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 속에서 천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수도로서 문화의 꽃을 피워온 경주!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중에서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는 6학년시절 경주를 찾았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그 때에는 친구들과 노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천방지축으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기에 바빴으니까.
이렇게 경주는 초등학교시절에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 코스로 많이 찾는 여행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다. 그 뿐만 아니라 경주는 신라시대의 왕릉, 안압지와 포석정 등 신라, 통일신라시대의 귀족 생활을 보여주는 유적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경주는 불교 유적이 굉장히 많아서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메카’로서의 역할을 하는 유적도시다. 중앙대학교 역사학도들의 이번 추계정기 답사는 이러한 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았다.
답사 첫날의 아침은 8시까지 학교 정문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답사 날은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게 고역이다. 6시 조금 넘어서 출발했는데도 아침 출근시간과 겹쳐서 지각을 해버렸다. 그래도 버스에는 탈 수 있었다. 출발할 때 에피소드를 한 가지 꼽자면 우리 동기 혜정이는 버스 출발하기 전까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사비를 털 수밖에 없었다. 경주까지 가는 버스에서는 조용히 왔다. 앞차에서는 교수님이 퀴즈도 준비하시고 굉장히 바쁘게 진행되었다고 했는데, 우리조가 탔던 차의 분의기는 앞차에 비해서는 차분했다.
드디어 경주에 도착했고, 경주에서 가장 처음 들렀던 곳은 ‘국립 경주 박물관’이었다. 원래 경주박물관은 스케줄에는 없는 코스였지만 교수님의 재량으로 포함시킨 코스였다. 처음에 주위에서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데 박물관까지 넣어서 간다고 불평하는 이야기들이 오갔으나 결국에는 다들 굉장히 만족해했다. 박물관은 시대별로 전시해 놓은 관도 있었을 뿐 아니라, 무덤이나 토기와 같은 테마별로 전시해 놓은 관이 있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고고미술사학 개론’ 시간에 배웠던 토기의 지역별 시대별 형태의 변화를 이곳에서 적용해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동기들과 같이 다니면서 괜히 아는 척해보고 서로 잘난 척한다고 비판하고 하는 것이 흥미 있었다. 그 외에 박물관 뒤편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생각보다 굉장히 크고 웅장해서 감은사지 석탑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목이나 손이 잘려 있는 불상은 마치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리스 신들을 조각을 보는 듯 했다. 개인적으로 지난여름에 가족들과 유럽 6개국을 여행했었다. 그 때 잠시 둘러본 것뿐이기는 했지만 영국 런던의 British museum(대영 박물관)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견학했다. 그곳에는 제국주의시기에 세계 각국에서 갈취한 세계적인 문화제들이 즐비했다. 그 중에서 그리스 신들을 조각해 놓은 조각상이라든지 판화들은 대부분 머리, 손, 발등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것은 로마제국 시대 기간 중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했던 시기에 유일신을 믿는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의 신들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파괴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국립 경주 박물관에 있던 머리 부분이 손상된 불상들은 ‘숭유억불정책’을 주장하던 조선시대에 들어서 같은 이유로 파손한 것이었다. 항상 느끼지만 비록 역사적으로 국가정책에 의한 행위일지라도 문화제의 훼손은 정말 안타깝다.
다음에는 분황사와 그 앞에 있는 황룡사지를 찾았다. 솔직히 말해서 황룡사지는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당간지주 정도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분황사에서는 우리 동기 붐이가 발표를 맡았다. 준비를 굉장히 많이 했는지 발표가 청산유수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그 다음에 바로 내 차례였는데 굉장히 부담됐다. 분황사는 발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절이었던 것 같지만 역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서 폐사지가 되었단다. 계속 번창했다면 상당히 좋은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전 이곳을 찾았을 때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기억 속의 이미지는 ‘분황사 모전 석탑’ 정도만 남아있었다. 이번의 답사에서 발표를 유심히 들었다. 붐이가 워낙 발표를 또박또박 잘 해주어서 분황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약사여래입상’은 중생들의 질병 구제를 위한 보살이라든지 분황사 모전 석탑의 1층 입구에 서 있는 인왕상, 그리고 기단위에 있는 물개와 사자 조각상이 각각 바다 쪽과 내륙 쪽을 가리킨다는 설명은 흥미로웠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안압지’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안압지는 내가 발표해야할 장소였다. 답사지에 쓰여 있는 안압지에 대한 원고도 내가 쓴 것이고, 때문에 답사원고를 쓸 때 발표도 겸해서 굉장히 공부도 많이 했을 뿐더러 어떻게 발표를 할지 생각도 해놓았는데, 웬걸 막상 사람들 앞에 서니까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이었다. 결국 발표는 했지만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두서없이 끝내버렸다. 굉장히 스스로에게 굴욕을 느꼈다. 안압지는 책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멋진 정원이었다. 물론 발굴 이후 복원작업이 훌륭하게 이루어져서 그렇게 느껴진 것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자리에 머릿속으로 과거의 동궁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뭔가 전율이 느껴졌다. 내가 준비하고 공부한 곳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튼 통일신라시대의 임해전 그리고 안압지의 전경은 상상 이상으로 멋졌을 것 같았다.
첫 날의 마지막코스는 ‘경주 황남리 고분군’이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더니 예전에 여기도 왔었던 것 같아서 앨범을 뒤적여 보니까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여기서 조별로 사진을 찍었던 단서가 나왔다. 그 때에는 생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관심을 갖고 다시 찾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곳은 별로 볼 게 없다는 것을.... 기대보다는 별로였다. 건진 것이 하나 있다면 기말 발표 때 쓸 적석목곽분 사진을 얻었다는 것 정도였다.
이렇게 우리의 답사 첫날이 끝났고 우리는 조별로 장을 봐서 숙소에 들어가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시고 놀았다. 첫날은 차를 오래타서 그런지 우리 조 일원들은 일찍(?) 한 새벽 3시쯤 잠들었다. 사실 오래 걷는 것보다도 차를 오랫동안 타는 게 훨씬 힘들다. 그래서 그랬는지 일찍 뻗었다.
둘째 날은 상큼하게 일어났다. 숙면도 취했고 아침밥도 든든히 먹고 둘째 날 답사 준비를 마쳤다. 사전답사를 다녀온 팀들이 말하기를 셋째 날 경주 남산을 오르는 것에 비하면 둘째 날의 답사는 너무 쉬운 것이라고 그랬다. 그래서 별 긴장을 하지 않았다. 사실 첫째 날 출발할 때 서울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태풍이 북상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사기간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올까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둘째 날 경주의 날씨는 거의 폭염의 하루였다. 비는커녕 하루 종일 햇볕이 강하게 내리 쬐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장항사지’였다. 장항사지는 폐사지였는데 다리를 건너 길 같지도 않은 길을 조금 올라가면 보수중인 탑 두개가 서있었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고 탑이 굉장히 웅장하게 느껴졌다는 것과 지난 새벽에 술을 많이 마신 우리 동기 두 명이 저 뒤에서 토해서 등 두드려 준 것만 기억이 난다. 적당히 먹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드는 순간 그들은 토하고 나서 바로 웃으며 사진을 찍어서 난감했다.
그 다음 답사 코스는 ‘골굴암’이었다. 개인적으로 3박4일 답사 일정중 가장 힘든 코스였다고 생각한다. 몸이 힘들었던 것 보다는 더운 날씨에 언덕을 올랐더니 땀이 너무 많이 나서 굉장히 찝찝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어쨌든 사전 답사 멤버들이 둘째 날 코스는 무난하다고 일러주었음에도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다. 금당과 암자까지 가는 길목 자체가 계속 언덕이었는데 다른 절처럼 숲속을 걷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포장이 잘 되어있는 그리고 땡볕이 내리쬐는 언덕이어서 너무 야속했다. 그리고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거의 암벽타기를 방불케 해서 여성 학우들에게는 고난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학생회장 누님은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아갔다. 마치 히말라야를 오르는 엄홍길 대장을 보는 듯 그녀의 두 어깨는 너무나도 든든했다. 골굴암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석굴사원이라고 했다. 중국 티벳의 돈황석굴이나 중국 본토의 운강석굴 인도의 아잔타석굴은 유명해서 잘 알려져 있지만 설마 우리나라에도 있을까하는 생각은 전혀 생각해 본적도 없었는데, 골굴암을 찾음으로써 역시나 경주는 우리나 불교의 메카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골굴사는 선무도(=위빠사나)라고 불리우는 불교의 마음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라고도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절 입구에 불교 형식의 신식건물이 있었는데 아마도 선무도 수행자들의 기숙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기림사를 찾았다. 사실 골굴암을 다녀오면서 너무 지쳤고 날씨도 더워서 기림사에서는 커다란 강당 같은 건물 안에서 계속 쉬었다. 기억나는 것은 검정개랑 놀았던 것 정도다.
이어지는 코스는 ‘감은사지와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대왕암’이었다. 이 세유적은 문무왕, 그리고 그의 아들인 신문왕과 관련된 곳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에 통일의 업적을 이루어낸 신라인의 기상과 그리고 앞으로의 국가의 부국강병,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감은사지와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발표는 나의 몫이었다. 전날에 안압지에서 당한 굴욕을 설욕하기위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발표준비를 했다. 그러나 야속한 답사부장님은 감은사지에서 유적을 설명해주시는 해설가님을 모셔왔고 본인은 하릴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시 전문가답게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동받았다. 솔직히 굉장히 재밌게 설명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또 공부하고 온 부분이기에 더 의미 있었다. 이견대를 견학하고 대왕암이 보이는 해수욕장에서 우리는 물놀이를 즐겼다. 물놀이를 즐겼다기 보다는 사실 왕고형님들이 학우들을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본인은 끝까지 도망쳐 생존했으나 나의 동기들이 모두 옷을 말리고 있을 때 데면데면하게 그 속에서 옷을 말리는 척 해야 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어쨌든 대왕암에서의 추억은 이번 답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땀을 너무 많이 흐려서 사우나를 다녀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행해진 전체판에서는 우리 동기 상범 형이 일약 슈퍼스타가 되면서 말미를 장식했다. 인재형님 덕분에 전체판 내내 상범이 형의 이름이 계속 외쳐졌고 상범이 형은 매우 부끄러워했지만 그래도 전체판은 너무 웃겼다. 안주거리를 얻기 위한 점수쟁탈전에서 우리 조는 처음에는 조용하게 단독 일등을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게임에서 무너지면서 4등으로 추락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참여한 조 모두에게 주는 안주정도만 받을 수 있었다. 전체판이 끝나고 조별모임을 가졌지만 너무 피곤해서 본인은 자정이 되지도 못해서 잠이 들고 말았다.
드디어 셋째 날 이번 답사의 하이라이트인 경주 남산 등산의 날이 도래했다. 경주 남산은 경주가 우리나라 불교유적의 메카라는 명성을 입증해주는 산실이다. 정말 등산로 곳곳에 불교 유적이 흩어져있다. 조금만 가면 바위에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경주 남산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포석정과 경주배리석불입상과 배리삼릉’을 찾았다. 그리고 셋째 날 부터는 불교사를 전공하신 진성규 교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시면서 계속 설명을 해 주셨다. 포석정에 대해서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이곳은 본인이 알기로는 통일신라 말기에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정원 같은 곳이었는데, 실제로는 제사를 지내던 제의 공간이라는 설명을 들어서 새로웠다. 대부분의 학우들이 배리석불입상과 배리삼릉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등산할 것에 벌써부터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배리석불입상 앞에서 진교수님의 설명은 굉장히 유익했다. 불상이 가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통인(通引)과 부처에 따라 달라지는 좌우 협씨보살의 설명, 그리고 그 협씨보살이 가지는 외형적인 특징까지 재미있는 설명들이었다. 이런 것은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사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유익했던 것이다. 이제 드디어 남산등정이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설명을 들었는데 조금 올라가다 보니까 날씨도 덥고 빨리 정상에 일등으로 오르고 싶다는 마음에 설명을 많이 놓쳤다.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남산에 있는 불교 유적들은 귀족과 관련된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 백성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유적들의 제작자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귀족 문화가 화려한데 비해 남산의 불상 들은 소박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남산 중턱에 떡하니 서있는 ‘용장사곡삼층석탑’ 이었다. 경주의 평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경치 좋은 자리에 떡 하니 서있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 뭔가 편안한 마음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는 날씨가 덥기 보다는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따뜻한 햇살과 살상살랑 부는 바람, 그리고 교수님의 열정적인 설명은 나를 잠시 꿈속으로 이끌었고 나는 졸았다. 마지막으로 용장사가 있던 터에서 우리 모두는 단체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왔다.
저녁에는 답사 마지막 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우리들은 술과 안주, 게임과 노래로 대학생의 젊음을 불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긴 밤 시간 동안 뭘 하고 놀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웃고 떠들고 즐기다보니 어느새 아침 해가 떠있었다. 너무 지쳐서 잠깐 눈을 붙였다.
마지막 날은 가볍게 불국사를 답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지난밤에 너무 신나게 놀아서 한 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비몽사몽이었다. 그래도 사찰 내에 금당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불상과 금당 명칭과의 관계를 찾아보려 했다. 모르는 것은 선배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맛있게 먹고 드디어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떠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선배와 후배들이 모두 어우러져 또 지난밤처럼 우리는 젊음을 불살랐다. 답사는 배우는 것도 많지만 이렇게 선후배 사이에 재밌게 즐기고 더욱 친하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항상 즐겁다.
경주를 다녀오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난여름에 유럽을 다녀왔지만 우리나라에서 미흡한 점은 유적도시의 이점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유럽의 도시,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로마나 파리 같은 도시는 도시자체가 가깝게는 150년 멀게는 500년이나 된 유적 도시로 굉장히 홍보도 잘 되어있고 관광객도 많으면서 유적 도시로서의 정비나 시스템도 잘 구축되어있었다. 예를 들면 파리의 세느강에서 유람선인 ‘바토무슈’를 타고 세느강 주변의 유적을 볼 때 배에서는 한국어를 포함에 6개국어로 번역하여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관광지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관광지는 이정도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럽의 도시들은 건물이 500년이 되어도 외부는 그대로 두고 내부만 새롭게 공사해서 살고 있다. 뭐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유적도시는 홍보나 관광시스템 구축이 너무 미흡하다는 것을 이번 경주 답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본인이 느끼기에는 경주정도만 하더라도 정말 훌륭한 유적도시다. 물론 경주는 유적 도시로서의 기반시설은 잘 구축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홍보가 적어서 그런지 몰라도 외국 관광객이 너무 적었다. 이러한 훌륭한 유적을 자국민만 감상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답사 내내 떠나질 않았다. 국내 관광을 하는 외국인들의 패키지여행이 이런 곳까지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사실 서울에서 경주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본인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아침을 밀라노에서 먹고, 점심을 피사에서 먹었으며, 저녁은 로마에서 먹었다. 하루에 버스만 편도로 꼬박 8시간을 탔다. 그에 비하면 서울에서 경주정도의 거리는 우습지 않은가! 아무튼 정말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경주 남산이나 골굴사와 같은 너무나 멋진 곳을 찾지 못한 채 단지 서울 주변만 돌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다.
다시 답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번 답사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답사부인데도 불구하고 답사지에 실어야할 내가 맡은 유적지를 제외하고서 다른 부분은 공부하지 않고 간 것이었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답사부 부원의 설명이나 교수님의 설명을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안압지나 감은사지에서처럼 뭔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찾아가 보고 설명을 들었더라면 좀 더 유익하고 조금이라도 더 얻어갈 수 있는 답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아쉬웠던 점을 한 가지 더 꼽자면 지난번 춘계답사에서는 전라도 지역을 찾았기 때문에 들렀던 밥집 하나하나가 맛있는 음식점이었는데 역시 경상도는 전라도에 비해서 음식 맛이 훨씬 뒤쳐졌다. 뭐 전라도가 아니기 때문에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맛집을 탐방하는 게 아니라 학교 밖에서의 공부를 하기 위해 타 지역을 찾는 것이므로 사실 밥이 맛있고 없고는 부수적인 문제이다. 이번 정기 추계답사는 등산도 하고 암벽타기에 가까운 골굴암에도 들렀지만 본인에게는 몸이 조금 더 힘들었던 만큼 앞으로 기억에 더 많이 남을 것 같다. 물론 힘든 답사가 더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힘들게 한만큼 얻어가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답사였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새로운 공부를 하고 새로운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 역사학과의 매력인 답사는 앞으로 본인의 학교생활에서 계속될 것이다.
첫댓글 책쓴거같아요, ㅋ필자와 , 본인 ...
나도 그생각 했는데 ㅋㅋ 필자는~
답사이외의 사건을 쓴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훌륭한 유적들을 세계에 홍보하고, 유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관광시스템을 구축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답사에서 느낀점과 있었던 사건들까지 써주셨네요. 답사때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답사의 느낌과 함께 답사지만이 아닌 답사지 주변의 환경도 같이 보셨군요. 답사는 답사지의 유물만으로 완성되는것이 아니라 답사지 주변의 환경등과도 관련이 많은데 그런 면도 보셨군요. 잘봤습니다.
답사를 가서 단지 유적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닌 그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