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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시기에 노천명이 친일시만을 쓴 것은 아니다. 시집 제호이자 남의 창가를 서성거리며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을 노래한 「창변」을 비롯해, 어릴 적 고향을 풋풋한 향토적 서정 속에 녹여 회고하는 「촌경」 · 「고향」 · 「장날」 · 「푸른 오월」 · 「잔치」 · 「수수 깜부기」 등에서 그는 첫 시집 『산호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성숙한 시 세계를 보여준다. 이 가운데 「남사당」은 여장을 한 남사당의 끝없는 방랑과 고독을 주조(主調)로 하면서도, 여태껏 보이던 정적이며 과거 지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살아 움직이는 심상을 훌륭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 다홍치마를 둘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 이리하야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 람프불을 돋은 포장 속에선 /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屈辱)된다. // 산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 고흔 처녀도 있었건만 //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 처녀야! / 나는 집씨의 피였다. /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 우리들은 소도구를 실은 / 노새의 뒤를 따라 /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 길에 오르는 새벽은 //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남사당」 전문, 『창변』(서문당, 1972)
해방 뒤 노천명은 친일 행적에 대한 가책과 문우들의 영향 때문인지 잠시 좌익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이름을 올리지만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다. ‘서울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일하던 그는 이듬해 ‘부녀신문사’의 편집 차장으로 자리를 옮기나 1947년에 이르러 10여 년 동안의 신문사 생활을 청산한다. 잠시 쉬다가 1948년에 공부 겸 여행차 일본행을 시도하는데, 이 때 가족의 반대로 밀항을 하는 곡절을 겪기도 한다. 1년 동안 일본에 머물다가 귀국한 그는, 이듬해 안국동 집을 떠나 누하동으로 이사한다. 그는 누하동 집에서 양녀로 들인 인자와 함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며, 1950년 1월 『문예』에 「검정나비」 등을 발표하고 첫 수필집 『산딸기』를 펴낸다.
1940년대 초 일본 나라를 여행할 때의 노천명
‘사슴’은 노천명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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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6·25가 터지면서 노천명은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북에서 온 임화 · 김사량 등과 만나게 되는데, 수복 뒤 이 일이 해방 직후의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사실과 얽히며 좌익 분자 혐의를 가중시켜 자그마치 20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히는 것이다.
창살 밖으로 우물처럼 깊은 하늘에 날카롭게 그어놓은 듯한 하현달이 떠 있는 것이 보인다. 푸른 수의를 입은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의 눈에도 하현달이 상형 문자처럼 떠 있다. 심한 고문과 협박, 열악한 환경을 탓할 여유도 없는 수감 생활.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밭에서 뽑혀 나온 근채류의 식물처럼 늘어져 있다. 오등(五等) 콩밥과 눈물을 함께 씹어 삼키며 그는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라고 되씹곤 한다. 삶이 고단할수록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둥굴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의 시절. 고향 황해도 장연 땅,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 순을 꺾다 깨면 꿈이다.
「사슴」의 시인 노천명. 전쟁이 터지는가 싶더니 곧 인민군이 밀려들고,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인공 치하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쪽에 얼굴을 비치게 된다. 동맹에서 활동한 것은 부역 행위이고, 이로 말미암아 천명은 수복 뒤 반역 문화인으로 낙인 찍혀 팔자에 없는 감옥살이를 한다. 얼마 뒤 그는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에게 “3월 2일까지 나를 구하라.”는 명령투의 편지를 보낸다. 김광섭이 누하동 천명의 집에 방 두 칸을 얻어서 살 때의 친분이 이런 결례조차 서슴지 않게 만든 것이다. 문인들이 진정서를 내고, 특히 이헌구와 김상용 등이 석방 건의문을 작성해 검찰청장을 직접 찾아가 전달하는 등 구출 운동에 힘쓴 덕분에 노천명은 1951년 봄에 석방된다.
런던의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차디찬 2월의 아침에 문득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어 자살한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비명(悲鳴)이 살고 있다”고 노래한다. 어느 삶인들 그 속에 깃들인 비명이 없으랴. 노천명은 이런 비명을 밖으로 토하지 않고 안으로 삭여낸 시인이다. 그는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는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고 고백한다. 실비아 플라스가 비명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삶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방식으로 과격한 자기 파괴의 길을 갔다면, 노천명은 순한 사슴처럼 괴로움을 안으로 삭여내며 먼산이나 쳐다본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로 시작되는 「사슴」은 그의 고집스런 자아 응시가 낳은 시다. 집시의 피, 길들여지지 않는 노새, 슬픈 사슴, 궁핍, 비타협적 성향, 재생 불능성 뇌빈혈,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이 박쥐처럼 퍼덕이는”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시인 노천명의 삶은 그 중심이 매우 불행한 시대에 걸쳐져 있다. 그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中)에 뱄다”고 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은 그의 삶에 깊은 고통과 치욕을 각인한다. 친일시 발표, 전쟁중의 부역 행위, 감옥 생활로 이어지는 파란과 치욕, 그리고 야만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고 물살에 휩쓸리면서 삶에 대한 그의 막연한 몽환적 기대는 크게 이그러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고통과 고독이 내재화된 운명은 고결한 삶을 추구하던 이 시인에게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만다.
노천명은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전택면 비석포리에서 태어난다. 소지주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인천 등지에서 무역업에 손을 대어 성공을 거둔 덕분에 어린 천명은 한동안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다. 개울가에는 아버지가 심은 아라사버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뒤뜰에는 사과꽃이 피는 풍경. 눈이 내리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나가고, 천명은 곳간에서 당(唐)콩을 꺼내다 먹으며 늦도록 아버지를 기다린다. 위로 아들이 하나 있음에도 잇달아 딸이 태어나자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낳기를 바란 나머지 어린 천명에게 사내아이의 옷을 입혀 키운다. 그의 아명은 기선(基善)인데, 여섯 살 되던 해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이것이 호적에 오른다. 서울의 양반 집안에서 장연으로 시집온 어머니는 병약한 천명을 편애한다. 어머니는 『옥루몽(玉樓夢)』 등의 얘기를 들려주며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준다. 어린 천명은 어머니의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서울 말씨를 몹시 좋아한다.
1918년 아버지가 숨지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장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다. 천명은 진명여고보에 진학하게 되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100미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진명의 육상 팀은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을 만큼 경기력이 뛰어났다. 1930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할 즈음, 천명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다. 게다가 직장 관계로 언니와 형부가 지방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그는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외롭고 쓸쓸한 학창 시절을 보낸다.
이 때의 고독한 생활이 곧 그를 책과 원고지 속에 파묻히게 하는데, 같은 해 교지에 천명은 「봄 잔디 위에서」라는 시를 싣게 된다. 1932년 그는 『신동아』에 시 「밤의 찬미」와 「단상(斷想)」, 수필 「신록」, 소설 「닭 쫓던 개」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이 무렵 노천명은 교지 『이화』에 글을 내고 받은 원고료 1원을 언니에게 우편으로 부치는데, 언니는 그가 보낸 1원을 장롱 속에 천금처럼 고이 간직하다가 누렇게 변색되어 못 쓰게 되기도 한다.
노천명이 뛰던 진명여고 육상 선수단
1928년 전조선 여자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나서. 앞줄 오른쪽 네 번째가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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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전을 졸업한 천명은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 기자로 들어간 뒤 『매일신보』와 『서울신문』 등의 문화부 기자를 거친다. 그가 시인으로 문단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35년 2월 『시원(詩苑)』에 「내 청춘(靑春)의 배는」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뒤의 일이다. 1938년 그는 처녀 시집 『산호림』을 펴내며 회현동 경성호텔에서 호사스런 출판 기념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이 때가 문학 면에서 보나 인생 면에서 보나 그의 절정기인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무렵에 키운 필요 이상의 자만심과 아집은 그가 더욱 고독한 삶을 이어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기야 화려한 서장(序章)이었다. 그때 이 나라에선 하나밖에 없었던 여자로서 최고 학부를 나오자 모 신문사에서 금방 데려갔고 여기서 일을 하는 한편 나는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토하듯이 쉴새없이 시를 토했으며 또 용정이니 북간도니 연길 등지로 한바퀴 여행하고 와서는 『산호림』이라는 처녀 시집을 내놓았다. 당시 내 눈은 머언 데로, 높은 데로만 주어졌고 눈앞에 있는 것들은 왠일인지 마땅치 않았다.
「나의 20대」, 『사슴과 고독의 대화』(서문당, 1973)
첫 시집에서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로 회고와 고독에 침잠하는 ‘사슴’은 바로 노천명 자신인 것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사슴」 전문, 『산호림』(천명사, 1938)
노천명의 처녀 시집 〈산호림〉
대표작 〈사슴〉이 실린 이 시집을 낸 뒤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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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결혼을 하지 않을 뿐더러 내성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던 그는 연애도 거의 하지 않는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김광진과의 연애가 그의 삶에 새겨진 남자와의 유일 무이한 사랑의 흔적이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서 안톤 체호프의 작품 「앵화원(櫻花園)」을 무대에 올렸을 때 천명은 모윤숙과 함께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출연하는데, 이 때 김광진과 알게 되어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김광진은 유부남이었고,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 만나곤 한다. 나중에 김광진은 본처와 헤어지기로 하고 천명과 약혼까지 하지만, 그 결혼은 끝내 성사되지 않는다. 본처와의 이혼이 지연되면서 천명과 헤어진 김광진은 나중에 기생 왕수복과 월북한다.
이후 천명은 고아인 ‘인자’를 데려다가 친딸처럼 키우며 독신으로 산다. 내성적이며 오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노천명에게 친구가 많았을 리도 없다. 오래도록 가깝게 지낸 유일한 친구로는 뒷날 ‘공안과’ 원장 공병우 박사의 부인이 되는 학교 동기 이용희를 꼽을 수 있다. 졸업 뒤에도 두 사람은 당시 국회의사당 앞의 ‘청조’ 다방 등에서 만나 시에 관한 얘기를 나누곤 한다. 천명은 얼굴이 조금 얽었는데, 이 때문인지 때때로 이용희의 미모를 몹시 부러워한다. 그는 이용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불쑥 “네 얼굴에 내 글이면 장안에서 인기일 텐데.”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니네 가족과 함께
왼쪽이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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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치마 반회장 저고리를 즐겨 입고 우울할 때는 남도창을 듣던 천명이 나중에 꿈꾼 삶은 “이름 없는 여인”의 삶이었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 초가 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 삽살개는 달을 짖고 /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전문, 『별을 쳐다보며』(희망출판사, 1953)
이 무렵 신경증에 가깝던 노천명의 고독은 길게 목을 뽑고 우아한 향기를 뿜으며 스스로 고고하게 즐기는 고독이 아니라, 험난한 삶의 시련을 겪은 뒤 뼛속 깊이 전해 오는 죽음을 부르는 고독이었다.
너를 피하여 다름질 치기 열 몇 해 / 입 축일 샘가 하나 없는 길 / 자갈돌 발뿌리 차 피 내며 / 죽기로 달리다 // 문득 고개 돌리니 / 너는 내 그림자―나를 따랐구나 / 상장(喪章)과도 같이 // 나 이제 / 네 앞에 곱게 드리워 지나니 / 오―나의 마지막 날은 언제냐
「검정나비」 전문, 『별을 쳐다보며』(희망출판사, 1953)
1953년 그는 이런 번민을 겪으면서 써온 시 「고별」 · 「검정나비」 · 「별을 쳐다보며」 등을 비롯해 옥중 체험기, 그리고 6·25를 소재로 한 내용을 담은 「눈보라」 · 「북에서 북으로」 · 「희망」 등 40편의 시가 실린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펴낸다. 이 시집에서 노천명은 고독이라는 자신의 병이 문학을 통해 치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집 속의 몇몇 작품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겸허한 태도보다는 필요 이상의 변명과 현실 참여에 얽매인 듯한 무절제한 내용을 담음으로써 그를 아끼던 독자와 문우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마흔 줄의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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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서라벌예대 · 국민대 · 이화여대에 나가 강의를 하고, 1954년에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 백서』를, 1955년에 『여성 서간문 독본』을 펴낸다. 아울러 시 창작도 게을리하지 않아 1955년 『사상계』에 「어머니」, 1956년 『여원』에 「오월의 노래」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워낙 몸이 약하던 그는 「이화 70년사」를 무리하게 집필하다가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지고 만다.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한 노천명의 병명은 재생 불능성 뇌빈혈이었다.
1957년 3월 7일
하오 3시에 위생병원에 입원, 5시쯤 500그램 수혈. 두드러기가 돋아 괴로왔음.
1957년 3월 8일
아침에 박 선생 내방. 조석으로 2회 빈혈.
1957년 3월 9일
낮의 수혈에 48분이나 걸려 불안하다. 돈 걱정, 모든 것이 걱정이 되더니 밤 자정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여 수면제를 먹었다.
1957년 3월 11일
언니가 오후에 오셨다. 반가왔다. 오늘 수혈한 것까지 4만원을 내놓고 가셨다. 이에서 피가 나와 기분이 상했다.
1957년 3월 13일
잠 잘 자다. 아침에 혀에 피가 묻다. 또 조금씩 이에서 피가 난다. 내 피가 처음엔 100만이던 것이 이제는 41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노천명이 병원에서 쓴 일기의 일부다. 입원비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우들이 돈이라도 쥐어줄라치면 천명은 “내가 거진 줄 아니?” 하고 싸늘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곤 한다. 단짝인 이용희가 문병을 갔을 때도 천명은 재생 불능성 빈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병실의 벽면에 원고지를 대고 잡문을 쓰고 있다가 친구를 맞는다. 이용희가 파마를 한 천명의 삼단 같은 머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그는 명랑한 목소리로 “내가 삭발하고 입산한다는 소문 못 들었니?” 하고 농담을 한다. 그러나 천명의 몸에서는 이미 피가 썩어가는 역한 냄새가 감돈다. 문우 모윤숙의 부축을 받아 코로나 승용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온 것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외출이 된다.
얼마 뒤 모윤숙이 해외에 갈 일이 생겨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한 당부도 지키지 못한 채 천명은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서울 종로구 누하동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마흔여섯 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부조리한 삶이 악덕 채권자처럼 그에게 강요하던 치욕과 수모도 이로써 끝난다.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라고 혼잣말을 하는 천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노천명이 죽은 지 1년 만인 1958년 6월, 유고 「사슴의 노래」와 「유월의 언덕」 그리고 죽기 바로 전에 쓴 「나에게 레몬을」 등 42편을 모아 시집 『사슴의 노래』가 간행되며, 1973년에는 산문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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