밌다.
격포 어촌 닭이봉 중턱에서 본 격포 해안 마을 풍경이다. 바닷가 마을에 초가집들이 빼곡하다. 갑오징어를 잡는 그물을 해안 모래사장에 줄지어 널어놓았는데, 갑오징어 테를 말리고 있다. 사진 가운데 눈에 띄는 삼각 지붕 건물이 바로 수협이다. 오늘날 격포항과 비교해서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변함을 비유한 말)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배리도 이 사진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못 하게 변해부렀어. 말도 못혀!”
빨래하고 돌아가는 아낙네 푸른 보리와 샛노란 유채꽃, 갈색 초가지붕과 파란 하늘빛, 그 사이로 빨간 옷을 입은 아이를 업은 아낙이 빨래통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이다. 그야말로 한 폭의 전원풍경화다. 그런데 산은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은 민둥산이다. 그 시절 땔감으로 나무를 베는 바람에 벌거숭이 민둥산에 가슴이 아프다.
종암동 사람들은 신작로를 가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배리를 보고 “헬로가 왔어!”하고 외쳤단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길래 사진을 찍었다. 그냥 찍자니 심심하기도 해서 배리는 논에 내려가서 위로 올려다보며 찍었단다. ‘헬로’가 왔다며 소리친 할머니는 사진 오른쪽에 아이를 안고 있다.
포로가 된 친구는 사진이 꽤 별나다. 한 친구를 기둥에다 꽁꽁 묶어놓았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걸까. 사진 속 친구를 좋아하던 아가씨가 있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아가씨를 본체만체했더란다. 그래서 배리와 몇몇 친구들이 골려주려고 아가씨 집 앞에 있는 기둥에다 묶어두고는 아가씨에게 구해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전했단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배리가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후일담은 아무도 모른단다.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배리는 사진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겸염쩍어한다. “그때는 찍을 줄 몰라서 사진을 반은 감으로 찍었구먼.”
살래여, 살래야
브라이언 배리에게 40여 년 전 변산 사진은 그야말로 고향의 옛 모습이자 추억이었다. 그에게 부안은 한국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배리에게 있어 변산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어떻게 그토록 평생을 변산 사랑에 빠져 살 수 있었을까. 부안의 표정을 찍은 ‘살래여 살래야’ 사진 전시회에서 기자들 질문에 일흔을 넘긴 배리가 구수한 부안 사투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이유가 어딨간디. 그냥 확 땡겨 부렀어. 정말로 다시 오고 싶어 환장하겠는걸 어떡햐”
“그냥 확 땡겨서 한국에 눌러앉은 게 벌써 40년이여. 참 거시기 허지”
※ 브라이언 배리(1945년 ~ 2016년)
※ 참고문헌 - 부안문화원, <살래여 살래야>.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