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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16일 수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수도회] 변화를 추구하는 주님의 청지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4,1-11
† 복음 루카 19,11ㄴ-28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를 만납니다. 자캐오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참으로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불운과 약점의 아이콘입니다. 세속적으로야 세관장이었기에
재산도 제법 모았겠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유다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탁에서 그 옆에 앉는 것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키가 작아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자 하는 회개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는 감히 그
고귀한 분께 그런 갈증을 느낄 자격이 있는지조차도 자신이 없지만,
입고 있던 비단옷과 고급 신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체면 다
구겨 가면서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 순간의 만남이,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묵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청원이 바로 그에게는 구원이요, 새로운
생명이며, 하늘 나라의 시작입니다. 처음으로 사랑과 관심을 받아 보고,
인정을 받은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고 지탱해 준 재산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을 용서하시고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
2016년 다해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4,1-11
복음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ㄴ-28
어젯밤 뉴스를 보다가 ‘슈퍼문’이라는 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워졌을 때 나타나는 크고 밝은 보름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슈퍼문의 영향으로 해수면이 올라가서 해안가 저지대가
침수되는 현상이 있었다는 기사였지요. 문득 슈퍼문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루가 지났지만 달을 보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순간 너무 추운 것입니다. 얇은 운동복 하나
입고서 밖으로 나갔으니까요. 깜짝 놀라서 다시 따뜻하고 훈훈한
실내로 들어오려다가 ‘조금만 참자’라는 생각을 갖고 서서 달이 떠있는
곳을 쳐다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크고 밝은 달은 처음 본 것 같습니다. 만약
춥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었을까요? 추워서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달을 보러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귀찮다고 또 춥다고 밖에 나오지
않았으면 따뜻한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면서 시간을 보냈겠지요. 그러나
68년 만에 찾아왔다는 슈퍼문은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편안함을 위해서 또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다면 당연히 더 큰 것을 얻지
못합니다. 불편함을 극복하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분명히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선택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안주하고 마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욕심이 많으신 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비유 말씀을 보면, 원금을
그대로 가져온 사람에게 심하게 혼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가
가져온 돈을 빼앗아서 열 미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까? 솔직히
원금을 잃어버릴까봐 잘 보관하고 있었다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투자를 잘못했다가 가지고 있었던 그 한 미나마저
없어진다면 어떻게 합니까?
분명히 주님께서는 욕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그 욕심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미나뿐 아니라 미나의 숫자만큼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까지 주시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신께서 주신 것으로 어떤 면으로든 이윤을 남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능,
내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들이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내게 제공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공된 것들을
통해 충실히 일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보답을 해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아름다운 슈퍼문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받은 것들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들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 싫다면서
좋은 것이 좋다면서 그 사람이 나쁜 길로 가더라도 가만히 있다면,
능력과 재주가 있으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등등…….
주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큰 보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나기 30분’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생의 소나기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태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채규철).
68년만에 찾아왔다는 슈퍼문입니다.
어린아이의 낙서(‘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느 마을 담벼락과 집 벽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지워도 다음날 또 어김없이 적혀 있습니다. 지속되는 낙서를 보며, 마을
주민들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급기야 마을 사람들은 담벼락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낙서를 하는 범인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놀랍게도 어린 남자아이였습니다. 누가 봐도 깔끔한
옷차림, 예의 바른 평범한 어린아이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벽에 낙서한 거니?"
아이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울먹이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울먹이던 아이는 벽에 한 낙서가 엄마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궁금한 마음에 다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엄마
이름으로 낙서를 한 거니?"
아이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저는 건넛마을에 사는데
우리 엄마가 지금 많이 아파서요...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엄마 이름을
보고 함께 불러주면 금방 낫지 않을까 해서요.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순간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주고
있었을까요?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주고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낙서.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변화를 추구하는 주님의 청지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수, 루카 19,11ㄴ-28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변화를 추구하는 주님의 청지기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와 종말을 맞이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어떻게 하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세상 종말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에게 있는 것들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으로서,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왔습니다(묵시 4,11).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며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함으로써 주님을
온 존재로 찬미하는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심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세례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으며, 시간과 필요한 재물과 사람들을 주셨으며, 나에게
나만의 특성과 능력을 주셨지요.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느낀다면 불평불만 대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겠지요. 고통과 시련 중에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자긍심을 갖고 자신의 좋은 점을 보며 기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은 내가 겪는 시련과 번민을 이겨내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어야겠지요.
끝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신 선물들을 잘
관리해나가야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청지기답게 모든 사물과 사람을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특히 미소한 것과 심지어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도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 죄 중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하느님의
얼을 지니지 않는 사람은 없고, 모든 순간은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는
까닭이지요!
우리 모두 종말을 사는 사람답게 지금 나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언제
어디서든 온힘을 다하여 충실하게 임해야겠습니다. 게으름과
무사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키워나갔으면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늘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청지기의 자세이지요.
변화란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곧,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세속적인 유치한 원리를 버리고, 받기보다는 주는데서
기쁨을 찾고, 듣기보다는 말하기 좋아하는 습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되돌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지요. 기쁘게
형제자매들과 삶을 나누고, 지니고 있는 능력과 시간과 재화 모두를
형제들과 나눌 때 금화 하나를 열 개로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금화에 감사드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올바로 인식하여 사소한 것까지도 소중히 여기며, 나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얼굴을 돌리는 변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되돌리고 나눔으로써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잘 맞이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더 많은 것을 받게 되겠지만, 변화를 거부하고 나누지
않는다면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잘하였다, 착한 종아!> (루카 19,17)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무리해 가며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우리 삶을 평가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고 어떤 평가를 내려 주실까요?
“잘하였다, 착한 종아!” 이렇게 말씀해 주실까요?
아니면 요즘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는 박근혜 정부처럼,
“이 악한 종아, 너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 남에게 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수능을 코앞에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도 저마다 평가를 받게 되겠지요.
지금까지 미흡한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육상경기나 숏트랙 경기가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결승점 부근에서 벌어지는
역전 드라마가 늘 짜릿한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 기회가 남았습니다.
회개할 기회도 남았고 더 사랑할 기회도 남았습니다.
용서를 청할 기회도 남았고 자비를 베풀 기회도 남았습니다.
여러분이 “잘하였다, 착한 종아!”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 가운데 한해를 잘 마무리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은 우리에게 빚이 없으십니다
2016년 다해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
독서: 요한 묵시록 4,1-11
하느님은 우리에게 빚이 없으십니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과 편지’란 글이 있습니다. 한 불우하게 자란
열등감 많은 청년이 착한 아내를 얻으며 변하게 된 내용입니다.
아내에게 언제나 부족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것을 알아챈 아내가 도시락에 매번 “저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란 편지를 넣어준 것입니다. 처음엔 그냥 자신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란 생각에 막연한 고마움만 지니고 살았는데 언제부턴가는
아내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회사에 두 시간 먼저
출근해서 청소와 일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십 년간 지켜본 사장이 그를
부사장으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여전히 그 날 점심 도시락에도
“저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란 편지가 넣어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어준 힘은 남편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아내에게 생색을 낼 수
있을까요? 우리 또한 주님께서 믿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우리의 노력의 대가인 양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제 동기 신부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야기 주제가 수능을 위해 어떤
준비들을 하고 있는가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모여서 기도를 하고
안수를 주는 등의 일정을 각 성당에서 잡고 있었습니다. 한 신부가 지친
듯이 “그런 거 안 하면 안 되나?”하며 한탄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가 되었으나, 이내 현실상 그럴 수 없다는 분위기가 되었고
무거운 분위기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왠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었기에 사회에서 소위 성공한
자리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텐데 이것저것 더 자신에게 맞춰달라고 요구한다면 남편을 향한
자랑스러움은 조금씩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시고, 또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나머지는 하느님 나라를 찾는 이에게
주님께서 알아서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성령님’뿐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그분이 우리가 무언가를 청하면 당연히 들어주셔야 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면 아직은 우리 처지가 어떤 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기도를 감사로만 채워도 그분의 은혜를 충분히 감사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주님의 어좌가 놓여있었고
그 어좌 둘레에는 스물네 개의 어좌가 더 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앞뒤로 눈이 달린 네 생물이 밤낮으로 주님께
“거룩하시도다!”를 외치며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그
스물두 개의 어좌에 앉아있던 원로들이 각기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의
어좌 앞에 던지며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일곱 가닥으로 머리를 땋았던
삼손이 그 성령의 힘을 잃자 눈이 뽑히게 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귀담아 듣지 않아 치드키야 왕의 눈이 뽑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흙으로 태생소경의 눈을 만들어주시고, 바오로도
하나니아스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즉, 위의 광경은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이 성령의 힘으로 각자 자신의
왕 됨을 포기하여 주님 앞에 엎드려 찬미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에서는 주님께 경배만 드릴뿐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요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희생하여 우리 생명을
구해주신 것도 부족하다는 모습으로 보여 주님께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하느님께 빚을 받으러 온 것처럼 앉아서 빨리 갚으라고
독촉하는 듯이 이것저것을 청하지 말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주제의 예화로 우리나라 전쟁 때, 미국 폭격기가 서울에 폭탄을
투하하려 할 때 아직 피난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그 서울
항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들이 폭탄을 투하시키지 못하게 한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이 불바다가 되지 않게 되었던 것은 밑에서 지키고
있었던 군인들의 공일까요, 아니면 위에서 지켜주신 예수님의
덕일까요? 어찌 군인이 서울을 지켰다고 주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강의를 하고 나오는데 전직 군인이신 분이 기분이 상한 듯이
“신부님은 ‘군인이 지킨 것이 아니다’라고 해서는 안 되고, ‘군인도
지켰다’라고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전히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큰일을 한 것처럼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거룩하시다,
혹은 감사와 영예와 찬미를 드리기만 해도 행복할 사람이 되기를
연습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해 달라며 청하는 것도
자녀로서 나쁜 행위는 아니지만 그저 종으로라도 써 주면 감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오던 탕자의 그 감사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 중 단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셔도 여전히 우리에게 빚이 없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는 모든 일을 해 드렸을지라도 여전히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루카 17,10)
라고 말해야 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요한에게 천사가 보여주었듯이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님을 찬미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 루카 19,11ㄴ-28
내일은 수학능력 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저는 1981년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군 생활 3년, 신학교에서 7년을 지냈고, 보좌신부로 8년, 해외연수
2년, 본당신부 8년, 사목국 3년, 청소년국 6개월, 중견사제 연수 6개월,
성소국에서 3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35년 감사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셨고, 좋은 이웃들이 있었고, 가끔씩
뒤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비옥한
땅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시험 보는
학생들이 그동안 준비한 만큼 좋은 결실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았어도 지금 좋은 결실을 맺는 친구도 있습니다. 시험의
결과는 좋았지만 지금 어렵게 지내는 친구도 있습니다. 한 번의 결과에
낙담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상문제를 알거나, 정답까지 미리 알고 있다면 수월하게 시험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글이 있습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
(Senses)을 선사하셨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 배우자를 사랑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대해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문을 열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절대평가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예수님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작은 일에 충실해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 루카 19,11ㄴ-28
작은 일에 충실해야
‘기쁨은 나누면 커지고 슬픔을 나누면 작아진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합니다. 마음을
키워서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상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순간순간이 하늘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미나'를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마음이 열린 이에게는 천상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고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종말에나 오는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 협력하며 노력하면 그 자리가 이미
천상왕국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렌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달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 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 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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