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오(상) -제7장 2

산과 골짜기를 붉게 물들이던 노을은 점차 검푸른 밤의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신의 신경을 곤두 세운 채. 주변의 격렬한 싸움들은 이제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동공을 가득 메운 것은 서로의 모습, 서로의 움직임 뿐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안소는 온 몸을 죄어드는 긴장을 느꼈다. '벅찬 상대다!' 그는 칼자루를 꽉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옮겨 놓았다. 하향월의 눈이 예리한 검끝처럼 빛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무사다운 무사로군.' 사람백정(人屠夫) 안소!! 칼에 관한한 귀신이라는 소문은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상대로 부족함이 없다!' 거리는 점차 좁아들고 팽팽히 긴장된 공기가 부딪쳤다. 바람이 소리내어 터져 나갔다.매봉옥은 아까전부터 참아오던 구토를 드디어 하고야 말았다. 그의 눈에 비친 석실의 풍경은 진정 그의 여린 감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당분간 고기종류를 입에 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저 푸줏간 고기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상학의 모습을 보고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고개를 꺾고 쓴물을 토해내는 그는 본채도 않고 대도오는 상학을 살펴보고 있었다.매봉옥을 향해 급하게 소리쳤다. "그쯤 했으면 가서 노대를 불러와!" 매봉옥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대도오에게 비틀비틀 다가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다시 상학을 마주 대하는 순간 자기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꺾으려 들었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매봉옥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정신 차려! 아직 죽지 않았다. 살릴 기회를 그냥 보낼 셈인가!!" 따귀가 특효약이었던가, 매봉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도오가 다시 지시했다. "노대를 불러와!!" 매봉옥이 쏜살같이 문을 튀어나갔다. 대도오는 상학의 팔목을 묶은 쇠고리를 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의 몸을 잡았다. 선혈이 옷에 그대로 묻었지만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한쪽에 고문기구들이 놓인 나무탁자가 보였다. 대도오는 한 손으로 그것들을 쓸어버리고 거기 상학을 눕혔다. 초미(焦眉)를 다투는 일이었다. 상학의 눈이 돌아가고, 심장의 움직임이 멎어있었던 것이다. 대도오는 바지를 벗겨 보았다. 똥은 싸지 않았다. 항문은 열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소생의 기회가 있다. 대도오는 기를 모아 심장을 압박했다. 특별히 의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돌아다니며 배운 소생술(甦生術)을 해보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웠다.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혀 흐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도오는 입을 벌려 말했다. "위험한 장난 하지마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정한 음성이었다. 등 뒤에서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독고청청은 태연히 손에 든 예리한 첨도(尖刀)를 땅에 내려놓으며 변명했다. "바닥이 혼잡해서 조금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전 보기보다 깔끔한 걸 좋아한답니다." 대도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손이나 닦고서 그런 말을 하려무나!" 독고청청은 손을 내려다 보았다. 선혈의 붉은 빛이 그녀의 눈을 아프게 자극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귀여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여자의, 특히 자신과 같이 아름다운 소녀의 무기는 웃음과 눈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대도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등판만을 보이고 있을 뿐인 것이다. 당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을 리가 없었다. 독고청청의 미소가 걷히고 얼음으로 만든 꽃처럼 싸늘하게 굳었다. 대도오의 엉덩이 뒤에 매달린 짧은 칼집과 거기 꽂힌 칼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두자 정도의 길이에 손바닥 너비의 기형도...' 소뿔 모양이라 했다. 엉덩이에 차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대도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대도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독고청청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녀는 그가 대도오 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칼은 한 싸움터에서 두 번 볼 정도로 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구심을 알아?" 본색이 드러났다 해야 할까, 감추어진 원한이 나타났다 해야 할까. 그녀의 음성은 더이상 달콤하지도 귀엽지도 않았다. 대도오는 그제야 약간의 반응을 보였다. "응? 강구심? 아... 내 칼에 죽은 그 멍청한 자식 말이군!" "멍청한... 자식?" 그녀는 소리나지 않게 허리를 숙여 피가 말라붙은 긴 송곳 하나를 주워 들었다. 대도오는 차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심장을 눌러도 상학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싸움터를 기루(妓樓) 정도로 알았던 놈이었지! 우세한 위치에 있으면 그 위치를 활용해야지 무슨 여유를 부린다고...있는 멋을 다 부리며 병신같은 짓을 하더니 죽었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독고청청은 등을 돌린 대도오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죽어-엇!" 대도오는 홱 돌아서며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꺾었다. "아-야-앗!" 언제 그녀가 이런 아픔을 겪어 보았으랴, 비명을 지르며 송곳을 떨어뜨리는데, 짝-!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갈겨버리는 대도오였다. "여기 그 놈 추종자가 있었군! 너도 같은 멍청인가? 자기 위치도 파악 못하는..." 이게 무슨 뜻일까? 그녀는 머리가 혼란해졌다. '날...이 독고청청을 때리는 사람이 있다니...' 타오르는 분노로 그녀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아니야!! 난 멍청이가 아니란 말야!!" 맨 손으로 대도오에게 달려들어 때리려 들었다. 짝-! 짜-악! 대도오는 다시 두 대를 후려쳤다. 그녀는 석실 구석에 쓰러져 버렸다. 그 때, 노대가 매봉옥과 함께 뛰어들어 상학에게 붙었다. 진맥을 하며 석실 안을 슬쩍 살펴보더니 화로를 손짓했다. "부젓가락!" 매봉옥이 이유도 모르고 잽싸게 부젓가락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노대는 한 손으로 상학의 바지를 끌어내리고 다리를 벌리더니 항문과 음낭(陰囊)사이의 회음혈(會陰穴)에 부젓가락을 대었다가 급히 뗐다. 상학의 몸이 움찔하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긴 숨이 입으로부터 터져나왔다. 심장이 다시 뛰고 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시에 멎었던 피가 상처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노대는 부젓가락을 던지고 허리춤에서 가죽뭉치 하나를 꺼내었다. 그 속에 크고작은 은침 여럿이 꽂혀있었다. 그는 그 중 둘을 꺼내어 겨드랑이 아래 극천혈(極泉穴)과 갈비뼈 사이 천지혈(天池穴)에 꽂았다. 피는 금세 멈추어졌다. 노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허리를 폈다. "우선은 숨을 돌렸습니다만, 되도록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면 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대도오는 독고청청을 힐끗 보고는 상학의 양쪽 어깨를 잡고 등에 거꾸로 메었다. 부젓가락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업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대가 상학의 다리를 잡고 두 사람은 석실을 나갔다. 매봉옥이 대도오를 불렀다. "저...소녀는 어쩔 작정이십니까?" 대답은 밖에서 나왔다. "네가 알아서 해라!" 매봉옥은 기가 막혀 소녀를 보았다. 석실 구석에 엎드린 소녀의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상황에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매봉옥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를 못했고 왜 조장에게 맞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묶여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잡혀온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도 그 정도의 추리는 할 수 있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조장도 그냥 뒀는데 그냥 두고가지, 뭐!' 간신히 마음을 정하고 나가려는데 소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매봉옥은 숨이 콱 막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부어오른 붉은 뺨 사이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도저히 이 소녀를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냥 두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데려갔으면, 아니 말이라도 한 번 했으면...하는 생각이 이 순간 그의 머리를 점령해버렸다. 소녀의 터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매봉옥은 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조장이 원망스러웠다. '여인에게 손을 대다니...'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오며 눈이 시큰해 졌다. 그럴 이유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을 그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옥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나간 사람이 대도오 맞지?" 매봉옥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황급히 긍정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목이 잠긴듯 말은 나오지 않고 가슴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필이면 조장의 이름을 묻다니...' 그러나 사실 그는 그녀가 누구의 이름을 물었어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이상...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매봉옥은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소녀가 그를 힐끗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마주 내미는 매봉옥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소녀의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닌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색은... 매봉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의 손은 선혈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그 손...다쳤어?" 소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매봉옥의 가슴에 격랑이 일었다. "대도오에게 물어봐!" 대도오!! 매봉옥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철수할 시간인 것이다. 그는 놀란 토끼처럼 석실을 튀어나갔다. 뒤에서 그녀의 웃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신을 넋나간 멍청이라고 비웃는 것 처럼...십자파는 난주에서 노호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장소였다. 역으로 노호산에 나온 철기맹의 무리가 현재 포진한 장소에서 물러나 도주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서문기는 휘하의 기마대와 함께 관도에 나와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오늘 소교주의 안배는 어딘가에서 구멍이 난 것이 틀림 없었다. 이 방향으로 도주한 자들은 얼마되지 않았고, 그것도 거의가 청기당의 졸개들 뿐이었다. 서문기는 황기.흑기당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이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조금 전까지 비치던 불빛마저 없는 것으로 보아 격전은 끝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