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金奎植,1881년∼1950년)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회 총본부 부위원장, 위원장, 대한 임정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19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4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
김규식은 1881년 2월 28일(족보에 의하면) 조선 경상남도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따라서 그를 강원도 출신으로도 간주하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는 아버지 김지성(김용원)과 할아버지 김동선 내외의 묘소가 소재하고 있다.
김규식은 청풍 김씨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전라도관찰사 증 의정부 영의정 김징(金澄)의 8대손이었다. 김구(金構), 김유(金楺)는 그의 7대 방조였다. 그의 가계는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등을 배출한 노론가의 방계였다. 노론 명문가의 후예로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던 김치인과 김종수 등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김익로는 현감을 지냈지만 당대의 정치 거물인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의 사촌 형제였다. 김익로는 김규식의 6대조였다. 그러나 노론 벽파로 분류된 그의 가계는 순조대 이후 몰락했고,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의 대에 다시 벼슬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선전관을 역임하였고, 15세 때부터 왕실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일본,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였다.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고,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이씨마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과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웠다. 1886년 5월 구걸을 하던 김규식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는데, 외모는 남루했지만 아이의 눈엔 총기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약과 우유를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당시 고열과 질병에 시달리던 어린 김규식을 포기한 숙부들은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눕혀놓았고, 병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던 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며 애걸하였다 한다.
병약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던 그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러가지 잔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후일 김순애(金順愛)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도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 말렸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의 동의하에 언더우드에게 영어교육차 보내졌다는 설이 있고, 김지성(김용원) 유배 후 방치된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 간호한 뒤, 언더우드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는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부친 김지성(김용원)을 상봉하여 고향 홍천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김규식은 언더우드목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할머니가 사망하고, 1892년 부친마저 사망했다.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사망했고,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숙부들 역시 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이정식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합작에 노력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보았다. 주변의 냉담한 시선과 고아라는 차별대우(혹은 서자라는 멸시), 그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무정함 등은 후일 그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 교장으로 있었다.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00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에 재학 중 그는 대한제국 고종의 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 2006년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김규식의 글을 읽고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김규식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 동아리 활동으로는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주의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다가오는 러시아나 일본의 갈등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동아시아의 땅과 바다엔 한 번 더 전쟁이 울릴 것이다.
러일전쟁을 사전에 예언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1905년 9월 5일 전쟁의 최종 승리는 김규식의 예견대로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국내에서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간사로 선임 되었다.
김규식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의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0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교회를 찾아, 전덕기·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5월 21일에는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YMCA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한다.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07년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9년 7월 한국문법 책을 펴냈고, 로노크 대학교 학보의 1909년 7월호에 실렸다. 1910년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
종교 활동으로는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에 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 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 조병옥은 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 고 회고하였다.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1일 김규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평양)에 영문(英文)으로 보고하였다.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11년 9월 조선총독부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한다. 김규식은 극적으로 투옥은 모면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 이후로 일본의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그는 1913년 초 인삼장사를 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경상남도의 한 갑부는 그에게 1천원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놈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고 표현하였다. 중국 망명후 신규식·여운형 등의 주도로 창설된 동제사의 중견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윤치호의 이복동생인 윤치왕이 군사훈련을 배우겠다고 상하이를 찾아왔으나, 그는 기회가 많으니 영국에 가서 의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여 영국으로 보내주었다. 또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를 계속한다, 미국에 간다는 등의 뜬소문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 역시 그의 이런 계획을 전해듣고,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의 출국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에서는 국내 기독교계 인사들을 의심하였으나 미국인 선교사들 댁을 수색할 수는 없어 윤치호의 집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그의 출국을 도왔다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고 만다.
1913년 김규식은 베이징·상하이·난징 등지에 먼저 와 있던 여러 애국지사들과 접촉했다. 13년 3월 쑨원, 친치메이, 황싱, 탕샤오이, 왕쳉팅, 웰링턴 V. 쿠 등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교분을 쌓았고,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관여하였다. 김규식은 중국 혁명 당시 냉휼(冷橘)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방부(邦阜) 까지 올라갔는데, 이 부대는 서주부(徐州府)에서 내려온 복벽파 장훈(張勳)의 군대 앞에서 어지러이 후퇴했다. 1913년 9월 중국 혁명은 실패하고 쑨원 등은 망명하면서 그는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1910년대 김규식은 몽골에서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14년부터 2년간 화북과 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 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1월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변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해 가을 장래의 독립군단 또는 게릴라 부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류동렬, 이태준과 청년들을 이끌고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여기서 상업과 노동으로 비용을 조달하며 초보적인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자금이 쉽게 조달되지 않았고 이태준은 병사하여 항일군대 결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피혁 장사를 하다가 잠시 공장에 취직하였으나 맞지 않아 바로 그만두고 허베이 성(河北省)으로 건너가 성경과 기독교 용품을 판매하다가 상하이로 내려와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였다.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 앤더슨&마이어회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16년 아내 조은수 여사가 차남 김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찾아와 상봉하였으나, 1917년 여름 폐병으로 조은수 여사와 사별하였다. 1918년 3월초 앤더슨&마이어 상사에서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지점을 열기로 계획하였는데, 그에게 지점장으로 부임해줄 것을 전보로 보내왔다. 아무도 울란바토르로 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청해서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이는 앤더슨마이어 상사 사원 몇 명과 둘째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殷植)이 동행하였다. 그 뒤 장가구에서 만리장성을 넘은 뒤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러나 차량 고장과 심한 눈보라로 하루 만에 내린 뒤 11일간 산지에 고립되어 있다가,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지나가던 몽골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낙타를 타고 37일간 몽골 초원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갔다. 1918년 6월, 출발 3개월만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어학 재능이 뛰어났던 김규식은 다국어를 구사하였는데, 한국어 외에 영어, 한자(漢字),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중국은 지역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하였으나 한자를 잘 구사하던 그는 방언의 차이에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중국인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1917년 12월 친러한족중앙총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8년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上海)로 건너왔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의 창립에 참가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등의 단체 설립 이후 한국인 청년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고 유학을 하여 공부할 것을 권고하며 돌려보내거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1918년 12월,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좌절 이후 절망으로 변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이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상처한 처지였는데 1918년 12월에 서병호와 김필순의 소개로 황해남도 장연군 출신 김순애를 만나 재혼한다. 본래 김규식은 조은수와의 첫 결혼 이전에 김순애와도 혼담이 오갔다. 김규식은 결혼 직후 구식 여성이던 본처 조은수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김순애는 조은수의 정신여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순애의 사람됨을 알아본 조은수는 죽기 전 김순애와 재혼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줄 것이니 꼭 김순애 양과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청혼했을 때 김순애는 받아주지 않았다. 김순애는 고된 결혼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는데, 병중에 있던 친정어머니 안성은이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애원하여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8년 12월 말 난징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김규식은 재혼 후 보름 만에 김탕, 여운홍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 가명으로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신분을 위장한 뒤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프랑스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던 신한청년당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푼돈을 모두 김규식에게 희사하고, 독립운동가들 중 결혼 예복과 반지가 있는 지사들은 이를 팔아서 돈을 희사하였다. 신한청년당원과 전파통신으로 교신, 신한청년당원들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한다. 여권을 얻지 못하던 그는 중국인 쑨원 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던 중화민국 대표단 중 정육수를 만났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도 유창하였는데, 그들이 한국인이며 파리행을 계획한 것을 알아본 정육수 등은 자신들의 배표를 김규식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우편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항하여, 그해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프랑스 파리 시내 파리 9구 샤토당가 38번지에 건물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부인 임정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이어 파리위원부 내 신한청년당과 조선공보국을 개설하였다. 이들은 계속 수작업으로 '한국의 독립과 환호'(L'INDEPENDANCE de LA COREE et LA PAIX) 등 계속 문건과 홍보 팜플렛을 만들고 모임을 개최, 조선의 현실을 알렸다. 이어 장택상 등 유학중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파리위원부로 찾아와 그의 일을 도왔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김규식은 파리한국통신부를 설립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임시정부 차원의 공식적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후일 그가 떠나고 이 활동이 중단된 이후 한인들은 자체 힘으로 비공식 외교 활동을 추진했다.
국내·외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에 기대를 걸었고, 김규식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회의장에 조선의 문제 역시 처리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과 그 일행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거절당하면서, 프랑스 외교부 측은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김규식은 이를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 알려 왔다. 김규식에게 공식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주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당시 이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파리 시내 건물은 파리 시내 '샤토등' 거리 38번지에 위치한 건물로, 2006년에 발견되었다.
1919년 3월 17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강화대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4월 10일 부재중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1일 파리 현지에 체류 중 외무총장에 선출되고,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4월 13일 상해 임정으로부터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받았다. 4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취소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부장관에 피선되었다. 1919년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차장(次長)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임명장을 받거나 전보로 소식을 접하였다.
국내에서는 137명의 유림(儒林)들이 별도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작성, 그에게 보내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파리 장서사건의 실패로 일본의 감시는 더해갔다. 일본은 김규식 일행에 위협을 느꼈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탐문에도 계속해서 홍보책자 등을 인쇄하여 돌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일본의 부탁을 받은 프랑스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고, 여러가지 외교문서를 계속 만들어서 프랑스 외무성에 보내고, 강화회의 의장이 프랑스 대통령 크레망스에게도 발송하였고 세계열강들 대표에게도 여러가지 문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문서를 작성·발송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패전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활동무대를 옮겨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김탕, 여운홍, 장택상 등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
파리 강화회의 열강들의 외면에 실망과 회의감을 느낀 김규식은 파리위원부위원장직을 사직, 파리위원부를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에게 넘기고 여운홍, 김탕, 장택상 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배로 도미하는 동안,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수반 이승만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타이프로 작성하였다. 8월 6일 김규식 일행은 워싱턴 D.C의 한인위원회에 도착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 되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하와이 및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 이후 애국공채표를 작성, 이승만과 공동명의로 발행,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에 보내는 일을 하였다. 이어 서재필을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김규식은 ‘극동 정세(Far Eastern Situation)’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서 김규식은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팽창이 그대로 허용된다면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극동에서 제거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15년 후 일본은 중국, 시베리아 및 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영·미 각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는 한동안 묻혀져 있다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역사학 교수 이정식에 의해 발견되었다.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줄곧 국내외 언론에 칼럼과 기고문을 송고하여 싣기도 하였다.
9월 임시정부의 개편때 구미위원부도 함께 개편되면서 그는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물러났다.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이승만과 함께 독립공채표를 작성하여 기금을 마련하였다. 독립 공채표의 금액은 독립 후 정부가 수립되면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채권이었다. 10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한국인 교민들과 면담하였고, 10월 30일 캘리포니아주 맥스웰, 10월 31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트, 11월 1일 띠뉴바, 11월 2일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국인 교포들을 순방하고 11월 3일 다시 워싱턴 구미위원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