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흑풍쌀살의 무공 연마
여소교를 번갈아 안으며 진현풍과 매초풍은 한참을 날았다.
경공을 쓰며 쉬지 않고 날던 이들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멈춰 섰다. 아혈(啞穴)을 눌린 여소
교는 몹시 놀란데다가 지쳐 있어 아예 인사불성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매초풍에게 있어서 여소교는 보배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여소교의 아혈을 풀어 주고
또 운기(運氣)시키느라 부산을 떨었다. 조금 후에야 여소교가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매초풍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네가 죽었더라면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될 뻔했지."
여소교는 눈을 감은 채 악처후를 불러댔다. 그러다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악처후 대신 매
초풍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매초풍은 그녀가 또 기절해 의식을 잃을까 봐 목소리를 부드럽게 고쳐 말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널 구해 주지 않았다면 넌 벌써 오혈궁 놈들에게 죽었을 거야. 또 그냥
죽이기나 했겠어?"
"그런 소리 집어치워요. 우리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까지 해치려고 하는 걸 모를 줄 알
구? 난 너와 죽기 살기로 싸울테다!"
여소교가 이를 갈았다.
"왜 이래? 그러지 말고 구음백골조를 배워 보지 않겠어?"
매초풍이 징그러운 웃음을 매달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소교는 손목이 조여드는 것
같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여소교가 매초풍이 말한 것을 되뇌어 보았다.
"구음백……?"
매초풍이 깔깔대며 진현풍을 돌아보았다.
"이봐요, 이 애가 얼마나 재미있나 한번 봐요. 수양딸이라도 삼고 싶다구요."
"허튼소리. 네가 몇 살인데 그런 소리를 해! 이 악마 같은 년아!"
여소교가 욕설을 퍼부었다. 매초풍이 발끈하여 그녀의 뺨을 두어 번 후려쳤다.
"이것이 은공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여!"
"사매, 그러다가 소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진현풍의 말에 매초풍이 더욱 날뛰었다.
"왜, 가슴이 아파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제 저에게 싫증이 났다는 뜻이겠죠?"
"당신은 화를 낼 때가 더 이쁘단 말이야."
진현풍이 얼른 말을 눙쳤다.
"흥, 여인들 어르는 것은 천하 일품이라니까!"
매초풍도 싫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다. 진현풍이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그녀의 볼에 입을 맞
추며 진현풍이 속삭였다.
"요망한 것들……!"
두 사람이 노는 꼴을 보고 있던 여소교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 가문이 몰살당한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랄들 하고 있군!"
여소교가 툭 내뱉었다.
"이 년이 정말 죽지 못해 환장을 했나?"
진현풍도 더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으로 여소교를 치려고 했
다. 여소교는 각오를 했다는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죽여라!"
그런데 망측하게도 여소교의 뱃속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 바람에 매초
풍이 배꼽을 움켜쥐고 웃었다.
"오호호호,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년이 배가 고프다고 하나?"
"그게 뭐가 우습다고 그래? 왼종일 밥도 안 먹고 시달렸는데……."
여소교가 매초풍에게 눈을 흘겼다.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먹을 것을 구해 보자구. 이러다간 모두 굶겠는걸. 아니 저 년이
또 성화를 부릴까 봐 겁이 나."
매초풍이 그녀를 놀려댔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혀를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에 치를 떨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읍이 하나 나타났다. 작은 읍이긴 하지만 객점은 무려 여덟 군데나 되
었다. 날이 저물어 객점 문 앞에는 등이 걸려 있었다.
흑풍쌍살은 가장 좋은 객점을 골라 들어갔다. 객점의 심부름꾼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세 사람의 차림은 비록 남루하고 지저분하나 보통 사람 같지가 않아서였다.
더군다나 두 여인은 모두 보기 드문 미인들이었다. 그중에서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여인은
값비싼 진주 보석들을 손목과 목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부잣집 여인이 분명하다고 그
는 믿었다. 그런 반면 부잣집 여인이 왜 그런 꼴로 다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심부름꾼은 분명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여기고는 정중히 맞이했다.
세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자 심부름꾼이 웃는 얼굴로 달려왔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오늘 밤은 예서 묵으실 거죠?"
진현풍이 말없이 고개짓을 했다.
"깨끗한 방이 있나?"
"그럼요."
"그럼 먼저 사간과(國于果)와 이함산(二咸酸)을 가져와요."
매초풍이 주문했다. 심부름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게 뭐죠?"
매초풍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무리 촌구석이지만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인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당신은 사부님한테 무공은 젖혀 두고 말재간만 배웠나?"
진현풍이 은근히 비꼬았다. 그리고 심부름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풀어서 말하지. 사간과란 계원, 여지, 살구씨, 대추 이 네 가지 과실을 말하는 거고,
이함산이란 앵두와 청매를 일컫는 거요."
그때서야 심부름꾼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안면을 활짝 폈다. 주인에게서 대처 사람들이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그는 한편 반갑게 여겼다.
"또 다른 건 필요 없나요?"
"고급은 없을 테니까 그저 술안주가 될 만한 것을 내오게나. 이를테면 원앙우근(鴛鴦牛筋 :
소 힘줄로 만든 요리), 초압장(秒鴨掌 : 오리 발로 만든 요리), 폭장퇴(爆獐腿 : 노루 다리고
기로 만든 요리), 수정토사(水晶兎絲 : 토끼 고기로 만든 요리) 같은 걸로 말이오."
"아니 그렇게 비싼 걸……. 다행히 우리 객점에서 만들고는 있지만 값이 대단히 비쌉니다
요."
"누가 메어먹고 달아날까 봐 그러나? 자……."
진현풍이 품 속에서 은괘 다섯 냥짜리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심부름꾼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고 가려는데 매초풍이 다시 불러
세웠다.
"여아홍주(女兒紅酒)가 있으면 두 각(角)만 가져와요."
주문한 것들이 나오자 세 사람은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배를 채운 세 사람은 심부름꾼을 따라 객방으로 갔다. 방은 깨 했지만 침대가 두 개밖에 없
었다.
"조금만 계시면 제가 침대 하나를 더 들여오겠습니다. 헤헤,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손님들이
많아서……."
심부름꾼의 말에 진현풍이 언성을 높였다.
"아까 밥 먹을 때만 해도 몇 안 되는 것 같던데 무슨 소린가? 이 객점에는 적어도 객방이
이삼십 칸 되는 걸로 아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객점의 대부분의 객방들을 이미 사흘 전에 맡아 놓은 사람들이 있
었습니다. 이 객방이 그리고 남은 빈방이지요. 세 분께서 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이 방마저
없었을 겁니다요."
매초풍은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이 작은 읍에 무슨 손님들이 그리 많소?"
"글쎄 말입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요 며칠 사이 어찌 된 일인지 내왕하는 손님들이 갑자기
많아졌어요. 다른 객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요."
여소교가 가볍게 매초풍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난 다른 사람과 한 방에서 자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더군다나……."
그녀가 진현풍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매초풍이 둘러댔다.
"친오라버니인데 뭐 어때? 내가 너와 한 침대에서 자면 되지."
여소교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 신분을 밝히기만 하면 단칼에 죽여 버리겠다고
매초풍이 여러 번 위협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불편하시다면 객점 지하에 방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심부름꾼의 말을 매초풍이 싹뚝 잘랐다.
"됐으니 나가 봐요. 여인들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하니까."
심부름꾼이 알겠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나가 버렸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자는 게 습관이 안 돼놔서……."
"그러면 이 소저와 한 침대에서 자지 그래요? 그러면 습관이 될테죠?"
매초풍이 쏘아붙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난 그런 뜻이 아닌데……."
매초풍이 여소교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 사람이 너와 함께 자고 싶어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여소교는 두 사람이 자기를 능
욕하려고 그러는 줄 알고 기겁을 했다.
"난 싫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내겐 이미 사내가 있단 말이에요."
"흥, 내가 알기로는 시집을 안 갔다고 알고 있는데 무슨 수작 이야."
"바로 소요공자 악처후예요."
이에 놀란 두 사람은 사로 멍하니 얼굴을 마주했다.
"그게 사실이야?"
"예, 그분은 꼭 내게 장가를 들겠다고 맹세까지 했는걸요."
매초풍이 픽 바람이 새듯 웃었다.
"바보 같은 계집애. 소요공자의 말을 정말로 믿어? 너를 속인 거라구."
여소교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들이 그와 적대관계에 놓였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
매초풍이 정색을 하며 타이르듯이 설명했다.
"악처후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네가 갖고 있는 소녀경을 얻어내기 위해 그런 거라구. 생각
해 봐. 그렇지 않았다면 왜 너의 부모는 구하지 않고 너만 꿰차고 도망을 쳤겠어?"
이제껏 사내를 모르고 있던 여소교는 악처후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나 하나만 구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인데 어떻게 부모까지 구해요?"
그녀는 오히려 악처후를 두둔하고 나섰다.
매초풍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여씨네 가문 때문에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종자를 남겨 둘 수는 없어. 하지만 그
냥 죽이지는 않겠어. 마음 고생을 실컷 하다가 서서히 죽게 만들테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미소를 보였다.
"이 사랑에 푹 빠진 계집애야, 네 말을 들으니 은근히 질투가 나는걸. 나도 너같이 정 많은
공자님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진현풍이 얼른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 진현풍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매초풍이 새로운 제의
를 했다.
"말을 듣고 보니 딱하군. 내 악처후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어."
"그럼 날 풀어 주겠다는 말인가요?"
매초풍이 여소교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한 가지만 대답하면 난 네가 악처후를 만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어. 아니 내가 직접 그를
만나 너를 넘겨줄 수도 있어."
여소교는 반신반의했다.
이때 밖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났다. 객방을 미리 맡아 두었다는 사람들이 온 듯했다.
진현풍이 얼른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여러 명의 사내들이 등에 칼을 차고 걸어오고 있었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여윈 몸에
누런 소매 없는 겉옷을 걸쳤다. 길죽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낯색은 약간 검은
편이었다. 동그란 눈은 작은 듯했지만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가 사내들의 두목인 것 같
았다.
그 곁에는 가죽집에 넣은 큰 칼을 가슴에 안은 거인이 씩씩거리며 걷고 있었다. 칼자루를
감은 누런 비단이 눈부셨다.
진현풍은 가만히 돌아서며 매초풍에게 속삭였다.
"사매, 저 사람들이 누굴까?"
밖을 살펴본 매초풍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상관 말아요.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니 잠자코 있기나 해요."
"난 곡령풍과 육승풍이 무림 사람들을 끌고 와 우리를 공격할까 봐 걱정되는데……."
매초풍이 입을 씰룩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도화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존심이 강해요. 그런데 그들이 과연 남
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하려 들 것 같아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들은 곧 여소교의 혼수혈(昏睡穴)을 눌러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자기들은
한 침대에 누워 밤늦도록 쾌락을 나누다가 지쳐 잠들었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뜨락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얼른 옷을 입고 문틈으로 밖을
살펴보았다.
어젯밤에 온 그 무리들이 두 사람씩 하나가 되어 무공 연마를 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
이는 그 여윈 사내는 황색 비단 바지저고리를 입고는 나머지를 지휘하고 있었다.
"공력을 들인 무공인 듯싶은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군."
진현풍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매초풍도 밖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권법이 날쌔고 주먹에 힘은 있는데 초수가 너무 밋밋해."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급하게 빼며 말했다.
"혹시, 자기들의 비법은 숨겨두고 있는지도……. 사람들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비밀 무공을
연마하겠어요?"
진현풍이 그 말에 수긍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조련을 하는 걸 봐서는 싸우러 가는 길인지도 모르지."
"난 지금 손이 근질거려 미치겠어요. 어서 몇을 잡아다가 구음 백골조나 최심장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공이 어느 정도 있는 상대라야 우리 수련이 효과가 있을텐데 말이에요."
진현풍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상대의 무공을 모르고 무작정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매초풍이 여소교가 아직 자고 있는 침대로 접근했다. 해당화처럼 붉게 상기된 채 여소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매초풍이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원래는 여소교처럼 평온한 생활을 누리려고 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이젠 꿈으로
도 찾을 수 없으니……. 그녀의 손은 이미 무공 연마에 각이 지고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그녀는 당장 여소교의 머리를 박살내 죽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그녀의 혼수혈을
풀어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여소교는 매초풍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는 몸을 사렸다. 매초풍이
얼른 미소로 바꾸며 말했다.
"잘 잤어?"
여소교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넌 참 아름다워. 소요공자가 반할 만도 하지."
그 말에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소교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사실 그쪽도 예뻐요."
매초풍이 그 말에 방긋 웃었다.
"정말?"
"그래요."
"호호호, 그건 그렇고 듣자하니 여씨네 가문의 여인들은 모두 소녀공 비법을 알고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
순간 여소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익히면 마음에 드는 사내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를 수 있다며?"
여소교가 두 눈을 꿈벅이더니 말했다.
"어머니는 소녀공을 배워 주면서도 그런 말씀은 한 번도……."
여소교가 자신의 술수에 걸려들어 조금씩 실토하고 있다는 것을 안 매초풍이 속으로 웃었
다.
"남녀간의 일은 모녀간이라도 함부로 주고받을 수가 없어서 그렇겠지. 하지만 언니 같은 내
게 말 못할 건 없잖아?"
매초풍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여소교가 무언가를 떠올리다가 그만 피식 하고 웃었다.
"왜 웃지?"
"그런데 소요공자님은 글쎄 소녀공이 몸 보양하는 장수공(長壽功)이라고 하지 뭐예요. 그 말
이 틀리다면 사내가 배워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텐데……."
매초풍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과연 악처후도 소녀공을 얻으려고 했었구나. 그런 속셈이 없고서야 여씨네를 도와줄 리가
없지!'
매초풍이 상념을 떨쳐버리며 다시 미소를 건넸다.
"그 사람이 널 좋아하고 또 너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네가 남녀간의 방사를
잘 모를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랬겠지. 소녀공을 우선 연구한 다음 그 비법을 네게 가르쳐 주
려고 그랬을 거야."
그러자 여소교는 볼이 빨개지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사람은 그런 생각밖에 모르나 봐."
"그것은 결코 나쁜 게 아냐."
"그런데 저분은 언니를 사랑하고 있나 보죠?"
여소교는 차츰 매초풍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피, 저 사람은 무공밖에는 몰라."
진현풍은 아직도 문틈으로 사내들의 무공 연마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공을 배워 저분의 마음을 잡아 보겠다는 건가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여소교가 미소를 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난처한 기색이 되고
말았다.
"헌데 소녀공을 남에게 전수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께서 신신 당부를 하셨는데……."
"걱정 마. 넌 그저 그걸 세 번만 입으로 외우면 돼. 나는 곁에서 듣기만 할 테니까. 그건 전
수하는 게 아니잖아?"
"사람이 없는 데서만 소리내어 외우라고 하셨어요."
이때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채주님, 한번 본때를 보여주시오!"
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현풍이 급히 손짓을 했다.
"사매, 그 사내가 무공을 보일 모양이야!"
아쉽지만 매초풍은 일단 소녀경은 접어두고 그쪽으로 갔다.
야윈 사내가 큰 칼을 안고 있는 사내에게 접근했다. 칼자루를 쥐더니 칼을 쑥 뽑아 든 그가
눈을 부라렸다. 칼등이 두껍고 날 이 넓은 금도(金刀)였다. 그가 그것을 거꾸로 쥐고는 읍을
했다.
"여러 아우님들, 이 형님이 한번 해보이겠소."
칼을 척척척 휘두르며 그가 칼솜씨를 보이기 시작했다. 금빛이 번뜩일 때마다 갈채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는 전후좌우 여덟 번을 내리쳤다. 객영팔방(客迎八方)이라는 초수였다. 맹호
처럼 날쌘동작이었다.
차츰 구경꾼들이 물려들었다. 진현풍도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다. 심부름꾼 옆에 가 선
진현풍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구경에 정신이 팔린 심부름꾼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저 호걸도 모른단 말이에요? 저 사람은 금도채(金刀寨)의 채주인 금도(金刀) 임청(林靑)이
랍니다."
진현풍은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금도 임청은 금도 일백영팔식(金刀一百零八式)을
잘 써 이름이 났는데 그 초수들은 송나라 명장 금도영공(金滯令公) 양계업의 금도도법(金刀
刀法)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임청이 보이는 것은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임청
의 손에서는 위력 있게 보였다.
무공을 보인 그는 부하들과 함께 아침을 먹더니 어디론가 말을 타고 가버렸다.
뒤늦게 세 사람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 문어귀로부터 걸어 들어왔다. 횐 옷을 입은 사내였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햇볕에 그
을린 듯 새까만 발에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도 기이한 사내였다. 허리에 찬
검도 검집이 없는 녹슨 검이었다. 검날만 예리하게 갈아 놓은 듯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심부름꾼이 달려가 허리를 넙죽 숙였다.
"무엇을 드릴까요?"
"난 술이면 돼."
아침부터 술을 찾는 것도 괴이했다.
"아침부터 술을 찾는 손님은 삼 년 만에 처음인데요. 삼 년 전에도 손님과 용모가 비슷한
분이 오셔서 술을 찾았어요. 아주 아리따운 처녀도 데리고 왔었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
사내가 말했다.
"그렇게 마음씨 좋던 본이 죽었어요?"
"기억을 하고 있으니 묻겠는데, 그 사람이 데리고 온 소저가 너에게 술 한 잔을 상으로 부
어 준 일도 잊지 않고 있겠군?"
"그럼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요. 그 아가씨는 참 꽃같이 아름다웠어요. 마음씨도 비
단결을 닮았구요. 제가 술을 좋아하는 줄 알고 상으로 주신 거죠. 그런데 손님이 어떻게
……?"
"이 사람아, 술은 언제 주려고 그래?"
"아이구 죄송합니다. 근데 무슨 술로……?"
"행화촌주로 네 각 가져와."
"그때 손님도 그 술을 달라고 하셨는데……."
심부름꾼은 그때 손님과 어떤 관계일지 사뭇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행화촌주는 매우 독한 술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그 독한 술을 혼자 다 마셨다. 그 독주가 들
어가면 갈수록 얼굴이 붉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창백해졌다.
그자를 살펴보던 매초풍이 감탄을 했다.
"호걸남아야!"
그 괴사내가 다시 심부름꾼을 불렀다.
"여기 산녹사(酸綠絲) 한 접시하고 용봉양양(龍鳳兩兩) : 중국 장 아찌), 그리고 죽순 한 접
시와 물고기 생회 한 접시를 더 가져오지."
"손님께서도 그 손님과 식성이 같으시군요."
괴인은 아무 대답 없이 술을 마셨다.
"정녕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느냐?"
그 말에 심부름꾼이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래 떴다.
"손님이 그럼 바로…… 삼 년 전 그 손님!"
괴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삼 년 전의 그 호방한 젊은이는 삼 년 전에 죽었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계시면서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말씀입니까요? 그럼 그때 그 소저
는……?"
괴인이 약간 떨리는 손으로 술사발을 집었다. 급히 술을 비운 그가 시를 읊조렸다.
주가가 어디 있냐 물었더니
목동은 행화촌을 가리키네
허허, 미주는 여전하건만
미인은 영영 떠나가 버렸네.
그리고는 괴인은 다시 술을 들이마셨다. 심부름꾼은 그가 그 여인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이
변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저,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여인들이란 원래 다……."
순간 괴인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눌렀다. 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넌 모른다.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아느냐? 여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보이냐구?"
매초풍은 괴인의 내공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녀는 그의 내공으로 보아 그가 아주 총명한
사람임을 알았다. 사부가 그를 보았다면 반드시 제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괴팍
한 성미가 꼭 자신의 사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진현풍이 매초풍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아. 저 내공을 보라구."
"얼른 먹기나 해요. 우린 떠나면 그만이니까."
다시 괴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삼 년 전엔 내가 또 술 두 각을 더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손님, 기억력도 참 대단하십니다요."
그는 얼른 술을 날라 왔다. 괴인은 그 심부름꾼을 자기 앞에 앉혔다.
"저같이 미천한 놈이 어떻게……."
"하지만 정아(瀞兒)보다는 보기 좋아. 그 여인은 나와 같이 술을 마셨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의 여인이 돼 버렸지."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요. 여인들이란 그저……."
괴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심부름꾼은 겁을 집어먹고 몸둘 바를 몰라했다. 괴인이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아냐, 정아는 그런 방탕한 여인이 아니었어. 내게 처녀도 바쳤고 혼인 준비도 하고 있었다
구."
밥을 다 먹은 세 사람은 그러나 호기심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 여인이 다른 데로 시집이라도 갔나요?"
심부름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술주정뱅이라서 그랬지."
"아, 예."
"문제는 술을 먹고 그녀를 때리질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후회가 되는군."
괴인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난 술이 깨어서는 묻곤 했지. 그 상처는 어디서 다친 상처냐고?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말
이야."
그는 계속 술을 마셔 댔다.
"정아는 내가 돈을 마구 쓰는 것을 싫어했어. 난 이틀도 못 가 은 백만 냥을 다 써버린 적
도 있었으니까."
심부름꾼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그녀는 내게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더군.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 버렸어."
"네 가지 죄라니요?"
"먹기 좋아하고, 마시기 좋아하고, 계집질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고……."
괴인은 이제 주정처럼,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듯 계속 지껄였다.
"나는 가장 좋은 객주집만 가고 가장 비싼 것만 골라 먹으면서 아우에게나 겨우 은자 몇 푼
을 쥐여 주곤 했지. 정아는 그런 나를 나쁜 버릇을 가졌다고 꾸짖었어. 하지만 난 돈이란 죽
으면 가져가지도 못하는 것이라 여기고는 내 멋대로 행동한 거야."
심부름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한푼의 은자를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
기 때문에 속으로 한껏 괴사내를 비웃었다.
괴인의 침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내가 기생집에 가서 기생들과 놀기를 좋아한다고 화를 냈지. 난 기생집에 갔어도
그녀들과 웃고 떠들기 위해서 가는 거였어. 한 번도 그녀들과 살을 섞은 적이 없었지. 내가
도박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야. 욕을 먹어도 싸지. 한 번은 그녀까지 북방에서 온 투전꾼에게
빼앗기고 말았거든."
"아니 사랑하는 여인을 걸고 투전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사실 그때는 오기가 생겨서 그랬지만 나중엔 후회가 들었지."
"그래서 여인까지 빼앗겼단 말이에요?"
심부름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괴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계속했다.
"난 몽땅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었지. 나중에 곁에서 구경하던 한 사내가 백은 오만 냥과
구슬 백 개를 내놓아 정아를 다시 찾아 주었어. 대단해. 생면부지인 남의 여인을 그것들과
바꿔 주었던 그 사내는 정말 내겐 귀인이었지. 난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어. 나하고 강호에
나서길 원한다면 좋은 벗으로 평생 지낼 생각도 했었지. 그런데 실수였어. 정아가 그에게 시
집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한 거야. 할 수 없이 난 그 사람과 결투를 벌였지. 결과는 참
패였어. 그전에 술을 잔뜩 마셨던 게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취하지만 않았다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요."
갑자기 괴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매초풍이었다. 괴인이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매초풍
도 범상치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탁운백(卓雲白), 절정공자란 말이에요?"
매초풍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매초풍이 그 말에 웃음을 살짝 띄웠다.
"난 지금 절정공자를 이긴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큰 인물이지. 아주 신비스런 인물……. 그가 정아를 데리고 간 다음에야 알았지만 그는 오
혈궁 궁주인 묘상(苗尙)이었소."
"오혈궁 궁주?"
매초풍이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여소교는 머리 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탁운백과 악처후는 이름하여 강호의 양 공자가 아니던가. 서로 교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 공자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전 소요공자의 아내랍니다."
그녀가 탁운백에게 울부짖으며 달려가려고 했다.
"가만있지 못해!"
매초풍이 그녀의 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그녀의 아혈을 눌러 말을 못하게 하고는 탁운
백을 주시했다. 절정공자 탁운백은 냉소를 머금은 채 여소교를 바라보았다.
"소저는 이 탁운백의 별호가 뭔지 아시오?"
말을 못하게 된 여소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별호가 절정공자임을 아시는데 왜 그러시오. 나 절정공자는 이젠 모든 여인들과는 연관
이 없게 된 사내요. 모든 정을 끊었다는 뜻이오."
"이봐요. 그대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좋겠소?"
진현풍이 한마디 끼여들었다. 탁운백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대들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많겠소. 난 내 일만 생각할 뿐이오. 그리고 난 취했소. 취하
면 사람을 때리는 버릇이 있는데 아직까지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난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죽이고 싶소! 특히 무공을 할 줄 아는 여인들이 가장
눈에 거슬리지."
"오, 알 만하군. 정아란 여인이 무공을 할 줄 알았나 보지. 그래서 그 분풀이로 무공을 익히
고 있는 여인들을 모두 미워하고 있군 그래."
매초풍이 비웃자 탁운백이 고함을 질렀다.
"그 여인은 끌어들이지 마!"
순간 술사발들이 일제히 매초풍에게로 날아갔다. 매초풍이 얼른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술사
발들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탁운백은 그녀의 경공에 은근히 놀라는 눈치였다.
"무공이 뛰어나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대는 여인이야. 난 여인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
어."
진현풍이 두 손으로 탁자를 집어들더니 탁운백을 향해 힘껏 던졌다. 너털웃음을 토하던 탁
운백이 일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어느새 대들보 위에 올라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초풍이 여소교의 혈도를 몇 곳 더 눌러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간다!"
진현풍과 함에 몸을 날리며 탁운백을 향해 최심장을 날렸다. 탁운백이 그들의 공격을 피해
아래로 내려왔다. 두 사람도 내려서며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탁자와 의자들이 마치 폭풍에
휘감긴 나뭇잎처럼 휘날렸다.
"대단한 장법이야. 처음 보는 장법인데?"
탁운백이 감탄을 하자 진현풍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당연하지. 흑풍쌍살의 절기를 네 놈이 알기나 하겠어?"
"이제 알겠다. 너희들이 그 흑풍쌍살이로구나. 하지만 생각보다는 무공이 형편없는걸."
매초풍이 두 손을 매의 발톱처럼 만들어 달려들었다. 그녀는 일시에 탁운백의 등짝을 움켜
쥐려고 했다. 탁운백이 급히 몸을 돌리며 주먹을 뻗었다.
"절정권(絶情拳)!"
탁운백의 주먹이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어떤 것이 진짜 주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도화도 황약사가 자랑하는 낙영신검장(落英神劍掌)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초수였
다. 물론 황약사를 따를 수는 없었지만 그 강한 내공만은 매초풍을 곤경에 밀어넣기에 충분
했다.
진현풍이 얼른 매초풍을 도와 합세했다. 탁운백은 날쌘 동작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술
에 취해 보법이 불안전해 보였지만 공격과 방어는 철두철미했다.
다급해진 진현풍이 소리쳤다.
"사매, 어서 병장기를 써!"
매초풍이 허리에서 은빛으로 번쩍이는 긴 채찍을 풀어 한차례 바닥에 내리쳤다.
휘이익― 탁!
그러더니 곧장 탁운백을 향해 뱀의 혀처럼 휘어지는 채찍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음……."
탁운백은 그 채찍을 손으로 잡아 오히려 그녀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채찍에 갈고리
같은 것들이 잔뜩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포기했다.
탁운백이 다시 대들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한 손으로 대들보를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녹슨 검을 뽑아 들었다.
진현풍에게도 금빛이 나는 채찍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독룡금편(毒龍金鞭)이라고 하였
고 매초풍의 채찍을 독룡은편(毒龍銀鞭)이라 불렀다. 모두 길이가 넉 장(丈)씩 되었다.
그들은 동시에 탁운백을 채찍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탁운백이 검으로 채찍을 막아냈다. 그는 자신의 검을 자신했다. 그런데 채찍은 쉽게 끊어지
지가 않았다. 그들의 채찍은 천 년 묵은 구렁이 껍질로 만들었고 겉에는 백금까지 입혀져
있어 보기보다 질겼다.
탁운백은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집 밖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도 탁운백을 쫓아 밖으로 나갔
다. 탁운백의 절정검법은 그 초수가 특이하여 지금까지 남에게 져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에
못지않게 황약사의 무공을 전수받은 흑풍쌍살의 채찍질 또한 천하에서 알아주는 절기였다.
흑풍쌍살이 채찍을 휘두르며 한꺼번에 공격하자 이제는 탁운백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한창 싸우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이윽고 수십
기의 사람을 태운 말들이 객점 문 앞에 이르렀다.
금도채의 호한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뜨락으로 성큼 들어서며 세 사람
이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맨 앞에서 걸어오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냐?"
그 벽력같은 소리에 세 사람이 동작을 멈췄다. 탁운백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사내의 말을
받아쳤다.
"네 놈들은 누군데 어른신들 싸움에 나서느냐?"
"이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순간 딱 소리가 나며 그의 뺨을 탁운백이 후려갈겼다. 그의 뺨은 순식간에 부어 올랐다. 사
내가 화를 버럭 내며 칼을 높이 쳐들었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바로 금도 임청이었
다.
"채주님, 저 놈들이 글쎄……."
"저리 가 있거라."
임청미 점잖게 말했다.
아침에 객점을 떠난 그들은 남에게 줄 선물을 놔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러 서둘러 돌아온 길이었다.
임청이 탁운백에게 읍을 하며 사죄하는 투로 말했다.
"내 부하의 잘못을 용서하시오. 그런데 그대도 너무한 것 같소아다."
"그래서 어쩔 셈이오?"
탁운백은 여전히 독기를 품은 낯빛이었다.
임청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으나 참기로 했다. 괜한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자신들의 일을 그
르칠까 봐서였다.
"그럼……."
집 안으로 들어 가려는데 탁운백이 앞을 가로막았다.
"날 무시하겠다는 게요?"
임청이 한번 사나운 눈초리를 돌렸다가 이내 옆으로 비꼈다. 오히려 발끈하고 나선 것은 그
의 부하들이었다.
"채주님, 저 병들어 죽은 귀신같이 생긴 놈을 혼내 줍시다!"
"저 놈의 다리를 한칼에 잘라 버리겠다!"
"죽여!"
부하들이 모두 탁운백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부렸다.
탁운백의 낯색이 돌연 창백해졌다. 그의 가슴속에서 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인간의 모든 정과 감정들이 사라지게
되자 그는 피를 마시려고 했다. 그것도 사람의 피를 마시려 했다.
차츰 임청의 기색도 험악해졌다. 다른 부하들이 으르렁대고 탁운백의 창백해진 낯색을 그가
겁먹은 것으로 여긴 임청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임청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가 천천히
금도를 뽑아 들었다.
매초풍은 팽팽하게 감도는 긴장감에 목이 탔다. 그녀는 가만히 진현풍의 옷자락을 잡아끌었
다. 그리곤 여소교를 옆에 끼고는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때를 같이하여 탁운백이 녹슨 검을 임청에게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예리하게 가
르며 그의 검이 살기를 내뿜었다. 절정검법 중에서도 절정검 초식이었다. 다른 예비 동작은
전혀 없이 곧바로 상대를 향해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비교적 간단하게 보이지만 사실 치명
적인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긴장한 입청은 평생 익혀 온 금도팔식(金刀八式)을 쓰며 녹슨 탁운백의 검을 막았다. 순간
탁운백의 검은 어느새 임청의 금도를 비껴 지나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임청이 그만 칼을 떨어뜨리며 한숨을 지었다. 겉으로 본 탁운백의 얼굴색과는 전혀 다르게
승패가 결정 난 것이었다.
"날 죽이더라도 내 부하들은 살려 주시오."
탁운백이 그 말에 검을 거두었다. 임청이 약간 의외라는 눈길로 탁운백을 응시했다.
"그대는 너무 경솔하였소. 금도 일백영팔식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 세
상 누구도 그 초식을 패배시키지 못하는데……."
탁운백이 무표정하게 내뱉었다. 이제 살았다고 믿은 임청이 미소 지었다.
"잘 보았소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검보다 인정이 있소이다."
"우리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요."
탁운백이 다시 검을 쳐들었다. 임청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꼭 싸워야 한다면 그전에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소? 내 금도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상대를
죽인 적이 없소 또한 나 역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죽고 싶지는 않소."
"난 절정공자 탁운백이라고 하는 사람이요."
그 말에 임청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임청이 눈이 없어 탁 공자님을 몰라 뵈었소이다. 부디 용서하시오."
나머지 부하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사실 제가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도 탁 공자께 드리려던 선물을 깜박 잊고 놓고 갔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님을 뵙게 될 줄이야. 여봐라, 어서 그 선물을 가져와라!"
부하 하나가 누런 비단에 싼 것을 들고 와 탁운백에게 건넸다.
"부족한 선물이지만 받아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임청이 직접 그것을 풀렸다. 보자기 속에서 자담목으로 만든 나무상자가 나왔다. 그 뚜껑을
여니 눈부신 진주 보물들이 가득 했다.
"공자성의 이번 길이 순탄하게 성사되기를 바라며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오직 그 뜻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흑풍쌍살은 여소교를 끌고 벌써 삽십 리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비로소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매초풍은 여소교를 땅에 내
려놓고 혈도를 풀어 주었다.
"망할 놈의 계집,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인 거야?"
여소교가 가볍게 눈을 치뜨며 매초풍의 말에 대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겠어요. 난 당신들에게 이런 시달림을 받고 싶지가 않다구요!"
매초풍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오호호호, 넌 절정공자가 네 편을 들어줄 거라고 믿었더냐? 소요공자와 절정공자는 벗이
아니라 적이란다. 소요공자가 절정 공자의 출중한 무공을 얼마나 시기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한 번만 더 허튼 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진현풍도 눈을 부릅뜨고 협박을 했다.
"당신들은 나를 윽박지르고 어르고 하는군요. 그 목적이 무엇인지 난 알아요. 소녀공을 얻자
는 속셈이죠? 흥, 소녀공을 쓰면 사내들이 어떻게 된다구요?"
"그건 사실이다."
"그만둬요. 누굴 속이려고 그래요?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말하지 않겠다는 게냐? 네가 그것을 토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매초풍이 여소교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을 눌렀다. 이제 내력만 가하면 여소교는
죽은 목숨이었다. 여소교는 그것도 모른 채 깔깔 웃어댔다.
"날 죽일려구? 그렇게 되면 소녀공은 끝장이지. 소녀공 때문이라도 날 죽이지 못할걸?"
매초풍이 손을 거두며 그녀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분노를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수록 여소교는 득의에 찬 행동을 보였다.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사매, 요 며칠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는데 오늘 밤은 한번 해 보아야 하지 않겠어?"
진현풍이 물어 왔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잖아요. 연마를 하려면 어서 인가를 찾아야 할텐데."
그 말에 여소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공을 연마하는데 왜 인가가 필요한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한 오리쯤 더 가니 푸른 들판 끄트머리에 작은 마을 하나가 낮게 자리잡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오는 조용한 전원 마을이었다.
흑풍쌍살은 여소교를 이끌고 남쪽에 있는 돌산으로 올라갔다. 해가 지고 노을이 번지는 것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저 애를 잘 지키고 있어요. 내가 다녀올테니."
매초풍이 돌아서려고 했다.
"조심하고 젊고 건장한 것들을 많이 찾아보라구."
"알았어요."
매초풍은 마을로 내려갔다. 매초풍은 먹을 것도 얻을 겸 구음 백골조와 최심장을 연마할 상
대도 고를 생각이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도 단정히 벗었다. 그녀는 얼굴이 반반해서 이런 일은 언제
나 도맡아서 했다.
한 농가에 이른 그녀는 문밖에서 부드럽게 주인을 불렀다.
"계십니까."
곧 젊은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나왔다.
"지나가는 길손인데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겠어요?"
"들어오세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매초풍은 그만하면 건강한 몸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내는 어떨
까?
마침 집 안에서 얼굴이 검붉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걷어올린 팔뚝에서는 단
단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내가 매초풍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그러자 얼른 젊은 여인이 사
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요. 어서 들어가 불이나 떼지 않고!"
사내가 히죽 웃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여인이 휘어잡고 사는 집안이군!'
매초풍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물을 마시면서 부부 모
두가 건강하니 사내는 최심장을 연마하는 데 쓰고 부인도 데리고 가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혹시 이 마을에 부잣집이 있나요?"
매초풍이 묻자 여인이 대꾸했다.
"있지요. 동쪽에 있는 시대관인부(柴大官人府)는 근방에서 소문난 갑부랍니다. 이 마을 사람
들 모두가 그 집 땅을 부쳐 먹고 살고 있거든요."
매초풍은 속으로 은근히 흡족해 했다. 부잣집이면 건장한 사내와 여인들이 적지 않을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대개 부잣집 주인을 원외라고 하는데 왜 그 집은 대관인이라고 부르지요? 무슨 큰 벼슬이
라도 했던 집안인가요?"
"글쎄 지금은 벼슬이 없지만 전에 한 분이 황하 북쪽 어디선가 지부(知府)로 있었대나 봐요.
그러다가 금나라와 내통한 일이 발각돼서 송나라 명장 악비 장군 밑에 있는 대장 양재홍에
게 죽음을 당했대요. 양 장군이 그의 가문까지 멸살시키려는 바람에 이곳까지 도망쳐 와 살
고 있지요. 벌써 오래 전의 일이랍니다."
매초풍은 그 집에 금은 보화가 많을 거라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젊은 여인이 다시 말을 이
었다.
"시씨네가 금나라와 내통했으니 관가에서 가만 놔두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외딴 곳에 처박
혀 있으니 어쩌겠어요. 포졸들이 몇 번 내려오기는 했었지만 그 집 장정들에게 오히려 떼죽
음을 당하고 말았지요."
"그 집 장정들의 무공이 대단한가 보죠?"
"난 그런 거 잘 모르지만 남들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장정 넷이서 포졸 수십 명을 때려죽였
다고 했어요."
매초풍은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지 않다는 걱정이 들었다. 여인은 또 관병들마
저 그 집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집엔 궁노(弓弩)를 수없이 준비해 왔거든요. 하인들이 모두 그걸 쏠 줄 안다고 들었어
요. 그러니 관병들이 쉽게 접근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다가 가장 힘센 사람 하나가 포위를
뚫고 나가 열 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왔지요. 그리곤 관병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죠."
"그때 데리고 온 사람이 어디 사람이라고 하던가요?"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매초풍은 그 젊은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농가를 나왔다. 그녀는 마을 동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농민들이 그녀를 보자 한결같이 걸음을 세우고 넋을
놓았다.
마을 동쪽으로 가보니 정말 으리으리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문 앞에는 양쪽에 돌사자
하나씩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매초풍은 시씨네 소작인 하나만 잡아 돌산으로 급히 올라왔다. 소작인을 협박하여 시씨네
집 내막을 대충 알아냈다. 시대관인네 집에 있는 장정 중 우두머리 격은 시대(柴大), 시이
(柴二), 시삼 (柴三), 시사(柴四)라고 했다. 그들은 한 사부 밑에게 삼 년 동안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런데 시대관인을 도와 관병들을 물리친 그 열 사람에 대해서는 소작인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매초풍은 시대관인부의 일을 캐묻고 나서 손바닥으로 소작농의 뒷덜미 대추혈을 쳤다. 소작
농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뻗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 집이 강호의 어느 방파와 연계가 있는 것 같아. 사매, 오늘 무공 연마는 그만
두는 게 어때?"
진현풍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고집이 센 매초풍은 반대를 했다.
"난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보고 싶어요."
사실 그녀는 무공을 연마하는 것보다 여소교에게서 소녀공을 얻어내는 게 더 급했다. 물론
두 가지 일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삼경 무렵, 매초풍과 진현풍은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소교는 더 이상 혈도를 누르지 않
아도 좋을 만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매초풍은 그녀의 손발을 묶어 놓고 입에는 재갈을 물
렸다.
흑풍쌍살은 부엉이처럼 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들이 시대관인 담장을 넘어 소작농에게서 알아낸 길을 따라 북쪽 사랑방으로 접근해 갔
다.
두 사람은 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는 동정을 살폈다.
매초풍은 작은 돌조각 하나를 집어 창문을 향해 던졌다. 그런데도 집 안에서는 오랫동안 기
척이 없었다.
'원래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깨는 법인데……, 그렇다면 너무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진현풍이 가만히 창문을 밀어 보았다. 창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창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매초풍이 그를 잡았다. 그녀는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는 안을 들
여다보았다.
넓은 실내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져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다른 방으로 연결된 문이 있었다.
그리고 벽에 네 개의 칼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것도 보였다. 창문 바로 앞에는 긴 탁자가
있었는데 찻주전자와 먹다 남은 찻잔이 열 개 가까이 놓여져 있었다. 왼쪽에도 침대가 두
개 더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흔적이 역력했다.
창문 사이로 역한 술냄새와 고리타분한 냄새들이 섞여 확 풍겼다. 두 사람은 살며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매초풍은 곧장 왼쪽 침대로 가서 휘장을 걷었다. 침대 위에서 정신없
이 자고 있던 사내들의 혈도를 눌렀다.
다음 침대로 가려고 할 때였다. 한 사내가 깨어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매초풍이 얼른 사내
의 인후를 눌러 찍소리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다시 대혈(大穴)을 짚자 사내는 꼼짝도
못하고 늘어졌다. 진현풍도 나머지 두 사내의 혈도를 각각 눌러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집 밖으로 나와 야경꾼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모두가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한 자들이라 실망이 되었다. 무공 연마에는 합당하지 않은 대상들이었다.
다른 사내들을 찾아 몸을 돌리려는데 한 방에서 인기척이 나며 불이 켜졌다. 매초풍과 진현
풍은 얼른 장미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말소리가 가깝게 들려 왔다.
"이봐, 사제. 내가 뭐라고 하던가? 술을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벌써 얼마나 마셔 댔
어?"
사제로 불린 사람이 웃으며 대꾸했다.
"난 술을 안 마셔도 밤중엔 꼭 일어나야 하오. 잠을 깨워서 미안하외다."
곧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스물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내의 바람으로
나왔다.
"좋은 술에 좋은 안주에 어여쁜 종년까지 품에 안겨 주는데 왜 안 마셔? 그렇게 못하는 게
바보지!"
사내는 혼자 중얼거리며 흑풍쌍살이 숨어 있는 장미 숲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
고는 땅에 바싹 엎드렸다.
사내가 오줌을 깔기기 시작했다. 오줌발이 세차게 뿜어지며 매초풍의 얼굴로도 몇 방을 튀
었다.
'저 놈이……? 당장 잘라 버릴테다!'
매초풍이 이를 갈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가 시원하게 방뇨를 마친 다음 돌아섰다. 이때
매초풍이 솔개처럼 몸을 날려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채려고 했다. 사내가 그것을 눈치채고는
얼른 몸을 엎드렸다. 그러나 매초풍은 오른쪽 손바닥으로 사내의 등에 있는 영대(靈臺)와 지
양(至陽)의 혈도를 눌러 버렸다.
사내는 집채와도 같은 큰 힘이 체내로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겁이 나서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매초풍은 사내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놓았다.
이때 집 안에서 다른 한 사내의 웃음 소리와 여인의 교성이 들려 왔다. 그러더니 사내가 밖
에 대고 소리쳤다.
"사제, 우린 침대를 바꿨다. 우리 계집들을 한번 바위서 놀아 보자구!"
그러자 다시 여인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호호호, 이러지 말라니까요. 사형제끼리 이러면 어떡해요? 망측하게……."
"망측하긴, 이래야 진짜배기 재미가 있다구."
매초풍과 진현풍이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나자 안에 있던 사내는 오줌 누
러 갔던 사제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사제, 윌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들어오라구. 우리 누가 더 센가 한번 내기해 보자구."
매초풍이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한 여인이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누워 있었다.
다른 침대에는 남녀 한 쌍이 역시 벌거벗은 채 서로 끌어안고 빨아대고 있었다.
"아니……?"
사내가 매초풍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매초풍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런, 또 하나 들어왔네!"
그는 계집종으로 착각한 듯했다. 매초풍이 냉소를 던졌다.
"난 이 집 종년이 아니라 네 놈의 할머니시다!"
그제야 사내는 매초풍을 수상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매초풍 뒤로 진현풍이 모습을 나타냈다.
"흐흐……!"
매초풍이 곧 갈고리처럼 손을 만들어 달려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그때까지 품에 안고 있던
계집을 얼른 방패처럼 돌려 막았다.
그렇다고 물러설 매초풍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춤하지 않고 다섯 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계
집종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박히며 피가 뿜어졌다. 정확히 계집종의 심장을
찌른 것이었다.
"아악……!"
계집종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러자 다른 침대에 있던 계집이 튀어오르듯 일어났다.
"아아……."
그녀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도망치려고 했다. 매초풍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자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문 쪽으로 달려가자 매초풍이 장을 날렸다.
"헉!"
등짝을 얻어맞은 계집종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사형이라는 자는 매초풍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디 이 할미하고 놀아 보자."
매초풍이 징그럽게 웃으며 가까이 갔다.
"으아악……!"
사내는 귀신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그는 알몸으로 막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리
려 했다. 그런데 그만 시커먼 물체에 가로막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진현풍이 달려와
그의 앞에 버티고 선 것이다.
매초풍이 그자의 뒷덜미를 움켜쥐며 말했다.
"허튼 짓하면 모가지를 비틀어 놓겠다!"
사형이란 자는 사지를 벌벌 떨며 알겠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자 매초풍이 그의 혈도를 눌러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불을 끄고 한 사람이 하나씩 사내들을 옆구리에 끼고는 밖으로 나왔다.
돌산으로 돌아온 그들은 축 늘어진 사내들을 여소교 곁에 눕혀 놓았다. 여소교는 아직도 움
직이지 못하고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시 시대관인부로 가서 한 번에 두 사람씩 데려왔다. 그중
에서도 몸이 건장하고 무공이 뛰어나 보이는 자들만 골라 열심히 날랐다.
"이제 낮에 만났던 그 농가의 젊은 부부만 잡아오면 여덟이 돼요. 그런 다음 무공 연마를
하기로 해요."
그들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그들은 농가집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들어 있던 젊
은 부부는 소스라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느닷없이 닥친 두 사람에게 혈도를
빼앗겨 반항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갓난아이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진현풍이 죽이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
"놔둬요. 어린애는 내게 필요해요."
매초풍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돌산으로 돌아온 매초풍은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숨이 막혀서 인지 기절을 한 상태였다. 매
초풍은 아이에게 진기를 불어넣으며 한동안 아이의 전신을 주물러댔다. 잠시 후 아이가 우
렁찬 울음 을 토했다.
매초풍은 또 여소교의 입에 채웠던 재갈을 풀고 철도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런 다음 아이를
여소교에게 안겼다.
"이 아인 누구죠?"
울어대는 아이를 연신 추스리며 여소교가 눈을 왕방울만하게 만들었다.
"왜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너하고 닮은 구석이라도 있느냐? 혹 네가 낳은 아이는 아니냐?"
"어머, 해괴망측하게 그런 소리를……."
여소교가 토라지듯 고개를 홱 돌렸다.
매초풍이 싱긋 웃으며 진현풍을 돌아보았다.
"이제 시작해요. 무엇부터 먼저 할까요? 구음백골조를 먼저 할까, 아니면……?"
"모두 신체가 건장한 사람들이니 우리의 수준으로는 구음백골조가 좀 부족할지도 몰라. 단
번에 손가락이 두개골을 꿰뚫지 못 하면 낭패거든. 오히려 최심장을 써보는 게 좋을 것 같
군."
매초풍도 그 말에 동조를 했다.
"한 사람이 한 명씩 맡아 가장 약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구음진경>에 적혀 있다면서
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구음진경>의 글은 알아보기 힘들어 잘은 모르지만 내가 체험한 바로는 그래."
"그렇다면 오차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는 않아. 우린 처음부터 내가 깨달은 초식대로 연마했었잖아. 그래도 무공이 날로 발
전되어 갔지 언제 실패해 본 적이 있었나?"
진현풍이 자신하며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자 매초풍도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동사 황약사는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아내의 총명한 기억력에 의해 <구음진경>의 하
반부를 얻어냈었다. 그러니 흑풍쌍살이 훔쳐낸 것 역시 전부가 아니라 그 하반부일 뿐이었
다.
하반부에는 모두 적을 이길 수 있는 실용적인 초수들이 적혀 있었다. 그 초수들은 위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기초를 쌓는 비결에 대한 구절은 없었다. 그것은 <구음진경>상반부에 있
었다. 상반부에는 내공을 수련하는 도가의 큰 도리들, 그리고 권경(拳經)과 검리(劍理)들이
적혀 있었다. 그 대신 상반부에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초수들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다 익혀야지만 완벽한 <구음진경>의 절묘한 무공을 얻을 수 있는 것
이었다. 왕중양은 유언으로 그 기서의 상반부와 하반부를 따로 감춰 두라고 했었다. 그 목적
은 바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상반부를 읽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흑풍쌍살에게 <구음진경> 전체가 전해졌다면 강호 무림에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아무
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이 어려워 해독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연마했다가는 도리어 화를 불러올 수
도 있었다. 진현풍은 그런 믿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나하나 연마해 나갈 때마다 신
중하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매초풍도 진현풍이 책을 많이 접해 자기보다 학식이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경문을 파악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수를 받고자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젊은 여인과 그의 남편의 혈도를 풀었다. 매초풍이 그녀의 멱살을 잡으며 진현풍
을 돌아보았다.
"아이를 낳은 지 석 달도 안 되고 젖도 있기에 고른 거예요. 뼈가 좀 연해졌을 수는 있지만
원기는 그런대로 충만하니 구음 백골조를 사용하기에 적합할 것 같아요."
"글쎄, 그건 사매 마음대로 하라구."
진현풍도 젊은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사내는 계속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한편 그의 아내인
젊은 여인은 아이가 낯모르는 처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그 애를 돌려줘요!"
매초풍이 웃었다.
"저 계집은 그래도 규방의 처녀이니 아이를 잘 건사할 거다."
그제야 젊은 여인은 매초풍을 알아보았다.
"아니, 낮에 우리 집에 와서 물을……. 그런데 왜 우리를……?"
"무공 연마를 위해 필요해서 모셔 왔지."
그녀가 다시 깔깔대며 젊은 여인을 돌려 세웠다. 한 손으로 그녀 뒷덜미의 대추혈을 쥐고
다른 손바닥을 허리 뒤에 있는 명문 혈(命門穴)에 갖다 댔다.
젊은 여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기는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매초풍이 그녀를 눌러 앉히고는 자신도 그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매초풍이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