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장 음모(陰謀)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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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전(群雄殿).
대전의 현관에 쓰여진 필체는 웅후한 가운데 패기가 넘치고 있었
다. 군웅전은 넓은 대청으로 되어 있어 수백 명이 함께 연회를 벌
일 수 있는 방대한 규모였다.
무영종 일행은 금악비에 의해 군웅전 앞에 안내되었다.
"자, 무대협. 소생은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먼저 올라가십시
오."
금악비의 말에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시오."
금악비가 총총히 오던 길로 사라지자 무영종은 관동삼괴와 함께
군웅전으로 올랐다.
군웅전 안에는 과연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긴
탁자가 놓여져 근 오백 명이 넘는 군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탁자에는 온갖 미주가효가 풍성히 놓여져 있었다.
무영종은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둘러본 뒤 아는 인물들이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사가(四家), 일장(一莊), 이보(二堡)의 인물들이 보였는데
사대세가(四大世家)의 가주들과 그들의 젊은 후인들이 대부분 모
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태양장(太陽莊)의 태양신군 황보숭양과 황보무룡, 황보문연,
천풍보(天風堡)의 태을성수 종리자허, 신창보(神槍堡)의 자면신창
소중산 등.......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도무림(邪道武林)의 남맹(南盟)인 천군맹
(天群盟)의 맹주 구주진천도 조천명과 그의 수하들, 일교(一敎)인
통천교(通天敎)의 교주 통천마군 흑고의 모습도 보였다.
이곡(二谷)인 혈영곡(血影谷)의 곡주 혈의마검 공손패와 그의 수
하인 혈의삼십육궁(血衣三十六弓), 백독곡(百毒谷)의 곡주 백독마
군(百毒魔君) 음무위(陰武韋)와 그의 수하인 십독(十毒)도 있었
다.
그밖에도 숱한 정사도의 고수들과 구파일방(九派一幇)의 고수들도
보였다.
근 백 년(百年) 간 보이지 않던 십팔나한의 출현은 매우 경이로운
일이요, 무당(武當)파의 도사들과 그밖에도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 또한 놀랄 만한 현상이었다.
무영종은 주위를 면밀히 훑어보다 한 인물의 이름을 되뇌였다.
'호불범도 왔구나.'
만사귀재 호불귀의 후인인 호불범이 천안통수(天眼通 ) 마운로와
함께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영종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 내심 의혹을 느꼈다.
'북단의 단주인 선풍마서생 위전풍과 오상공자(五霜公子)가 보이
지 않는구나.'
무영종은 대충 장내의 인물들을 살펴본 후 관동삼괴와 함께 빈자
리를 찾아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전음으로 말했다.
(삼괴, 지금부터 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관동삼괴는 모두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무영종이란 신비한 인물에게 완전히 굴복되고 있었다.
무영종의 옆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한 명의 괴도(怪道)가 앉아 있
었다.
그는 몰골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으며 입고 있는 도포도 낡아 너
덜거리고 있었다. 봉두난발 사이로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그는 연신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워낙 술과 음식을 아귀처럼 먹어대는 바람에 그의 주위에는 아무
도 앉는 사람이 없었다.
"크으... 독하구나. 과연 죽엽청(竹葉靑)은 언제 마셔도 좋거든!"
무영종은 자음자작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나이는 사십 정도로, 자세히 보니 그의 용모는 비록 지저분하긴
했어도 청수한 편이었고 지혜가 어려 있었다.
중년 괴도사는 주위를 훑어보더니 히쭉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두 악살(惡殺)이 꼈어, 모두! 흐흐흐... 죽을 줄도 모르고 함
정에 뛰어들다니."
그는 술을 다시 들이켠 후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하기야... 덧없는 인생(人生) 멋지게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흐흐흐......."
비록 그의 음성이 크지는 않았다 해도 장내의 군웅들은 모두 쟁쟁
한 무림고수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괴도사의 말을 듣고는 모
두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거칠고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친구! 말이 좀 지나치군!"
괴도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자를 바라보았다.
팔 척(八尺)의 거구, 그 인물은 탁자 위에 거대한 철궁(鐵弓)과
유성추를 놓고 있는 장한이었다.
그의 얼굴은 사각형이며 고리눈에서는 전광같은 섬뜩한 빛이 쏟아
져 나오고 있어 매우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으하하하하!"
그러나 괴도사가 갑자기 마구 웃어제끼자 입에서 침이 튀고 탁자
위의 술병이 엎어졌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예의 거한을 격노케
했다.
꽝!
거한은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고 솥뚜껑 만한 시커먼 장인(掌印)이
탁자에 선명히 찍혔다.
"미친 놈, 죽고 싶으냐? 감히 나 사해신군(四海神君) 구양경(歐陽
卿)을 놀리다니!"
그의 우렁찬 고함은 군웅전을 찌르릉 울렸다. 괴도사는 비로소 광
소를 그쳤으나 여전히 히쭉히쭉 웃으며 지껄였다.
"당신이 황하칠십이채(黃河七十二寨)의 총표파자 사해신군 구양경
이란 말이오?"
"그렇다! 이 미친 말코야!"
사해신군 구양경,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순 가량 되어 보였으나
실제 나이는 이미 칠십이 넘었다. 워낙 타고난 성품(性品)이 격정
적이라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의 무적철궁칠십이로(無敵鐵弓七十二路)와 단혼절명유성추법(斷
魂絶命流星錘琺)은 무림의 패도지학이었다.
그는 벌써 삽십 세 때 황하칠십이채를 건립했다. 특히 의제(義弟)
이자 군사(軍師)인 신안수사 제갈전의 지모의 도움으로 인해 황하
칠십이채를 무림의 철벽으로 세운 일대호걸이었다.
그런데도 괴도사는 그를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비웃고 있었다.
"흐흐흐... 당신은 일찌감치 이곳에서 도망가는 게 좋겠군. 보름
이내로 당신은 반드시 액운을 당할 거야. 흐흐흐."
악담도 그쯤되면 이만저만 도가 지나친 게 아니었다. 사해신군 구
양경은 노기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 미친 도사 놈!"
그는 두 눈에서 분광을 폭사하며 벌떡 자리에서 뛰쳐 일어났다.
그러나 곧 지극히 차분하면서도 침착한 말이 그를 만류했다.
"구양대협(歐陽大俠), 참으시오. 이곳에서는 모두가 같은 배를 탄
격이니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면 오히려 수라궁 만 좋은 일을 시
켜주는 셈입니다."
그는 구양경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이십 세 가량의 한 청년으로
누가 죽었는지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다.
지극히 준수한 용모와 지혜로운 두 눈, 그리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가 사람들의 인상에 깊게 자리하게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유
생건을 쓰고 있어 단아하고도 고귀한 기품이 흘렀다.
그가 만류하자 구양경은 안면을 씰룩이더니 간신히 화를 참으며
앉았다.
"석공자(石公子)가 아니었다면 노부는 저 놈을 그저......."
"구양대협의 넓으신 도량은 무림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상복청년의 음성은 침착하고도 냉정했다. 구양경은 그를 보며 탄
식했다.
"아! 복건(福建) 석가(石家)의 석대선생(石大先生)의 죽음은 곧
무림의 지다성(智多星)이 떨어진 것이야. 다행히 그 분의 후인인
석검영(石劍英) 공자가 있으니 곧 선생의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걸
세."
상복청년은 바로 비명횡사한 칠인의 무림지사 중 석대선생의 후인
이었다. 석대선생의 손자로 지무성(智武星) 석검영이라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영종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해신군 구양경을 저렇듯 쉽게 다루는 석검영이란 청년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한편 괴도사는 주의의 상황과는 아랑곳 없이 다시 연신 술을 마시
기 시작했다. 그러다 옆 쪽에 앉은 무영종을 발견하자 그의 게슴
츠레하던 두 눈에 이채가 번쩍 일어났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무영종에게 다가왔다.
"형씨, 여기 좀 앉읍시다."
무영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도사는 허락도 없이 털썩 주
저 앉더니 넉살 좋은 괴소를 흘렸다.
"헤헤헤... 솔직히 내 자리의 술은 모두 바닥이 났소. 좀 실례하
겠소이다."
무영종은 담담히 그가 하는 대로 보고만 있었다. 괴도사는 덥썩
술병을 거머쥐더니 말했다.
"이 타락한 도인은 선기묘인(仙機妙人) 사도유(司徒有)라 하오."
"본인은 무영종이오."
선기묘인 사도유는 두 눈을 가늘게 했다.
"무영종이라... 무척이나 신비한 이름이구려."
사도유는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 무
영종은 막상 담담했으나 오히려 관동삼괴가 노기를 띠고 들먹거렸
다.
그러나 무영종이 눈짓으로 제지하자 그들은 이내 조용해졌다.
"흐흐흐... 역시 인생은 술밖에 가치 있는 것이 없지."
선기묘인 사도유는 트림을 했다.
"키억!"
그리고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크... 으. 나는 저 머나먼 대막(大漠)에서 왔소."
무영종은 표정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듣고 있었다.
"빌어먹을 수라궁인지 무언지 모르지만 그 자식들은 기인(奇人)도
몰라본다오. 무림의 쓰레기같은... 크윽! 자들에겐 마존첩인지 뭔
지를 돌리면서... 커... 억! 이 뛰어난 선기묘인 사도유 어르신에
게는 그런 것 한 장 안 주니 말이오."
군웅들이 모두 들었으되 군웅들 전체를 한데 묶어 쓰레기로 치부
한 그의 말은 실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은은히 노기가 어리고 있었으나 무영종은 내심
느끼는 것이 있었다.
'마존첩을 받지 않았다고? 그럼 이 자도 이 관(二關)을 통과한 인
물이란 말인가.'
그는 사도유의 소매를 잡았다.
"사도형, 이제 그만 드시오."
그러나 사도유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아니 무형, 내가 지금 주정하는 줄 아시오? 천만에, 천만의 말씀
이오.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정신이 맑소."
그는 다시 술병을 잡았으나 술병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젠장! 술이 떨어졌군!"
사도유는 밖을 향해 빽 고함을 쳤다.
"여봐! 여기 술을 더 가져와라!"
실로 방약무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웅전 밖에서 십여 명의 청의시비들이 술병을 안고 들어왔
다. 그들 중 한 시비가 사도유 앞에 와 두 개의 술병을 내려놓았
다.
그녀는 아름답고 청초한 용모를 지닌 십칠팔 세쯤 되어보이는 미
소녀였다. 선기묘인 사도유의 오른손이 느닷없이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어머!"
시비는 그만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나리,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시비는 도망치듯 달아났다. 사도유는 키들키들거렸다.
"아름다운 계집들이야! 흐흐흐... 저 정도의 미모라면 천하의 철
석간장도 녹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마폭 아래 많은 사내들이
무릎을 꿇겠는 걸?"
사도유는 계속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오호라! 그대여, 아느냐? 여인(女人), 여인이란 존재는 남자를
즐겁게 해주지. 황홀할 정도로. 그러나 그 웃음 속에 독(毒)이 있
음을 아는가?"
사도유는 실로 미친 사람 같았다.
"흐흐흐흐... 젊고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영웅들, 일개의 협사(俠
士)들....... 낄낄! 그러나 한낱 썩은 계집들의 가랑이에 침을 질
질 흘리고 만다면 끝장이지, 끝장이야!"
사도유는 두 눈을 희번뜩이며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희한
하게도 군웅들 중 몇몇은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
리는 것이 아닌가?
무영종은 그의 말 속에 현기(玄機)가 있음을 알아 보고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음, 선기묘인 사도유, 이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필시 내력이
있는 자다.'
무영종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도형, 이제 그만 하시오. 수라궁에서 들으면 어떻게 하시겠
소?"
그러나 사도유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수라궁이 무섭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지. 더더구나
수라궁이 내 말에 움직인다면 흥! 그거야말로 가치도 없는 잡졸들
이고 말고."
실로 교묘한 말솜씨였다. 설사 수라궁인들이 그의 말에 분노한들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게 만들고 만 것이었다.
무영종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때 어디선가 둔중한 북소리가 울
려퍼졌다.
둥! 둥! 둥! 둥!
도합 열두 번의 북소리, 그것은 군웅들의 가슴에 무겁게 와닿았
다.
장내는 삽시에 조용해졌다.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침묵이었다.
마치 폭풍전야의 정적이라고나 할까?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장내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들
어섰다. 맨 앞장 선 자는 마치 흡혈귀처럼 생긴 괴노인으로 그는
온통 머리칼과 수염이 거칠게 자라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모두 붉
은 색이었다. 또한 입은 옷도 혈의(血依)였다.
두 눈은 움푹 꺼지고 섬광이 뻗었다. 코가 유독 날카롭고 키는 구
척(九尺) 장신이었으나 몸은 깡말라 있었다. 그를 보자 군웅들 가
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앗! 광마혈제 적표다!"
군웅들은 그 말에 금새 웅성웅성 거렸다.
광마혈제(狂魔血帝) 적표(赤豹).
그는 나이가 이미 백이십(百二十)이 넘은 노마로 팔십 년 전 신비
하게 실종됨으로써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바 있었다. 그의 무공은
과거 혈교의 진전을 받은 것으로 사이하고 패도적이었다.
적표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아직도 노부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있었다니 정말
기쁘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한 곳에서 갑자기 눈길을 멈추더니 두 눈에
서 혈광(血光)을 번쩍 뿜어냈다.
그의 음성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흐흐흐흐... 천산(天山)의 늙은이! 이곳에서 팔십 년 만에 보게
되는군!"
그의 말에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보는 방향으로 집중됐다.
그곳에는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명의 지극히 평범한 용모
의 백의노인이 있었다.
보통 키에 아무런 특징도 없는 노인이었다. 단지 눈길을 끌 것이
라면 노인이 허리에 찬 한 자루의 백검으로 수실과 자루, 검집까
지 모두 순백의 검이었다.
백의노인의 눈빛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정하여 마치 태어난 지 얼
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빛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백의노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희대의 노마두 광마혈제 적표
에게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적형(赤兄)이 노부를 알아볼 줄은 몰랐구료."
음성은 매우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중인들은 마치 귓
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광마혈제 적표는 그를 노려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노부의 두 눈이 멀지 않는 한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천산비
검옹(天山飛劍翁) 비간운(丕干雲)을 몰라볼 리가 있겠는가?"
순간 장내는 온통 경악에 휩싸였다.
"아아, 천산비검옹!"
장내는 삽시지간 온통 경악에 휩싸였다.
천산비검옹이라면 육십 년 전 황산비무대회(黃山比武大會) 이후
한 번도 무림에 나온 적이 없다. 또한 천산파도 이십 년래 두문불
출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자리에 그가 나타나다니, 그것도 수행제자 한 명도 없
이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 그의 나이가 백 세가 넘었음에
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오십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는 것
이었다.
천산파 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천산비검옹은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광마혈제 적표는 주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강호의 고인들이 모두 모이셨군."
그는 포권을 하는 듯 마는 듯 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수라궁의 부궁주(副宮主)겸 혈마전(血魔殿)의 전주요. 궁
주님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요."
군웅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도의 대마황인 그가 수
라궁의 일개 전주(殿主)로 만족하여 있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우선 본궁의 고수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소."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회색옷을 입은 깡마른 강시같은 늙은이
가 나섰다. 그는 눈동자가 없이 눈이 모두 흰자위뿐이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흐흐... 노부는 백골당(白骨堂)의 당주인 백골사마(白骨邪魔) 금
마륜이오."
"아!"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졌다.
백골사마 금마륜, 그는 수개월 전 고루혈마 곡우양, 지도마살 마
운천과 함께 천풍보에 마존첩을 전달하며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
다.
그가 자기 소개를 마치자 이번에는 키가 작고 백의를 입었으며 안
색이 창백하고 백발이 무성한 괴노인이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괴
이하게 남색이 돌고 있었다.
"독혈당(毒血堂)의 당주인 오독비마(五毒飛魔) 구우령(仇雨令)이
오."
군웅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오독비마 구우령은 오십 년 전 사라졌던 대흉마로써 독술독공(毒
術毒功)의 제일인자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명의 청의노인이 나섰다. 그는 살집이 좋은 인자하게 생
긴 팔순노인으로 언뜻 보아서는 마음씨가 지극히 좋은 객점주인같
은 인상이었다.
"하하... 노부는 음풍당주(陰風堂主) 불면소살(佛面笑殺) 호천광
(胡天光)이오."
강호에서 오랜 옛날 이런 노래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儆笑者 笑中殺.
儆笑年 暗中殺.
웃는 자를 조심하라, 웃음 속에 살인을 한다.
어린 소년을 조심하라,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은밀히 살수를 뻗는
다.
이 노래는 사십 년 전의 두 마두(魔頭)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소자
(儆笑者) 소중살(笑中殺)이란 바로 언제나 인자한 불면(佛面)과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불면소살 호천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으... 음."
군웅들은 음풍당주인 호천광을 보며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다시 이번에는 한 명의 혈의노인이 나왔다.
"고루당주(蠱淚堂主) 고루혈마 곡우양이오."
그는 천풍보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마살당주(魔殺堂主) 지도마살 마운천이오."
흑의에 깡마른 노인, 종이칼(紙刀)로 돌을 자르는 대마두도 역시
천풍보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야천당주(夜天堂主) 환우령(幻羽囹)이오!"
흑의(黑衣)에 얼굴에는 검은 복면을 쓴 괴인(怪人), 그는 삼십 년
전 야제(夜帝)라는 별명이 붙었던 밤에만 나타났던 마두였다.
"광풍당주(狂風堂主) 열화풍사(熱火風砂) 관천우(關千牛)요!"
사막(砂漠)에서 악명 높기로 이름났던 삼십 년 전 광풍문(狂風門)
의 문주로 그는 갈의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풍(風)자가 새겨져 있
었다.
"사신당주(死神堂主) 화의사신(華衣死神) 곡량(哭亮)이오!"
삼십 년 전 무림에서 가장 기분나쁜 마인(魔人)이 나타났다. 그
는 언제나 화려한 화복(華服)을 입고 다녔으며 꼭 경사가 있는 강
호고수들의 장원이나 문파에 잘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면
잔치는 머지않아 초상집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죽음을 몰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십 년 전 무림
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출현했다.
이름하여 팔대당주(八大堂主).
그들은 말 그대로 각기 수라궁의 팔당(八堂)을 맡고 있었다.
장내의 군웅들은 그들의 소개가 끝나자 온통 경악과 미혹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팔대당주는 모두가 한결같이 백 살이 넘은 전대의
대마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최소한 삼십 년 전에 의문의 실종을
했던 자들이었다.
더구나 오독비마, 비천야차, 열화풍사 등은 이미 죽은 것으로 소
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수라궁의 수하가 되어 있을
줄이야 과연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장내(場內)의 분위기는 지극히 침중해졌다.
군웅들은 수라궁의 일개 전주와 팔대당주가 가공할 거마(巨魔)들
로 구성되어 있음에 모두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
마혈제 적표가 중인들을 깔보듯이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양해를 구하겠소.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
겠지만 본궁의 개파대전은 사정상 십 일(十日)동안 연기되었소.
그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오."
그는 비록 사과한다고 했지만 조금도 미안해 하는 빛이 보이지 않
았다.
어디선가에서 착 가라앉으면서도 깊은 분노심이 서린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적표!"
적표의 안색이 변했다. 그 누가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군웅들도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일제히 주시했다.
대청의 중앙에서 한 명의 갈의노인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긴 흑도(黑刀)를 들고 있었는데 팔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체격은 건장하고 비범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
히 눈빛은 마치 두 자루의 비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예의 분노서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십 일을 연기하든 백 일을 연기하든 다 좋다. 그러나 한 가지만
묻자!"
그의 말투는 칼로 끊듯 단호했다. 적표는 자신에게 감히 막말을
하는 갈의노인에 대해 살기를 띄웠다.
"네 놈은 누구냐?"
갈의노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노부는 팽가의 가주(家主)인 패천참인도(覇天斬刃刀) 팽천후다."
적표의 표정이 움찔 변했으며 군웅들은 술렁거렸다.
팽천후는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물었다.
"팽가에서 나의 손자를 그토록 잔인하게 죽인 놈이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무서운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적표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후후후... 팽가주, 노부가 한 마디 하겠네."
그는 말을 놓았다. 나이나 무림의 경력이나 모든 것이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천참인도 팽천후의 말투는 그보다 더 했다.
"무엇을 말이냐?"
적표는 노기를 띄웠으나 참고 말했다.
"십 일 후 개파대전 때 그대의 모든 원한을 풀 수 있도록 해주겠
네."
팽천후의 안면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뇌리에는 그 순간
비참하게 찢겨죽은 손자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는 무림의 고인다왔다.
"석 달 동안 기다린 것을... 십 일 더 못기다릴 것도 없지."
그는 분노를 삭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역시 분노성 깃
든 음성이 또 한 차례 터져 나왔다.
"적선배!"
외침과 함께 한 명의 흉맹하게 생긴 흑의노인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체격이 장대한 칠순 노인으로 얼굴에 긴 상흔(傷痕)이 나 있
었다.
"노부는 천군맹(天群盟)의 맹주인 구주진천도(九州震天刀) 조천명
이오!"
장내가 술렁거렸다. 현 사파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남맹북단(南盟
北檀)중의 남맹 천군맹의 맹주. 구주진천도 조천명의 이름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할 공포의 존재였다.
"내 비록 사도의 인물이나 사(邪)에도 엄연히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소!"
조천명의 두 눈에서는 으스스한 살광이 뻗쳐 나왔다. 그 눈빛을
한 번 본 자는 절대로 그와 원한을 살 수가 없다. 그것은 조천명
의 무서움이 바로 정확한 은원을 신조로 하기 때문이었다.
은혜 입은 자는 꼭 갚되 원수는 반드시 처참하게 복수한다. 이것
이 조천명의 철칙이자 천군맹(天群盟) 삼천여 명 고수의 계율이었
다.
조천명은 수라궁의 혈마천주인 광마혈제 적표를 노려보며 계속 말
했다.
"적선배! 당신은 분명 동도에서 나보다 선배요. 당신이 선배라면
이 후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적표는 그의 당당한 태도에 움찔했다. 조천명은 두 눈에서 불똥을
튕기며 물었다.
"적선배, 나의 노모(老母)를 죽인 자는 누구요?"
적표는 안색이 변했으나 곧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맹주, 노부의 신의를 걸고 약속하겠소. 십 일 후 모든 사실을
알려주겠소."
조천명의 입가에 살기가 어렸다.
"좋소! 적선배의 말을 믿겠소.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하시오. 나 조
천명의 이름이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님을 말이오."
그는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수라궁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나 천군맹의 힘 또한 그에 못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적표는 음산한 읏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좋소, 조맹주! 조맹주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건 그렇고 오늘밤은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연회를 베푼 것
이니 마음껏 먹고 즐기시기 바라오."
적표는 손을 들었다.
"여봐라!"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장내에 오십여 명의 청의시비들이 나타
났다. 그녀들은 모두 품에 술병을 안고 있었으며 한결같이 어디다
내놓아도 미색(美色)을 자랑할 수 있는 미녀(美女)들이었다.
"핫핫핫... 오늘은 특별히 백 년(百年) 묵은 설홍매로주(雪紅梅露
酒)를 열 독 준비했소. 즐겁게 드시기 바라오."
적표의 말이 떨어지자 오십 명의 시비들은 바쁘게 군웅들 사이를
누비며 술병을 나르기 시작했다.
장내에는 향기로운 주향이 진동했다. 그러나 보기 드문 명주인 설
홍매로주가 탁자마다 놓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웅들은 한 사람도
술을 마시려 들지 않았다.
선기묘인 사도유가 갑자기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 좋은 섬서(陝西) 특산의 미주를 놓고 마시지 않다니 정말 바
보같은 자들이군!"
그는 술병을 덥썩 쥐더니 벌컥벌컥 마셔댔다. 군웅들의 눈은 일제
히 그에게 향해졌다.
사도유는 단숨에 한 병을 비워대더니 다른 병을 잡았다.
"자, 자! 무형도 한 잔 드시오!"
무영종은 담담히 술잔을 내밀었다.
"고맙소, 사도형."
그는 사도유가 따라주는 술을 거침없이 마셨다. 사도유는 유쾌하
게 대소했다.
"하하하... 무형은 정말 이 도사의 마음에 들었소. 진정 무형이야
말로 영웅 중의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소. 핫핫핫핫."
그는 대소를 뚝 그치더니 이번에는 적표에게 얼굴을 돌렸다.
"적노선배. 소생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적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사도유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흥
얼거리듯 말했다.
"소생이 알기로는 현재 수라궁에 들어온 군웅의 숫자는 모두 오백
오십 명인데 어째서 이곳에는 오백십일 명밖에 없는 것이오?"
그 말에 적표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후후후... 소생 말이오? 크크... 소생은 사도유라는 시시껄렁한
거지도사요."
사도유는 연신 장난치듯 킬킬거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 소생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시지요? 적선배
님."
적표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덮였다.
"노부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사도유는 다시 술을 몇 모금 마신 뒤 킬킬거리며 말했다.
"소생이 알기로는... 킬킬... 그 삼십 구 명은 이미 수라궁에 넘
어간 것으로 알고 있소만?"
군웅들의 안색이 대뜸 홱 변했다.
"클클클... 여기에 계신 이 멍청한 영웅호한들만 모두 제거하면
이제 곧 수라궁은 강호독패를 이룰 것이 틀림없구료."
군웅들의 안색은 더욱더 크게 변했다. 삽시간에 장내는 소란해지
고 말았다. 벌써 몇몇 사람은 탁자를 치며 일어서고 있었다.
적표는 무섭게 외쳤다.
"사도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러나 사도유는 추호도 개의치 않고 다시 술을 들이키더니 이번
에는 고개를 저어댔다.
"낄낄낄... 적노선배, 농담이오. 농담! 소생이 적노선배 말대로 잠
시 헛소리를 했소. 낄낄낄."
사도유는 괴소를 흘리며 마침내 더 이상 술을 이기지 못하는 듯 탁
자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요란하게 코를 골
며 잠이 들어 버렸다.
적표는 그만 상대를 잃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사도유를 노려보다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무영종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 이 선기묘인이란 자는 두서없이 횡설수설 하는듯 하지만 실
상은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다. 실로 심계와 지혜가 깊은 자다.'
그는 탁자에 엎드려 코를 골고 있는 사도유를 차분히 훑어보며 다
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단점은 너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위험
을 유발시키니 좋은 방법이 못된다.'
장내의 상황은 몹시 어색하고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백이십일 명에 달하는 군웅들은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고
술과 음식을 드는 자도 없었다. 모두 납덩이같은 안색으로 이 무
서운 음모(陰謀)의 밤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광대사(玄光大師).
소림사 선좌원주(禪坐院主).
그는 소림사에서 불심(佛心)이 깊기로 장문인인 현공대사(玄空大
師)와 필적했다. 또한 현자(玄字) 항렬에서 현오(玄悟), 현공(玄
空) 다음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깊고 차분했으며 심기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현오대사와 특히 친분이 두터웠다.
현오가 소림사에 방문한 흑의여인 단혜령에게 죽은 후 가장 슬퍼한
것도 바로 현광이었다.
천심선사(天心禪師)는 그를 선택하여 십팔나한과 함께 수라궁으로
보냈다. 거기에는 바로 그가 그 누구보다도 침착하다는데 이유가
있었다.
현광은 백 세가 넘었는데도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
방 안에 앉아 탁자 위의 촛불을 응시하는 현광대사의 깊고 맑은
두 눈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수라궁이 마련해
준 거처로써 추심각(秋心閣)이었다.
'으음. 정혜(丁慧)에게서 소사제가 이곳으로 온다고 들었는데 어
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현광대사는 지금 한 가지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대사부님의 혜안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당금의 어지러운
무림을 구원할 자는 오직 소사제밖에 없다.'
문 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사숙님, 주무십니까?"
"음, 정혜냐?"
"네, 사숙님."
"들어오너라."
잠시 후 방 안으로 정혜가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영준한 얼굴에
두 눈이 물처럼 고요했다. 그것은 당대 소림사의 젊은 고수중 일
인자다운 면모였다.
정혜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현광대사는 그를 내려보며 담담히
물었다.
"정혜, 소사제의 행적은?"
"아직도 묘연하옵니다."
정혜는 그러나 확신하듯 말했다.
"그러나 소사숙님은 워낙 초절한 분이시므로 어쩌면 벌써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광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역시 그렇게 믿는 듯한 눈치였
으나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정혜, 만사(萬事)에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호굴(虎屈)에
들어와 있다. 천려일실이라 했으니 극히 조심에 조심을 기해야 한
다."
정혜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현광대사는 고개를 들어 촛불을 바라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수라궁이 개파대전을 십 일 미룬 것은 필시 크나큰 음모일 것이
다. 어쩌면... 상상도 못할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
현광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또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굴에 불안한 기운이 음영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흘렀고 현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혜, 노납이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네, 사숙님."
"정인(丁仁)과 정비(丁比)로 하여금 두 인물을 감시케 하여라."
"두 인물이라면?"
"백골사마 금마륜과 오독비마 구우령이다."
현광대사는 음성이 더욱 침중해졌다.
"정혜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 두 명은 아까 소개했던 팔대당주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음험한 위인들이다."
"으음."
정혜는 침음성을 발했다. 현광은 계속하여 말했다.
"무공 역시 가공할 정도다. 과거 노납이 속가시절 그들을 만난 적
이 있었는데 만약 그들이 그것을 모두 완성시켰다면......."
현광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실로 상상도 못할 무서운 혈겁(血劫)이 일어날 것이다."
현광은 의아해 하는 정혜를 내려보며 지시를 내렸다.
"정인과 정비는 십팔나한 중에서 경공(經功)이 가장 뛰어나고 머
리가 현명하다. 그들에게 각각 그들을 맡도록 해라."
"네, 사숙님."
"그리고 정혜. 그대는 다시 한 사람을 감시해라. 그 자는... 수라
궁의 부궁주이자 혈마전주인 광마혈제 적표다."
정혜의 안색이 변하자 현광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 자의 무공은 대단히 높다. 어쩌면... 노납보다 한 수 위일지
도 모른다."
정혜는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사숙께서 그를 감시하라는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현광은 무겁게 대답했다.
"그 자는 과거 팔십 년 전 공동의 기인이신 적봉우사(赤鳳羽士)에
게 패한 후 사라졌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공 외에도 무서운 것
이 있다."
정혜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天 三百六十銀殺無影隊)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그러나 현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노납도 모른다. 단지 소문에 의하면 과거 적봉우사께서 직접 그
자를 찾아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가 가공할 삼백육십 명
의 천강은살무영대를 키우는 것을 제지시키기 위해서였다."
"......."
"만일 그 자가 그것을 그 동안 완성시켰다면... 실로 무서운 일이
다."
현광은 이어 신중히 말했다.
"정혜, 그대는 정자(丁字) 제일의 인재다. 그대 외에는 적표를 맡
을 사람이 없다."
"알겠습니다. 사숙님."
"조심해야 한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사숙님."
정혜는 공손히 절을 하고 방을 나갔다.
"아미타불."
현광은 눈을 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그러나 그는 곧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휴우! 만약 이 수라궁에 광마혈제의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가
있고 백골사마의 구유강시녀(九幽彊屍女)와 오독비마의 오독마절
진(五毒魔絶陳)마저 있다면. 아미타불... 아미타불!"
현광은 더이상 생각하기가 끔찍한 듯 백미를 떨었다. 그의 귓전에
소림을 떠나기 전 천기선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 현광. 천강삼백육십은살대와 구유강시녀, 오독마절진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섭다. 천하에서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
직 두 명뿐, 그들은 바로 만사(萬事)와 귀곡(鬼谷)이다.
현광은 한숨을 쉬었다.
'아! 그러나 만사는 죽고 귀곡자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의 청수한 노안에는 불안의 먹구름이 어렸다.
그런데 그의 바로 등 뒤에서 가볍고 낭랑한 웃음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무슨 걱정이 그리 많습니까?"
현광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졌다.
'처, 천하에 그 누가 이런 경공술을!'
그의 몸이 앉은 채로 눈부실 정도의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가 싶
더니 그는 눈 앞에 서 있는 자면(紫面)의 중년인을 날카롭게 쏘아
보며 물었다.
"아미타불... 그대는 누구요?"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사형, 이 현수(玄修)의 목소리도 잊었습니까?"
현광의 얼굴에 기쁨이 크게 일더니 그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오, 오! 소사제, 소사제였군!"
현광은 자면중년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는 바로 자부신군 무영
종, 즉 그렇게도 고대하던 하후성인 것이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형께선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현광은 흥분으로 고조된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불존의 돌보심일세. 소사제, 자네를 만나니 마치 암
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듯 하군."
현광은 하후성을 보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정말 자네는 노납을 놀라게 하는군. 허허허!"
하후성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사형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네, 우선 자리에."
이윽고 두 사람은 마주보며 바닥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긴 대화가 오갔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오직 그들
만이 알고 있었다. 모두 상승의 전음술로 주고 받았기 때문이었
다.
대략 한 시진 가량이 지나자 하후성, 즉 무영종은 일어섰다.
"그럼."
그는 가볍게 포권하더니 아무런 소리도 없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실로 놀랍고도 신비한 신법이었다. 현광대사는 여전히 바닥에 앉
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척 밝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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