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10타
<개회> 사회자
<법신불전 헌배> 일어서서 대례
[기도]
<입정>
<영주>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기원문>
<심고>
<독경>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법어봉독>:700쪽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15 유촉편(遺囑編) 28~29장
유촉편(遺囑編) 28장
이 보원(李普圓)에게 말씀하시기를 [지혜 많은 사람이 복은 적기 쉬우니, 잘 조절해야 하나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앞으로는 모든 일이 사양으로 이루어지고 억지로는 아니되며, 자기 양심 가진대로 대우 받게 되고 거짓으로는 대우 받지 못하게 되리라.]
유촉편(遺囑編) 29장
순봉(順鳳)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나 대인될 소질이 없지 않나니, 마음을 키우고 국을 더 넓혀서 대인 되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라. 몸은 작아도 마음이 크면 대인이요, 몸은 커도 마음이 작으면 소인이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대인 되는 공부의 요령은 만사종관(萬事從寬)이니라.]
< 일상수행의 요법 대조> (p54)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성가>
77장: 원인 결과 끊임 없이(因果의 노래)
<설법> 창산 김진성 교무
불행한 일에 취사공부/ 이춘풍외..
이춘풍[李春風, 1876~1930]
본명은 지영(之永). 법호는 훈산(薰山). 정산종사의 외사촌 형. 1876년 2월 6일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구성면 하원리에서 부친 현옥(鉉沃)과 모친 김씨의 1남 2녀 중 독자로 출생했다. 12세에 백부 현각(鉉珏)에게 출계(出系)했고, 16세에 경타원 정삼리화(敬陀圓鄭三零火)와 결혼하여 딸 여덟을 두었다. 그중 두 딸이 전무출신으로 항타원 이경순과 달타원 이정화이다.
1921년(원기6) 고모부 되는 구산 송벽조의 인도로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대종사의 제자가 되고, 그해 겨울 부인(정삼리화)과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로 이사,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종곡으로 이사해 왔다. 종곡은 변산으로 드는 초입에 있는 마을로 영광과 변산간 노정의 유숙처로 알맞은 위치에 있었다. 이춘풍은 영산과 변산을 내왕하는 소태산과 그 제자들의 시봉을 맡는 한편, 종곡 사가와 실상초당을 왕래하며 소태산의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47세시에는 초기 경전 편찬에 조력했다.
어느 날 변산 내소사에 딸린 암자인 청련암 뒷산을 넘으며 소태산으로부터 다음의 법문을 듣는다. ‘험한 길을 당하니 일심공부가 저절로 되는도다. 그러므로 길을 가되 험한 곳에서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평탄한 곳에서 실수가 있기 쉬우며, 일을 하되 어려운 일에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쉬운 일에 도리어 실수가 있기 쉽나니, 공부하는 사람이 험하고 평탄한 곳이나 어렵고 쉬운 일에 대중이 한결같아야 일행삼매(一行三昧)의 공부를 성취하리라’(《대종경》 수행품34).
이춘풍은 1923년(원기8) 여름 소태산 모친의 열반으로 영광에 가서 영산원 건설에 몇 달 근무했다. 이 무렵 소태산이 이춘풍과 더불어 방언답을 둘러보며 주고받은 문답이 《대종경》 서품 10장이다. 소태산이 1924년(원기9) 변산에서 하산하여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연 뒤 익산본관이 건설되자, 이춘풍은 사가를 내변산으로 옮기고 봉래정사 수호원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 50세 되던 1925년(원기10)에는 익산 본관으로 나와 전무출신을 단행, 을축 동선(乙丑冬禪)의 여선원(女禪員) 교무로서 부인 회원들을 지도했고, 이어 3회~6회의 여선원 교무로 계속 근무했다. 이춘풍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하여 소태산의 법하에서 공부하다가 전무출신을 단행할 무렵에 평소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유교와 불교의 진리를 놓고 심적 고통을 겪은 것을 털어 놓는다. 이와 관련된 법문이 《대종경》 변의품 20장이다.
이춘풍은 1922년(원기7)부터 6년간 부안 봉래산에 살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연구한 감각감상, 논설, 예문, 서간문 등을 1927년(원기12)에 편집한 《산중풍경(山中風景)》을 남겨 초기교단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게 했다. 이는 《월말통신》, 《사업보고서》가 나오기 이전 교단 창립 제1대 제1회 내 교단관계 자료로서, 한 개인의 관점에서 그때 그때 느낀 바를 진솔하게 기록한 감상담, 서간문, 교리연구 등을 통해 봉래정사 풍경과 총부건설 당시의 풍경 일단과 동지들간의 교리 논쟁 등을 서술하고 있어 교단 창립 제1회 내 발전사를 연구하는데 주요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춘풍은 법명처럼 온순 자애하여 사람을 사귈 때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았고 매사에 책임감이 강하고 강직하여 시종이 한결같은 실천력이 있었다. 또한 교단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의견안을 개진하여 불법연구회 총재에 대한 존칭을 ‘종사주(宗師主)’로 통일시켰으며, 지방 교당과 훈련 업무에 종사하는 전무출신에 대해 ‘교무(敎務)’로 호칭을 통일토록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李大進〉
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55
이 춘풍이 여쭙기를 [지난 번에 저의 자식이 산에 갔다가 포수의 그릇 쏜 탄환에 크게 놀란 일이 있사온데, 만일 그 때에 불행한 일을 당하였다 하오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사올지 취사가 잘 되지 아니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생각대로 한 번 말하여 보라.] 춘풍이 사뢰기를 [법률이 이러한 일을 다스리기 위하여 있는 것이오니, 법에 사실을 알리어 부자된 심정을 표함이 옳을 듯하나이다.] 대종사 다시 송 적벽(宋赤壁)에게 물으시니, 그가 사뢰기를 [모든 일이 다 인과의 관계로 되는 것이오니, 그 일도 인과의 보응으로 생각하옵고 아무 일 없이 하겠나이다.] 대종사 다시 오 창건(吳昌建)에게 물으시니 그가 사뢰기를 [저도 공부하는 처지가 아니라면 반드시 법에 호소하겠사오나, 또한 천명으로 돌리고 그만 두겠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 사람의 말이 다 중도를 잡지 못하였도다. 대개 지금의 법령 제도가 사람이 출생하거나 사망하면 반드시 관청에 신고하게 되어 있으며, 더욱 횡액을 당하였거나 의외의 급사를 하였을 때에는 비록 관계 없는 사람이라도 발견한 사람이 관청에 보고할 의무를 가졌나니, 외인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부자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처지리요. 그러므로, 나는 오직 국민의 처지에서 부모로서 즉시 관청에 사유를 보고할 것이요, 그 후의 일은 법을 가진 관청의 처리에 맡기고 나의 알 바 아니라 하겠노라.]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34장34
대종사 이 춘풍으로 더불어 청련암(靑蓮庵) 뒷 산 험한 재를 넘으시다가 말씀하시기를 [험한 길을 당하니 일심 공부가 저절로 되는도다. 그러므로, 길을 가되 험한 곳에서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평탄한 곳에서 실수가 있기 쉬우며, 일을 하되 어려운 일에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쉬운 일에 도리어 실수가 있기 쉽나니, 공부하는 사람이 험하고 평탄한 곳이나 어렵고 쉬운 일에 대중이 한결같아야 일행 삼매(一行三昧)의 공부를 성취하나니라.]
대종경(大宗經)
제1 서품(序品)10장10
하루는 이춘풍(李春風)이 와서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도덕을 배우려 함이어늘, 나는 무슨 뜻으로 도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이 같이 먼저 언(堰)을 막으라 하였는지 그 뜻을 알겠는가.] 춘풍이 사뢰기를 [저 같은 소견으로 어찌 깊으신 뜻을 다 알으오리까마는 저의 생각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오니, 첫째는 이 언을 막아서 공부하는 비용을 준비하게 하심이요, 다음은 동심 합력으로 나아가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증거를 보이시기 위함인가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대개 옳으나 그 밖에도 나의 뜻을 더 들어보라. 저 사람들이 원래에 공부를 목적하고 온 것이므로 먼저 굳은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니, 수 만년 불고하던 간석지를 개척하여 논을 만들기로 하매 이웃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겸하여 노동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서 충분히 믿기 어려운 이 일을 할 때에 그것으로 참된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이 한 일의 시(始)와 종(終)을 볼 때에 앞으로 모든 사업을 성취할 힘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는 소비 절약과 근로 작업으로 자작 자급하는 방법을 보아서 복록(福祿)이 어디로부터 오는 근본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그 괴로운 일을 할 때에 솔성(率性) 하는 법이 골라져서 스스로 괴로움을 이길 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모든 생각으로 이 일을 착수시켰노라.]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20장20
이 춘풍이 유가의 규모를 벗어나 출가하여 대종사를 뵈옵고 사뢰기를 [제가 대종사를 뵈오니 마음이 황홀하와 삼천 제자를 거느렸던 공자님을 뵈온 것 같사오나 원래 불교는 유교 선성들이 수긍하지 아니한 점이 있사와 늘 마음에 걸리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 점이 무엇이던가.] 춘풍이 사뢰기를 [불교는 허무 적멸을 주장하므로 무부 무군(無父無君)이 된다고 하였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본의가 영겁 다생에 많은 부모와 자녀를 위하사 제도의 문을 열어 놓으셨건마는 후래 제자로서 혹 그 뜻에 어그러진 바가 없지도 않았으나, 앞으로는 모든 법을 시대에 적응하게 하여 불교를 믿음으로써 가정의 일이 잘 되게 하고, 불교를 믿음으로써 사회 국가의 일이 잘 되도록 하려 하노니 무부 무군이 될까 염려하지 말 것이며, 또는 주역(周易)의 무극과 태극이 곧 허무 적멸의 진경이요, 공자의 인(仁)이 곧 사욕이 없는 허무 적멸의 자리요, 자사(子思)의 미발지중(未發之中)이 허무 적멸이 아니면 적연 부동한 중(中)이 될 수 없고,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이 허무 적멸이 아니면 명덕을 밝힐 수 없는 바라, 그러므로 각종 각파가 말은 다르고 이름은 다르나 그 진리의 본원인즉 같나니라. 그러나, 허무 적멸에만 그쳐 버리면 큰 도인이 될 수 없나니 허무 적멸로 도의 체를 삼고 인·의·예·지로 도의 용을 삼아서 인간 만사에 풀어 쓸 줄 알아야 원만한 대도니라.]
<성가>
78장: 공부와 사업 중에(無相의 노래)
<공고>
<생활결의 구호>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성가>
102장 : 저희들이 이 불사로(回向의 노래)
<폐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대력을 얻어 성불제중(成佛濟衆)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