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熙 宣
정읍은 예로부터 문학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행상 떠난 지아비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음을 근심하여 불렀다는 백제시대의 유일한 한글가요 <정읍사>와 한국 고대가사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최초의 가사문학 <상춘곡>의 발상지가 바로 정읍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고장에다 태를 묻은 문학인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고운 최치원과 불우헌 정극인을 비롯하여 원적가와 참선가를 지은 백학명선사, 규방가사의 일인자로 꼽히는 소고당 고단여사 등이 우리 정읍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하는 나라였다. 각 고을마다 오늘날 문학동인회와 같은 <시회詩會(poaty party)>와 이문회以文會(논어, 君子以文會)라는 문단이 형성되어 한문학이 크게 융성하였고 우리 지방도 시회와 이문회가 활성화 되어 방각본(태인본)이라는 출판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으며 태인향교 노휴재가 중심이 되어 읍원정에서 백일장대회를 개최하는 등 문학에 대한 열의와 이에 대한 연중행사가 계속 이어졌다.
광복 후에는 1956년 이상비 평론가가 주축이 되어 예원계藝苑契(후에 금요회로 개칭)라는 문화예술단체를 설립했으니 이가 곧 정읍예총 창립의 모태라 하겠다.
예원계(금요회)의 활동이 중단된 이후 20년에 가까운 문학의 공백기가 있어 현대문학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오던 지역에서 활동하는 몇몇 뜻있는 문인들이 이심전심으로 동인회 결성을 갈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정읍문인협회는 그날(1979. 8. 19) 오후 전주 발 정읍 행 직행버스 안에서 태동한 셈이다. 정읍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수필가 김동필, 김희선)이 전주에서 있었던 <전북수필문학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 모임에 참석해서 점심을 먹으며 맥주를 몇 잔 마시고 얼근하게 취기가 올라 정읍으로 오는 직행버스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정읍에도 우리 말고도 글 쓰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니 힘닿는 대로 찾아봐서 문학모임을 한번 만들어보자고 약속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주일 뒤인 1979년 8월 26일 11시에 정주읍내 백두산응접실레스토랑에 김동필, 김희선, 최재삼, 이윤구, 이석배 등 5명의 발기인이 모여 모임의 명칭을 정하는데 그날 참석자 중에서는 단체의 명칭을 정읍문학회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김동필 선생이 몇몇 사람이 모인 작은 단체인데 어떻게 감히 정읍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느냐고 반대하여 정읍의 상징인 내장산의 이름을 딴 <내장문학동인회>로 결정하고 본인이 초안한 정관을 채택하였으며 회장 김동필, 부회장 ,이석배, 감사 이윤구, 편집주간 겸 간사에 김희선 등의 임원을 선출한 뒤 모임을 마쳤다.
이후 매월 10일에 회원들의 집을 돌면서 월례회를 갖기로 하여 창립 후 첫 번째 월례회의는 최재삼 회원집에서 가졌는데 당시 전북일보 문화부장이던 김남곤 시인, 서해방송 편성부장이던 김학 수필가, 고창대성중 교사이던 정주환 수필가 등이 내빈으로 참석해서 회원들을 격려해주었고 1979년 9월 11일자 전북일보 문화면에 문학의 본고장인 정읍에도 문학모임인 <내장문학동인회>가 창립되었다는 소식이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전북일보에 기사가 실린 뒤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문학동호인들이 속속 회원으로 가입하여 회원 수가 늘어가면서 동인지를 발간에 대한 욕심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매월 5천원의 회비를 걷어 3천 원짜리 식사를 해버리면 남는 돈이 별로 없어서 따로 발간비를 갹출하지 않으면 동인지 발간은 이룰 수 없는 꿈일 수밖에 없었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가 없겠다는 판단이 들어 회원들을 시내 모 다방으로 모이게 해서 광고주를 물색하여 동인지에 광고를 싣는 방법을 시도해보자고 동의를 구한 뒤 시내 상가를 돌며 광고주를 찾아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필자의 인척으로 꽤 유명세를 타는 한치과의원이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한형주원장은 우리 큰고모님의 둘째손주로 서울대 치과대학 출신으로 학창시절 학보에 수필을 게재하던 문학청년이어서 자신 있게 찾아갔지만 막상 대면을 하고보니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으니까 아재가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묻기에 일행들과 인사를 시킨 뒤 조심스럽게 동인지 창간호를 발간해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다는 사정을 말했더니 두말 하지 않고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원을 즉석에서 현금으로 챙겨주며 열심히 해보라는 격려가 오늘날 동인지 <정읍내장문학>의 씨앗이 된 셈이다..
처음 찾아간 곳에서 대어를 낚은데 용기를 얻은 회원들은 친분이 있는 상가를 돌며 몇 군데서 크고 작은 협찬을 받아 30만 원 가량의 자금을 마련했고 원고는 이미 거두어두었기 때문에 원고뭉치를 들고 전주에 가서 대흥정판사며, 청웅출판사를 찾아가 견적을 받았는데 예상했던 가격과 엄청난 차이가 있어 명함도 못 내밀어 보고 그냥 돌아오려다가 고하 최승범교수께 전화를 걸어 당신 전북문학을 도맡아 찍어내던 선명인쇄사를 소개받고 중화산동 예수병원 근처에 있는 인쇄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최교수님 소개로 왔노라고 원고뭉치를 보였더니 우리가 준비한 예산만으로 출판을 해주겠다고 해서 계약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 뒤에 초교본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인쇄소에 갔더니 당시는 5. 18 광주사태 이후 계엄령이 내려진 서슬 퍼런 시절이라 도청에 가서 검열관으로부터 검열을 받아야 출판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정읍으로 돌아와 몇몇 회원들과 의논을 했더니 정태진 회원이 쉽게 검열을 통과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나섰고 며칠 후에 내장문학 창간을 축하한다는 조남조 전라북도지사와 유재신 도교육감을 비롯한 도단위 기관장들의 사인을 받은 화선지를 표구사에서 배접을 해가지고 가져다주기에 큰 기대를 안하고 교정본과 함께 챙겨가지고 도청으로 검열관을 찾아가 원고와 사인 받은 종이를 보였더니 피식 웃으며 내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검열필>이라는 큼직한 고무인을 찍어주어서 수월하게 검열을 통과하고 내장문학 창간호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82년에는 2호, 1983년에는 3호를 발간하면서 주위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4호부터는 문예진흥기금을 받게 되어 큰 부담 없이 해마다 한 권씩의 동인지를 발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창립이후 잘 나가던 정읍지부는 1991년 정읍군예총이 따로 생기면서 시와 군지부로 나뉘었다가 1995년에 시군이 통합되면서 예총과 문인협회도 통합지부로 새롭게 발족해서 회원 수도 늘고 명실상부한 정읍을 대표하는 문학단체로 자리매김하던 중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창립 19년만인 1998년에 몇몇 사람들이 지부장 선출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결국에는 정읍문학회라는 사설단체를 만들어 딴살림을 차려 분가를 해버리는 바람에 좁은 지역사회에서 사사건건 충돌을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는 두 지붕 두 가족 시대를 살아야 했었다.
본디 한 뿌리였으니 언젠가는 합쳐야한다는 도내 문단원로들의 바람은 헛되지 않아서 딴살림을 차린지 19년만인 2017년 2월에 통합이라는 깃발아래 다시 모였지만 아직도 몇몇 사람은 통합에 반기를 들고 계속해서 정읍문학회라는 사설단체에 남아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1979년 8월 19일에 태동을 한 정읍문인협회는 창립한지 19년만에 갈라섰다가 다시 19년만에 합쳤으니 19라는 숫자와는 기막힌 인연이 있는 셈이니 19년 뒤인 2036년에는 우리 회원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문학의 본고장 정읍의 문학인구의 저변확대와 향토문학발전의 견인차가 되고자한다.
첫댓글 가까운 관내 지역이지만 잘 몰랐던 정읍 문단의 일화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귀한 글 올려 주신 김희선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성함중 빛날 熙 !
제 이름 끝자도 같은 한자를 씁니다.^^
네 읽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포항 해설사 전국대회를 다녀와서 동기 선생님들이나 선배 선생님들과 같이 했던 시간들이 더 소중했음을 상기하면서
카페를 방문하니 우리 동기 선생님 올리신 글이 눈이갑니다
항상 그 자리 계셔주셔서 감사 합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왜 다리라고 하는지 ㅋㅋ
키다리라서 그렇게 불려졌다고 하시면서 씩 웃으셨습니다
소리없는 미소가 모든것을 다 답하셨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즐겁고 유익한 나들이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박양현, 김영광, 문성준, 신미혜 동기님들과의 소중한 추억 길이 간직할게요.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