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 《사막을 건너는 법》
부조리와 반항
전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시지프스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시지프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지프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지프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돌아와서는 저승에 돌아가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에게 다시 붙잡혀 저승으로 억지로 끌려갔다.
신들은 고약한 시지프스에게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가혹한 형벌을 준비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거대한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바위는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계속해야 했다. 말 그대로 ‘하늘 없는 공간, 깊이 없는 시간’과 싸우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오늘날 우리도 바로 그 끔찍한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고 있다고 했다.
카뮈는 현대인들의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이 시지프스의 무용無用하고 희망 없는 형벌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뮈는 이 무용하고 희망없는 우리의 삶을 ‘사막’이라 하고, 그것의 고단함과 무의미함을 극복하는 법을 ‘버티기’라고 했다.
그런데 작가 서영은(1943-)은 같은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사막을 건너는 법’을 내놓았다.
‘버틴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꿋꿋이 견딘다는 것을 뜻하지만, ‘건넌다는 것’은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버티기보다는 건너기가 훨씬 희망적이고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사막을 건너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또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페스트》는 1947년 출간된 카뮈의 소설이다.
《페스트》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한 도시에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시작한다. 시는 외부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막고 도시를 봉쇄시킨다.
여기서 페스트는 인간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 곧 죽음에 갇혀 삶과 세계에 대하여 어떤 희망이나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조리’를 뜻한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란 과연 무엇일까?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이 부조리를 말할 때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 ‘알 수 없다’라는 말의 뜻은 무지無智가 아니라 무의미無意味라는 것이다. 즉, 자신과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것 자체를 아예 발견하지 못했단 것이다. 이러한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또는 간단히 ‘존재의 무의미성’이 바로 부조리라는 말이 가진 진정한 뜻이다.
《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기자 랑베르와 신부 파눌루, 그리고 의사 리유, 세 사람이다.
신문기자 랑베유는 무슨 수를 쓰든 그곳을 탈출하려고 한다. 이는 부조리 즉 ‘존재의 무의미성’앞에서 안일한 일상으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상징한다.
파눌루 신부는 페스트가 사악한 인간들에게 내리는 신의 징벌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스의 형벌일 것이다. 올바른 사람은 사악한 사람들과 달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교한다. 부조리 앞에서 헛된 ‘희망’을 갖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의사 리유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자’고 주장한다. 물론 희망 없는 싸움이지만 이 같은 절망적 상황을 거부하며 투쟁하는 것만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바람직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료인 타루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한다. 리유는 부조리 앞에서 ‘반항’하는 인간의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부조리 앞에서 사람들이 흔히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우선 ‘자살’과 ‘희망’이라는 것이다. 카뮈는 희망이란 자기 기만적인 것으로 바로 파눌루 신부의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반면, 자살은 죽으면 부조리도 함께 끝나기 때문에 결코 부조리에 대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소멸일 뿐 해결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라고 했다. ‘반항’이다. 그리고 반항을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사막에서 버티기’는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곧 부조리 앞에서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구원을 호소함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의 표본으로 시지프스를 들었다. 시지프스는 삶의 무의미성, 곧 부조리를 직시하며 헛된 희망을 갖지도 않고, 구원을 호소하지도 않으며, 자살로써 회피하거나 기권하지 않고 “쓰라리고도 멋진 내기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막에서 버티기‘이자 ’부정을 부정하는 용기‘이며, ‘무의미에 의미 주기‘인 것이다.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준 형벌은 무의미한 삶이었다. 그런데 시지프스는 이 무의미한 삶에 스스로 ’반항‘이라는 의미를 줌으로써 그 형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주는 인간의 삶은 그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려 했던 신들에 대한 시지프스의 승리라는 것이다.
카뮈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언제나 굴러떨어질 자신의 운명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부조리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인간‘의 당당한 자세를 찾아낸 것이다.
랑베르 기자와 파눌루 신부도 모두 본래의 입장을 버리고 결국 의사 리유의 태도에 동조한다. 페스트가 물러나자, 오랑 시는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때 마지막 희생자가 생긴다. 리유와 함께 보건대를 만들어 운영했던 타루가 페스트로 쓰러지고, 요양소에 가 있던 리유의 아내가 죽었다는 전보가 도착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부조리는 꾸준히 남아서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을 흔들어 깨우리라는 것, 시지프스의 바위는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다시 계곡으로 굴러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루는 리유에게 말했다.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이니까”
그래서 카뮈는 저 영원한 수인이자 영원한 승리자인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반항하라는 것이다. 사막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말고 쓰러지지도 말고 그저 버티라는 것이다. 부조리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부조리를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반항하며 버티다 보면, 오랑에서 페스트가 물러가듯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1975년 서영은은 그녀의 발표작 1인칭 단편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좀 색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하여 일상적 삶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부조리를 깨달은 것이다.
주인공이 이러한 실존 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월남전에서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전투 중 적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동료를 잃고 자신은 부상을 당한다. 그 덕에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나 까닭도 없이 삶과 죽음이 우연에 의해 결정돼버린 이 특별한 사건은 그때까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부조리를 느끼게 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는 무슨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한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타인들을 보면서 뭔가 크게 어긋난 기분을 갖는 것, 낯익은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도 점점 더 낯선 땅으로 뒷걸음쳐 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 집에 도착한 날부터 베일에 가린 듯 모든 사물,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등은 사막에서 이방인들이 된 사람들이 먼저 경험하는 것들이다.
애인에게마저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마침내 애인은 예전처럼 친근한 미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그럼으로써 주인공은 완벽하게 사막에 갇힌 것이다. 카뮈가 말한 ’사막에서 버티기‘외에 다른 길이 없다.
작가 서영은은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물웅덩이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한 노인을 통해 사막에서 ’버티기‘에서 ’건너기‘로 기묘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노인은 주택가 공터에서 파라솔을 펴놓고 뽑기를 판다. 한데 파라솔은 비워놓고 언제나 쓰레기 더미와 물웅덩이 속을 헤치며 뭔가를 열심히 찾는다. 그러다가 동네 꼬마가 뽑기를 하러 오면 그제서야 파라솔로 돌아온다. 주인공은 이 노인에게 지남철에 끌리듯이 빠져들어가서 이 노인에 대해 알아간다.
노인이 찾고 있는 것은 월남전에서 전사한 아들이 받은 훈장이었다. 늘 품속에 지니고 다니다가 동네 꼬마 녀석이 보자고 하여 꺼내 주었는데 그 녀석이 그 귀한 훈장을 그만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찿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을 들은 주인공은 한 가지 특별한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탄 훈장을 물웅덩이에 던져 놓았다가 마치 노인이 잃어버린 훈장을 찾은 것처럼 기획하는 것이다.
’나는 어제 해질 무렵 노인이 돌아가고 나서 내 훈장을 가지고 공터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물웅덩이 속에 던져 버리고 찾기 쉽게 표시를 해 놓았다. 나흘이나 꼬박 지켜보며 잔인한 욕망으로 몸을 떨던 끝에 그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것이 표현하기 어려운 데다 그것을 말해서 노인이 알아들을지도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차라리 진흙투성이가 된 보잘것없는 훈장을 노인의 코앞에 들이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노인의 그 초인적인 힘이 결국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다. 노인의 눈 속에서 희망도 의지도 애정도 다 사라지고 대신 사막처럼 막막하고 끝없는 허무의 모습이 비치는 광경을 보아야 나는 비로소 이전의 생활로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 그 ’갸륵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웅덩이와 쓰레기 더미를 한참 뒤지는 척하다 전날 물웅덩이 속에 숨겨놓은 훈장을 꺼내들고 노인에게 외친다. “뭔가 비슷한 걸 찾은 것 같습니까? 이것 보세요! 찾으시려던 게 바로 이거지요. 네? 맞습니까?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노인은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외친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러고는 휙 돌아서 가버렸다.
그 후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잘 아는 꼬마에게서 노인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다.
노인이 아들의 훈장을 꼬마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스스로 물웅덩이 속에 빠트렸다는 것, 손녀딸이 노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1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기르고 있는 개도 아들이 키우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버린 것을 주어 기른다는 것 등을 말이다. 그동안 노인한데서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주인공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노인은 죄다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냉혹하게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저만큼 노인이 짐을 챙겨 공터를 떠나려는 것이 보인다.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디선가 다시 시작하겠지. 나는 정말 바보였다“
여기서 주인공이 ”나는 정말 바보였다“라는 말은 동시에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라는 뜻과 같다. 주인공이 노인을 통해 그제야 깨달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폴란드 출신 작가 유레크 베커(Jurek Becker, 1937-1997)의 《거짓말쟁이 야콥》(1969)라는 작품이 있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은 로츠에 사는 유대인들을 좁은 넓이의 거주지에 몰아넣고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시킨다. 그러니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아우슈비츠나 헤우무노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단지 중간역에 갇혀 독일군에 노력을 제공하는 노예로 지내야만 하는 이들의 삶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고통스럽고 희망도 없고 무의미한, 나치 독일이 만든 인위적 사막에 갇힌 것과 같다.
그들 중 야콥 하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군 부대 주위에서 우연히 러시아 군대가 400킬로미터 밖 인근까지 진격해왔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버리면 모두들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에게 ”내게 라디오가 한 대 있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는 매일매일 거짓 뉴스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스스로 불안해진 야콥이 한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그 친구가 자살해 버렸다.
야콥은 자신이 하는 1그램의 거짓말이 1톤의 희망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동료들이 사막에서 자살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그 사막을 건너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이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노인은 알고 있었지만 주인공이 몰랐던 것이다.
노인의 거짓말, 이 모두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노인에게는 그것이 사막을 건너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야콥의 거짓말‘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서영은이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비법이라는 말이다.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는 말했다. ’삶에 의미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라도 삶에는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첫댓글 독서일기 3 <사막을 건너는 법> 잘 읽었습니다.
긴 글 쓰느라 수고가 많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