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느 국립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자연대 교수들과 총장님의 간담회가 열렸다. 순수 기초과학의 연구와 교육에 힘쓰는 자연대 교수들의 고충과 애로 사항을 총장님께 직접 전달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때 내가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자연대 운동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한 높은 분들의 결정에 대해 매우 속상해 하고 있었으므로 며칠 전부터 잔뜩 벼르고 있었다.
간담회가 시작되자 여러 선생님들이 ‘연구 공간 확보’ 같은 매우 고매하고 훌륭한 말씀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내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총장님, 수학과의 강석진입니다. 자연대 운동장이 없어진다는데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저 뿐만 아니라 자연대와 공대의 교수? 학생들에겐 자연대 운동장이 연구와 교육에 필수적입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와아~~” 하고 웃어댔다. 나는 진지하고 심각한데 재미있다는 듯 웃는 인간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총장님, 이런 식으로 운동장을 하나 둘씩 잡아먹다가는 이 학교가 순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총장님께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질문 하셨다.
“순대가… 어느 대학을 말하는 겁니까?”
순간 대형 강의실이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졌다. 당황한 내가 더듬거리며 보충 설명을 드렸다.
“그게요… 대학이 아니라요… 돼지 창자에 고기가루와 당면 조각 같은 걸 다져 넣은 건데요….”
간담회가 열리던 건물은 지진이라도 난 듯 세차게 흔들렸고, 총장님도 나도 얼굴이 벌개져서 씩씩거리다가 그만 다른 ‘고매한 의견’을 듣는 순서로 넘어가고 말았다.
요즘 그 국립대학교에서는 총장배 축구대회가 벌어지고 있다. 무려 55개 팀이 출전했는데 운동장은 겨우 1.6개(대운동장+기숙사 운동장) 뿐이다. 그야말로 순대 속의 고기가루처럼 축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그때 그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니, 여기가 바로 순대 아닙니까?”
그래도 순대 속의 학생들은 한없이 즐거워 보였다. 축구를 하고 있었으니까….
/한국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강석진
[강석진홍진박사 공저 수학책 美 대학원생 교과서로 출판]
고등과학원 수학부 강석진 박사와 홍진 박사가 공동으로 지은 수학책 ‘양자 그룹과 결정기저 소개’(Introduction to Quantum Groups and Crystal Bases)가 미국 수학학를 통해 대학원생용 수학 교과서로 출판됐다.
아시아권 학자의 저서 가운데 미국 수학회에서 펴내는 교과서로 사용된 것은 강박사와 홍 박사가 처음이다.
6일 고등과학원에 따르면 수학회 교과서로 사용되는 두 교수의 책에는 양자군과 표현에 대한 기본이론, 결정기저 이론의 핵심과 응용, 수리물리학에 접목되는 부분, 조합론과의 연관성등이 수록돼 있다.
강 박사는 “고급 수학을 접해 본학부생, 대학원생, 그리고 직업 수학자들 모두에게 양자군과 결정기저 이론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탐구] 서울대 떠나는 ‘축구공 위의 수학자’ 강석진 교수(上)>>
"학자의 본연의 길을 가는 것"
서울대 수리 과학부 강석진(40)교수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 약 2주후인 7월부터는 서울대 교수가 아니다. 남보기엔 아쉬울 것 하나없는 국내 최고명문대학의 자랑스러운 교수직을 그만두고 고등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유서깊은 간판지상주의 사회에서 내린 그의 결정은 일반인들에게 먼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1999년 과학기술부로부터 ‘젊은 과학자상‘까지 받았던 국내수학계의 주목받는 대표주자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모교의 자연대 축구부 감독직을 본업 못지않게 사랑하던, 대단한 축구광이었다. 누구보다 팀웍과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던 그가 평생 봉사의 다짐을 포기하고 8년만에 모교를 떠나게 된 것은 분명 심상치않은 변화였다.
왜 그는이삿짐을 꾸렸을까. 6월 14일, “이런 일로 언론에 노출되고 싶지는 않다”던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처럼 밖으로는‘명랑쾌활’을 가장하는 그였지만, 그의 씩씩한 웃음이 오히려 쓸쓸한 여운을 남겼다.
학자도, 서울대 동문도 아닌 이쪽에게 말이다. 우선 그와의 이야기를 옮겨적는다.
강교수의 대답이 다소 길더라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의 이야기는 정말 그 자체로 길었다. 가슴답답한 무엇인가를 안고있는 사람들에게서 영낙없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행여 다른 교수들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몹시 조심스러워 하더라는 것도 덧붙여야겠다.
-언제부터 생각했던 일인가?
“고민은 처음부터 많았다. 94년 이곳에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앞이 캄캄했다. 미국 노틀담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왔는데, 닥친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전임자보다 적은양이라고 하는데도 그랬다.
그 갖가지 행정업무에 파묻혀 정작 학자로서 연구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는데 대한 갈등이 오래도록 누적돼 왔다.
그러다가 99년부터 1년간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돌아온뒤 결정적으로 내진로를 재고하게 됐다. 함께 공부했던 외국의 동료학자들은 내가 여기서 잡무에 묻혀있는 사이 이미 내가 뒤따라잡기도 벅찰만큼 계속적인 연구로 큰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에서 보낸 1년동안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만회하려고 애썼다. 이 기회가 아니면 한국에선 기본적인 리서치도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1년을 그야말로 피터지게 보냈다.
골프 한번한 일 없고, 집사람은 도대체 미국까지 와서도 왜 이래야 되냐고 속상해 할 만큼 치열하게 보냈다. 나중엔 찾아온 동생까지도 연구시간을 뺏는다는 생각에 밉기까지 했다.
더 답답한 일은 그렇게 미국에 있는 동안 이미 머릿속에 다 해결해 둔 과제들도 다시 학교에 돌아오자 단지 그걸 논문으로 옮길 시간을 낼수가 없어 6개월간 손한번 못 대보고 지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환경에선 내가 원하는 수준의 연구를 영원히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돌연사도 남의 얘기같지 않았다. 95년부터 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해 96년부터 위염, 불면증을 앓아왔고 작년엔 지방간까지 생겼다.
두달만에 13kg이 빠지기도 했다.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엔 내가 왜 공부를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자꾸 나를 변명하는데만 익숙해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연구시간을 빼앗기는 일들이란 주로 어떤 것인가?
“다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시시콜콜한 일들이 많다. 전공강의 자체도 상당한 준비와 시간을 요하는일이지만, 그외에도 갖가지 학회에다 연구비를 신청하거나 프로포절을 쓰는 일, 어떤제도가 바뀔 때마다그 제도가 바뀌는데 대한 사전 자료조사와 분석,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학생들과 상담하는 일등 매일 무슨회의나 문서작업들이 끊임없이 밀어닥친다.
내가 소속된 위원회만도 여러가지다. 방학땐 방학대로 또 맡겨지는 일이 있다. 처음엔 과기대나 포항공대로 옮길것을 생각했다가도 그곳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상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방법은 강의를 포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그렇다.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교수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정말 초인적으로 버티는 것이다. 서울대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발전한 건 교수들의 헌신적인 공헌과 희생 덕분이었음을 알아줘야 한다.
다만 나는 더 이상 초인노릇을 감당할 수 없기에 떠나는 것이다. 남들은 왜 서울대가 세계수준에 미치지 못하냐고 비난하지만 서울대 교수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 뭔지 아는가?
그들도 세계수준이 뭔지 안다. 어떻게 하면 그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그 방법도 훤하게 안다. 그들중 상당수가 그 스스로 얼마전 그 세계무대의 스타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뻔히 방법이 보이는데도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예 모르면 그런 갈등도 없겠지만, 할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신도 있으며 의욕도 있는데 당장할 수가 없으니 더 초조하고 고통스럽다. 가끔 술자리에선 절친한 교수들이 내게‘배신자’ ‘도망자’라는 농담도 하지만, 아무도 정색으로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서로가 잘 알기에 차마 붙들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전 BK21 일로 찾아온 외국의 교수들은 우리더러 어떻게 그토록 전쟁처럼 사는지 놀랍다며 ‘무엇보다 교수들이 먼저 전사할까봐 가장 걱정스럽다’고도 했다.”
-국립대 교수들의 낮은 연봉문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자리를 옮기는데 현실적인 대우문제가 작용하진 않았는가?
“전혀 무관하다고만은 할 수없다. 하지만 돈 때문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나는 연구비나마 서울대내에서도 잘 받는 축이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좋은 처지이면서 왜 나가려고 하느냐’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나는 학자다. 연구로서 인정을 받고 싶다. 사실상 지금까지도 국내에선 남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공헌했다고 자부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연구만 마음껏 할 수있다면 돈이야 먹고 살 만큼만 받아도 참을 수 있다. ‘그렇게 돈이 중요하면 돈많이 주는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느냐’고 우리끼리 흔히 말하기도 했다.
대우가 열악한데도 왜 서울대에 교수들이 남아있는지 그 이유를 한번쯤 생각해봐줬으면 좋겠다. 나 역시 피치못해 옮기기는 하지만 당장 얼마만큼의 성과가 나타날지는 장담할 수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지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되리란 것만큼은 확실하다.
-현재 상황에선 전혀 대안이 없다는 얘기인가?
“업무가 대폭 줄거나 교수들이 많이 충원되지 않는 한 현재의 환경에선 별 방법이 없어 보인다. 개인적인 노력과 체력엔 한계가 있다. 그간 어떻게든 연구시간을 확보하려고 나름대로 많이 애썼다. 연구실에 들어서면 무조건 핸드폰을 끄고 전화선도 뽑는게 내 습관이었다.
방해를 받지않기위해서다. 주말엔 완전히 연락두절한 채 전혀 엉뚱한 곳으로 잠적하기도 했다. 어떨땐 연구실 불도 끄고 문도 잠근채 어둠속에서 숨죽이고 공부를 한적도 있지만, 그 와중에도 불꺼진 연구실 문을 두들겨대며 가지않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과학원은 어떤 곳인가?
“아인슈타인박사를 비롯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도 여럿 배출한 프린스턴의 전문연구기관을 모델로 우리나라 과기부에서 세운 카이스트 부설연구기관이다.
설립 5년째를 맞는데, 국내에선 최고의 연구환경이다. 그곳에 가면 정규강의가 없기 때문에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할수 있다. 사실 학생들과 헤어진다는게 나로선 가장 아쉬움이 크다.
그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 내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잘 맞았고, 강단에 서지 않는 내 인생은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내가 강의없이 얼마나 잘 버틸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는건 사실이다.
-얼마전 강 교수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면 서울대를 등진다기보다는 오히려 떠나는 시점에서야 밝히는 애정고백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서울대를 바라보는 외부사람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것 같은데...
“내가 떠나는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사유에서 내린 결정이다. 누가 뭐래도 서울대 자체는 그 구성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에 의해 그간 많은 발전을 해왔고, 지금도 열심히 잘 하고 있으며 희망도 있다.
다만 여건때문에 그 속도가 외부의 기대치만큼 이르지 못하는 점은 안타깝다. 그런데 언론이나 외부 사람들은 서울대에 대해 웬지 모를 적대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관련된 모든 보도나 여론이 마치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하찮은 수준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그어떤 통계자료든 그결론은 언제나 서울대가 멍청하거나 나태하다는 식이다. 교수들부터가 마치 타대학보다 대단한 특혜를 누리면서도 연구비만 축내며 판판이 노는 후안무치의 인간들처럼 나오는가하면 최근엔 서울대 학생들까지 머리 나쁜 저능아에다 놀기만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보도되는 걸 보았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건 서울대생만의 얘기도 아니고, 그자체도 교육정책의 실패가 낳은 결과다. 본질은 놔두고 죄없는 학생들에게 또한번 고통을 주었다. 서울대의 국제학술논문인용색인(SCI)만 해도 최근 전세계 55위 수준이라며 한심해하지만 내가 처음 왔을땐 800등쯤이었다.
불과 몇년만에 이만큼 올랐으면 누가봐도 놀라운 발전이다. 더구나 이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그정도까지 올랐다면 나름대로 사력을 다 한것이다. 그런데도 이런점을 그대로 인정해주기는 커녕 여전히 ‘무능한 학교와 학생, 교수‘로 이야기가 끝난다.
우리는 변하고 있는데 왜 언론이나 여론의 결론은 8년전이나 지금이나 늘 똑같은지 상식적으로도 이상하지 않은가. (지면상 각 사항에 대한 그의 항변을 다 실을 수 없어 아쉽다. 통계자료에 빗댄 여론의 비난이 왜 부당한 몰매로 비치는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사실상 설득력이 있었다.)
이건 생산적인 채찍질이 아니다. 차라리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면 훨씬 좋은 조건이 보장됨을 알면서도 굳이 이곳을 지키며 나름대로 국가대표급 학교로서의 위상을 높이려고 눈물겹도록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줬으면 한다.”
-축구 얘기를 하자. 재학때부터 서울대 자연대 축구부에서 뛰기 시작해 현재도 감독으로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서울대를 떠나도 축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할 것인가?
“나는 자연대 축구부를 떠나는게 아니다. 비록 감독은 못 맡겠지만 앞으로도 일주일에 한번은 여전히 축구부에 올 것이다. 달라질게 없다.
오히려 옛날보다 더 자주 축구를 즐길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축구를 하기 위해서라도 낙성대 집에서 이사할 생각이 없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평생 서울대에 몸바치겠다고 일부러 그 부근에 집을 얻느라 별별 고생을 다 해서 찾은 집이었다. <계속>
<<인간탐구] '축구공 위의 수학자' 강석진 교수 (下)>>
축구에 맺힌 한, 수학 풀듯 풀어가
처음 그와 만나기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매번 그의 첫 응대법은 이런 식이었다.“ 실례지만....” “실례하십시오.” “아침부터 죄송하지만,...” “아침부터 죄송하십시오.”
알고보니 유전이었다. 대학시절 친구 하나가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부친이 받은 적이 있다. “여보세요. 거기 석진이네 집인가요?” “아니오. 여긴 내 집이오.”
자연대 축구부의 송별회 자리에서도 ‘퇴임말기’를 맞은 자칭 ‘조폭두목’의 일장훈시는 남달랐다.
“공식적으로는 떠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나더러 ‘전(前) 감독’이라고 부르는 놈만 있으면 죽을 줄 알아! 앞으로도 내 이름은 영원히 강 감독이다, 알겠냐!” 그날도 약 1주일간의 중국출장후 귀국하자마자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부리나케 운동장부터 달려나온 강 감독이었다.
서울대에서 이적하는 프로수학선수 강석진(40)교수. 그가 얼마나 지독한 축구광인지는 익히 알려져있다. 5년전 ‘축구공 위의 수학자’란 책까지 직접 써서 스스로 공표한 바가 있다. 제목만 그럴듯하지 사실상 수학자 얘기보다는 축구공 얘기로 도배한 글이다.
평소 행동거지도 ‘교수용’이 아니라 ‘축구감독용’이다. 복장부터가 당장이라도 시합에 뛰어들 태세다. 운동모자에다 깡충한 반바지, 배낭과 운동화차림으로 온 교내를 활보한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온통 생채기들로 화려하다. 일부러 그것들을 봐달라고 다리를 드러낸게 아닌가 의심마저 들게 한다.
그나마 배낭속에 축구공을 담고 다니지 않는게 다행이다. 얼굴도 동안인데다가 도무지 학자티가 나지 않다보니 엉뚱한 오해도 받는다. 서울대에 부임한 초창기 몇해 동안엔 조교인줄 알고 따라와 ‘시험문제를 좀 가르쳐달라’며 떼를 쓰다 혼나고 간 신입생들도 많다.
약골에서 축구광으로 변신
어릴때만해도 운동 근처엔 얼씬하지도 못했다. 마음 여리고 겁 많은 약골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겐 능수능란한 팽이치기나 연날리기, 공차기 종목조차 단 한가지도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었다. 하기만 하면 넘어지거나 엉키기 일쑤, 아무도 자기편에 끼워주지 않았다.
가족 내력이기도 했다. 집안을 통틀어 책벌레만 많았을 뿐 운동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전 성균관대 교수 강신항씨, 어머니는 전 성신여대 교수 정양완씨, 그외 15분차이로 12대 종손의 자리를 놓친 쌍둥이 동생이나 삼촌 등 온통 교수들로 집단을 이룬 학자집안이다.
특히 아버지는 타 대학 학생들까지 몰려와 북새통을 이룰만큼 호쾌한 명강의로 이름난 국어학자였지만 가정에선 더없이 무서운 사령관이었다. 새벽 5시반의 아침 식사를 비롯 철저한 스파르타식으로 전 가족을 이끌었다.
그런 아버지 아래 동생은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장남에다 종손인 그는 갖가지 일탈 전력으로 오래도록 부모님 속을 썩혔다.
초등학교 2학년때 우연히 아버지의 학과 조교가 라디오 농구중계를 듣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스포츠란 것을 알았다.
당시 제5회 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 마지막 날,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조교로부터‘농구엔 신동파, 축구엔 이회택’이란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축구와 이회택의 이름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년 뒤 직접 TV에서 지켜본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은 더욱 그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건 운동경기가 아니라 거의 한편의 영화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브라질 공격대앞에 장렬히 몸을 던지며 그 아찔한 문전 골을 기어이 걷어낸 뒤 품안에 공을 꼭 껴안고 파란 잔디위에 쓰러져 있던 이탈리아의 골키퍼.
일찍 한자를 깨친 것도 신문에 나온 축구선수의 이름을 외다보니 생긴 결과였다. 예나 지금이나 외는데는 도사. 대학때까지도 웬만한 종목의 세계 랭킹 순위는 줄줄 외고 다녔다.
한때 부모님이 대만에 계실 때엔 당시 마음의 우상이었던 포르투갈의 ‘검은 표범’ 에 우세비오를 흠모하다 못해 자신의 편지에까지 ‘강 에우세비오 올림’이라고 개명해 편지를 올렸다가 부모님이 아들 편지도 몰라보는 사태까지 만들었다.
한달 급식비를 빼돌려 축구공을 사느라 때아닌 ‘결식아동’도 되어보았다. ‘월간 축구’라는 잡지를 보려고 그것이 비치된 은행에서 월례행사로 죽치고 앉아있는가 하면, 매일 방과후마다 동네 아이들과의 축구대결도 모자라, 밤이면 밤마다 방에 이불을 펴놓고 다이빙 연습을하며 혼자 뿌듯해 하기도 했다.
신통할만큼 학교성적은 언제나 최상위권이었다. 이를테면 같은 시간을 공부하고도 유난히 집중력이 높은, 소위 ‘상위 몇퍼센트의 선택받은 소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험성적이야 어떻든 아버지에겐 환영을 받지 못했다. 맨날 축구공만 껴안고 사는 아들에 대해 부친은 ‘머리만 믿고 노는 놈이 더 나쁘다’며 더 무섭게 나무라셨다. 당시 흔치않던 TV를 어렵사리 장만했을때도 호시탐탐 축구중계만 노리는 장남을 보자 가차없이 벽장안에 던져넣어버리셨다.
오로지 축구선수가 되겠다던 꿈을 결국 포기한 건 가족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상 한계를 보면서부터 였다. 아무리 연습해도 타고난 축구재목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땐 당시 유럽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요한 크루이프 선수의 백넘버 14번까지 베껴 달고 나섰지만 이미 학교대표팀 선수들중에서도 후보로 밀려나 있었다. 삼선중학교 축구반 시절엔 1년에 한차례 밖에 없는 공식대회마저 아예 출전 엔트리에 끼지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제2의 펠레가 되겠다던 꿈이 문전에서부터 꺽이면서 엄청난 사춘기의 열병을 앓았다.
축구 포기하고 수학으로 진로 선택
다행히 또다른 출구가 나타났다. 중학교 2학년때 수학공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배운 공식들과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공부라기보다 즐거운 게임이었다.
특히 좋은 수학선생님과 모 여중 수학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친구로부터 친절한 ‘코치’까지 받아 빠른 속도로 일취월장했다. 수학점수가 좋으면 무엇보다 신이 났다. 축구에서 받은 상처가 수학에서 치료됐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외손답게 문학적인 재능도 드러내던 고등학교 시절엔 그야말로 좌충우돌로 지냈다. 이런저런 우연에 휘말려 난데없는 싸움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진로를 정할때쯤 긴 고민끝에 결국 축구를 포기하고 수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수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스포츠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따라붙었다. 본 학업에다 대학신문 기자, 면목동 야학 교사로 분주히 대학생활을 보내는 중에도 3학년때 당시 국내에 하나뿐이던 권투전문잡지사를 찾아가 번역 아르바이트겸 스포츠 전문기자의 꿈을 새롭게 키우기도 했다.
원래는 원문번역만 해도 될 것을 자신이 알아낸 주변 정보들까지 덧붙여 재미있게 써내자 꽤 호평을 받았다.
서울대 대학원 1년을 맞을때 쯤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미국 유학길에 나섰다.
예일대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는 동안, 그러나 수학도의 길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파고 들면 들수록 너무나 어려워 난생 처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해보았다. 이미 축구는 잠정 중단중이었다.
평소엔 하루 다섯시간 꼬박 앉아있기도 힘들 것 같던 공부를 박사학위 무렵엔 하루 열시간이상 미친 듯이 매달려 있었다.
지도교수는 ‘이따금 차라도 마셔가며 공부하라’고 충고까지 했다. 그렇게 무서운 집중과 노력으로도 쉬 넘지 못하는 것이 수학의 벽이었다. 어떤 것은 한달만에 풀리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세계적인 대학자들 조차 350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풀어낸 수학문제도 있었다.
힘들때마다 ‘축구를 했을때 처럼만 열심히해보자. 그래도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그때 포기하자’며 애써 용기를 냈다. 그 와중에 어느날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는 충격처럼 다가왔다. 다들 어려운 공부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상황에서 서로를 위로하던 중이었다.
누군가 ‘어쩌다 우리는 이 어려운 수학을 공부하게 됐을까’란 질문을 던져놓았다. ‘아름답고 깨끗하니까’ 등 그저 그렇고 그런 대답들이 흘러나오더니 다시 ‘그렇지만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는 한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듣기만하던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수학이 어렵기 때문에 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어렵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힘겨운 수학공부 도전정신으로 이겨내
그때까지의 고통이 순식간에 짜릿한 도전욕으로 바뀌었다. 쉽지않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이다. 공부가 주는 고통은 지금도 적지 않지만 그래서 그는 더 맹렬히 싸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일대를 나올 때쯤엔 전교를 통틀어 총 6명에게만 수여하는 Teaching Prize를 받기도 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전임강사를 거쳐 노틀담 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했다. 예의 활달한 기질로 강의때마다 학생들의 인기를 얻었다. 마침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곳의 교수들까지 대거 미국 대학들로 몰려나와 치열한 자리경쟁이 벌어지던 상황이었다.
그 어려운 경쟁속에서 차지한 노틀담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갑자기 고국에서 일하겠다고 하자 교수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서울대에 가면 이곳보다 월급이 많은가? 아니면 수업시간이 이곳보다 적은가?’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전부 아니라고 하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뿐이었다.
유치할만큼의 ‘애국심’과‘충성심’ 하나로 짐을 싸들고 돌아왔지만 대학의 현실은 생각보다도 더 힘겨웠다. 이후 8년만에 평생 봉직을 결심했던 서울대를 떠날때까지 그간의 심경이나 과정은 지난번 이야기에서 밝힌 바와 같다.
서울대 수학과에서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하마터면 이 ‘조폭두목’ 강 교수도 울음을 터뜨릴뻔 했다. 강의가 끝난 뒤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던 학생들은 그를 위해 가슴 찡한 이별의 선물과 축하파티를 몰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래도 헛 살지는 않았구나, 학생들에게 보기 흉한 선생은 아니었구나,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습니다.”
소속이 바뀌는 마당에도 오히려 장기집권의 권력욕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강 감독으로부터 자연대 축구부원들은 그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얘기가 있다.
‘반칙을 쓰지 않고도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우리가 혼 내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줘라! 비겁하게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공격찬스를 만들어라!’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기다린다’는 말과 ‘비겁하다’는 말은 그의 사전에 있어 동의어다. 이만하면 그의 이적도 쉬 이해될 것이다. 회식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총감독 김명환 교수는 넌지시 협박도 건넸다.
축구라면 강 교수 못지않게 극렬분자인 그는 1년간 미국에 건너가 있던중 강 교수로부터 노마크 찬스로 감독직을 기습탈취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더좋은 학자가 되겠다고 가면서 만약 거기에 간 뒤에도 제대로 연구 안 하고 딴 짓이라도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송별회인지 출정식인지도 모를 술자리가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