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변화는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시간과 장소, 사건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인생을 통째로 뒤흔드는 변화의 기회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이고 충격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큰 충격은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변화의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목표와 태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고,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지나온 삶을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내가
쌓아 올리고 만들어 놓은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포기와 비움 없는 변화는 그저 덧칠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그 칠이 벗겨지고 나면 변화하기 전의 나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로 초대하십니다.
복음은 마치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그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세 번에 걸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둘째는 오늘 복음의 거룩한 변모 때에,
마지막은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때에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예수께서 당신의 뜻을
잘 알고 있음을 공표하십니다(마르 1,11).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하셨을 때 더 이상 모세와 엘리야의 그것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마르 9,7). 마지막으로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새 계약의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루카 22,19-20).
우리는 복음서의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방향이 바뀌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의 목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 거룩한 변모를 세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셨을까요? 많은
이들에게 쉽게 보여주셨으면 보다 많은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지 않으셨을까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변화가 스스로의 결정과 용기를 통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듯합니다.
완전한 변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즉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글 : 김인식 대철 베드로 신부 – 마산교구
대학은 무엇 하는 곳인가?
대학에 대한 가톨릭 적 비전?
대학 입학 철이 다가옵니다. 대학에 진학하게 된 새내기들 축하합니다.
우리나라 대학 진학 열은 유별납니다. 그런데 왜 대학에 진학했냐고
신입생들에게 물어봤을 때 소신 있는 답변을 들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많이들은 답변은 “남들이 가니까.”, “부모님이 가야 한다고 해서.” 등이었습니다.
기성세대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학벌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 대학에 간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대학, 특히
명문대를 통해 얻게 되는 상징적, 문화적 자본뿐 아니라 교우 관계를 통해 맺게 되는
인맥이 사회적 자본이 되어 일생에 도움이 된다는 관찰에 기반을 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정부의 대학 정책도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의 양성이라는
관점보다는 경제성, 효율성의 관점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대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비전은 무엇일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교회의 심장으로부터>(1990)라는 가톨릭계 대학교에 관한 교황령이나,
21세기 예수회 대학의 방향을 밝힌 예수회 총원장 콜벤바흐의
《예수회 대학 교육에 있어서 신앙의 봉사와 정의의 구현》(2000)은 훌륭한 안내가
되지만, 일단 2019년 시성된 존 뉴먼 추기경의 《대학의 이념》(1852)은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이 책은 서양 대학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고전입니다.
뉴먼에게 대학은 전공 중심의 단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활용하는
‘지식기술자’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이를 넘어서서 학생들이 사유하는 훈련을 받고
판단력을 형성하여 보편 지식을 배우고 활용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뉴먼은 포괄적 능력을 갖춘 정신의 함양을 위해 교수와 학생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일반적인 지식은 집에서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그 지식의 분위기, 색조, 열정, 그것을 담지하고 사는 삶 등을
배우는 것은 교수와 상호관계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혼이 담긴 교수와 이루는 만남이 중요합니다.
마치 아이가 부모와 인격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정신의 계발에도 스승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대학은… 자신의 자녀들을 한 사람씩 다 알고 있는,
영양을 주는 어머니(Alma Mater)이지, 주조장이나 화폐 주조소, 혹은
밟아 돌리는 바퀴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가톨릭적 지성인 교육은 오늘날 시급합니다.
법률, 의료 등 분야마다 전문가는 많지만
‘지식기술자’ 또는 ‘영혼 없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익히 이런 전문가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핵무기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 인공지능(AI), 양극화, 민주주의의 위기 등
현시대의 이슈는 단지 양심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기술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 문제나 사안을 포괄적으로 볼 수 있도록 훈련된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안건들입니다.
한국의 대학, 적어도 가톨릭계 대학은,
학생들을 이런 지성인으로 양성하는, 학문과 교육의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글 : 김우선 데니스 신부 – 서강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