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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8월18일~1(土日)雲雨晴
▲마니산(摩利山)(2)(상방리-참성단-정상-함허동천갈림길-정수사)
해봉산악회(49명)
♠참 고
마리산(摩利山)
*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華道面)의 쌍봉(双峰) 산.
내용 출처:두산세계대백과
높이 469m. 강화도의 최고봉이며, 산정에는 단군왕검(檀君王倹)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136)이 있다.
《수산집 修山集》에 참성단의 높이는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나,
수차례 개축이 있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남서쪽 기슭에는 정수사(浄水寺)법당(보물161)이 있다.
북서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台:지방기념물29) 1기(基)가 있다.
본래 마리산이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마니산(摩尼山)으로 바뀌어 불리다가,
1995년 7월 27일 학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ꡐ머리․으뜸 ․최고ꡑ의 뜻을
나타내는 마리산으로 개명하였다.
♣산행 코스
05:56=상방리 마니산 길목식당 앞
06:15=계단
07:00=참성단
08:34=함허동천 갈림길
09:05=암능 끝 내리막흙길
09:30=정수사
10:00=도로
총 4시간4분
10:24=전등사 주차장
☞☞☞ 94년7월 첫 마리산 산행 후 7년만의 산행이다.
당시는 암능코스 갈림길에서 왼편 함허동천으로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암능코스로 직진하여 정수사로 빠진다고 한다.
귀로에 국내 최장이라는 서해대교를 관광한다고 해서인가
뜻밖에 셋째 처제가 가겠다고 연락이 오고
예상외로 초만원이 되어 22시, 무더운 밤 시민회관 앞을 떠난다.
정 대장이 산행일정 안내방송을 마치고 언양휴게소에 들렸다 출발하면서
빗발이 떨어지다 그치고 빌려왔다는 비디오 K2등반을 다룬
‘버디컬리미트’를 시청하며 가다
처제가 차멀미를 하는지 비닐봉지를 부탁한다.
금강휴게소와 죽전휴게소를 거쳐 서울을 지나
강화도로 건너가 산행기점인 상방리 집단시설지구
마니산국민관광지라는 도로 표지판이 걸려있는 지점에
도착한 게 먼동이 환히 튼 새벽 5시40분.
맑은 하늘에 무더운 공기가 덮쳐온다.
넉넉한 시간에 각자 용무를 보게 한다.
몇몇 회원들이 화장실에 들렸다 수세식 변기가 물이 나오지 않아
도무지 불결하여 그냥 나왔다며 불평을 쏟아낸다.
5시56분, 마리산 길목식당 앞마당에 집결하여
상견례를 하고 첨성단으로 출발한다.
매표소에서 단체입장료를 지불하고
오른편으로 계곡물을 바라보며 촬영하며 올라간다.
6시15분, 석비가 서있는 지점에서
900여개가 된다는 반듯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6시26분, 왼편으로 정자가 나타나고 왼편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완만한 너럭바위길, 다시 돌계단으로 이어지고
얼마가지 않아 넙적 바위 길로 변한다.
오른편으로 시계가 트이면서 화도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등산로에 버린 나무지팡이를 짚으며 힘들게 올라가는 처제.
집행부 후미담당 이 군에게 부탁하여 ‘개미허리’에서 배낭을 넘기고
빈 몸으로 올라가면서도 힘들어한다.
간이이정표(마니산입구2.4km 함허동천2.5km 정수사3km)에서
등산로는 왼편으로 꺾어지고 좌측가드레인을 거쳐
우측 석축을 끼고 올라가다
7시, 석축사이의 돌계단을 거쳐 사적136호인 참성단에 올라선다.
사적 제136호인 참성단(塹城壇)은 단군(檀君)의 제천지(祭天地).
자연석을 다듬어 반듯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쌓았다.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下圓壇)과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방단(上方壇)의 이중으로 구성하고,
상방단 동쪽면에는 21계단의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에 중수했다고 한다.
마리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마리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하고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강도(江都:江華)는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로 되어 있고 문물이
발달하였으며, 마리(摩利)․혈구(穴口) 등 하늘과의 인연이 깊다고 한다.
또 개국신화(開国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리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桓雄)의
권속이므로 결국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방(方)과 원(圓)은 천지의 의형(擬形)이며 조화가 모두 거기서
일어나는 것으로 옛날 사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참성단의 원과 방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에 두고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눈에 익은 향로와 출입을 막기 위한 제단 앞의 간판.
둥글게 둘러쌓은 돌 울타리.
우선 공사가 진행 중인 인천국제공항과 서해바다, 한강 하류등
확 트인 사방을 캠코더에 담는다.
처제가 뜻밖에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며 지금은 김포에 살고 있다는
듬직한 중년남자를 소개한다.
지난밤에 어딘가 통화를 하드니 동창생과 통화한 모양이고 김포에서
불원천리 마리산 참성단까지 찾아온 모양이다.
처제가 준비해온 김밥과 과일로 아침식사를 하고
돌담에 올라 말썽 많은 인천공항과 영종대교를 다시 줌으로
촬영하는데 여객기 한대가 착륙한다.
돌담에서 내려와 향로 안을 들여다보니 온갖 쓰레기가 들어있어
옆에 있는 김 대장을 불러 청소하게 한다.
정 대장이 주제가 되어 약식으로 조사장 선창의 만세삼창으로 상봉식과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7시42분, 정수사로 향해 되돌아 내려가 오른편 능선을 타는데
처제가 김포 동창생과 상방리로 하산하겠다고 했는데 그사이
마음을 바꾸었는지 동창생과 다시 산행을 하겠다며 뒤따라온다.
이정표(정수사3km 함허동천2.5km 마니산입구2.4km)를 지나
오른편으로 산불감시초소를 쳐다보며 바위 길로 올라간다.
참성단 중수비를 지나 저만큼 마니산 정상이 우뚝서있고
오랜 세월 비와 해풍에 할퀴고 닳은 굵직굵직한 바위들,
흙을 밟는 시간보다 바위를 밟는 시간이 더 길다.
오른편으로 서해를 바라보며 널찍한 마당능선을 거쳐
너럭바위 위의 노란페인트 칠한 선을 따라가다
‘추락주의’ 표지판을 보며 빗긴 바위를 넘기도 한다.
바위사이에 원추리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있다.
이어지는 바위 길에 구들장 바위돌이 흔들리고
8시25분, 너럭바위의 정상,
정상비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수많은 세월, 강한 해풍에 동쪽으로 기울어진
청송 한 그루가 바위위에 강력한 인상으로 외롭게 서있다.
8시35분, 기억에 남아있는 함허동천 갈림길에 당도한다.
갈림길 간이이정표(참성단1km 함허동천1.65km 정수사1.8km)가 서있다.
왼편으로 한때 함허대사가 수도했대서 붙여진 이름의
함허동천 코스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후미담당 이 군이 바위를 건너뛰기가 위험하니
왼편으로 돌아서 오라고 한다.
이제 왼편으로 함허동천 코스를 바라보며
내리막길의 본격적인 특유의 너럭바위의 암능 길이 이어진다.
처제를 비롯한 후미구릅이 암능 타는 걸 뒤에서 캠코더로 잡으며
바위사이를 때로는 건너뛰며 엉덩이를 깔며 조심조심 내려간다.
‘추락주의’표지판이 다시 나타나고
더욱 가까워진 영종도를 바라보며 아찔한 바위 길을 따라가다
너럭바위에 뿌리내린 강인한 잡초의 생명력을 내려다본다.
전면에 집채보다 서너 배 큰 암괴가 가로막는데
철사다리와 밧줄이 걸려있다.
건너편에서 건너오다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년 등산객들이 힘들게 올라가려는 내 모습을 보고
“왜 힘든 암능을 탈려고 합니까.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요...”
한다.
그러고 보니 왼편으로 우회코스가 있다.
오른편으로 암괴를 끼고 오솔길을 따라가다
다시 암능으로 오른다.
얼마가지 않아 가볍게 내려가는 등산로를 거쳐
9시5분, 암능 길은 끝나고 더욱 가까워진 영종도와 작별하고
매미소리가 요란한 숲 속 길로 내려선다.
후미를 맡고 있는 이 군과 홍팔군의 아가씨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으며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며 촬영한다.
9시18분, 함허동천 갈림길을 거쳐
바위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을 끼고 가다
9시28분, 콘크리트포장 임도에 내려선다.
관리인이 없는 간이 매표소를 지나
정수사 들머리 안내간판이 보이고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정수사를 중수했다는
함허대사의 부도가 있다는 정수사로 들어선다.
보물 제161호인 정수사법당(浄水寺法堂)은 조선 세종 5년(1423)에 창건되었다는데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건립 당초의 세부형식을 제일 잘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건물 후면의 공포(뱀包)이며
그것은 조선 전기에 속하는 주심포(柱心包) 집의 수법을 따르고 있으나 출목(出目)을
1출목으로 처리하여 약간 긴 첨차(墅遮)를 받친 것이 특색이다.
또 외목도리를 받친 장설(長舌)은 공포 부분에서 운두를 높이고 있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중앙을 우물천장, 그 주위는 빗 천장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후일에 추가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붕 밑의 가구재(架構材)들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측면에는 고주(高柱) 2개를 세워서 그것으로 종량(宗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건물 앞뒤 기둥에 걸친 옥내 대들보는 그 양끝이 그대로 길게 외부의 출목까지 뻗쳐 나와
공포와 함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1957년 보수공사를 할 때 1689년(숙종 15) 당시의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1423년(세종 5)에 중창(重祠)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정수사 뒤편에 있다는 함허대사부도는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하고
기와불사 시주를 받는 보살님에게 이 절에 보물이 있느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지정문화재라는 대웅전을 촬영하고
기와불사를 한 신 회원과 되돌아 나온다.
+(함허대사의 휘(諱:돌아가신 분의 이름)는 기화(己和), 법명은 득통(得通)이다.
21세 되던 해에 벗이 죽자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하여 무학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불도에 정진하여 고승이 되어서 많은 불교 서적을 남겼다.
세종 15년에영남 봉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콘크리트 포장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노변주점에서 한잔하고 있는 처제와 그의 친구를 만나
권하는 시원한 동동주를 한잔 마시고
촬영을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9시58분, 도로변에 주차해 있는 관광버스에 올라
약 4시간의 산행을 마친다.
뒤늦게 내려오는 처제를 기다리다
10시10분, 다음 목적지 전등사로 출발한다.
2분거리의 함허동천 앞을 지나
10시24분, 전등사 주차장 도착.
곧 전등사(伝灯寺)로 올라간다.
매표원은 표를 팔고 있는데 검표원은 보이지 않고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郎城)(일명정족산성)문을 지나
정족산성의 수비대장이였던 천총 양헌수(千摠 梁憲洙)장군 승전비를 거쳐
전등사 누각 밑으로 올라 대웅전 마당에 올라선다.
대웅전안에는 부처님이 한지로 고깔을 쉬웠는데 기와불사 보살님에게
문의하니 아직 점안식을 올리지 않아서라고 한다.
고구려의 아도화상(阿道和尚)이 신라 미추왕2년(263)에 묵호자(墨胡子)라는
이름으로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법을 전파하기 전, 이곳에
진종사(真宗寺)을 세우고 개조(開祖)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절.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라고 했다지만 그보다는
진리의 등불을 전한다는 불교본래의 뜻이 있기도 하다.
여하간 정화공주가 전했다는 그 옥등이 이 절의 소중한 보물이 되어 전해 오고 있다.
정면3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퍽 안정감 있고 우아한 건물이다.
굵은 배흘림기둥에 모서리를 약간 높게 추켜세워 처마 끝이 날아갈 듯 들리도록 했다.
공포 위로는 동물조각, 귀면(鬼面), 연꽃봉우리가 조각되어 있고,
발가벗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네 귀의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도편수의 증오가 부처의 넓은 도량에서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라고 전한다.
창호 전면이 빗살창호인 것이 눈길을 끈다.
대웅전(보물 제178호)에서 시작하여 약사전(보물 제179호), 명부전, 극락전,
녹 쓴 범종(보물 제393호)까지 캠코더에 담는다.
일제 말기 군수물자 징발 때 전등사 범종도 강제 공출 되었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주지스님이
인천 항구를 뒤지고 다니다가 부평 병기창에 큰 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으나 본래의
종을 찾을 길 없어 대신 이 종을 갖고 왔다고 한다.
전등사를 빙 둘러 싸고 있는 산을 정족산(鼎足山)이라고 하는데 산봉우리 세 개가 마치
가마솥의 세 발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세 봉우리를 연하여 포곡식(包谷式)으로 쌓은 성이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郎城)이고 정족산에 있다고 하여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축성 년대를 알 수 없고 신비한 전설만 전하는 이 정족산성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화를 입고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격전을 치른 역사의 현장이다.
*여기서 전등사 주변과 관련된 근대역사를 옮겨본다.
1866년9월 7일 갑곶돈을 함락 시키고 강화를 장악한 프랑스군은 한양침공까지도
시도하려 했으나 한강양안의 수비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장기전 태세를 취하면서
겨울 날 곳을 물색하여 선정한 곳이 정족산성 이었다.
조선군의 무기가 보잘 것 없는 것을 알고 승리에 도취해 있던 프랑스군은 그 해
10월에 16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해병대령 올리비에의 지휘 하에 정족산성을 침공해 왔다.
그에 앞서 정족산성의 수비대장이 되었던 천총 양헌수(千摠 梁憲洙)장군은 강화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성을 곧 침공해 올 것으로 예측하고, 일직이 전국에서 모집한
367명의 포수(사냥꾼)를 매복 시켜 대기하고 있었다.
수비태세가 보이지 않는 성 안을 프랑스군은 거침없이 들어왔고 적군의 유인에 성공한
우리 군은 양헌수장군의 지휘 하에 사력을 다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당황했고 곧 신무기로 응수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기로 결의했던 용감한 포수들은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30여명의 부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마침내 다수의 무기를 버린 채 도망치고 말았다.
구식무기조차 빈약한 조선군이 신무기를 앞세운 프랑스군을 무찌른 쾌거였다.
이에 놀란 로오즈제독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관아를 불사른 후 군함을 거두어 중국으로
퇴각했고, 양헌수장군은 그 공로로 한성부좌윤을 거쳐 금위대장,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 정족산 안에는 또 하나의 유적인 사고(史庫)터가 전등사 안쪽으로 성 안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던 보사권봉소(譜史権奉所) 자리이다.
조선왕조는 국서(国書)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에 크게 고심해 왔다.
전란이나 화재로 소실될 것에 대비하여 한양의 춘추관을 비롯한 충주, 성주, 전주의 네 곳에
각각 분산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남았다.
그 후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재인쇄하여 춘추관과 강릉 오대산, 봉화 태백산,
강화 마니산, 무주 적상산 등 다섯 곳으로 분산 보관했고 이를 오대사고(五大史庫)라 한다.
오대사고의 하나였던 마니산 사고를 헌종 1년(1666)에 이곳 정족산으로 옮겼고
그 후 다시 고려궁터에 새로 지은 외규장각(外奎章閣)으로 옮겼다가 프랑스군의 화를
입었고 얼마 남지 않은 서책들은 현재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이끼 낀 거대한 땅은행나무, 남문(宗海樓)등 약 1시간 볼거리를 촬영하고
11시20분, 되돌아 동문(三郞城)으로 빠져나오니 검표원이 앉아있다.
식당거리로 내려가 식사를 하기위해 주위를 살피는데 처제와 중년남자가
나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식당 안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뭘 먹겠느냐며 산채비빔밥을 시킨다.
밥을 다 먹기 전에 바쁘게 계산을 마친다.
12시5분, 다음 관광지 서해대교를 향해 출발한다.
좌석을 촬영하기 좋은 3번석으로 옮기고
84번지방도-48번국도-강화대교를 거쳐 서서울나들목으로 빠져
13시43분, 화성휴게소에 들리고
14시14분, 서해대교 현수교위에 정차한다.
총 연 장 7,310m 폭 31.41m 왕복6차선인 서해대교.
총사업비 6,052억원으로 우리기술진의 힘으로 만들었다는데
큰 뜻이 있다고 한다.
불법주차라면서도 많은 차량들이 정차하여 관광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 관광과 기념촬영을 마치고
삽교호를 오른편으로 바라보며 되돌아 나간다.
서평택나들목으로 빠져나와
15시25분, 안성나들목으로 들어가 경부고속도로에 오른다.
16시50분, 옥천휴게소에 들리고 다시 달리다
17시16분, 황간을 지나 추풍령을 지척에 두고 기억에도 생생한
백두대간 추풍령 금산이 계속 잘려나가고 있는 교묘한 현장을 캠코더에 담는다.
지난번 촬영한 비디오를 시청하며 가다 정 대장이 차기 산행은
부산등산연합회의 합동산행이라며 참석하여 촬영해 달라고 부탁한다.
배기사와 김기사가 교대운전하며 쾌속으로 달려 예정시간보다 빠른,
무더웠지만 아름다운 우리산하와 지난 역사현장을 보았다는 흐뭇한 기분과
백두대간 금산 파괴현장이 떠올라 씁쓰레한 기분이 뒤섞인 체
20시46분, 부산T/G를 빠져나간다.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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