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7년 당구업 최고호황
필자는 사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당구계에 뛰어들어 한동안 불편함을 모르고 지냈다. 당구장 영업이 워낙 잘돼다 보니 하루하루 돈을 벌어 사는데 만족했고 ‘유비무환’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80년대 초반 당구장 매상이 급격이 줄면서 생활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때는 필자가 당구선수로서도 국내 챔피언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필자는 선수회 회장이던 양귀문씨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500차례 이상 묘기당구 시범을 펼쳤다. 인기 TV프로그램이던 ‘묘기대행진’에 2회 연속 출연했고 ‘비밀의 커텐’, ‘내가 최고야’ 등에도 모습을 나타내 이름도 꽤나 알려졌었다. 그에 반해 금전적으로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결국 필자는 업장을 정리하고 선수회에서도 물러났다. 그때가 내 나이 43세였다. 이후 이것저것 사업도 하고 실패도 맛보다가 당뇨라는 진단을 받고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
그러다가 마침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컬러 오브 머니’라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당구붐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에 출장을 갔던 나도 한국에 돌아온뒤 다시 당구계에 뛰어들 준비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2, 3개월뒤 일본에서는 포켓볼붐이 일었다. 이 덕분에 한국당구용품 제조업계가 수출 호황을 누렸다. 이때는 수출 물량이 모자를 정도로 주문이 많아서 품질을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일본에 수출된 포켓볼 당구대중에는 공이 밑에 걸려서 나오지 않는다든가, 아예 수평이 맞지 않아 공의 힘이 떨어지면 방향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조립 자체가 엉망인 불량 당구대도 많았지만 86년부터 87년까지의 기간은 국내당구업계가 누린 최고의 호황기였다
85년 당구월드컵협회 창설
73년 제3회 한일 친선당구대회 이후 일본 선수들과 매년 1, 2차례씩은 만나는 등 교류를 가졌다는 얘기는 앞에서 한바 있다. 하지만 서로 얼굴을 알게되면서 눈인사나 하는 정도지 10년이 지나도 인사 이상의 대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이 많은 분들께 통역을 부탁해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83년 주간지인 일본 빌리야드 타임지의 사장 아다찌씨와 알게 됐다. 아다찌는 빌리야드 타임의 사장이자 편집자, 기자였고 오사카 네야가와에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한국 당구와 당구용품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아다찌는 아예 2년정도 한국에 눌러 앉았는데 항상 나와 같이 다녔다. 내게는 그가 자연스럽게 일본어 선생이 됐다. 이때 배운 일본어로 나는 많은 일본 선수들과 교류를 가질수 있었다.
이 덕분에 84년 와다라는 일본인과 가깝게 됐다.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교환학생으로 벨기에 겐트대를 졸업하고 그 대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교수였다. 와다는 처음 한국에 와서 내게 “한국의 전 챔피언이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왜 당구를 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지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나한테 월급 주는 사람이 당구치는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안 치고 있다”고 대답하니 “앞으로 B.W.A라는 프로단체가 생길테니 그때 다시 당구를 치면된다”고 말해줬다. BWA는 ‘빌리야드 월드컵협회’를 뜻하는 말로 85년 창설됐다. 와다는 BWA 창설멤버로 아시아 지역 담당관을 맡았다. 그는 한국과 일본 선수를 추천받아 BWA 프로선수로 선발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일본 당구신동꺾고 '한국프로 1호'영예
세계프로당구협회가 창설되면서 아시아에서 3명의 대표선수를 선발하게됐다. 앞에서 언급했던 일본인 와다씨가 아시아지역 담당관으로 선발을 맡게 됐는데 86년 4월 일본 시즈오카 화이트 스팟이라는 장소에서 예선전이 열렸다. 예선에는 일본 랭킹 1위인 고바야시, 2위 고모리, 3위 아라이와 한국 선발선수로 나간 필자 등 4명이 출전했다. 4명이 2차례의 풀리그를 펼쳐 1명을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는데 고바야시와 고모리는 세계챔피언까지 지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서 일본 ‘당구신동’으로 불리던 아라이와 필자 둘중 한명의 탈락이 유력했다.
필자는 몇년간 선수생활도 하지 않다가 출전한 탓에 초반 고전을 했지만 결국 아라이를 꺾고 ‘한국 1호 프로’라는 영예와 함께 세계 대회 참가자격을 따냈다.
그러던중 세계 최고의 당구선수들이 일본에서 경기를 하게됐다. 필자는 그들이 한국에도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당시 사회체육연합회 회장이었던 전경환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씨의 협력으로 클루망, 데일리스(이상 벨기에), 반 프라토(네덜란드), 비탈리스(프랑스), 브롬달(스웨덴) 등 당구잡지나 영화에서만 볼수 있었던 거물 선수들이 한국에 오게됐다. 이들은 88체육관에서 시범경기를 펼쳤는데 당시 체육관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숫자에 놀라며 일일이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이때 외국 선수들은 한국 당구계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지금 한국 당구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Q)당구의 기원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가나요A)일부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부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양탄자위에서 공을 굴리는 놀이를 즐겼다는 설이 있다. 이것을 당구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16세기초 귀족들이 자신들의 저택에서 당구와 비슷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서 ‘빌리야드’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생겼다는게 정설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당구의 최초 발상지로 인정받는다. 영국은 당구대에 구멍이 뚫려 있는 포켓테이블의 종구국으로 스누커를 영연방 최고의 스포츠로 발전시켰고 프랑스는 캐롬테이블, 즉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 당구대에서 진행하는 경기의 종주국이다. 우리나라 당구는 90% 이상이 캐롬테이블에서 치뤄진다.
벨기에 노인전용 당구클럽 눈길
필자는 87년 3월 BWA로부터 프로선수 인정서와 함께 10월 벨기에에서 열리는 스파대회에 출전하라는 일정표를 받았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당구의 본고장인 유럽대회에 진출하게 됐지만 사실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선게 사실이다. 어느덧 10월이 다가왔고 필자는 이상천, 백충기 선수와 함께 스파대회에 출전하게됐다. 이 대회 우승자에게는 다음해 월드컵 투어경기 출전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각오는 대단했다.
스파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때 벨기에에 가려면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브뤼셀로 들어갔는데 하늘에서만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한 3시간 들어가니 스파라는 도시가 나왔다. 대회 개막일까지 5일이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회장에 가서 연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기장은 오페라 하우스로 쓰이는 극장이었고 대회 전날 당구대를 설치하기 때문에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스파에 있는 다른 당구장을 찾기로 마음먹고 하루종일 시내를 헤맸지만 서울에는 그리 흔했던 당구장이 단 한곳도 없었다. 벨기에라는 나라는 국기가 당구이고 당구대학까지 있다는 말까지 들었던 우리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결국 끈질지게 알아본 끝에 리에쥬라는 벨기에에서 3번째로 큰 다른 도시의 당구장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일본 선수들과 리에쥬로 갔는데 이것 역시 여행이었다. 호텔에서 택시로 출발, 기차를 2차례 갈아타고서야 리에쥬 아카데미클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2시간30분 동안 연습을 했는데 이 클럽은 60세 이상 노인들만으로 구성된 클럽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당구대 1909년 순종때 창덕궁에 첫 설치
우리나라에 당구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09년 순종임금때다. 당시 일본을 통해 '옥돌대'라는 이름의 당구대 2대가 창덕궁에 최초로 설치됐다고 한다. 순종임금은 대신들과 함께 운동을 겸해 당구를 즐겼는데 당시 순종의 당구 실력은 지금의 점수로 치면 100-150점 정도였다고 하니 초보 수준은 벗어난 셈이다.
1926년 경성신문사내 조선박문국에서 편찬한 ‘순종국장록’에는 순종임금의 생전 모습과 유품 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진중에는 넓은 궁중 내실에 설치돼 있는 당구대와 계산대,당구 큐대의 모습을 담은 것도 있고 임금이 대신들과 함께 당구를 즐기는 사진도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 당구를 전파한 일본은 1895년 포루투갈을 통해 최초로 당구를 수입했고 1920년대 긴좌와 유라꾸조 중심가에 당구장들이 문을 열었다. 한국에는 이보다 조금 늦은 1930년대 중반 명동에 일반인도 출입할 수 있는 최초의 당구장이 생겼다. 이 당구장 사장 역시 일본인이었다.
물론 이때도 당구는 여전히 귀족스포츠였다. 당구장을 출입하는 손님들은 외국에 유학을 갔다가 당구를 배운 사람들이나 국내 상류층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구를 치려면 당시 쌀 1가마니 정도의 비용을 내야 했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하루 당구비가 20만원 가량이 든 셈이니 웬만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이후에도 부산,대구 등 큰 도시에 하나 둘씩 업소가 생겨났지만 한동안 당구는 소수의 특권층만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남아 있었다.
Q)뒤로 돌려치기는 왜 키스가 많이 날까요
A)우리가 흔히 ‘우라’라고 부르는 뒤로 돌려치기는 ‘쫑’(키스)이 자주 일어나는 공이다. 뒤로 돌려치기가 키스를 많이 일으키는 이유는 제1적구(처음 맞는 공)와 수구(내 공)가 함께 돌기 때문이다. 두 개의 공이 대칭운동을 하기 때문에 서로 만날 확률이 그만큼 높다.
이를 피하려면 공을 얇게 치거나 두껍게 쳐서 대칭운동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게 중요하다. 물론 공을 얇게 칠 경우에는 타법을 끊어쳐서 공이 늘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하고 두껍게 칠 경우에는 밀어쳐서 공이 짧아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키스를 피하는데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많이 연습하는 선수를 따라갈 방법은 없다. 한국 선수들은 외국 선수들에 비해 어려운 볼은 잘 치면서도 쉬운 볼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쉬운 공일수록 몇백번씩 되풀이해 연습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 박병문(62)씨는 45년전인 58년 당구에 입문,62년 제1회 전국 스리쿠션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79년과 89년 이 대회 정상에 올랐던 당구계의 원로다. 85년 일본 시즈오카 당구월드컵협회 프로선발대회에서 한국선수로는 유일하게 선발돼 87년 유럽투어에 출전하기도 했다. 80년 대한당구선수회 전무,93년 대한당구경기연맹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대한당구연맹 원로회원이자 감사로 94년부터 한국 당구동호인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6.25동란뒤부터 당구장 이미지 나빠져
당구장의 이미지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6.25 동란 직후였다. 이 당시에는 집밖으로 나오면 갈 곳이라고는 다방 아니면 당구장 뿐이었다.
그때도 중심가의 몇몇 당구장은 옛멋과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지만 대다수의 변두리 당구장은 목조 2층 건물에 당구대 3대 정도였다. 1년에 반은 휴업을 했다. 더위 뿐만 아니라 달려드는 여름철 벌레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사정은 열악했다. 그나마 겨울에는 창문을 닫고 난방을 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날씨가 추워지면 톱밥난로로 난방을 하고 미군이 쓰던 야전등이나 호롱불을 켜고 영업을 했다. 물론 미성년자는 출입금지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보니 담배연기와 먼지, 목소리 크고 힘센 사람의 횡포, 욕설과 때로는 싸움질이 벌어지기도 했다. 얌전한 손님들은 안쪽 구석에서 숨소리도 죽여가며 당구를 쳤으니 깡패나 건달들의 집합처로 악명이 높아져 갔다.
자유당 말기였던 5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콘크리트 건물들이 새로 지어지고 새로운 당구장이 신설됐다. 전기도 들어오고 시설도 좋아지면서 남자들만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국 최고의 당구 고수는 사구(四球)에 최용,박수복,강두석씨 등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중국,만주,일본에서도 적수가 없을 정도로 날렸다. 이때 경기방식은 한번에 빨간공과 흰공을 맞추면 2점,빨간공 2개를 맞추면 3점,공 3개를 모두 맞추면 5점을 주는 방식이었다. 쓰리쿠션에는 고(故) 조동성 선배님이 이름을 날렸다. 대한당구경기연맹의 전신인 3구회(三球會)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초대 명인으로 추대된 분이다.
이 무렵 고수중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은 가수 남인수씨다. 남인수씨는 옛 수도극장 앞에 있던 국제당구장을 직접 경영했다. 이 당구장에는 국내에서 찾기 힘든 경기용 테이블이 1대 설치돼 있어 미군들이 찾아와 경기를 벌이는 등 빅이벤트가 종종 열리곤 했다.
Q)큐미스가 자주 나는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A)우리가 `삑사리'라고 부르는 말의 정식 용어는 `큐미스'다. 흔히들 큐미스가 나면 큐대 탓을 하거나 "초크칠을 안했다"며 화를 내곤 한다. 물론 오랜 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큐대나 초크칠을 잊는 것도 큐미스의 원인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큐미스가 나는 대부분의 원인은 본인의 타법에 있다. 정상적인 타법이라면 큐대가 공에 맞는 순간 회전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큐대의 무게가 공에 제대로 실리기도 전에 회전을 주려하기 때문에 큐미스가 자주 발생한다.
50년대 후반부터 성인남자 오락으로 자리잡아
당구는 50년대 후반 들면서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즐기는 대중오락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당구장은 미성년자 출입금지 지역이었지만 나이 어린 고점자들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부모나 친척이 당구장을 경영한다는 등 이유로 일찍부터 당구를 접한 선수들이었다. 이들을 당구계에서는 `꼬마'라고 불렀다. 키가 작아서 꼬마가 아니라 나이가 어린데도 당구를 잘 친다고 해서 애칭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신촌 꼬마, 아현동 꼬마,이리 꼬마, 중대 꼬마, 한대 꼬마 등이 유명했다.
이렇게 지역 이름을 딴 닉네임으로 부르는 일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리, 대전 김, 대구 조, 영도 박, 해운대 김 등 곳곳의 당구 고점자들이 생겨났다. 지금처럼 매스컴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은 몰랐지만 "어디가면 누가 있다더라"는 식으로 유명세는 타고 있었다.
유명한 선수 옆에는 항상 건달과 전주가 있었다. 이들은 다른 지역 선수들과 섭외를 통해 빅매치 게임을 만들었다. 이런 게임에는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뤘고 돈도 걸려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긴장감이 흘렀다. 종종 큰 싸움이 나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홈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동네로 원정경기를 가는 선수들도 난다 긴다하는 고수였지만 홈그라운드의 잇점을 갖고 있는 상대편은 경기 종목을 유리하게 바꾸거나 때로는 아예 선수를 교체하기도 했다.
필자는 58년 처음 당구장에 가봤는데 3년만인 1961년 4·19 민주혁명이 일어날 때쯤 해서 500점을 쳤다. 당구는 이즈음 보건사회부 당구분과에 소속돼 있었다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뒤 1962년 사단법인 당구협회가 탄생했다. 다음해인 1963년 10월 서울시청뒤 서울신문 사옥에서 제1회 3쿠션 선수권대회가 열려 필자도 부푼 꿈을 안고 출전했다.
Q)`구찌(口)'는 어디까지 허용되나요
A)`구찌'란 `입 구(口)'자의 일본 발음이다. 동네 당구장에서는 말로 상대를 흥분시켜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구찌'를 주무기로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구찌'도 상대를 이기려는 비열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서로에게 재미를 주는 수준을 지킨다면 동네 당구에서는 어느 정도 허용돼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식 경기에서는 엄격히 금지된다. 공식경기에서 선수가 말을 했다가 상대 선수가 심판에게 항의할 경우 1차 경고를 받게 된다. 이같은 일이 되풀이되면 몰수게임까지 선언된다. 특히 선수가 치려고 하는 순간에는 관중들도 조용히 해야 한다.
63년 전국 3쿠션대회 처음 열려... 보사부장관이 대회장
보건사회부 산하에 소속돼 있던 당구가 62년 5·16 혁명이후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로 인가됐다는 것은 전편에 소개한바 있다. 이때 초대 회장은 유정선씨, 총무에 전화영씨가 있었는데 전총무는 현존하는 당구계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당구협회는 전국의 당구장을 도별로 묶어 도지부를 결성하고 업장을 대표하는 중앙회를 서울에 두고, 63년 10월 서울시청뒤 서울신문 사옥 2층 대회의실에서 제1회 전국 3쿠션 선수권 대회를 열었다. 대회장은 당시 고재필 보건사회부 장관이 맡았다. 이전까지 몇차례 당구대회가 있었지만 이 대회는 명실공히 한국에서 열린 첫번째 전국 대회였다. 전국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이 모두 출전했고 본부석에는 트로피와 부상으로 유명회사에서 보내준 각종 제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선수들이 경기중인 테이블 옆에는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팬들도 가득 찼다. 이때만 해도 관중들은 선수들이 한점 한점 득점할 때마다 박수와 함성을 질러 댔다. 여러 테이블에서 경기가 동시에 진행되는데 옆에서 함성 소리가 날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조용하게 진행되는 요즘 대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끔은 당구선수가 팬을 몰고 다니는 이때의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
대회는 토너먼트로 진행됐다. 당시 23살이었던 필자는 전승으로 승자부 결승에 올라 패자조에서 올라온 선수와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됐다. 결승전은 밤 9시나 되서야 벌어졌다. 두 게임중 한번만 이기면 필자가 우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경기를 치르느라 당구대의 컨디션은 최악으로 변해 버렸고 결국 두 게임을 다 진 필자는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대회가 열린지 벌써 40년이나 지났지만 필자에게는 무척 소중한 대회였다. 젊은 나이로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당구동호인회 회장 031-979-7100
Q)초크는 무엇으로 만드나요
A)초크가 처음 발명된 것은 19세기초다. 영국 런던 `버스당구'의 주임 잭 카가 `큐미스'를 방지하기 위해 큐대 끝에 백묵가루 칠하는 법을 고안해 냈다. 초크가 나오면서 공에 비틈을 주는게 가능해졌는데 이것을 `잉글리시'라고 부르는 것도 영국에서 고안된 타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이나 자기 등을 미세한 입자로 갈아 초크를 만든다. 지금은 대부분 수입 초크를 쓰는데 144개 들이 한 상자 가격이 2만5000원 정도. 초크 한개 값이 174원 가량 하는 셈이다.
선수들은 초크 한개를 갖고 몇개월씩 쓰지만 아마추어들은 오래 사용하지 못한다. 초크의 가운데 부위만 심하게 쓰다보니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초크를 칠할 때는 `X자형'으로 적당한 힘을 주고 문질러야 오래 쓸수 있다.
73년 한일 당구대항전서 일본에 패해
나는 73년 제3회 한일 당구대항전에 한국 대표로 뽑혀 출전했다. 경기 방식은 양팀에서 7명씩 출전, 상대 선수 전원과 한번씩 맞붙는 식이었다. 뱅킹으로 선구를 가렸는데 선구가 초구에 200개를 다 치면 후구에게 단번치기 기회를 한차례 주게 돼있었다. 종합전적으로 한국은 일본에게 졌는데 일본의 아오키가 초구에 2000점 치기를 4차례나 성공시키면서 7전 전승을 거뒀다. 2위는 한국의 전광웅(6승1패·단번치기 5번), 3위가 필자(6승1패·단번치기 3번)였다.
그무렵 내가 경영하던 인천 대하당구장 손님중 변영철이란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6,7살 어렸는데 인천 지역 대표나 마찬가지였던 선수였다. 어느날 그가 우리 당구장에서 정상철이라는 고수와 맞대결을 펼쳤다. 정상철은 부산 출신으로 70년대 초반 국내 최강자로 불렸다. 그는 그때 고수들이 그랬듯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1대1 승부를 펼쳤다.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던 정상철은 얼굴도 잘 생겼고 키도 컸다. 미남이라 그랬는지 항상 연인을 대동하고 다녔는데 나중에 그 첫사랑의 연인과 결혼까지 했다.
두 사람의 경기에서는 정상철이 싱겁게 승리해 변영철에게 인천 홈에서의 첫 패배를 안겼는데 정상철은 내게도 도전을 해왔다. 나는 10년간 그런 게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불리했지만 홈이라는 이점은 매우 컸다. 관중들도 나를 응원했고 당구대도 나한테 익숙했다. 결국 내가 그 게임의 승자가 됐다.
74년 가을에는 이상천이라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나타나 변영철을 꺾으면서 명성을 떨쳤다. 이후 나와 이상천, 정상철 3명은 국내 3쿠션 3인방으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우리는 순위만 바꿔 가면서 국내 대회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그때 3인방중 지금은 나만 원로회에 남아 있다. 지난해 부산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던 이상천은 일찌감치 미국 뉴욕에 둥지를 틀었고 정상철은 당구계를 떠났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만 들었다.
Q)당구공은 무엇으로 만드나요
A)과거 당구공을 상아로 만든 시절이 있었지만 이는 극히 일부의 소유물이었다. 상아공은 공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답기 때문에 소장자들은 자기 공을 갖고 다니면서 쳤다.
지금 우리가 쓰는 당구공은 모두 벨기에산으로 아라미스라는 제품이다. 원료는 합성수지인데 독일이나 영국에서도 만들지만 벨기에산을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공을 개발하려고 시도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망했다고 한다. 공의 광을 유지시키는 비법은 벨기에에서 국가적인 기밀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당구공을 쳐서 깨뜨리면 당구장에서 평생 공짜로 칠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과거 불량품으로 나온 공이 깨지는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힘껏 쳐도 공이 깨지는 일은 없다.
볼은 크기는 일반 캐럼볼이 65.5mm, 3쿠션볼은 61.5mm다. 포켓볼은 57.1mm이고 스누커볼은 가장 작아서 53mm가 조금 넘는다.당구공도 1년에 1~1.5mm씩 닳기 때문에 많이 쓰면 갈아줘야 한다.
한국위해 애썼던 귀화 일본인 윤춘식
오늘은 귀화 일본인으로 살았지만 진정 한국을 위해 애썼던 당구인 고(故) 다카키 쇼오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카키의 한국 이름은 윤춘식.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14살때였던 1930년대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인으로 귀화해 야쿠자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는 꽤 유명한 야쿠자가 돼 명성을 날렸지만 21세때 당구에 입문하면서 야쿠자 세계에서 손을 씻었다.
당구에 전념한 그는 30세가 되던 무렵 일본 챔피언에 등극했다. 다카키는 일본에서 단 한명밖에 없는 영세 9단으로 명인 오다케에 이은 `일본 당구사의 2인자'로 인정 받는다. 다카키는 68년 일본당구협회 전무이사가 된뒤 한일당구대회를 만드는 등 한국 당구를 위해 애썼다. 경비 상당 부분을 자비로 처리하면서까지 한국에 온 그는 제1회 대회때 출전했던 양귀문 선수를 일본으로 데려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다카키는 야쿠자 출신답게(?) 왼쪽 새끼손가락이 반밖에 없었는데 그가 반쪽 뿐인 손가락을 세워 멋지게 맛세를 찍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일본에 온 한국 선수들에게도 극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필자도 80년 대회때 일본에 갔는데 온천 관광에 이어 오하도호텔 스위트룸에 묶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그는 요코하마의 변두리 시장통 2층에 살림집과 같이 있는 당구장을 부인과 함께 경영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한국 당구를 위해 혼신을 다한 것은 일본에 귀화한 인생에 속죄하고 싶었던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자식도 없이 살았던 그 분을 부모처럼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해 드린것도 없이 이후 부인의 고향인 오키나와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는 소식만 접해 지금도 후회가 남는다.
Q)큐는 무엇으로 만드나요
A)요즘 큐는 캐나다산 단풍나무로 만든다. 특히 하대(아래 부분)는 단풍나무중에서도 `버드아이'라고 부르는 옹이가 있는 쪽이나 물결 무늬 있는 부분만 잘라 사용한다. 큐의 맨 아래부분은 흑단이나 장미목을 쓰는데 보기에도 좋고 큐 무게를 조종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수제 큐 하나 만드는데는 보통 7-10년이 걸린다. 미리 나무를 준비해서 오랜 동안 건조과정을 거쳐야 하고 큐를 계속 다듬어가면서 휘어지면 버리는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좋은 큐는 가격도 비싸다. 프로선수들이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일본 아담사에서 만드는 무사시큐다. 아담사 제품은 제일 좋은 것은 100만엔이나 간다. 보통 200만원 넘는 것은 좋은 제품으로 치는데 70-80만원 짜리도 있다.
한국에서는 한밭큐를 가장 많이 쓴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유럽에 큐를 수출하기도 한다. 여기서 만드는 개인큐는 50-65만원 정도 한다. 일반 당구장에서 아마추어용으로 비치해놓은 큐는 하우스큐라고 부르는데 대량생산 제품이기 때문에 3만원 정도로 싸다.
허리우드’당구대 만든 사람은 홍영선
인천에서 당구당을 하던 필자는 70년대 서울 영등포로 무대를 옮겼다. 필자는 영등포에 당구장을 낸뒤 안두원, 서기화 등 친구들과 함께 영등포지부 정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매일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영등포구청에 등록된 63개 당구장을 모두 방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대문지부장 김명석, 다까키 선생의 제자인 양귀문과 가까와졌다.
우리는 모두 당구 국가대표를 지낸 사이로 매일 만나 당구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돌아다녀 `삼총사'로 불렸다. 여기에 홍영선이라는 친구가 `달타냥'이라는 별명으로 우리와 함께 어울렸다. 가장 선배였던 양귀문 형은 명문학교 출신답게 능숙한 언변을 자랑했고 현 동대문구 체육회장으로 재직중인 김명식은 조직활동에 능했다. 막내 홍영선은 나중에 당구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 들어보았을 허리우드 당구대를 만들었다. 홍영선은 허리우드 당구대를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수출해 자랑거리가 됐지만 우리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 마음을 아프게 했다.
78년 대한당구협회 주최로 국가대표 1차 선발전이 종로 허리우드 당구장에서 개최됐다. 우리 조에 이상천이 편성됐는데 그는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 무난히 제기동 유신당구장에서 벌어진 최종 결승전에 나와 함께 올랐다. 최종전 결과 필자가 1위, 2위에 이상천, 3위 김동수, 4위 정상철로 결정됐다. 정상철이 국내 3쿠션 대회에서 3위밖으로 밀려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이상천은 아시아 3쿠션 선수권에 출전하기 위해 맹훈련, 3개월후 한국에 1장 주어진 출전티켓을 거머쥐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Q)당구를 처음 시작할때는 왜 30점을 놓고 치나요
A)과거 당구는 빨간공과 흰공을 치면 20점, 빨간공 2개를 치면 30점, 공 3개를 모두 치면 50점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초보자는 빨간공 2개 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30점을 치면 이기도록 배려를 해줬다.
요즘은 30점 치다가 50, 80점으로 점수를 올리지만 원래는 30에서 80까지 10점씩 계속해서 올렸다. 40, 60, 70점 선수도 있었던 셈이다. 80점을 넘어서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고 해서 20점씩 늘어나 100, 120점으로 가고 이후에는 150, 200,250, 300, 400,500점까지 올라간다.
500점 이상에서는 700, 1000, 2000점까지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봐야 한다. `세리' 기술을 연마해서 500점 이상되면 얼마든지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리를 한번 만들면 보통 당구대 긴쪽에서 60개, 짧은쪽에서 40개씩 쳐서 당구대를 한바퀴 돌면 200개를 친다. 우리나라에는 한번에 1000개 넘게 쳐본 선수도 꽤 많다.
당구 잘 치면 건달’ 인식 바꾸려 협회만들어
78년 들어 당구협회 동대문지부장 김명석, 역도 국가대표 출신 김용석과 필자 등 비슷한 또래 3명은 삼구회를 조직했다. 유신당구장 조동성 사장을 회장으로 했다. 이 삼구회는 훗날 대한당구선수회의 전신이 됐다.
우리가 삼구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당시 유신당구장에 우리나라에 유일한 `국제식 3쿠션 당구대(대다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경기에 나가려면 대다이에서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구대 하나에서 칠수 있는 최대 인원은 6명이기 때문에 초대 삼구회 회원은 6명이었다. 79년 가서 홍순민이 을지로 5가 방산시장안에 새 당구장을 오픈하면서 대다이를 하나 들여 놓아 6명을 충원했다.
우리가 모임을 만든 이유는 `잡기'로만 인식돼 있는 당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당구 잘 치는 사람은 건달로 여겨져 있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실제 당구는 어느 종목보다 집중력이나 체력이 필요한 스포츠다. 당구를 2시간 계속 쳤을때의 운동량은 약 2km를 걸은 것과 같다는 과학적인 데이터도 나와 있다. 세계당구연감 첫장에는 "당구란 최고의 기술과 두뇌와 매너의 스포츠다"라고 정의돼 있다.
당구를 잘 치기 위해서는 머리도 좋아야 한다. 그때 우리 모임에는 명문고 출신들이 많았다. 박용인, 권성덕이 경기고, 신항균은 서울고, 신일우는 경복고 출신이었다. 초기 모임에는 합류하지 않다가 2대 회장으로 들어온 양귀문은 서울 상대를 졸업했다. 후배 이상천도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서울대를 졸업하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야 물론 `공' 때문이었다.
Q)분가루는 얼마나 칠해야 하나요
A)손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들은 분가루를 칠하는 경우가 많다. 땀이 잔뜩 젖은 채로 당구를 치면 당구대도 땀으로 범벅이 되고 지저분해진다. 큐 스트로크가 빡빡해져 큐질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분가루는 큐가 닿는 부분에만 살짝 칠하는게 정상이다. 양손에 빵 만드는 사람처럼 하얗게 분가루를 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당구대가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이 분가루가 떡지게되면 큐질에도 미세한 지장을 주게 된다.
요즘은 당구장에서 장갑을 주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실장갑을 주로 줬는데 최근 당구장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수용 3손가락 장갑이 비치돼 있는 곳도 많다. 여러 모로 분가루보다 장갑을 쓰는게 낫다. 젊은 프로선수들도 장갑을 많이 사용한다.
70년대 최고 인기업종... 80년대 초 허가제 되면서 우후죽순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생계문제로 당구계를 떠난다. 남아 있는 선수들도 자기 돈으로 당구장을 경영할 수 있는 여건이 되든지, 최소한 당구장 책임자로 일을 해야 선수생활을 할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 세계에도 내기당구나 노른, 경마 등 도박으로 살아가는 몇몇 `기생충'들도 생겨 난다. 이들은 소수지만 당구 전체를 욕먹이는 사람들이다.
사실 70년대 당구는 최고의 인기 업종이었다. 당시에는 당구장의 신규허가가 불허됐었다. 당구장 숫자가 적다보니 당구장이라면 어디든지 호황을 누렸다. 당구장 허가증에 고액의 프리미엄까지 붙을 정도였다. 필자는 영등포에서 `챔피언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3쿠션 챔피언이 운영한다고 해서 손님이 무척 많았다. 전국 영업실적 순위 3위안에 들었다. 음료수 서비스는 커녕 카운터에 물주전자 하나 갖다놓고 장사를 하는데도 오전 9시30분부터 영업 끝날때까지 모든 당구대에 손님이 가득 들어찼다. 시간당 200원씩 할때였는데 당구대 10대가 하루 15시간씩 쉬지 않고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 강남아파트 수채 값인 5600만원에도 팔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당시 선수회를 만든다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선수들에게 여관비와 술값으로 다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80년대 초반 끝나고 만다. 81년 모든 업종의 허가제가 풀리면서 당구장 역시 신고제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당구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건물 하나에 당구장 하나"라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됐다. 영등포만해도 70년대에는 당구장이 63곳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약 40배 정도로 늘었다. 한때는 전국 당구장 갯수가 3만개에 이르기도 했다. 필자의 당구장 역시 매상이 차츰 줄어 결국 82년 2300만원에 팔게됐다.
Q)어떤 큐를 선택해야 하나요
A)당구를 잘 치려면 큐를 선택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고점자일수록 자신의 큐로 컨디션을 조절한다. 큐의 무게는 15~18온스가 적합하고 길이는 1m45~1m47이 적당하다. 팀은 1.2cm~1.35cm정도로 고르는게 좋다. 두께도 2mm는 넘어야 한다. 표면은 물론 둥근 모양이 돼야 한다. 공과 접촉하는 부분이 많아야 회전을 많이 줄수 있기 때문이다. 손은 큐의 무게 중심점에서 한뼘 정도 뒷부분을 잡아 무게가 앞쪽으로 오게 하고 초크를 칠할 때는 수평으로 팁의 옆부분을 칠해야 큐미스를 줄일 수 있다.
처음 당구대 만들땐 15~25일 걸려
80, 90년대 당구를 친 독자라면 `허리우드 당구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은 허리우드 당구대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고(故) 홍영선 후배를 회상하고자 한다.
그는 70년대 서울 종로2가 낙원극장이 있던 건물에 `허리우드'라는 대형 당구장 경영을 시작하면서 당구계에 등장했다. 나는 양귀문 선배를 통해 그를 알게 됐는데 금방 친해져서 친형제처럼 지내게 됐다.
그 무렵 당구장에서 쓰던 국내 라사(당구대 위에 까는 천)에는 털이 있어 매일 아침 다리미로 다려야 했고 공도 잘 구르지 않았다. 홍영선은 명동지하상가에 허리우드 당구재료상사를 차리고 95% 양모로 만든 스페인제 그라니토 천조각을 가져다 연구에 몰두, 3번째 도전만에 털이 없는 그라니토 라사 개발에 성공했다. 홍영선이 만든 `무모지'는 순식간에 라사 시장을 석권했다.
홍영선은 라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조립식 당구대가 없었다. 당구장을 차리려면 임대한 건물안에 목수 몇명이 들어가 당구대를 만들어야 했다. 당구대 만드는데 15~25일 정도가 걸렸다. 조립식 당구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홍영선은 부엌 싱크대를 만들었던 한샘 사장과 함께 연구 끝에 조립식 허리우드 당구대를 탄생시켰다. 홍영선은 10년전쯤 세상을 떠났지만 허리우드 당구대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서울대 출신 당구천재 양귀문
80, 90년대 당구를 치던 사람들에게 `양귀문'은 꽤나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80년대는 `3구회'로 시작된 전국의 선수모임이 대한당구선수회로 이름을 바꾸고 커나가던 시기였다. 이때 선수회의 2대 회장이 양귀문 선배였다.
양귀문은 목포고를 나와 서울대 상대를 나온 수재였다. 단순히 학벌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 중후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을 갖췄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인재였다.
양귀문이 당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60년대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징계를 당한 그가 명동에서 공을 치기 시작했고 우연히 71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1회 한일친선당구대회에서 다카기 일본단장의 눈에 띄게됐다. 다카기씨는 일본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그에게 일본행을 제안했고 양귀문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제대로 된 정식 당구수업을 받게됐다.
양귀문은 한국에 돌아와 `당구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이무렵 변웅전씨가 진행하던 `묘기대행진'이라는 프로그램에 필자와 함께 3차례 나가 묘기시범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88년 양귀문은 당구학원을 열었다. 주변에서는 "미쳤냐. 학원생이 한명이라도 있겠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장안평에 차렸던 첫 학원은 망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강남의 남부터미널 부근에 다시 세워진 `양귀문 당구학원'은 성공해 지금은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당구의 황금시대’ 70년대말~80년대초의 풍류
오늘은 `당구의 황금시대'였던 70년대말에서 80년대초의 얘기를 한번 해보자.
그때는 새로운 당구장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문을 열던 시기였다. 대한당구협회 산하에 2만5000~3만개의 업소가 있었으니 국민 1000명당 1개씩의 당구장이 있었던 셈이다. 명동에 있던 태평양당구장과 영동백화점앞 반도당구장에 대다이 3대씩이 놓여지면서 서울지회의 월례대회나 전국대회도 언제든지 개최할 수 있게됐다.
이 무렵 당구계 최고의 멋쟁이로 당구선수회 부회장이던 권성덕씨가 있었다. 그는 인쇄소와 대형 약국을 운영했는데 당구 뿐만 아니라 술과 노래, 각종 악기도 수준급으로 다뤄 인기가 높았다. 권씨가 직접 설계하고 지어서 살던 단독 주택 2층에는 커다란 회의용 탁자가 있었다. 1층에서는 식구들이 살고 2층에서는 직원들과 월 2차례 모여 회의를 했는데 테이블 덮개를 치우면 경기용 당구대로 변했다. 한일대회 같은 큰 행사가 있을때면 선수들이 권씨의 집으로 몰려가 식사를 한뒤 당구를 한게임 쳤다.
유명선수들만 개인큐를 갖고 있던 그때 권씨집에는 선수들도 탐내는 명품큐가 15자루 정도 걸려 있었다. 필자도 그의 집에 종종 갔었는데 2층에서 당구를 치고난뒤에는 방음 무대까지 설치된 지하 바에서 술을 한잔씩 걸치곤 했다.
80년대 중반 영화 `컬러 오브 머니'로 당구 붐
필자는 사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당구계에 뛰어들어 한동안 불편함을 모르고 지냈다. 당구장 영업이 워낙 잘돼다 보니 하루하루 돈을 벌어 사는데 만족했고 `유비무환'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80년대 초반 당구장 매상이 급격이 줄면서 생활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때는 필자가 당구선수로서도 국내 챔피언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필자는 선수회 회장이던 양귀문씨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500차례 이상 묘기당구 시범을 펼쳤다. 인기 TV프로그램이던 `묘기대행진'에 2회 연속 출연했고 `비밀의 커텐', `내가 최고야' 등에도 모습을 나타내 이름도 꽤나 알려졌었다. 그와 반해 금전적으로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결국 필자는 업장을 정리하고 선수회에서도 물러났다. 그때가 내 나이 43세였다. 이후 이것저것 사업도 하고 실패도 맛보다가 당뇨라는 진단을 받고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
그러다가 마침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컬러 오브 머니'라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당구붐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에 출장을 갔던 나도 한국에 돌아온뒤 다시 당구계에 뛰어들 준비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2, 3개월뒤 일본에서는 포켓볼붐이 일었다. 이 덕분에 한국당구용품 제조업계가 수출 호황을 누렸다. 이때는 수출 물량이 모자를 정도로 주문이 많아서 품질을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일본에 수출된 포켓볼 당구대중에는 공이 밑에 걸려서 나오지 않는다든가, 아예 수평이 맞지 않아 공의 힘이 떨어지면 방향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조립 자체가 엉망인 불량 당구대도 많았지만 86년부터 87년까지의 기간은 국내당구업계가 누린 최고의 호황기였다.
프로단체 BWA(빌리야드 월드컵협회) 85년 창설
73년 제3회 한일 친선당구대회 이후 일본 선수들과 매년 1, 2차례씩은 만나는 등 교류를 가졌다는 얘기는 앞에서 한바 있다. 하지만 서로 얼굴을 알게되면서 눈인사나 하는 정도지 10년이 지나도 인사 이상의 대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이 많은 분들께 통역을 부탁해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83년 주간지인 일본 빌리야드 타임지의 사장 아다찌씨와 알게 됐다. 아다찌는 빌리야드 타임의 사장이자 편집자, 기자였고 오사카 네야가와에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한국 당구와 당구용품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아다찌는 아예 2년정도 한국에 눌러 앉았는데 항상 나와 같이 다녔다. 내게는 그가 자연스럽게 일본어 선생이 됐다. 이때 배운 일본어로 나는 많은 일본 선수들과 교류를 가질수 있었다.
이 덕분에 84년 와다라는 일본인과 가깝게 됐다.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교환학생으로 벨기에 겐트대를 졸업하고 그 대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교수였다. 와다는 처음 한국에 와서 내게 "한국의 전 챔피언이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왜 당구를 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지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나한테 월급 주는 사람이 당구치는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안 치고 있다"고 대답하니 "앞으로 B.W.A라는 프로단체가 생길테니 그때 다시 당구를 치면된다"고 말해줬다. BWA는 `빌리야드 월드컵협회'를 뜻하는 말로 85년 창설됐다. 와다는 BWA 창설멤버로 아시아 지역 담당관을 맡았다. 그는 한국과 일본 선수를 추천받아 BWA 프로선수로 선발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아시아 대표선수 선발전서 승리
세계프로당구협회가 창설되면서 아시아에서 3명의 대표선수를 선발하게됐다. 앞에서 언급했던 일본인 와다씨가 아시아지역 담당관으로 선발을 맡게 됐는데 86년 4월 일본 시즈오카 화이트 스팟이라는 장소에서 예선전이 열렸다. 예선에는 일본 랭킹 1위인 고바야시, 2위 고모리, 3위 아라이와 한국 선발선수로 나간 필자 등 4명이 출전했다. 4명이 2차례의 풀리그를 펼쳐 1명을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는데 고바야시와 고모리는 세계챔피언까지 지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서 일본 `당구신동'으로 불리던 아라이와 필자 둘중 한명의 탈락이 유력했다.
필자는 몇년간 선수생활도 하지 않다가 출전한 탓에 초반 고전을 했지만 결국 아라이를 꺾고 `한국 1호 프로'라는 영예와 함께 세계 대회 참가자격을 따냈다.
그러던중 세계 최고의 당구선수들이 일본에서 경기를 하게됐다. 필자는 그들이 한국에도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당시 사회체육연합회 회장이었던 전경환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씨의 협력으로 클루망, 데일리스(이상 벨기에), 반 프라토(네덜란드), 비탈리스(프랑스), 브롬달(스웨덴) 등 당구잡지나 영화에서만 볼수 있었던 거물 선수들이 한국에 오게됐다. 이들은 88체육관에서 시범경기를 펼쳤는데 당시 체육관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숫자에 놀라며 일일이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이때 외국 선수들은 한국 당구계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지금 한국 당구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Q)당구의 기원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가나요
A)일부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부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양탄자위에서 공을 굴리는 놀이를 즐겼다는 설이 있다. 이것을 당구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16세기초 귀족들이 자신들의 저택에서 당구와 비슷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서 `빌리야드'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생겼다는게 정설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당구의 최초 발상지로 인정받는다. 영국은 당구대에 구멍이 뚫려 있는 포켓테이블의 종구국으로 스누커를 영연방 최고의 스포츠로 발전시켰고 프랑스는 캐롬테이블, 즉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 당구대에서 진행하는 경기의 종주국이다. 우리나라 당구는 90% 이상이 캐롬테이블에서 치러진다.
87년 비행기 24시간타고 유럽대회 출전
필자는 87년 3월 BWA로부터 프로선수 인정서와 함께 10월 벨기에에서 열리는 스파대회에 출전하라는 일정표를 받았다. 국내에서 처으으로 당구의 본고장인 유럽대회에 진출하게 됐지만 사실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선게 사실이다. 어느덧 10월이 다가왔고 필자는 이상천, 백충기 선수와 함께 스파대회에 출전하게됐다. 이 대회 우승자에게는 다음해 월드컵 투어경기 출전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각오는 대단했다.
스파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때 벨기에에 가려면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브뤼셀로 들어갔는데 하늘에서만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한 3시간 들어가니 스파라는 도시가 나왔다. 대회 개막일까지 5일이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회장에 가서 연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기장은 오페라 하우스로 쓰이는 극장이었고 대회 전날 당구대를 설치하기 때문에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스파에 있는 다른 당구장을 찾기로 마음먹고 하루종일 시내를 헤맸지만 서울에는 그리 흔했던 당구장이 단 한곳도 없었다. 벨기에라는 국기가 당구이고 당구대학까지 있다는 말까지 들었던 우리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결국 끈질지게 알아본 끝에 리에쥬라는 벨기에에서 3번째로 큰 다른 도시의 당구장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일본 선수들과 리에쥬로 갔는데 이것 역시 여행이었다. 호텔에서 택시로 출발, 기차를 2차례 갈아타고서야 리에쥬 아카데미클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2시간30분 동안 연습을 했는데 이 클럽은 60세 이상 노인들만으로 구성된 클럽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첫 당구월드컵 수상도 관전
벨기에와 네덜란드 대회에서의 공식일정을 모두 마친 필자는 겐트에서 1주일 정도 쉰뒤 프랑스에서 열린 당구월드컵 대회를 보기 위해 일본의 와다와 함께 파리로 갔다.
대회까지 2일 정도가 남았기에 우리는 에펠탑, 개선문, 콩코드광장, 세느강 등 파리의 명소들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말로만 듣던 몽마르뜨 언덕과 캉캉춤의 원조인 물랭루스 등을 보면서 오랜 동안 국민들이 가꾸고 소중히 여기면 훌륭한 관광상품이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도 관광자원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도 하게됐다.
드디어 세계당구협회가 창립후 처음으로 연 월드컵이 열렸다. 나는 비록 출전자격을 얻지 못해 관중석에 앉아 있었지만 초대 대회를 직접 본다는 점만으로도 흥분이 됐다. 대회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체육관에서 열렸다. 체육관에는 프랑스가 생산하고 있는 샤빌로트 당구대가 설치됐고 꽃이 가득 장식돼 있어서 분위기가 한결 돋보였다. 본부석 위쪽의 귀빈석에는 전현직 수상까지 포함한 귀빈들이 앉아 경기를 관전했다. 중년 이상의 팬들이 대부분인 관중석도 대만원이었다.
대회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온 자네티의 초반 선전이 돋보였다. 절묘한 힘조절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고 오펜스, 디펜스 모두 빼어났다.
그러나 역시 클루망이었다. 클루망은 그렇게 잘 나가던 자네티를 결승에서 간단히 굴복시키고 월드컵 첫 챔피언에 올라 자신의 명성을 확인시켰다.
필자도 이 대회를 끝으로 43일간의 유럽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88년 한일 프로대회 부활
1달반 정도의 유럽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니 다니던 회사의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사표를 낸뒤 당구장 개업준비를 했다. 외국을 다니면서 본대로 손님을 위한 인테리어를 하고 성산동과 여의도에 박클럽이라는 간판으로 88년 3월에 개업을 했다. 5년만에 업주로 돌아왔으니 당구인으로 재기를 한 셈이다. 헐리우드의 홍영선 사장과 유성모직의 현두경 회장님, 일본인 아다찌씨가 큰 도움을 줬다. 내게는 은인들이었다.
필자의 당구장 개업을 축하해주러 일본에서도 7, 8명의 친구들이 찾아와 자연스럽게 친선당구대회도 열게 됐다. 우리는 이 기회에 81년을 끝으로 열리지 않고 있던 한일대회를 부활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때부터 6명의 프로선수와 7명의 아마추어 선수가 양국에서 나와 짝수해는 한국에서, 홀수해는 일본에서 대회를 치르게 됐다. 대회가 알려지면서 일본측 주관회인 중부선수회 외에도 관서, 관동선수회도 돌아가면서 주최를 하게 됐고 우리나라에도 출전을 원하는 선수들이 늘어나 대표선정에 애를 먹기도 했다.
전략적 당구장운영 필요하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포켓볼이 차츰 유행하면서 당구장에 1, 2대씩 포켓볼 테이블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당구장으로 젊은 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포켓볼 붐이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여성 동호인이 많아지고 당구장 분위기가 바뀌면서 영업이 잘돼고 인테리어 역시 세련된 새로운 개념의 당구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 강남지역에는 오직 포켓볼 테이블만 설치하고 고객도 여성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당구장이 등장했으며, 모 여자대학 앞에는 오히려 남자는 출입할 수 없는 여성전용 당구장이 생기기도 했다.
이때부터 당구장도 인테리어를 하지 않으면 안됐고 운영비용 역시 그 이전보다 평균 2배 이상 늘어나 자본력이 없으면 당구장 개장도 쉽지 않게 됐다. 이렇던 당구장이 90년대 말부터 PC방과 IMF를 만나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당구를 즐기는 동호인들도 크게 줄기 시작했다. 오늘날 당구장 숫자는 그대로인데 당구장을 찾는 동호인들이 줄어들면서 당구장 운영이 점차 사양산업화 되는 현실이다.
일본의 당구는 이미 30~40년전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전국적으로 약 2500여개의 당구장만 영업중이며, 고객분포도 3쿠션은 10%미만이고 대부분이 포켓볼 손님이다. 우리나라도 당구장에 사범을 상주시켜 포켓볼 인구를 늘리는 것이 당구장 영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에 앞서 일본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당구장 숫자(약 2만개)가 수요-공급의 법칙에 맞게 정리되야 할 것으로 보이며 당구인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대중속으로 더욱 다가서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당구의 걸어온 길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이 지면을 통해 필자의 글을 격려해준 동호인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연재를 마친다. 한국당구동호인회회장 031-979-7100
첫댓글 당구의 역사 너무나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양귀문 선생님, 이상천 선수의 이름도 나오며, 당구공을 상아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도 조금 길기는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맙습니다. 위의 글은 제 스승이신 박병문선생께서 조간지에 기고한 글을 모아 제가 올려놓은것입니다. 아직도 건강하게 공을 치며 생활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