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하려고… 퇴직 후 대비… 영업에 활용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4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점(占) ‘점(占)’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친숙하다. 흔히 ‘점을 본다’는 것은 역술을 지칭한다. 역술은 사주, 관상, 풍수지리, 육효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기원전 중국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진 역술은 오랜 세월을 거슬러온 동양의 전통 사상이기도 하다. 최근 유행하는 타로(taro)는 서양의 역술로 볼 수 있다. 14세기경부터 유럽에서 그림 카드로 점을 치면서 시작됐다.
S 보험회사에서 생활설계사로 근무하는 윤희은(가명·여·32)씨는 주말마다 타로점을 배우러 다닌다. 지난달 요리 수업을 들으려고 문화센터에 갔다가 ‘타로’ 강좌를 보고 그 자리에서 등록했다고 한다. 윤씨는 “마음이 답답할 때 친구들과 사주나 타로점을 본다”면서 “타로를 배워두면 나중에 투잡(two job)을 할 수도 있고, 보험 영업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같이 배우자”며 호기심을 보였지만 윤씨의 남편은 “당장 그만두라”고 말렸다고 한다. 윤씨는 “타로나 사주 보는 걸 아직도 미신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노하우가 쌓이면 충분히 사업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배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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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동의 I역술학원. 평일 오후에도 역술을 배우려는 중장년 '학생'들로 빈자리가 없다. /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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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로점을 보는 노인 / photo 조선일보 DB
역술인 전국에 40만명 넘어… 시장 규모도 수조원대 추정
최근 역술이 부가가치 높은 서비스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 역술인은 ‘예언자’에서 ‘조언자’로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한국 타로협회 관계자는 “신촌·건대·이대·대학로·명동·강남역 등 서울 주요 지역에서 타로점을 보는 곳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서 “노점이 대부분이고 따로 등록을 하는 건 아니라서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서울에만 300~400곳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역술인협회 측은 “역술인은 물론이고 점을 쳐서 금전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을 모두 합쳤을 때 그 수는 전국적으로 40만명 정도”라면서 “역술산업의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수조원대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라벌대학 풍수명리과 김종섭 교수는 “역술은 어느 직업군에나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학문”이라면서 “실제로 (풍수명리과를) 졸업한 뒤에 철학원을 창업할 수도 있지만 상조회사, 공인중개사, 웨딩컨설턴트, 생활설계사 등으로 활약하는 졸업생도 많다”고 말했다. 김종섭 교수는 특히 “영업직종의 경우 자연스러운 상담을 이끌어내기 위해 역술이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선진국인 프랑스에서는 점성학을 연구해 박사 학위도 딸 수 있고, 홍콩에서는 의사보다 풍수지리사가 더 대우를 받는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역술의 문턱이 낮아지긴 했지만, 앞으로 더욱 고급 서비스로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돈 잘 번다' 소문에 역술학원으로… 대학·문화센터도 속속 강의 개설
역술이 ‘돈 되는 사업’으로 주목받으면서 점을 배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사주나 타로점 치는 법을 강의하는 문화센터·대학 사회교육원은 서울에만 줄잡아 100여곳이 넘고, 개인을 통해 ‘과외’하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역술 수강생의 수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실제로 고려대 평생교육원은 사주를 통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흥미, 성격, 지능을 분석하는 ‘명리상담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평생교육원 역시 ‘기문 둔갑’ ‘사주명리학’ ‘풍수지리’ ‘주역’ 등의 역술 강의를 개설해 인기를 끌고 있다.
2006년에는 국내 최초로 대학에 ‘풍수명리학과’가 개설됐다. 경북 경주시 서라벌대학에서는 2년 동안 집중적으로 역술 관련 과목을 가르친다. 이 대학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다. 풍수명리과 ‘최연소 재학생’인 1학년 이상석(19)군은 “인터넷을 통해 사주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대학 진학 전에) 따로 배운 적은 없다”면서 “한문을 좋아하고 풍수·명리학이라는 학문이 특이해서 학과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부근에서 ‘타로이야기’를 운영하는 타로이스트 조민규(37)씨는 올해 초부터 사설 타로 강의를 시작했다. 일대일로 타로점을 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조민규씨는 “타로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꾸준히 늘고 있다”면서 “불과 6개월 전에 비하면 수강생이 4~5배 늘었다”고 했다. 타로를 보는 손님은 20대부터 30~50대까지 다양하지만 수강생의 평균 연령은 30대 중반이다.
10년 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조민규씨는 4년 전 투잡을 위해 타로를 배웠고, 매출이 좋아 2년 전부터는 아예 타로이스트로 전업했다. 일요일을 제외한 주6일 근무에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영업하는 그의 한 달 매출은 평균 500만~600만원 선. 강의와 행사를 통해 버는 돈이 반 정도를 차지한다. 그는 타로점만 봐서 매출을 올리는 건 아니라면서 “백화점이나 박람회 등에서 이벤트로 타로점을 보거나 대학 캠퍼스 리쿠르팅이나 매장 오픈 행사에도 초대된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역술가들이 타로를 배우러 온다는 것. 조씨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타로를 친숙하게 생각하니까 역술가들도 일부러 배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직 은행간부·교장·명퇴자… 가족이 아냐고? 몰래 다니지!
“도화살이 있다고 무조건 바람둥이라고 풀이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가진 ‘살’을 활용하는 법도 알아야죠. 도화살 있는 사람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매너가 있고, 자상하잖아요. 직업을 고를 때도 마찬가집니다. 연예인 같은 경우엔 도화살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에요. 도화살 있는 남자라면 여성 속옷이나 화장품을 다루는 일이 잘 맞을 수 있죠.”
지난 9월 14일 오후 2시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동 I역술학원. 좌석 40개가 빈자리 없이 빼곡하다. ‘궁합’ 강의를 맡은 강사 윤미원(여·50)씨는 대형 보습학원 강사처럼 무선 마이크를 귀에 걸면서 강단으로 올라섰다. 복사물을 나눠주며 “오늘 강의 내용이니까 찬찬히 읽어보고 계세요”하며 방긋 웃었다. 까만 정장에 하얀 재킷을 입은 그는 칠판에 몇 가지 한자를 쓰고서 “오늘따라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수업 시작해 볼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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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술학원에서 사용하는 강의교재 /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정장 재킷을 벗지도 않고 맨 앞줄에 앉아 있던 60대 남성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기에 열중했다. 의자 오른편 바닥에는 회사원이 들 법한 밤색 서류가방이 놓여 있다. 금테 안경 너머로 강사를 응시하던 남성은 큰 소리로 대답하면서 수업에 참여하는 ‘모범생’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 기자가 그에게 다가가 인사하자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소”하며 손사래를 쳤다.
황급히 자리를 뜨는 남성을 바라보며 김진옥(가명·여·53)씨가 “여기서 괜히 인터뷰해봤자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나도 친구들한테 여기서 수업 듣는 것을 비밀로 하고 있다”면서 “남편은 꽃꽂이 배우러 문화센터 간 줄 안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정말 식겁했어요. 딸이 제 가방에서 뭘 봤나 봐요. 다짜고짜 ‘엄마 요즘 어디 가느냐’고 추궁을 하더라고요. 딱 잡아뗐죠. 근데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엄마 점쟁이 되려고 해? 동네 창피하게 왜 이래?’ 딸내미 얘기 듣고 나니까 진짜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김진옥씨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P씨(48·강원도 태백시)는 목소리를 낮추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사연이 있다”라고 말했다. P씨는 자신을 “강원도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이곳을 찾는 ‘장거리 통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턱 끝으로 3시 방향을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왕년에 교장선생님 했던 분”이라고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강의실을 훑어보던 그는 “은행 지점장 했던 사람도 있고,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당한 사람도 있다”면서 “다들 남한테는 말도 못하고 쉬쉬하면서 다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의사 등 직업에 활용할 목적도… 예언자 아닌 조언자로 역할 변화
역술학원 강성문 원장은 “역술학원을 운영한 지 올해로 7년째”라면서 “첫해 수강생은 10명 남짓이었지만, 지금은 수강생이 150~20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강성문 원장은 “역술을 잘 배워두면 나이 들어서 업(業)으로 삼기에 좋다”면서 “공부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삶의 지혜가 녹아들어 가야 제대로 (점을) 본다”고 했다. 역술은 수학공식 외우듯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요즘 들어 역술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강성문 원장은 “창업을 목적으로 배우는 사람도 있지만, 역술을 현재 직업에 응용하려고 배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의사나 마사지사, 상담사 같은 경우 역술을 적절히 활용하면 손님들에게 반응이 좋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학원에 온다”면서 “몸 건강과 함께 마음 건강까지 관리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7급 행정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35세에 역술에 심취하게 됐습니다. 역술 공부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지요. 창업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매일 3시간씩, 1년 6개월 정도 꾸준히 공부해야 돼요. 그래도 나이 들어서 하기에 이만한 일이 없습니다. 제자 중에는 한 달에 1000만원은 우습게 버는 사람도 꽤 됩니다. 벌이가 괜찮지요.”
타로이스트 조민규씨는 “요즘 타로나 사주 보는 사람들은 ‘예언자’가 아니라 ‘조언자’가 됐다”면서 “소비자는 5000원을 내고 답답한 마음을 (역술인에게) 푸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타로점을 보면서 ‘서비스 비용’을 내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비밀을 보장해주는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얻는 자체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조씨는 “역술이나 타로가 새로운 서비스업으로 자리 잡으려면, 단순히 돈벌이로만 생각하지 말고 체계적으로 (역술이나 타로를) 공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점에 대한 인식 변화
대학생 89% "점 보고 싶다"… "보고 나면 마음 편해져" 50%
기존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성인 2명 중 1명꼴로 점이나 사주를 본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난 6월 한 구직 포털사이트에서 대학생 8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점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8.7%가 ‘있다’고 응답했다. 비과학적인 분야로 치부되는 점이나 사주가 젊은층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조사대상 2명 중 1명(51.5%)은 실제로 ‘점을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점을 얼마나 자주 보는지 묻는 항목에서는 점을 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대학생 가운데 10.7%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경우 꼭 점을 본다’고 답할 정도로 깊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대학생들은 점을 보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 점을 본 경험이 있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적어도 마음은 편해진다(51.2%)’고 말했다. ‘방향을 정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는 응답자도 10명 중 1명(10.0%)꼴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문제해결을 바란 것이 아니므로, 해결 여부는 상관 없다(27.1%)’는 응답도 있어 점이나 사주에 대한 인식이 ‘예언’에서 ‘조언’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설문조사에서 ‘점을 본 뒤 오히려 불안해졌다’는 부정적인 의견은 소수(5.1%)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