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천 조씨(白川趙氏)
배천(白川)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 도랍현(刀臘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구택( 澤)으로 고쳐 해주군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초(高麗初)에 배주(白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 평주(平州)에 속했다가 의종(毅宗) 때 다시 배주(白州)로 하여 해주(海州)에 속하게 하였다. 고종(高宗) 때 복흥군(復興郡)으로 승격되었으나 공민왕(恭愍王) 때 배주(白州)라 고쳤고 1413년(태종 13)에 배천군으로 개칭되어 경기도(京機道)로 부터 황해도(黃海道)로 옮겼고, 1562년(중종 21)에는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 연안(延安)에 병합되어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배천조씨(白川趙氏)의 시조(始組)인 조지린(趙之 )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태조(太組 : 조광윤)의 맏아들인 덕소(德昭)의 아들로 979년(고려 경종 4, 송나라 태평흥국 4년)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은천현(銀川縣) 도태리(都台里 : 황해도 배천)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고려 현종조(顯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양유(良裕)가 덕종(德宗)과 정종조(靖宗朝)에 걸쳐 판위시승(判衛寺承)을 지내고 추의찬화익조공신(推義贊化翊祚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寺中)에 오르고 배천군(白川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배천(白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 후 양유(良裕)의 아들 선정(先正)이 1047년(고려 문종 원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은청광록 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寺中)·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옥(玉)의 아들 문주(文胄)는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고종(高宗)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져서 아들 오(傲)·진(珍) 형제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임란사충신(壬亂四忠臣)」의 한 사람인 헌(憲)이 이름을 날렸는데, 그는 응지(應祉)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율곡(栗谷) 이 이(李 珥)와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호조 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치고 통진 현감(通津縣監)에 올라, 누차에 걸친 상소(上疎)와 직간(直諫)으로 인해 왕의 노여움을 받아 한때 유배(流配)·파직 또는 벼슬이 깎이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으나 선조(宣組)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 영조(英組) 때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특히 그는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났고, 이 이(李 珥)의 학문(學問)을 계승시킨 학자(學者)로 「중봉집(重峰集)」·「중봉동환봉사(重峰東還封事)」 등을 집필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충(庶)의 아들 정호(政虎)는 광해군(光海君)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 등을 지내다가 인조반정(仁組反正) 후 지평(持平)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라 인조(仁組)가 부친(父親)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정호(政虎)의 아들 석윤(錫胤)은 인조(仁組)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올라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을 연마하고 수찬(修撰)·승지(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 한 후 효종(孝宗) 즉위년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으로 「인조실록(仁組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겸행(謙行)의 아들인 석주(錫周)는 숙종(肅宗)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역임했으나 만년에는 시주(詩酒)를 즐기며 학문에만 진력했고, 죽은 후 효행(孝行)과 청백(淸白)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이밖에 석록(錫祿)·상한(相漢)이 군수(郡守)를 역임했고, 수달(壽達)이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4,312 가구, 58,5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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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창조씨(淳昌趙氏) [유래] 시조 조자장(趙子長)은 고려시대에 호장(戶長) 을지냈다. 조자장은 趙子張으로도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대부분의 족보에 趙子長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 본관을 순창으로 한것은 고려 때 대장군에 오른 조인평(趙仁平)에서 비롯된것이며, 조인평을 시조로 기록된 문헌도 있으나 조인평은 조자장의 5세손이다.
[가문의번영] 조인평(趙仁平)은 고려 명종 7년 계룡산의 토적을 토평하고 벼슬에 올라 금오위 랑장(金吾衛 郞將)에 오르고 대장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명종 때 목사 등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긴 조유성(淳惟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사위로 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조수익(淳壽益) 등이 있다.
[계 파] 문등파(文等派) 삼고파(三顧派) 안촌파(安村派) 지곡파(池谷派) 진위파(振威派) 행정파(杏亭派)
[족보발간] -임술보 : 1802년(순조 2년) -무진보 : 1868년(고종 5년) -계유보 : 1933년 -계묘보 : 1963년 -무진보 : 1988년
[본관지] -전라북도 순창군
[기 타] [ 연락처 ] 조용락 변호사사무소 : 02-752-5545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419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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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 조씨(楊州趙氏)
양주(楊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매성군(買城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였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소(來蘇)를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견주(見州)로 승격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는 다시 양주(楊州)로 개칭한 뒤 1895년(고종 32) 목(牧)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양주 조씨(楊州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된 조 잠(趙 岑)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조선시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고려 때 사람인 군우(君祐)의 손자이며, 경질(景質)의 아들이라 전(傳)하고 있다. 후손들은 잠(岑)을 시조(始祖)로 하고 양주(楊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잠의 증손(曾孫) 계생(啓生)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올랐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다. 계생의 동생 말생(末生)은 태종(太宗)의 총신(寵臣)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세종(世宗)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선(璿)은 태종(太宗)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로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극관(克寬)은 계생(啓生)의 맏아들로 태종(太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정자(正字)·우정언(右正言)·지평(持平)·이조 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쳤고, 세종(世宗) 때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말생(末生)의 7세손 정(挺)은 충수(忠秀)의 아들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대사성(大司成)·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가문의 세력을 팽창시켰다. 한편 남(擥)의 아들인 존성(存性)은 선조(宣祖)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형조(刑曹) 및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부총관(副摠管)을 역임했으며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검찰사로서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세자(世子)를 따라 전주(全州)에 갔다 돌아왔다. 존성(存性)의 아들 창원(昌遠)은 인조(仁祖)의 국구(國舅 : 임금의 장인, 그의 딸이 인조비 장열왕후)가 되어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동생 계원(啓遠)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계원(啓遠)의 아들 7형제 중 둘째 귀석(龜錫), 셋째 희석(禧錫), 넷째 사석(師錫)과 다섯째 가석(嘉錫) 등이 뛰어나 가문의 번창을 누렸다. 한편 숙종(肅宗) 때 노론(老論) 4대신의 한사람인 태채(泰采)는 군수(郡守) 희석(禧錫)의 아들로 1686년(숙종 12)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세제(世弟 : 영조) 책봉을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켜 세제로 하여 대리청정(代理廳政)을 하게 했으나, 유봉휘(柳鳳輝)를 비롯한 소론(少論)의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자 사직하고 이어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태구(泰耉)는 우의정 사석(師錫)의 아들로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한 후 설서(說書)·문학(文學)·승지(承旨) 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고,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가서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1720년(숙종 46)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그 밖에 좌참찬(左參贊)과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한 운규(雲逵)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영순(榮順)이 유명했다. 근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영의정(領議政) 두순(斗淳)과 좌의정(左議政) 병세 (秉世)가 있다. 두순(斗順)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내고 1849년(철종 즉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실록청 도청당상(實錄廳都廳堂上)이 되어「헌종실록(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동문휘고(同文彙考)」의 찬집당상( 輯堂上)을 지냈다. 병세(秉世)는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기울어 가는 국운(國運) 앞에 충의(忠義)를 다한 명신(名臣)이다. 그는 1859년(철종 10)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高宗) 때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로 나가 탐관오리들의 비리를 논척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돌아와 대사성(大司成)에 승진되었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주청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을 만나지 못하자 민영환(閔泳煥)·이명근(李命根)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이끌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연소(聯疎)했으며, 이어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席藁大罪)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疎)와 동포(同胞)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5,462가구, 23,2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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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 조씨(玉川趙氏)
옥천(玉川)은 순창(淳昌)의 별호(別號)로서 전라북도(全羅北道)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 도실군(道實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순창(淳昌)으로 개칭하여 남원부(南原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5년(명종 5)에 다시 설치하였고 충숙왕(忠肅王) 때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에 임실군(任實郡) 영계면(靈溪面)을 병합하였다. 조씨(趙氏)는 본래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미상(未詳)하다. 옥천 조씨(玉川趙氏)는 고려에서 광록대부(光祿大夫)·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낸 조 장(趙 璋)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그의 증손(曾孫) 원길(元吉)이 공양왕(恭讓王) 때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은 옥천(玉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장(璋)의 아들 홍규(洪珪)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손자(孫子) 전(佺)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동생 여(璵)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였다. 한편 원길(元吉)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영(瑛)은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차남 유(瑜)는 전농시 부정(典農寺副正)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한 후 태종(太宗)이 유(瑜)에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명(命)했으나 고려에서 벼슬을 지낸 신하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형제가 함께 절의를 지킴으로, 그가 죽은 뒤 세종(世宗)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장사 지내고 「효자전부정조유지여(孝子前副正趙瑜之閭)」라는 명정(銘旌)을 내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유(瑜)의 아들 숭문(崇文)이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으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관련되어 아들 천산(哲山)과 함께 죽음을 당하고 뒤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가문을 빛냈다. 그외 유(瑜)의 증손(曾孫) 침(琛)은 중종(中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효신(孝臣 : 이조 참판을 역임)과 호신(虎臣 : 병마절도사를 지냄)·효정(孝貞 : 시강원 설서) 등이 이름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옥천 조씨(玉川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0,819가구, 48,6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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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 조씨(林川趙氏)
임천(林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 가림군(加林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가림(嘉林)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때 임주(林州)로 하였다가 1018년(헌종 9) 가림현(嘉林縣)으로 삼았는데 충숙왕(忠肅王) 때 다시 주(州)로 승격시켰다. 1394년(태조 3) 부(府)로 삼았다가 1401년(태종 1) 복귀시켰으며, 1403년(태종 3) 다시 부(府)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강등시켜 1413년(태종 13) 임천(林川)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삼았다. 1914년 부여군(扶餘郡)에 합(合)했다.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시조(始祖) 조천혁(趙天赫)은 송(宋)나라 태조의 손자인 유길(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전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연원(淵原)은 천혁이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을 지내다가 979년 국난(國難)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와 호서지방(湖西地方 : 현 부여군 임천지방)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고려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거란군(거丹軍)을 토벌한 공(功)으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가림(嘉林 : 임천의 고호)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천혁(天赫)을 시조(始祖)로 하여 임천(林川)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에서 이름을 날린 지서(之瑞)가 있다. 그는 감찰(監察)을 지낸 찬(瓚)의 아들로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어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충효(忠孝)로 이름을 날린 그는 1480년(성종 11) 호당(湖堂)에 뽑혀 학문을 연마했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으로 세자(世子 : 연산군)에게 풍간(諷諫)하며 학문(學問)을 진강(進講)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자 외직(外職)인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폭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학문에만 힘썼다. 사예(司藝)를 역임한 원경(元卿)의 아들 익(翊)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으며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한편 3대(三代)에 걸쳐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날린 원(瑗)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조 식(曹 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언(正言)이 되어 당시 격렬한 당쟁(黨箏)의 폐해(弊害)를 상소하였으며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역임한 후 승지(承旨)를 지냈다. 아들 희일(希逸)은 선조(宣祖) 때 과거에 급제하여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김상헌(金尙憲)·류 근(柳 根) 등과 함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시문(詩文)으로 찬탄을 받았으며,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을 강화(江華)로 호종한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그의 아우 희진(希進)은 정언(正言)·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지냈고, 특히 경서(經書)에 밝았으며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하여 「단보유고」를 남겼다. 석형(錫馨)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과거에 오를 것을 단념했다가 인조(仁祖)때 진사시(進士試)에 일등(一等)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시문(詩文)에 능해 당시(唐詩)에 정통했고 글씨는 진체(晋體)를 잘 썼다. 숙종(肅宗)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경망(景望)은 석형의 아들로, 특히 서사(書使)와 경적(經籍)에 밝았으며 서예가(書藝家)로 유명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숙종(肅宗) 때 한문소설(漢文小說)인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집필한 성기(聖期)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명택(明澤)·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명정(明鼎) 등이 유명했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위인 경호(慶鎬)는 일본 정부가 준 남작(男爵)을 거절하여 동생 병호(秉鎬)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2,511가구, 10,4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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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조씨(酒泉趙氏)
시조: 조관(趙琯)
<本貫地> 주천(酒泉)은 강원도 원주(原州) 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이다. 주요 성씨로 趙, 尹, 安씨 등이 있었다.
<氏族史의 개요> 시조 조관(趙琯)은 고려조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지냈다고 한다. 후손인 조호문(趙好問)이 성종 때 문과에 급제, 직강(直講)에 이르렀다. 문헌이 없어 세계,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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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 조씨(稷山趙氏)
직산(稷山)은 충청남도(忠淸南道)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위례성(慰禮城)이었는데 고구려(高句麗) 때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때는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高麗初)에 직산(稷山)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 천안부(天安府)에 예속 시켰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 경기도(京畿道)로 옮겼으나 중종(中宗) 때 천안군에 병합하여 지금은 천안군에 속한 직산면(稷山面)으로 남아있다. 직산 조씨(稷山趙氏)는 백제(百濟)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조성(趙 成)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稷山趙氏甲子大同譜)」에 의하면 시조 조 성(趙 成)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 제 11대 황제, 재위기간 : 기원전 32 - 7) 때 주몽(朱蒙 :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百濟)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하여 마한(馬韓)을 멸망시킨 후 백제창업(百濟創業)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白)에 이봉(移封)되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준연(俊連)과 손자(孫子) 입충(立沖)이 함께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시조의 손자(孫子) 입충(立沖)으로부터 고려 말기(高麗末期)에 이르기까지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 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합문지후사(閤門祗侯使)에 올랐던 원우(元祐)와 병부 낭중(兵部郞中) 원경(元慶),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복원(復元), 태자 첨사(太子詹事) 영원(永元), 조선(朝鮮)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한 응원(應元) 등 다섯 계통(系統)으로 갈라져서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합문지후사 원우(元佑)의 손자 방림(邦霖)이 조선 세조(世祖)가 등하는데 공을 세워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책록되었고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광보(光甫))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地)에 추증되었던 경(瓊 : 찬판 광보의 현손)의 맏아들 응형(應亨)은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역임했으며,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지낸 탁(擢 : 사정 광원의 현손)의 아들 서동(瑞東)은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임진왜란 때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있었던 영규(英圭)는 양산성(梁山城) 수비에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고 장성(長城)의 모암서원(慕庵書院)과 양산(梁山)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던 영(英)은 숙종조(肅宗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던 수(洙)와 함께 무맥(武脈)을 이었다.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유선(有善)은 유학(儒學)에 정통하여 「고정유사(考亭遺事)」와 「사우연원(師友淵源)」을 편찬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진산 군수(珍山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외 숙종(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복장(司僕將)을 지내고 영조(英祖)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던 태상(台相)은 군수(郡守)를 역임한 정휴(鼎休)와 함께 직산 조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직산 조씨(稷山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861가구, 3,4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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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조씨(眞補趙氏)
진보(眞寶)는 경상북도(慶尙北道)에 있는 지명으로 신라 초기에는 칠파화현(漆巴火縣)이라 하다가 경덕왕 때 진보현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진안현(眞安縣 : 고구려의 助 縣)과 합쳐 보성부(甫城府 : 岩城)로 개편하였다. 고려 현종 때 예주(禮州)에 편입시켰는데 왜구로 인해 그 지방을 비워 두었다가 조선 태조때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청부(靑鳧)를 합하여 청보군(靑寶郡)이라 하다가 혁파(革罷)하고 진보로 고쳐 현(縣)으로 삼았다. 1474년(성종 5) 청송(靑松)에 편입했다가 1478년(성종 6) 복구하였으며 1895년 (고종 32)에 군(郡)이 되었다. 1914년 군을 폐하고 동면과 북면은 영양군(英陽郡)에 병합되고 나머지는 청송군(靑松郡)에 편입되었는데, 그 중심지역은 진보면으로 남아 있다. 진보 조씨(眞寶趙氏)의 시조(始祖) 조 용(趙 庸)은 지린(之 : 배천 조씨의 시조)의 11세손이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운주(雲柱)의 아들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탁월(卓越)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삼사 도사(三司都事)·계림부 판관(鷄林府判官) 등을 거쳐 예조 총랑(禮曹摠郞)에 올랐다. 1392년(태조 1)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 야주군(夜珠郡)에 은거(隱居)하자 조정(朝廷)에서 그의 절의(節義)를 가상(嘉尙)히 여겨 진보군에 봉하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증직(贈職)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진보(眞寶)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 용(庸)의 맏아들 담(聃)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고, 둘째 아들 이(耳)는 함경도 평사(咸鏡道評事)를 역임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증직되었다. 한편 이(耳)의 아들 청(聽)이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한 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증직되었다. 한편 이(耳)의 아들 청(聽)이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으며, 청의 아들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문행(文行)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낸 동생 무행(武行)과 함께 진보 조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보 조씨(眞寶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68가구, 7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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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 조씨(太原趙氏)
태원(太原)은 중국(中國) 산서성(山西省)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태원분지의 중심지이며, 근대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였고, 사적(史蹟)이 많은 곳이다. 태원 조씨(太原趙氏)의 시조(始祖)는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장사랑(將士郞)에 오른 조 만(趙 萬)으로 전하고 있으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태원조씨족보(太原趙氏族譜)」에는 만(萬)이 난을 피하여 함경도 북청지방(咸鏡道北靑地方)에 가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본관(本貫)을 태원(太原)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만(萬)의 아들 을생(乙生)이 장사랑(將仕郞)에, 손자(孫子) 경종(敬宗)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으며, 경종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희령(熙寧)이 참봉(參奉)을 지냈고, 막내 희형(熙亨)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러 명문인 태원 조씨(太原趙氏)를 유명하게 하였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세운(世雲)은 참봉을 지낸 희령(熙寧)의 아들이며, 동생 세복(世福)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낸 옥룡(玉龍)·윤헌(允憲)·호상(豪尙)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원 조씨(太原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49가구, 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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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 조씨(平山趙氏)
평산(平山)은 황해도(黃海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에 평산으로 바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고종(高宗) 때 군(郡)이 되었다. 평산 조씨(平山趙氏)의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며, 시조(始祖) 조응선(趙應善)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평산(平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계대(系代)를 알 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시조의 배소지인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낸 조충백(趙忠白)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충백(忠白)의 아들 복린(馥麟)이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냈고, 후손 발(發)의 아들 호문(好問)은 1480년(성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그 후 평산 조씨는 많은 학자(學者)를 배출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산 조씨(平山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285가구, 5,5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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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조씨(平壤趙氏)
평양(平壤)은 평안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로서 역사상 왕조에 따라 왕검성(王檢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서경(西京), 호경(鎬京), 유경(柳京) 등으로 불리웠고,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의 3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이기도 했던 곳이다. 고려 태조때 서 경(西京)이라 부르다가 광종때 서도(西都)로 개칭되었으며 목종때 와서는 호경(鎬京)이라 하였으나 1369년(공민왕 18)에 만호부(萬戶府)를 두고 후에 평양부(平壤府)로 개칭하였고, 1895년(고종 32) 전국을 13도로 분할함에 따라 평안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의 시조 조 춘(趙 椿)은 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에 이르렀고 중국으로 건너가 남송(南宋)을 도와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그의 현손 인규(仁規)는 고려조에 제교(諸校)가 되고 이어서 장군(將軍)에 오른 뒤 성절사로 원나라에 30여 차례나 사신(使臣)으로 왕래하였다. 그의 둘째 딸이 충선왕비가 되자 국구(國舅)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에 올라 수태위판중서문하이병부사(守太尉判中 書門下吏兵部事)·태자태사(太子太師)·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壤部院君)에 봉해져서 충렬왕의 명으로 선대의 본관인 상원(詳原)을 평양(平壤)으로 이적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규(仁規)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서(瑞)가 충렬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들 연(璉)과 셋째 아들 연수(延壽)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넷째 아들 의선(義旋)은 불문출가(佛門出家)하였고, 다섯째 아들 위(瑋)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연(璉)의 손자 준(浚)은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대호군(大護軍), 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을 거쳐 최 영(崔 瑩)장군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개국일등공신에 올라 제1차 왕자의 난 때 다시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으로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특히 준은 시문에 탁월하여 하 윤(河 崙)등과 함께「경제육전(經濟六典)」과「송당집(松堂集)」을 집필하여, 고려의 절신(節臣)인 동생 견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견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벼슬이 안렴사(案廉使)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에 은거했다. 이태조(李太祖)가 그에게 개국공신을 책록하고 친히 찾아갔으나 불사이군의 충절로 끝내 불취했다. 그외 태종(太宗)의 동서로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진 박(璞)은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대제학(大提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명종때의 학자 형제인 성(晟)과 욱(昱)은 호(瑚)의 아들로 지평(砥平)의 운계서원에 함께 제향되었다. 이밖에 태종의 사위였던 대임(大臨)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후 학문에만 전념한 수(須), 정조(正祖)때 무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심태(心泰) 등이 명문 평양 조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양조씨는 남한에 총 8,451가구, 35,0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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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조씨(豊壤趙氏) [유래]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당하여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신라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고려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가문의번영] 고려때의 조운걸은 1357년(공민왕 6년)에 문과급제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공신에 올랐고 그후 3도안찰사를 지내고 1374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은거하고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등의 작품을 남겼다.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것은 조선 숙종이후. 상신 7명, 대제학 4명, 공신 7명, 장신 7명을 냈다. 숙종 때 조도보는 조상경, 조상강, 조상기 등 아들 3 형제와 손자 8명이 있었는데 이들중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이들이 영조, 정조시대에 풍양조씨의 세력 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 학당 조상강은 영조때 병조판서를 네차례, 이조판서를 다섯차례 지냈다. 그의 증손자 조만영(趙萬永)은 순조의 외할아버지로 이때부터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엄은 조만영의 할아버지이다. 그밖에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효종 때 좌의정에 올랐던 조익(趙翼), 숙종 때의 우의정 조상우(趙相愚), 영조 때의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영조 때의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영조 때의 우의정 조재호(趙載浩) 등이 회양공파이다.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조복양(趙復陽), 왜정때 상주에서 궐기하여 싸우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순국한 조동범 등이 있으며, 현재 활약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과 조순 전부총리도 이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계 파] 시조 조맹의 후대에서 조지린(趙之藺)을 중조(中祖)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조신혁(趙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크게 나누어지고 이들을 각각 1세조로하고 있다. 이 2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 아래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상신 6명, 문형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어 벼슬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 파는 나중에 한평군파(漢平君派 : 이른바 노론집)와 청교파(靑橋派 : 이른바 소론집)로 나누어지는데,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조만영의 딸이 문조(익종)와 결혼을 하고,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년)에는 조병현(趙秉鉉)이 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집성촌] 경북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 마을의 대부분이 호군공파 후손들로 20여대를 이어 살고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퇴색한 단청과 이끼낀 기와집이 3백년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 한가운데 낮은 야산 밑에 자리한 양진당(養眞堂)은 난중일기를 쓴 조청이 여생을 보냈던 99칸 기와집으로 호군공파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2년에 문중에서는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지정받고 보수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본관지] 풍양 : 현재의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의 옛 이름 [기 타] [ 연락처 ] 조봉구 씨 : 02-392-4281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09,43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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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조씨(河東趙氏)
시조: 조관(趙琯)
<本貫地> 하동(河東)은 본래 신라의 한다사군(韓多沙郡)이다. 주요 성씨로 趙, 鄭, 董씨 등이 있었다.
<氏族 개요> 시조 조관(趙琯)은 고려조에 검교금오위대장군(檢校金吾衛大將軍)을 역임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동(河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0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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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조씨(漢陽趙氏)
한양조씨의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 용진현(德源府龍津縣)에 세거해온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은 조선이 개국하자 한성(漢城)으로 이 거하여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고, 많은 명신과 훈신·유현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한양 조씨는 지수(之壽)의 후손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인재의 계통과 총관을 지낸 휘의 계통으로 대별되어, 서로 계대를 다르게 하며 보첩도 따로 만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휘(暉)의 아들 양기(良琪)가 1281년(충렬왕 7)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일본정벌에 참가했고 21세 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받았다. 양기의 아들 돈(暾)은 1356년(공민왕 5) 쌍성수복 작전 때 공을 세워 예빈경이 되고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을 대파한 후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1375년(우왕 1) 삼중대광으로 용성군(龍城君)으로 봉해졌다. 돈(暾)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 중 맏아들 인벽(仁壁)은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왜구를 토벌하였고 정화공주와 결혼하여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으며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판도판서(版圖判書) 인재(麟才)의 증손이자 판서 세진(世珍)의 아들인 영무(英茂)는 조선조에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한산군에 봉해졌으며 1405년(태종 5)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임한 후 한산부원군에 진봉되어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조선조에 와서 한양 조씨의 가문을 더욱 빛낸 사림파의 영수 광조(光祖)는 개국공신 온(溫)의 현손으로 14세 때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원강(元綱)을 따라가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중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있으면서 신진사류인 30대의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켜 남 곤·심 정 등이 주동한 기묘사화에 피화되어 능주(綾州)에 유배, 배소에서 죽음을 당했다. 율곡 이 이는 김굉필·조광조·정여창·이언적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칭송하며 평생토록 숭배하였다 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중종 때 대사간(大司諫)·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위한(緯韓)과 그의 동생으로 시문에 능한 찬한(纘韓)이 유명했다. 공근(公謹)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위성공신에 오르고 한흥군에 봉해졌으며, 인조 때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경(絅)은 청백리에 녹선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장령 중여의 아들 종저(宗著)는 사학·천문·산수·의학에까지 박통하여 문명을 날렸으며, 충정공 인옥(仁沃)의 아들 뇌( )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순생(順生)과 그의 아들 명(銘), 시인 수삼(秀三), 화가로 이름난 중묵(重默) 등이 유명했는데, 수삼(秀三)은 현종 때 문장과 시로써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서예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손자 중묵(重默)은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희원 이한철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이렇게 조선조에서 세도를 떨친 한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나라와 가문을 위해 공헌했다. 독립투사인 맹선(孟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매국칠적을 죽이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양(平壤)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독립단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에 힘써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인원(仁元)의 아들인 병옥(炳玉)은 대학생으로 한인회·흥사단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경무부장(警務部長)으로 치안유지에 힘썼다. 그 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이 민주당으로 개편될 때 최고위원이 되어 야당을 영도했으며,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 육군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저서로「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 등이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지훈(芝薰)도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의 선구자로 민족적 정서운동에 앞장섰으며, 종신토록 대학교단에서 문학을 피력하였고, 사회활동에 이바지함이 지대하여 후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이 밖에도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시킨 한양 조씨는 선현의 유지에 맥을 더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양 조씨는 남한에 총 64,881가구, 273,4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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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 조씨(橫城趙氏)
횡성(橫城)은 강원도(江原道) 남서부에 위치하는 지평으로, 고구려 때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라 부르다가 신라 때에 황천(黃川)이라 고치고 삭주(朔州 : 춘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다시 횡천이라 일컫고 종전대로 삭주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원주(原州)의 속현(屬縣)으로 하였고, 1389년(공양왕 1)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고, 1414년 횡천과 홍천이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횡성으로 개칭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원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다시 현이 되었고, 1760년(영조 36)에는 원주로부터 토포사(討浦使)가 이설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횡성군으로 개칭되었다. 횡성 조씨(橫城趙氏)의 시조(始祖) 조 익(趙 翌)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첨(瞻)의 아들로 958년(고려 광종 9)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횡성(橫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익(翌)의 아들 승린(承藺)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손자(孫子) 윤익(潤益)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증손(曾孫) 주조(周祚)는 중서승(中書丞)에 이르렀다. 영인(永仁)은정당문학(政黨文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거쳐 개 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했다. 한편 영인의 아들 충(沖)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동지공거(同志貢擧)를 겸임하고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거란군(渠丹軍)의 침입을 물리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변은 충(沖)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로 동생 해(咳)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지근(支瑾)의 아들 무(茂)가 벼슬을 지내고 공(功)이 있어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으며, 후손 인(隣)은 부호군을 지냈다. 선조(宣祖)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목(穆)은 대춘(大椿)의 아들로 벼슬이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일생을 학문(學問)에만 힘써 대학자(大學者)로 존경을 받았고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외 인물로는 성립(誠立)이 공주목사(公州牧使)·대사간(大司諫)·수찬관(修撰官) 등을 역임했으며 식(湜)은 공조참의(工曹參議)·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 등을 지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석동(錫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횡성 조씨(橫城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6가구, 4,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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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조씨(興陽趙氏)
시조: 조윤서(趙允瑞)
<本貫地> 흥양(興陽)은 전남 고흥군(高興郡)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이다. 주요 성씨로 趙, 柳, 李, 張씨 등이 있었다.
<氏族 개요> 조윤서(趙允瑞)는 조벽(趙壁)의 아들로 조선조 명종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냈다고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나와있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5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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