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회의 추억!
고 양 진
“시작”이란 말은 “끝”이란 말을 예정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그제 2005년 2월 24일도 이와 같은 하나의 끝이 찬란하게 빛을 내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박병호의 가게 “3김”에서 , 우리는 아쉬운 정들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그 아래 층 노래방에서 우리들의 마지막 회포를 풀었으니...아아 인생이여!! 다시 돌아 올 수 없음을 아쉬워 할 뿐이다..
“현경회의 해체” 우리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이날 “현경회 15년의 역사”를 접은 것이다. 현경회의 처음 그리고 마지막의 회장을 맡았던 입장에서 , 다른 회원들에 대하여 죄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지만, 여기 13카페를 빌려 지나간 날들을 회고 해 보면서 간략히나마 그 역사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카페 양 마담의 양해를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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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봄의 어느날! 이날은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는 그 후의 인생에 있어서 꽤나 의미있는 중요한 날들의 처음부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이 한홍 등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혼자서 은둔의 상태에 침잠하고 있을 때였다. 태훈으로부터 친구들이 보고 싶다하니 한 번 나오라는 연락이 있었고, 거듭 권하는 지라 마지 못해 친구들의 모임에 나간 것이었는데, 그 후 이 모임이 현경회로 발전한 것이었다.
학교 다닐 시절에 각별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아니었기에 나는 처음에는 상당히 어색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이런 점들을 감안하여 모두가, 나한테는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것 같았다. 급기야는 모임이 결성된 후 만장일치로 회장까지 맡겨 주는 것이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책임을 맡았다가 그 임무를 다 하지 않고 그만둔게 늘 마음에 걸리던차라, 성의껏 열심히 마음을 기울였드니, 날이 갈 수록 튼튼한 모임이 되는 것 같았고 나중에는 부인들 까지 열심히 참석하는 친목회로 발전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적극적으로 힘을 합쳤던 모든 친구들의 덕분이었다.나는 초대 회장으로서 모임의 기틀을 잡는데 조금이나마 신경을 썼다.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만 , 내용은 또한 형식의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하에 조금 장난기 까지(이런것을 나의 유머감각이라고 살짝 자부도 하고 있지만)섞어서 거창한 회칙과 엄숙한 회의 진행으로 (회순까지 적어 벽에 붙여 놓는 등)독특한 친목회로 나가 보았다.
친구들은 이상타 않고 모이면 서로 즐거웠으니.. 자랑스러운 현경회가 아니었겠는가?
현경회의 명칭은 오현의 현에, 밝을 경 아름다울 경의 景을 택했는데, 좌우대칭형의 글자와 현자에 맞는 뜻과 서울(京)의 태양(日) 밑이라는 뜻을 동시에 고려 한 것이었다.
우연히 남아 있는 회원수첩 한권과 회칙을 중심으로 지나간 날들을 회상 해 본다.
會員手帖-賢景會... 포켓용 작은 수첩에 금박으로 , 이 수첩이 현경회 회원수첩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잇다.
첫 장을 걷으니 -Wisely and beautifully- 슬기롭고 / 아름답게- -賢 景-이라는 페이지가 4단으로 되어 나오고 그 뒷 면에는 賢景會歌라 하여 우리 들의 회가가 실려 있다.그 다음 페이지에는 회원의 명단과 주소,전화번호등이 실려있다.수첩을 만든 기억이 한 번 밖에 안 나는 것으로 보아 이 것이 아마도 우리들의 창단멤버였을 것이다.
이 會員名單에는-- (無順)-고양진, 송평순 ,김병수 ,고희찬, 박병호, 김영희, 백영일, 하인식, 장기식, 고태훈, 장호근, 고병식, 현창남, 정성배 ,안호찬, 임수종 ,이두성 등 17명의 이름이 보인다.그 후 진길남, 김동훈, 이경두,고삼주, 임인홍 등 이 입회하였으며
오경훈, 부정택, 김승환은 일시 입회하였다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 두었고
장기식, 임수종, 안호찬은 창단 멤버였으나 역시 중간에 그만 두었다.
따라서
고양진, 송평순, 김병수, 고희찬, 박병호, 김영희, 백영일, 하인식, 고태훈, 장호근, 고병식 현창남, 정성배, 이두성, 진길남, 김동훈, 고삼주, 임인홍, 이경두 등 19명이 이번 해산 당시의 현경회원 명단이 되겠다.
처음 이 모임을 결성할 때 쯤, 우리들은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딘 후 사회적으로 첫 번째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나는 전부터 살던 장위동 단독주택에 그대로 살고 있었지만, 평순,병호,영일, 기식, 호근, 창남 등은 강남구 대치동, 반포동 등 신흥 아파트촌의 새로운 부유층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인식이는 상계동 주공 아파트에 살아서 모임이 끝나서 돌아 갈때면 나는 인식의 쏘나타 승용차에 편안히 타고 갈 수 있엇다. 희찬이도 송파구의 진주 아파트에 살았다.병식이는 경기도 파주에서 서울 종합식품 공장을 차리고 있어 우리 들의 모임이 거기에서 모인 적도 여러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89년 10월 총회에서 회칙을 채택하는 것을 기점으로, 나 고양진이 회장을 맡고 지금은 제주에 내려가 있는 김병수가 사무총장을 맡았다. 회칙은 내가 초안을 잡았는데, 약간 장난스러웠지만 자손 만대까지 이 모임을 유지하고 스스로의 자존을 스스로 만들어 가자는 뜻에서, 총무를 사무총장이라고 하고, 회장은 편히 감투만 쓰고 있고, 운영은 총장체제로 움직이는 것으로 하였었다. 별 볼일도 없으면서 거창 한 것 같았지만 ,병수가 사무총장직을 성실히 수행해 주고 전 회원이 무조건 회장 뜻에 따르자는 주의여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최고로 잘 굴러 가는 모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3년 회장을 맡았으며, 호근, 평순, 인홍, 인식 등이 2년씩 (경우에 따라서 연임, 중임하면서)계속해서 회장직을 맡아서 이끌어 나갔다.
처음 모일 당시만 해도 다방영업이 완전히 쇠퇴한 때는 아니였는가 보다.우리는 약속시간을 정하여, 안국동 제주은행서울지점 옆골목- 목화 다방등에서 만난후 왠 만큼 친구들이 모이면 다시, 주변 광화문이나 인근 뒷골목으로 옮겨- 돼지갈비, 삼겹살에 소주등으로 회포를 풀곤 했다. 언제 부턴가 당연히 횟집이나 가든등에 모이는 것으로 변질해 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한 변화역시 모르는새에 세월을 탓하게 하는 것이었다...
병식은 문산 법원으로 이사하였으며, 각자 자가용들을 끌고 병식이네 집에 모였던 것도 여러번이었던 것 같다.호근 평순등의 집에서 회식을 하며 모임을 가진 기억들도, 이젠 그립기만 하다. 병식과 창남, 두성이가 한쪽에서 바둑두며 뿜어내던 담배연기도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담당했을 터이고... 화곡동 윤태현 사장네 한라산 흑돼지에서 오겹살을 먹던 추억,문봉우네 제주바당에서 고등어 회 에 쐐주잔 기우리던 날들!!
우리들의 아지트라고도 생각했던 -정릉 청수장의 연말 연시부부동반 모임등은 아련한 추억으로 이제는 우리들의 과거를 장식해 줄 뿐이구나...
수락산 뒤쪽 마당바위에서 돼지고기 바베큐를 즐기던 날등--- 추억은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경사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애사로는 병식이 어머님 초상과 병호 부인 의 경우가 생각난다.
-- 병호부인 정 여사!! 아 정여사에 대한 추억을 여기서 쓰면 병호를 어이 할 것인가?!!현경회에 대하여 가장 열성적이었고 연말연시 모임을 위해 노래연습까지 하던 그분의 모습이 너무도 그립다. 어느해든가 ,송년모임으로 모인 (병호네) 양평의 전원주택에서 우리는 그 마지막 모습을 보았었다. 병호는 암으로 투병하는 그녀의 모습을 우리에게 끝내 보여 주지 않았다.(본인의 뜻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들의 자녀들이 결혼식을 할 때가 되었고, 내년이면 우리도 환갑인데---
연말 연시면 그해의 기념품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회장단의 고민이었다.뜻이 있는 회원들은 찬조금도 많이 내 주었고, 다리미 밭침이라든가 오븐이라든가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쓰고 있는 기물들도 있다. 장호근 회장시에 현경회가(등대직이의 곡에 맞춰 부르기도 했었지..)의 일부구절을 새겨 넣은 6각형 시계는 지금 까지 우리집사람의 경대위에 걸려 있고.....
아! 아! 賢景會歌 .....수첩을 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구나...
賢景會歌-
1.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함께하는
정든고향 정든친구
다정한 얼굴들
생각하라 한겨울의 거센파도를
슬기롭고 아름다운 우정의 마음을---
2. 기쁠때도 슬플때도
언제나 같이해온
죽마고우 소박한 정
따사한 마음들
생각하라 꿈결같은 고향의 추억을
슬기롭고 아름답게 가꿔온 우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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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양영철에 의하여 오현13카페가 활성화 되고 , 등산모임도 2주에 한번꼴로 자주모이게 되었다.그렇게도 어렵게 보이던 재경 오고 13회 동창회도 이제는 활성화 되었다. 한 때 13회 모임이라면 두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오고선배들의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제 각각으로 흩어져 지내던 우리 13회 동창들의 결속의 주체로 자부했던 현경회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서로간의 정을 주고 받던 모임으로서의 현경회는 , 이제는 중복되어 만나게 되는 동창들간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보다 조직화된 재경 동창사회의 큰 틀을 다지기 위하여 이제 발전적으로 해체하기로 하였다. 아쉬움 속에, 2005년 2월 24일 우리는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제는
지난날들은 우리의 기억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추기-나는 우리 친구들이 나를 초대 현경회장으로 뽑아주고 초기 현경회의 운명을 맡겨 준데 대하여 죽을 때까지 그 영광스러움의 감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가장 어려웠을 시절에,(제주말로 기십살려 주려고) 일부러, 무조건 나를 우대해 주고 따라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자랑이 되었으며, 그간 나의 어려움을 이겨나가게 하는 큰 힘이 되었었다. 나의 이 표현은 나의 벗들인 우리 현경회원들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이니, 혹시 내가 더 우월하다는 표현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아 주길 바란다. 무조건적인 우정 !! 우리 현경회는 그 점에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 이 시점에서, 처음에서 비롯된 후 15년이 지나 마침내 끝을 볼 수 있는 그 저력인 것이리라...엊 그제 “삼김”에 모여--- 헤어지기를 섭섭해 하는 모습들을 보니 앞으로도-- 삼십년이라도 끄떡 없겠거늘... 아무래도 내가 잘 못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회원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그 동안 모임을 위해 남모르게 온갖 수고를 하면서도 한 번도 밖으로 내색하지도 않았던 자랑스러운 벗 태훈에게 내가 느꼈던 모든 영광을 돌려주고 싶으며, 다년간 총무로서 애써주었던 (그리하여 재경13회의 당연직 총무로 인식되고 있는) 희찬 , 매번 오락부장으로서 명사회자로서 “회”의 명예를 드 높여 주었던 영일에게 특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양진이가)
그리고 마지막 모임에는 병호 부부, 인식부부,희찬부부, 양진부부,창남부부,영일,삼주,태훈,병식과 부정택부부, 문봉우, 김종식도 참석하여 마지막 자리를 빛내 주었다.영일과 병식은 카페 게시판을 보지 않아 부부동반인줄 몰라 혼자만 나온것이 두고 두고 안타까울 것 같다.
첫댓글 발전적인 해체에 아쉬움과 찬사를 보냅니다. 모임을 결성하는 식은 많은데 해체모임은 그리 흔치 않고 쉽게 할 수 없는 걸로 압니다.
눈물 남쪄....^^ 아쉬움만 가득허고.. 모두에게 행운만 가득하기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어려운 결단 입니다 더욱 빛나는 우정을 위하여 힘 냅시다 화이팅 그런데 카페에 글 쓰면서 마담의 양해를 구하는 건 가당치도 않는일 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모임의 걸성을 위하여서라도 이 카페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구름님 아름다운 우정 따스한 추억을 모두가 공유 할 것입니다 남 몰래 어렵게 이겨내고 이끈 " 현경회15년사 " 카페에 영원희 보존 될 것입니다 . 저도 이 글 인쇄합니다 . 다시태어난 재경현정회 출발입니다 하늘 위에 하늘 있지만 구름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 행운이지요
현경회가 재경오현13회 밑거름된것을 진심으로축하합니다. (태훈)
현경이든 현정이든 우리는 하나. 모두에개 찬사를......!!! 특히 장문을써 역사를 기록해준 양진에개 더큰 찬사를 보내며 우리의우정 영원하길.....!!
정릉청수장과 수락산에서 놀던때가 그립구나 어느덧 1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현경회대한 고민을 했을텐데 수고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