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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란(거란대자:
, 거란소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2세기까지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나(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Kitai, 한국 한자: 契丹 글단)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남만주와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동호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생활 방식은 주로 정주 농경과 목축을 하고 유목도 하였다. 언어와 문화는 기록이 적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투르크나 고구려에 가깝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고구려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남몽골, 몽골,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연해주, 사할린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정복하였다. [1] 광개토대왕 때는 거란족 대부분을 고구려에 복속시켰다.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2]로 진출하여 거란족인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3]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거의 대부분 복속했다. 거란족은 오랜 세월 고구려인에 동화되었다. 이후 거란은 돌궐과 위구르에서도 활동하였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우고 송나라와 대립하였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고려가 승리하여 요나라는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12세기 이후부터는 몽골족과 위구르족에 편입되었다. 거란인들은 정주 목축, 농경을 하였다. 현대 몽골이 농경지가 부족하고 평원이 많아 유목을 많이 해서 오해가 있지만 거란, 선비족, 퉁구스 등 이민족들은 정주하며 농경과 유목도 하였다.
2. 거란 군주
칸호(汗號)씨족성명재위기간
大賀 | 대하돌라(大賀咄羅) | 619년~623년 이후 | |
大賀 | 대하마회(大賀摩會) | 628년경 | |
大賀 | 대하굴가(大賀窟哥) | 648년~656년경 | |
大賀 | 대하아복고(大賀阿卜固) | ? ~660년 | |
무상가한(無上可汗) | 大賀 | 이진충(李盡忠) 이진멸(李盡滅) | 660년~696년 |
内稽 | 손만영(孫萬榮) 손만참(孫萬斬) | 696년~697년 | |
大賀 | 이실활(李失活) | 697년 ~717년 | |
大賀 | 이사고(李娑固) | 717년~720년 | |
大賀 | 이욱우(李郁于) | 720년~723년 | |
大賀 | 이토우(李吐于) | 723년~725년 | |
大賀 | 이소고(李邵固) | 725년~730년 | |
와가한(窪可汗) | 遙輦 | 요련굴렬(遙輦屈列) | 730년~734년 |
李 | 이과절(李過折) | 734년~735년 | |
조오가한(阻午可汗) | 遙輦 | 요련조리(遙輦俎里) 이회수(李懷秀) | 735년~745년경 |
호랄가한(胡剌可汗) | 遙輦 | 요련해락(遙輦楷落) | 746년경~755년 이후 |
소가한(蘇可汗) | 遙輦 | 8세기 말 | |
선질가한(鮮質可汗) | 遙輦 | 9세기 초 | |
소고가한(昭古可汗) | 遙輦 | 830년대 | |
야란가한(耶瀾可汗) | 遙輦 | 요련굴술(遙輦屈戌) | 840년대 |
파랄가한(巴剌可汗) | 遙輦 | 요련습이지(遙輦習爾之) | 860년대 |
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 | 遙輦 | 요련흠덕(遙輦欽德) | ?~906년 |
3. 거란의 후손은?
어양 독락사의 요나라 진흙 불상
ㅇ 거란족은 한 때 우리와 역사를 공유하던 북방 유목 민족의 일파로 요나라(辽国)(907—1125, AD) 건국
- 영어로 Khita、Kitai、Kitaia, Hita、Catai、Cathay, Cathaia, Cathay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 홍콩의 유명 항공사인 Cathay Pacific의 이름은 “거란 항공”의 의미
ㅇ 고려 초 태조 왕건에게 화친을 위해 사신과 낙타를 보냈다가 만부교 낙타 아사 사건(942년)을 초래해
-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무도하다고 보고,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굶겨 죽여
ㅇ 송나라 시대 한족은 북방에 있는 호전적인 거란의 위협으로 엄청난 정신적 위축시기를 보내
- 소동파는 아무도 거란에 사신으로 가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자원하여 사신으로 떠나는 동생에게 “거란에 사신으로 가는 동생에게 주는 시”(送子由使契丹)를 지어 애절함으로 노래
ㅇ 말 등에서 일어난 기마민족 거란족은 유목민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통치술을 선보여
- 일국양제(One country, two systems)로 거란족과 한족을 별개의 시스템으로 통치하며, 무려 200여년간 한족을 통치
- “오랑캐의 통치는 100년을 가지 못 한다”는 통설을 깨
ㅇ 거란족이 만든 문자는 국가의 절대기밀로 분류되어 지배층 내부에서만 사용
- 한족 등 피지배층들에게는 문자를 보급하지 않아
ㅇ 거란족들은 원나라에 완전히 망한 이후 14세기 말부터 종적을 감추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ㅇ 유전자 분석상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다우르 족(达斡尔族)은 오늘날 중국 내몽골, 흑룡강성, 신장지역과 러시아 일부 지역에서 거주
- 중국내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약 15만 명의 인구 보유
ㅇ 불심이 깊었던 거란족은 요나라 백탑, 독락사 진흙불 등 아름다운 불교 예술작품을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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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Khitan people)은 우리 역사상 다민족 국가였던 고구려, 발해의 기층을 형성했던 유목 민족이었다. 주로 만주, 몽골지역에 거주했던 거란족은 고구려의 피지배층을 형성하였고, 고구려가 망하고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때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거란족은 세력이 커지자 발해를 멸망시키고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후 전개된 역사적 사건들에서 거란족은 우리 역사에서 점차 이방인 내지는 이적(異敵)으로 멀어져 가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고구려의 멸망과 거란족에 의한 발해의 멸망이다. 거란족은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요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화해의 올리브 가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을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라면서 외교관계를 끊어버렸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냉냉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거란의 잦은 고려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고려와 거란은 상당 기간 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고려초 만부교 낙타 사건(942년)
고려 초기에 고려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는 만부교 낙타사건(942)과 거란 사신 귀양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거란족의 두발 모습 (출처 : 我们称俄罗斯为战斗民族,那他们如何称呼我们呢?答案出乎意料 (baidu.com)
“임인 25년 10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낙타 50필을 선물하였다. 왕(태조)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더불어 화친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하고 배반할 마음을 일으켜 옛 맹세를 돌아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켜 버렸으니, 이는 도의(道義)가 없음이 매우 심한 것으로서 멀리 화친을 맺어 이웃나라로서 삼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신의 왕래를 끊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두니 모두 굶어 죽었다.”
(고려사절요, 태조 25년 10월)
이 사건 이후 고려와 거란(요나라) 간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거란의 3차례에 걸친 대규모 고려 침입과 고려의 격퇴전으로 이어졌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고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수시로 국경전쟁을 벌였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제국이던 송나라, 요나라, 고려 3자간의 관계도 긴장과 밀당(a tug of war)의 연속이었다. 강성기의 거란족의 남침에 불안을 느낀 송나라는 고려와 동맹을 맺고자 하였고, 고려 또한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송과의 관계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거란족과 중국 宋 나라에서의 풍경(1089)
내몽골 및 만주 지역에서 거란 제국의 등장 전까지 송나라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였다. 송나라 시기 국가의 정치, 경제는 전에 없는 발전을 이루고 민생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갑자기 막북 초원지대에서 요나라(916~1125)가 일어나면서 송의 국가안보는 시시각각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송나라 북쪽 변경지대에서 강성한 요나라의 등장은 송나라 사람들의 국가생활은 물론, 일상생활,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것은 심리적인 변화였다. 이는 송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그들이 화해와 타협을 추구해야 할 북방의 이민족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송나라와 완전히 다른 호전적인 유목민족 국가의 위협은 송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정신적 위축을 초래하였다. 요나라의 존재가 송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당시 소동파 가족의 생활을 통해 살펴보자.
적국 요나라에 동생을 사신으로 보내는 소동파의 애절한 마음
때는 1089년(哲宗元祐 4年)! 송나라 철종(哲宗) 황제는 요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 요나라와 평화를 구하고자 한 시도였다. 그러나 멀리 위험한 길에 사신으로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사신으로 자원한 사람이 소철(苏辙)이었다. 소철은 송대 문장가, 정치가로 유명한 소동파로 불리던 소식(苏轼)의 동생이다. 아래 시에는 소철의 형이자 당대의 유명 정치인이었던 소동파가 나라를 위해 막중한 책임을 지고 위험한 사신길을 떠나는 동생을 보내는 형의 절절한 마음이 나타나 있다.
거란으로 사신으로 떠나는 동생에게《送子由使契丹》
소식(苏轼), 宋(1089年)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여기 몸을 기대어
멀리 있는 그대를 생각하며 수건에 눈물만 적신다
풍설을 무릎 쓰며 말을 몰아 사신으로 떠나는 것을 사양하지 않으니
오랑캐도 황제의 명을 받아 온 귀한 사신인 것을 알아보겠네
사막에서 고개를 돌려 도성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니
호산에서 멀어질수록 도성의 풍경은 아득한 봄이어라
요나라 왕이 그대의 가문을 묻거든
조정의 제일 인물이 오직 소씨 가문에서만 나온다고 하지 말게나
送子由使契丹
云海相望寄此身,那因远适更沾巾。
不辞驿骑凌风雪,要使天骄识凤麟。
沙漠回看清禁月,湖山应梦武林春。
单于若问君家世,莫道中朝第一人。
11세기, 문치의 시대가 끝날 무렵, 한족이 세운 왕조였던 송나라는 막북에서 몰아치는 삭풍으로 떨고 있었다. 중원을 위협하던 거란족! 거란족이 흥기하여 세운 요나라는 한 때 만주, 내몽고, 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런데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요나라를 구성하였던 대부분의 거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거란족은 도대체 어떻게 흥성하고 어떻게 사라졌는가? 오늘날 거란족은 종족 자체가 사라진 것인가?
말 등에서 일어난 유목민족(马背上的游牧民族), 거란족(契丹)
(어양 독락사의 요나라 진흙불상)
거란족은 몽골지역 막북 초원지대에서 일어난 유목 민족이다.
거란족(契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4세기에 나온 역사서인 위서(魏书)에 나타나고 있다. 당시 중국이 동진과 서진으로 나뉘어 있던 시절 중국의 동북변방에서는 소수 민족들이 서로 이익을 위해 투쟁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패권을 자랑하던 유목민족 중의 하나가 바로 선비족(鲜卑族)이다. 선비족들은 다른 민족들과 투쟁 중 세력이 밀려 다른 곳으로 올라갔는데, 그들 일파가 도착한 곳이 몽골 초원지대인 송막지구(古代松漠地区)였다.
선비족의 일파인 거란족의 기원과 관련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에 하늘에서 내려온 한 신선이 백마를 타고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그가 내몽고의 노합하(老哈河)와 서라목론하(西拉木伦河)가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 신선은 푸른색의 소가 모는 마차를 타고 있던 아름다운 선녀를 만나게 되었다. 이 둘이 만난 지역은 목엽산(木葉山) 일대라고 한다. 둘은 서로 정을 통하게 되었고 부부가 되었다. 이들은 8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 여덟 명의 아들이 거란족을 이루는 8부족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란족은 천상에서 내려 온 선인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요나라 백탑)
송막지구로 달아난 이후 거란족은 세력이 점점 강성해 졌고, 자신들의 정권을 세우게 되었다. 5세기 중엽 중원의 혼란기에 북위 왕조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북위는 거란족과 통공(通贡)을 하는 관계를 만들었고, 거란족은 조공을 통해 우호적인 왕래를 시작하고,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서 세력이 강성해진 북제(北齐)가 군사를 동원하여 거란족을 정벌하였는데, 이로 인해 거란족은 큰 피해를 입고, 내부 세력도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다. 당시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살해한 거란족 포로들은 약 10만에 달하였다(袁騰飛, 「塞北三朝 遼」, 2014, p. 24).
뛰어난 지도자 야율아보기와 거란족의 屈起
7세기에 이르러 거란족은 다시 권토중래를 하게 되어 초원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어 당나라가 강성하던 시절 거란족은 당나라의 굴기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를 하면서 당나라와 기속관계(羁属关系)를 수립하였다. 당 나라는 거란족 거주지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 두어 거란족을 통치하였다. 이때 당시 거란은 당의 복속 하에서 도광양회(韬光养晦)를 하면서 향후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마침내 10세기에 이르러 초원지대에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요 태조)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면서 부족들을 통일하고 요나라(遼)(AD. 916~1,125)라는 강대한 제국을 건국하였다.
거란국의 건국자 야율아보기 (그림출처 : 萧峰的“南院大王”是何职位?来源于耶律阿保机的“一城两制” (baidu.com)
거란 8부족 중의 하나인 질랄부(迭剌部) 야율씨족인 야율아보기는 비범한 신화를 갖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꿈 속에서 태양을 보고 야율아보기를 잉태하였는데, 야율아보기가 태어났을 때 방에 신비한 광채가 생겼고 특이한 냄새가 가득 찼다고 한다. 태어나서부터 비범했던 야율아보기는 태어났을 때 머리가 3세 아이만큼 크고, 3개월이 되자 이미 말을 텄다고 한다. 성장하자 키가 농구선수보다 큰 9척이나 되었고, 힘이 장사여서 3백 근이나 되는 강궁을 들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내륙초원 지대에서 일어난 요나라는 만주와 내몽고, 중원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중원의 송나라와 자웅을 겨루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제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압록강변의 인접국가였던 고려와도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당시 요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한인관료 출신이었던 한연휘(韓延徽)의 역할이 컸다. 국가통치 기술이 없던 유목민족인 거란족에게 국가통치술(statecraft)을 가르치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문치에 능하고 행정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유목민족이 숫적으로 다수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말을 타면 군사를 지휘하지만, 말에서 내리면 민정을 실시할 수 있는(上馬管軍, 下馬管民) 전문가가 필요했다. 한연휘는 야율아보기의 옆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연휘는 야율아보기가 가장 신임하고 의지할 수 있는 한족 책사였다.
“오랑캐 국가는 100년을 가지 못 한다”는 통설을 깬 거란족
중국 역사에는 “오랑캐가 세운 국가는 백년을 가지 못 한다”(胡虏無百年之運)는 말이 있다. 대표적인 게 원나라 이다. 원나라는 겨우 97년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란족은 “백 년을 가지 못 한다”는 한족들의 호언을 처음으로 깬 북방 이민족의 왕조였다. 요나라는 210여 년을 중원에서 버티면서 상당수의 한족을 통치하였는데, 이는 변방의 유목 민족이 세운로서는 굉장히 긴 수명을 가진 것이었다. 요나라가 북방 이민족(北狄) 왕조로서 이처럼 오랫동안 지탱하면서 한족을 통치한 비결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원에서 역사상 최초로 실시한 “一國兩制”(one country, two systems)와 고유한 거란문자에 있었다.
요나라 특유의 일국양제(一國兩制)
요나라(遼)의 역사서인 「遼史」 백관지(百官志) 제1편에서는 “일국양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契丹舊俗, 事簡職專, 官制朴實, 不以名亂之, 其興也勃焉. 太祖神冊六年, 詔正班爵, 至于太宗, 兼制中國, 官分 南,北, 以國制治契丹, 以漢制待漢人”
“계단의 구속은 사무가 간결하고 직무는 전문적이었다. 관제는 소박하여 명칭이 어지럽지 않았다. 기세가 흥하여 일어났다. 태조 신책 6년에 반작을 바로잡도록 조칙을 내렸다. 태종 연간에 중국의 제도를 겸하고, 관제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 이를 통해 나라의 제도로서 거란족을 다스렸고, 한족의 제도를 통해 한인들을 대우하였다.”
요사(遼史)에 나타난 바와 같이 거란은 중원에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면서 요나라의 핵심 엘리트 층을 이루었던 거란족은 자신의 고유한 국제(國制)를 통해 통치하고, 영토내의 다수의 피통치 대상이던 한족(漢族)에 대해서는 한족의 제도를 채용하여 다스림으로써 이원적(二元的) 통치제도를 운영하였다. 사실 거란족 이전에도 남북조 시대 때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효문제가 정치제도 개혁을 통해 중원을 통치하였고, 유연, 돌궐 등도 중원을 통치하였으나 이들 북방유목민족들은 떨어진 꽃잎처럼 흐르는 물에 흘러갈 뿐 중원을 오래 다스리지는 못했다. 북방 유목민족들은 용맹하고 뛰어난 기마술, 전투 기술을 갖고 있었으나 말에서 내려 나라를 통치할 때는 통치술이 빈곤하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거란족은 일국양제라는 뛰어난 통치술을 개발하여 중원에서 장기간 한족을 통치하였다. 거란족은 일국양제 속에서 북면관과 남면관이라는 관제를 설치하여 북면관(北面官)이 거란족과 초원의 부족들을 다스리도록 하고, 남면관(南面官)은 한족들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남면관은 한족들을 통치할 때 한족들의 법과 습관을 존중하여 이에 따랐다. 한족을 다스릴 때 관직의 명칭도 복야, 추밀사, 절도사 등 당나라 식의 관직명을 썼다. 북면관은 거란족의 구칭인 우월(于越), 이리필(夷離畢) 같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일국양제는 한편으로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라고 볼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 보면 꽤나 관용적인 정책이었다. 일국양제는 요나라 2대 황제인 태종(耶律德光)이 처음 도입한 이후 약 200여 년간 꽤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국가의 절대 기밀로 유지된 거란 문자(契丹文)
(출처 : 契丹文字的搜索结果_百度图片搜索 (baidu.com)
한편, 거란이 흉노 등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과 대비되는 가장 큰 업적은 그들 자신의 문자(契丹文)를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계단문은 위구르 고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자를 통해 거란족들은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그들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란이 쓰던 문자는 국가의 절대기밀로 분류되었다. 지배층 내에서만 문자를 이용하였고, 한족 등 피지배층들에게는 문자를 보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다수의 주민들은 거란족의 문자를 모르고, 소수의 요나라 지배 엘리트층만이 계단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만의 신화, 문화와 역사의 계승과 전승에 심각한 문제가 여기서 초래되었다.
요나라와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송나라 사람들은 거란의 문자를 해독해 보려고 하였으나 불가능하였다. 약 1,00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거란의 문자는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간혹 거란족 귀족들의 무덤에서 계단문자와 한자로 병렬 표기된 묘지석이 출토되고 있어서 계단문 해석의 단서가 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중국에서는 “샹폴리옹(Jean François Champollion)”같은 천재적인 언어학자가 배출되지 못해서인지 계단문자는 여전히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계단 문자는 거란족의 멸망과 함께 소실되어 버린 사문자(死文字)가 된 것이다.
한 때 국운이 융성하던 요나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국정이 문란해지고 내란이 잇달았다. 그러다가 결국 1125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당하였다. 여진족에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잔여 세력 중에서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이끄는 세력은 저쪽으로 달아나 이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신장 서부지역에서 중앙아시아 동부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서요제국(西辽: Kara Kitai)(1132∼1218)이다. 키타이로 서방에 알려진 서요제국은 몽고족에 멸망당할 때까지 한 때 번성기를 누렸다. 이 당시 서방에 알려졌던 거란의 영문 명칭인 Kitai는 오늘날도 쓰이고 있는데, 홍콩의 항공사인 Cathay Pacific의 Cathay는 Kitai의 변이어이다.
(홍콩 South China Morning Post 사진 캡쳐)
역사의 무대에서 종적 없이 사라진 거란족
요나라가 멸망과 함께 그 많던 거란족들도 종적을 감추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후손들은 아직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상당한 숫자를 자랑하지만, 거란족은 오늘날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림 출처 : 李子信 facebook (2) Facebook
중국내의 자료에 따르면, 요나라가 막 건국되었을 때 거란족의 인구는 약 2백만 전후였고, 요나라 말엽에는 약 4백만의 거란족이 있었다고 한다(陈二虎, 契丹人的前世今生:如果你是这个姓,很有可能是他们的后裔).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은 있지만, 거란족이라는 명칭의 소수민족은 찾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돌아보면, 거란족들은 원나라에 망한 이후 14세기 말부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 많던 거란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후손도 없이 모두 사라졌을까? 요나라와 서요 제국이 망하면서 다수의 거란족들은 diaspora로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고, 일부는 중국이나 여러 지역에서 동화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원래 거란족은 성(姓)이 없었다. 그냥 각자가 살고 있는 지역의 명칭에 따라 이름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시대 때부터 일부가 성을 갖기 시작하였고, 야율아보기가 거란족 국가를 세운 이후에는 야율씨(耶律)씨와 소씨(萧)가 지배 엘리트의 성씨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후부터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을 쓰는 게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일부는 당나라 시대 때 당나라 정부로부터 받은 한족의 성인 劉씨, 罕씨, 罗씨 등의 성을 쓰기도 하였다. 초기 거란족들이 쓰던 성은 거란족을 표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으나, 거란족들이 중국 사회에 동화되면서 성씨는 거란족들을 구별하는 표식으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중국에서 성을 통해 거란족의 민족적 identity를 찾거나 그 후손을 찾는 것은 힘들어졌다.
그러면 거란족들은 아예 없어졌는가? 중국에서는 일부에서 이들이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란족은 역사적 강성기에 광대한 제국을 이루었기 때문에 많은 지역에 흩어진 사람들 중에는 거란족의 후예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거란족의 통치 지역이었던 동북3성, 내몽고 동부지역, 서쪽으로 신장 아얼타이산(新疆的阿尔泰山), 남쪽으로 텐진, 북쪽으로 러시아 일부에서는 거란족의 후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다우르 족
(사진출처 : 达斡尔族的搜索结果_百度图片搜索 (baidu.com)
그렇다면, 오늘날 거란족의 후예들은 어떤 민족일까? 중국의 학자들, 전문가들의 고증과 연구에 따르면, 고대 거란족의 후예들은 오늘날 내몽골과 흑룡강성 북쪽에 사는 다우르 족(达斡尔族)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우르 족은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내몽고, 흑룡강성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대개 과거 요나라의 통치지역과 일치한다. 다우르족은 약 15만 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데, 자신만의 고유한 민족적 특색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가령 그들만의 고유한 민족 언어, 문자(拉丁文字)를 쓰고, 민족 특유의 춤을 갖고 있다고 한다(袁騰飛, 「塞北三朝 遼」, 2014, pp. 361-362). 그러나 다우르족은 과거 거란족들이 쓰던 언어와 문자는 모른다.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나라 시기에는 강제로 만주어를 배웠고, 이후 계속된 민족 탄압으로 거란 고유의 문자와 언어를 상실하였다고 한다.
그림 출처 : 李子信 facebook (2) Facebook . 다우르 족의 전통 명절인 5월 16일 "흑회일(黑灰日)"에 새해 길상을 기원하며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있다.
중국계 학자들은 이들의 거주 지역과 문화만을 갖고 접근한다면, 다우르 족이 사라진 거란족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다만, 다우르 족과 거란족이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문화, 언어, 역사, 유전자(DNA) 분석 등을 통해 보다 더 심층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역사의 무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던 거란족들... 그들은 어찌보면 역사의 수수께끼 같은 민족이다. 내몽골, 만주에서 발흥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던 몽고족, 만주족들은 모두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오직 그들만 대부분 지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한반도 주변이나 중국 주요 지역에서 거란족의 후예들을 찾아보긴 힘들지만, 그들이 통치했던 지역에서 그들이 남긴 불탑 등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양의 요나라 백탑, 독락사 진흙불 등은 그들의 깊은 불심을 느낄 수 있는 찬란한 유적이다. 거란족이 남긴 백탑은 사신으로 요동땅을 주파하던 우리 선조들의 지친 발걸음에 안식을 주는 황야의 등대 역할을 하였다.
다우르 족의 가족 모습(그림 출처 : 李子信 facebook (2) Facebook )
参考文献:
[출처] 일국양제(一国两制)의 기원 : 거란(契丹)의 일국양제|작성자 pkyuh95
遼史(三), 中華書局, 2017.
袁騰飛, 「塞北三朝 遼」, 2014.
万丽聊历史, “古代的契丹族如今在哪儿?相当于哪个省份?说出来你都不信”.
《送子由使契丹》
내몽고 적봉시(内蒙古赤峰市)에 세워진 높이 9미터의 "계단 토템 기둥(契丹图腾柱)" 모습. 계단인들의 조상숭배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출처 : 赤峰契丹图腾柱的搜索结果_百度图片搜索 (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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